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눅 4:9-13) 관종 끼를 다 버렸는가?
누가복음 강해 (29)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눅4:9-13)
이생의 자랑
사십일을 금식하여 극도로 쇠약해진 예수님에게 사탄은 에덴동산에서 이브를 넘어트렸던 방식대로 세 가지 시험을 걸어 왔습니다. 먹음직하고 보암직한 것들로 주님을 유혹하여서 죄에 빠트리려 했던 첫째와 둘째 시험은 실패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이자 세 번째로 주님더러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유혹했습니다. 주님은 이 시험 또한 완전한 인간이자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물리치면서 사탄의 음흉한 계략이 무엇인지 드러내 보여 주셨습니다. 먼저 주님이 완전한 인간으로서 이브가 범한 잘못을 바로잡는 차원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그 전에 간단히 따져봐야 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이브는 사탄의 거짓말에 솔깃해져서 선악과를 다시 주목해서 봤더니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여서 따먹었습니다. (창3:6) 이브가 자신의 욕심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거역 대적하는 원죄를 범한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그래서 세상에서 오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모든 죄의 기원이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요일2:16)
이브의 먹음직하고 보암직한 욕심을 요한이 육신과 안목의 정욕이라고 표현한 것은 아주 합당합니다. 그러나 이브에게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다는 것과 요한이 말하는 이생의 자랑과는 서로 일치하는 점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언뜻 요한이 셋의 짝을 맞추려고 무리한 해석을 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에덴동산에는 성전 꼭대기같이 높은 곳이 없었을 것이고, 설령 있었다고 해도 이브가 굳이 목숨을 걸고 그곳에서 뛰어내릴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브가 지혜로워지는 일과 사탄의 지금 시험과도 딱히 연결되는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시험이 의미하는 바를 잘 따져보면 이브가 범한 죄와 요한이 평가한 맥락이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주님이 아주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도 전혀 다치지 않으면 많은 사람들이 열렬히 칭찬하며 추종할 것입니다. 요한이 말한 대로 분명히 이생에서 자신을 자랑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자신을 자랑하려면 당연히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지혜로워야 하므로, 이브가 원죄를 짓게 된 계기와도 같습니다.
이브가 혼자서 사탄을 상대하며 선악과를 먼저 따먹었다는 것부터 어쩌면 남편 아담보다 더 지혜롭다고 자부했거나, 아니면 그렇게 되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브는 사탄의 말대로 하나님처럼 최고로 지혜로운 존재가 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동산을 더 풍성하게 가꿔서 하나님은 물론 자기를 그렇게 만들어 준 사탄에게 보란 듯이 자랑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 자신을 자기가 봐도 아주 멋질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 결과는 너무나 참담하게도 정반대로 영적인 죽음이 임했고, 사탄의 유혹은 새빨간 거짓말로 판명났습니다.
무엇보다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게 된 결정적 계기는 사실 이 세 번째 욕심이었습니다. 단순히 먹음직하고 보암직한 정도로는 하나님을 거역 대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동산에는 선악과 이상으로 먹음직하고 보암직한 열매도 많았을 것이므로, 그런 욕심만 해소하려면 굳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었으므로, 마지막에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여겨진 것이 원죄의 결정적 원인이었습니다. 사탄도 그래서 주님에게 이 시험으로 마지막 승부를 걸었는데, 오늘날의 신자도 반드시 물리쳐야만 하는 가장 중요한 시험입니다.
관종이 아닌 사람은 없다.
이처럼 이생에서 자신을 자랑하려는 욕구가 인간 죄악의 결정적 요인이 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후에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을 첫째로 주셨습니다. 인간이 물질계에 제한된 연약한 피조물로서 육신의 정욕을 채우는 것은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필수 과제입니다. 그러지 못하면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훼손하게 됩니다.
빅토르 위고의 유명한 소설 레미제라블에서 주인공 장발장이 주교관의 은 촛대를 훔치다 경찰에게 잡혔습니다. 그의 처지를 불쌍히 여긴 주교가 자신이 선물한 것이라고 변호해 줘서 그를 진정한 회개로 이끌었습니다. 그 제목이 “동정을 받을 만한 사람”(Les Miserable)이라는 뜻이듯이, 굶어 죽지 않으려는 목적으로 저지른 죄는 세상에서도 용서 내지는 동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북한에선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최고의 덕목이지 않습니까?
