<2023가을겨울 합본호>
하늘은 시퍼렇게/ 김월한
하늘은 시퍼렇게
칼날처럼 눈을 뜨고
한 번쯤 미망(迷妄)을 털고
원점으로 돌아와서
거울 속
다시 나를 보고
소스라쳐 놀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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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기도/ 김혜경
아궁이 불속에서
꽃송이가 피워 오르면
오로지 아들, 딸 위한
매일 같은 기도문
그 시절
빈 주머니에서
타올랐던 기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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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과 추억/ 서관호
볼 붉은 홍옥일랑 첫사랑 송이더냐
가슴 연 석류 너는 짝사랑 순이더냐
먼 하늘 웃는 네 모습에 내 마음도 물들고.
뭉근한 모과향기 한약방 집 딸이더냐
당찬 유자향기 양조장 집 처자더냐
들국화 저도 질세라 노란 웃음 웃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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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리목/ 윤진옥
기쁨과 슬픔까지
한 궤미에 엮어 안고
말없이 바라보는
서로 휘어 아픈 허리
한순간 눈 맞은 죄값
평생
치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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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칸타타/ 이명희
날 선 바람 차갑게 가슴을 파고들어
봉합된 벼랑 가르며 세차게 흩날리는
저물녘 숫눈길에서 느낌표를 찍고 있다.
못다 한 아쉬움 속 갈라지는 목젖 사이
멀어져 가는 것들 슬며시 밀어 올린
만조의 해미 속에서 흐르는붉은 선율.
그리운 곳으로부터 바람은 모여들어
허공을 만들고 있는 갈변한 외침 소리
메아리 누가 던졌나 야윈 심장이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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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봄호>
봄 밤/ 이동림
봄비가 스친 자리
밤새워 가렵더니
동트자 불긋불긋
발진 같은 멍울들이
꽃으로
터지느라고
온 뜨락이 부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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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눈/ 정현대
간밤에 내린 눈이
덮었다 온 세상을
소리 없이 쌓인 눈이
복스럽게 보이는데
소중한 나의 친구여
행복을 쌓아 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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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길에/ 김옥중
산마을 산자락에
자식 없는 홀로 노인
장미를 심어놓고
자식 같다 하시더니
이듬해
지나가는데
장미만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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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잣말/ 이한성
하찮은 이야기에도 귀 기울여주세요
혼잣말을 하도록 내버려 두는 일은
사람이 사람에게 준 잔인한 벌입니다.
저녁이 있는 삶을 추구하는 이 시대
객지에서 돌아온 막내 아들에게
밤새껏 못 다한 이야기를 풀어 놓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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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약속/ 장기숙
사람은
손가락 걸고
시치미 뚝 떼는데
금낭화 닭의장풀 적모란 홍작약
자줏빛 다보록한 약속
어김없이 지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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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욕심/ 채명호
산까치 울고 가는
가을산 올라 보니
어릴 적
알밤 줍던
그리운 고향 생각
지금쯤
알밤주머니
채운 듯도 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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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여름호
섣달/ 김복희
내 생애의 수묵화도
흰 눈발이 흩날린다
한 해를 보내는 정
비워야 할 가슴속엔
한 자락
얹히는 나이테
소리 없는 달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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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맞이꽃/ 김우연
달만 어찌 맞겠는가 아침 해도 맞이하네
'달맞이꽃' 이름이야 관념 속에 핀 꽃이듯
대낮에 노란 꽃들이 눈을 뜨고 있었다.
내 의식 모래톱에 피어나는 많은 꽃들
고정된 생각의 끈 가만히 풀어주면
갈라진 남남갈등에 검은 강물 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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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명 주소/ 김종상
상용하던 동명을 도로명으로 바꾸고
생소한 길 이름을 우리 집 주소라니
마을이 하루 사이에 없어지고 말았다.
느르실 아래뜸은 이름이 촌스러워
세련되고 참신한 신창로1길 35-41로
현대적 감각을 살려 고쳤다는 것이다.