인간은 생존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삶의 질을 높이려 듭니다. 굳이 남들에게 자랑하려는 목적이 아니라도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부여해 준 창조적 예술적 능력 때문에 자연스레 그렇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남들 앞에 자랑하는 모습이 될 수도 있지만, 육신과 안목의 정욕을 채우는 것은 다른 사람의 삶에 직접적인 피해는 주지 않습니다. 자기 것을 가지고 자기 뜻대로 사용하는 일을 두고 다른 사람이 도덕적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서 비난할 수도 없습니다.
문제는 사람은 절대로 혼자서만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세상 안에서 온갖 사람들과 이런저런 관계를 맺으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영어에 “keep up with the John’s”라는 관용구가 있는데, John은 평범한 이웃 사람을 상징합니다. 이웃들보다 자신이 뛰어나다는 자랑은 하지 못해도 최소한 뒤지지는 않겠다는 욕구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 관용구가 생겼다는 것은 인간 세상에서 누구에게나 통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바꿔 말해 인간은 누구나 시쳇말로 ‘관종’, 관심받고 싶은 종자의 약칭, 끼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태생적으로 남의 관심과 애정을 받고 싶어 하는 욕심을, 최소한 인정을 받거나 멸시를 당하지 않겠다는 성향을 지녔습니다. 이 세대가 소셜 미디어에 주로 올리는 사진이 유명 맛집이나 이름난 관광지에 들렀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들이지 않습니까? 자신이 노력해서 육신과 안목의 정욕을 남들보다 더 풍성하고 화려하게 채웠다는 모습을 자랑하거나, 최소한 최신 유행에 뒤처지는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라고 인정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런 욕심이 자기 개발을 위해서 긍정적 차원으로 작용도 하지만, 인생을 그런 것에만 매달려 살면 자연히 죄로 발전하게 됩니다.
한국에는 더 나아가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관용구가 있습니다. 친척이 부유해지면 축하해 줘야 마땅한데 정반대로 시기 질투한다는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을 유발한 원인이 친형이 자기에게 아무 잘못을 하지 않은 친동생을 종교적으로 질투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겉으로 나는 절대 관종 끼가 없다고 자부할지 몰라도 그 내면에는 다른 이의 사랑 내지는 관심을 받고싶어 하지 않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또 그런 일로 상처 받는 것을 가장 못 견딥니다. 오죽하면 소셜 미디어에서 악플 테러를 받았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겠습니까?
요컨대 하나님을 거역 대적하는 원죄에 묶인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의 인생 목적이 어떻게든 이 땅에서 자신의 관종 끼를 만족시키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배제하면 자기를 높이는 일 밖에 남지 않습니다. 아니 자기만 높이려 들었기에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어지게 된 것이 인간이 겪는 모든 불평등, 불의, 고난, 불행, 특별히 죄악의 출발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다.
사탄은 나사렛의 랍비인 예수도 육신과 안목의 정욕과는 달리 이생의 자랑에 대한 유혹은 쉽게 물리치기 힘들 것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주님을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 세우고서 여기에서 전혀 다치지 않게 뛰어내림으로써 성안의 백성들에게 자기를 한껏 자랑해 보이라고 부추겼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성전의 남동쪽에 기드론 골짜기가 내려다보이는 높은 탑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곳이 맞다면, 기드론 골짜기가 91미터 정도 아래로 보이기에, 한 층을 넉넉히 잡아 4미터로 치면 23층 높이에 해당합니다. 그런 고층 빌딩에서 파라슈트도 없이 뛰어내려서 머리털 하나 다치지 않는다면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환호와 갈채를 받을 것은 틀림없습니다.
사탄이 앞의 두 시험에서 졌기에 앙갚음하려고 주님을 죽여버릴 의도였다고 속단해선 안 됩니다. 주님이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받을 때 많은 사람이 하늘에서 성령이 주님 위에 강림하는 것을 보았고 또 당신의 아들이라는 하나님의 음성도 들었습니다. 이미 유대 백성들이 주님께 기대하는 바가 커졌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 자신을 더 많이 자랑하는 랍비로 세우려는 참으로 음흉한 의도였습니다.
그 정도로 영악한 사탄인지라 주님이 이생에서 자랑하고 싶은 욕구 하나만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앞선 두 번의 시험을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물리쳤습니다. 이번에는 사탄이 선수를 쳤습니다.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전혀 다치지 않게 해준다고 하나님이 구약성경에 이미 약속해 놓았다고 상기시켰습니다. 하나님의 그 말씀을 믿고서 안심하고 뛰어내리면 그분께 순종하게 되고, 뛰어내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불순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뒤틀리게 해선 안 된다고 거꾸로 주님을 걱정해 주고 있는 꼴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고 시편 91:11,12의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자기가 시험하는 일에 적합하도록 그 말씀을 살짝 비틀어서 인용했습니다. 너무나 교묘하게도 “네 모든 길에서”라는 한 마디만 쏙 빼버렸습니다. 그러니까 그 문자적 의미가 지금 성전에서 뛰어내리는 일에 아주 합당한 말씀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시편은 ‘모든 길에서’라고 표현했듯이 당신을 사랑하는 자를 모든 위험에서 건져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한 것입니다. 대적들의 위험이나, 염병이나, 돌발적인 파멸 등에서 구해주시는 지존자를 자신의 거처로 삼은 신자의 기쁨을 노래한 것입니다. 그래서 12절도 앞의 11절에서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킨다”를 다시 풀어서 설명한 것인데, 신자가 광야 같은 인생길을 걸어가다가 돌부리에 넘어지지 않도록 함께 하는 천사가 붙들어 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14,15절)라는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신자를 대적한 자들은 환난을 당하게 버려두어도 간절히 기도하는 신자는 건져 준다고 합니다.
따라서 사탄이 인용한 원래 구절에는 무턱대고 성전에서 뛰어내려도 안 다치게 해준다는 약속의 의미는 전혀 없습니다. 놀이공원에서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도 아니고, 평소에 그런 위험한 일을 하려 들면 정상인도 아닙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권능을 시험해 보려고 자청해서 환난에 뛰어들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염병에서 지켜주는지 안 지켜주는지 확인하려고, 일부러 염병이 창궐하는 지역에 들어가서 온갖 병균에 자기 신체를 노출시킨다면 오히려 그 벌로 염병에 걸려 죽을 것입니다.
말씀을 비트는 재주꾼
사탄은 에덴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교묘하게 살짝 비틀어서 이브를 속였습니다. 이브에게 건넨 첫마디가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3:1b)였습니다. ‘참으로’라는 한 단어를 맨 앞에 붙임으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은 당연히 따라야 하지만, 반드시 정확하게 따라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미를 넌지시 강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브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으라고 허락하면서, 선악과 하나만 먹지 말라고 명했습니다. 사탄은 선악과 하나만 먹지 말라는 말씀은 의도적으로 빼버렸습니다. 그리고 첫째 말씀에선 문장 전체 구조는 그대로 둔 채, ‘하지 말라’는 단어 하나만 덧붙였습니다. 이브더러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다 인용했다고 착각하게 만들려는 뜻입니다.
그런데 덧붙여진 ‘말라’라는 단어 하나가 이브에게 곧바로 하나님의 뜻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열매를 다 먹으라고 했다면 선악과도 포함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왜 꼭 선악과만 먹지 말게 했지라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또 그렇다면 틀림없이 하나님에게 뭔가 시원하게 밝히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이유가 있지 않는가라는 의심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점을 사탄이 노린 것입니다.
이브는 자기 딴에는 하나님 편을 들어주려고 그분은 모든 과일을 먹게 허락했다고, 사탄이 건넸던 말을 고쳐주었습니다. 문제는 이브도 덩달아서 ‘만지지도 말라’고 하나님이 하시지 않은 말씀을 덧붙인 것입니다. 이브가 나름대로 하나님을 옹호하려는 뜻으로 그랬을지 모르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의 음흉하고도 교묘한 계략에 반쯤 넘어가 버린 것입니다. 속으로는 하나님이 뭔가 숨기고 있다는 의심 내지는 불만이 생겼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심의 씨앗이 이브에게 심어진 것을 확인하자, 사탄은 선악과를 먹어도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단정적으로 선언해 버립니다. 이브의 생각이 다른 쪽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아예 못을 박은 것입니다. 거기다 정말로 그럴싸한 이유를 덧붙였습니다. 이브가 '하나님에게 뭔가 말 못 할 비밀이 있지 않나'라고 궁금해 했던 바로 그 가려운 데를 아주 시원하게 긁어준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처럼 되는 것을 시기해서 하나님이 그런 거짓말을 했다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정말로 너희를 위해주는 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사탄 자기라는 투였습니다.
그 짧은 순간에 사탄은 아담과 이브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으로 긍정적인 사랑의 표식이었던 선악과를, 하나님이 자기 영역을 인간에게 절대 넘겨주지 않겠다는 절대적으로 부정적인 속박으로 바꿔버렸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단어 하나 바꾸어서 전혀 다른 의미로 인식시켜서 이브를 무너트렸습니다. 지금 주님에게도 똑같은 수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사탄의 말을 들으면 자칫 주님도 넘어갈만한 아주 교묘한 작전입니다.