대대로 한 마을에 함께 살던 이웃들이
이제는 길에서 나고 길에서 먹고 자며
떠돌이 생활을 하는 유랑민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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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장 서방마치기- 평택에서 온 전화/ 김현길
집사람
전화가 왔다
된장 서방 마치러
주말에 갈 테니까
꼼짝 말고 있으란다
간장을
야외 솥에 데림서
힐끔힐끔 쳐다봤다.
양은 다라
앞에 놓고
시누올케 둘이서
새 된장 구 된장을
마구 치대고 있었다
괜스레
서방 마친단 말에
가슴만 찔끔했다.
*새 된장과 구 된장을 섞어서 합치는 것을 '서방 마친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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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가을호>
구름국화/ 양점숙
백두산 구름 밑에는
누이 같은 꽃 핀다는데
하늘과 땅의 거리가 너무나 멀어
소원이 우리의 통일인 줄
그 꽃은 모르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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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 홍오선
아침에 해님에게
고맙다 인사하고
하고픈 것
다 해보고,
보고픈 것
다 봤으니,
하루가
백년 같았다며
후회없이 살았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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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裸木)/ 김정희
스쳐간
바람결에
여울진 그대 향
그리움
잎 떨구며
속살 환히 보이는 건
상처도
보배인 듯이
문득, 깨친 마음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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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종(播種)/ 남진원
파종 시기 늦었지만
밭을 잘 다듬었다
뿌린 씨 흙 덮은 후 허리 펴고 하늘 본다
오늘은
기쁜 날이다
별도 맘껏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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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바람/ 문주환
가을이 심심한지
저녁 강을 가고 있다
물보라를 남기다가 잎새를 흔들다가
횡하니
파문을 지우고
그늘까지 지운다
쓸쓸히 혼자만의
한 생각 지우려고
그립고 외롭다고 그 생각 지우려고
바람은
강물 가슴을
한없이 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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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고래에 대한 소문/ 이경옥
한반도 포항 앞바다에 고래가 묻혔다는
오래 전 떠돌던 소문 뜬금포로 다시 돌아
천지간 귀들이 쫑긋
설왕설래하는데.
야무진 시나리오에 배팅하는 거대 자본
노다지 고래 등에 시추공 내리꽂고
흑진주 찐득한 피를
채혈하게 된다는데.
대왕고래 사냥 꿈이 해일로 밀려오면
출렁이는 한반도는 또 난리가 날 텐데
고래야, 넌 어느 쪽이니?
핵 뉴스와 해프닝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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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가고 향기만 남았네/ 이소영
설익은 햇살 한 줌 떠메고 나타나면
꽃웃음 튀어나올 흰구름 활짝 열어
삭풍에 몽환적으로
야릇하다 그 향기.
맵싸한 눈물 묻어 짜릿하게 붉어지면
툭 건든 매듭 하나 꽃잎으로 흩날리네
바람이 덜미 잡아도
차가운 치맛자락.
대가람 달빛 아래 영혼 품은 매화 꽃잎
청자빛 허공 가득 애살풋 웃음 짓고
고요한 얼굴 하나를
찻잔 속에 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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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성/ 전학춘
애초 태어나 고향 하나 지키려 욕심했다
몸 커지고 물질 쌓이니 비바람들 침습했다
정 맞은 부피 채우려니
바깥 세상 쏘다녔다.
세상은 달라는 것 탐나는 것 많고 많았다
밤새워 쏘다녀도 빈터 많고 지쳐갔다
어느 날 귀성열차 기대어
창밖 별들 세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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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면들/ 최양숙
바다는 완벽해요 빛나고 친절하죠
겹겹의 물결 위로 햇살이 번져오고
해안선 이마를 따라 느리게 일어났죠.
그때 누군가가 유리병을 던졌어요
깨지고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죠
밖으로 나오지 못한 아가미는 바들거렸어요.
파도는 자신을 쳐서 수없이 어루만졌지만
백 년, 천 년 전부터 버려둔 시간 동안
모래밭 푸른 자전거 녹슬어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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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문학지 속의 한 편
표지 현대시조/ 2023가을겨울합본호부터 2024가을까지/ 154호-157호
바보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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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4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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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여름호 수록작이 가을호에 다시 실린 경우가 여럿 있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