그러나 이브의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오신 주님이 동일한 수법에 절대로 넘어가선 안 되고 그렇게 될 리도 없습니다. 이브가 처음에 사탄에게 넘어간 까닭은 오직 하나입니다. 사탄이 처음에 틀리게 말했다는 사실을 이브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든 과일을 먹으라고 허락했다고 답변했습니다. 그런데 왜 선악과만 못 먹게 했지라는 의심이 듦으로써 만지지도 말라고 했다는 말을 덧붙인 것입니다. 그러자 사탄은 하나님이 사실은 너희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너희를 질투하고 있다고 그 의심에 불을 확 붙인 것입니다. 결국 이브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함으로써 선악과를 따먹은 것입니다.
사탄은 지금 이브에게 시도했던 그대로 주님에게 하나님이 너를 정말로 사랑하는지 한번 시험해 보자는 것입니다. 남편의 사랑을 의심하는 아내는 자꾸 이벤트나 선물을 요구하면서 이벤트의 화려함이나 선물의 가격으로 그 사랑을 테스트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부부라면 아무 말 없이 표정만으로도 서로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서로 시험할 필요는 당연히 없고, 자신의 전부를 먼저 배우자를 위해 바치면서 상대를 살려 냅니다. 주님이 아무리 사십일을 금식해서 쇠약해져 있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리는 아예 없습니다. 그전에 사십 일 금식은 주님이 스스로 시작한 것이라서 하나님의 사랑과 연결할 차원도 아니었습니다.
사탄의 노림수는 주님이 만약 뛰어내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이라고 몰아붙이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이 이브처럼 사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고쳐줄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이 거짓의 아비 사탄과 하나님의 진리를 두고서 신학적인 논쟁을 벌여서 당신의 옳음을 증명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렇지만 사탄이 구약성경을 인용했기에, 주님도 신명기 6:16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라는 정확한 진리의 말씀으로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사탄은 주님더러 하나님을 시험해 보는 것이 그분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는 억지를 부렸으나, 주님은 그분을 시험하지 않는 것이 신자의 마땅한 본분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사탄은 자기 꾀에 거꾸로 자기가 넘어가 버렸습니다. 진리가 아닌 거짓으로만 일관하는 사탄에게 예정되었던 결과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누차 강조한 대로, 세 번의 시험 모두 주님이 먼저 주도하여서 당신의 뜻대로 이끈 것입니다.
사랑의 시험
사람이 지혜로워져서 현실 삶에서 자신을 높이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어리석은데도 지식을 쌓으려 하지 않고 계속 꼬리로 남아 있는 것은 인생을 허비하는 짓입니다. 신자도 현실적 실력을 쌓아서 자기보다 부족한 사람을 도와주며 함께 번영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입니다.
문제는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모든 인간이 관종끼가 넘쳐서 이생의 자랑만을 목표로 인생을 살아가기 때문에 온 세상이 죄악에 빠져서 타락으로 치닫는다는 것입니다. 남들 앞에 자기를 자랑한다는 것은 자존심을 높이려 했던 최초 인간이 범한 원죄의 결과입니다.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거부하고 자기 혼자서 멋대로 살려고 나섰습니다. 한마디로 이제 하나님의 사랑은 전혀 필요 없으며 앞으로는 오직 자기만 사랑하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진 인간이 하나님을 등지는 순간 인간의 영혼부터 비틀어집니다. 인간 본연의 형상이 파괴된 채로 행하는 인간의 모든 일도 결국 추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마15:19)라고 예리하게 지적했습니다. 그런 인간의 상황은 홍수 심판을 받아야 했던 노아의 때에 하나님이 “사람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창6:5)이라고 한탄했던 것에서 단 하나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물론 세상에서도 인간끼리 서로를 존중해주기 위해서 가능한 상대를 높이고 자신은 겸손히 낮추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문제는 자기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세상 사람은 평생토록 그분의 온전한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자기만 최고로 사랑하는 죄악 된 본성이 고착되어서 이생에서 오직 자기를 높여서 자랑하는 재미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들로선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누려보기 전에는 그런 자랑을 스스로 멈출 수 없습니다.
원죄로 더럽혀진 인간의 영혼은 성령으로 깨끗이 씻어서 하나님을 닮은 형상을 타락하기 전의 상태로 회복시켜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목적이 바로 그것인데, 하나님은 당신을 대적했던 원수까지도 진심으로 회개하고 겸손히 엎드리면 온전히 사랑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이생에서 자기를 자랑하느라 헛되고 헛되게 살지 말고, 에덴동산의 선악과에서부터 온전히 계시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품으로 제발 돌아오라는 간절한 호소입니다.
예수님이 사탄의 이 마지막 유혹을 물리친 것도 그 십자가 복음을 미리 실현해 보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대답하신 뜻이 바로 하나님의 당신에 대한 사랑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이브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여서 선악과 금령을 위반했던 잘못을 바로잡은 것입니다. 이브도 사탄에게 네가 아무리 하나님에 대한 나의 사랑을 흔들려 해도 절대 그러지 않겠다고 대답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 네가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다는 한마디만 했으면 사탄은 곧바로 물러갔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생의 자랑에 빠지지 않는 방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이 중요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삶에 도움이 되는 많은 안락과 풍요를 제공해 줍니다. 그러나 신자는 세상 사람들을 미혹 조종하고 있는 흑암의 세력에게 넘어가선 안 됩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사랑은 세상에 없는 온전한 참사랑이라서 절대로 그 사랑의 품을 떠나지 않겠다고 당당하게 선언하면 됩니다. 나와 하나님의 관계도 하나님 그분만이 거룩하게 주관 통치하시므로 세상 어떤 것에도 영향받지 않는다는 확신부터 가져야 합니다.
영적인 자랑
원죄에 묶인 불신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순전히 받아들이고 자신을 그분께 온전히 내어드리지 않으면 관심에 목매는 사람 끼를 없앨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미 그런 사랑을 받고 회심한 신자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세상 사람처럼 육신과 안목의 정욕을 남들보다 우월하게 채워서 자랑하려는 욕심에선 그런대로 자유로워집니다. 혹시라도 여전히 그런 목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주님의 가르침대로 먹고 마시는 것만 구하는 이방인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꼴입니다.
그 두 가지 정욕을 채우지 않는 신자라도 바리새인 같은 잘못은 종종 범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구제, 금식, 기도, 율법 준수 등에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자부했습니다. 사람들 앞에 자기들의 영적인 지혜와 그 실천의 우월함을 자랑하고서 칭찬받아야 마땅하다고 여겼습니다. 경건해야 할 영적인 수행마저 자신들의 이기적인 목적으로 악용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외식하는 모습을 절대로 본받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속은 썩어가나 겉만 번지르르한 회칠한 무덤이라고 직접 야단치면서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없다고 저주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 앞에서만 자랑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비유를 통해 바리새인은 성전에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기도한다고, 즉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를 자랑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자기들은 토색 불의 간음을 하지 않았고 세리처럼 동족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으며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고 소득의 십일조도 바쳤다고 늘어놓았습니다. 자기는 다른 이와 다르다고 자랑한 것을 넘어서, 그러니까 자기에게 특별 대우를 해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과 우리가 과연 완전히 다르다고 당당하게 자신할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 복음을 그렇게 알아듣기 쉽게 전했는데도 끝까지 못 알아듣다니 영적으로 너무 어리석은 것 아닌가 얕본 적은 없습니까? 마치 자기는 영적 지혜가 뛰어나서 전도 받자마자 쉽게 믿은 것처럼 착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조금만 힘든 일이 생기면 하나님께 제가 십일조도 드리고, 교회 봉사도 열심히 했는데 왜 이런 어려움을 줍니까라고 의심 불평한 적은 없습니까? 아주 사소한 도덕적 하자를 꼬투리 잡아서 다른 성도를 비난 정죄한 적은 없습니까? 겉으로는 아주 경건하고 포용력이 좋은 것처럼 하면서 속으로는 나는 너 같은 사람과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자부한 적은 없습니까?
예수님도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는지 물은 청년에게 선한 이는 오직 한 분 하나님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주님이 선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받은 것이 아니면, 즉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지 않은 채 행하는 모든 것은 선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고후10:17)라고 가르쳤습니다. 인간은, 아니 신자는 오직 주님이 주신 것만 자랑해야 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주님이 주신 것은 굳이 자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어서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라고 덧붙였습니다. 주님이 칭찬하는 신자는 사람들도 옳다고 인정해 준다고 합니다.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신자의 삶과 인생에 온전히 드러나면 그 거룩한 생명의 향기와 광채를 주변 사람도 자연히 알게 됩니다. 신자의 일상적 삶의 방식이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굳이 이생에서 자랑하느라 죄에 빠질 이유는 물론 그럴만한 빈틈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이생에서 자랑하는 죄를 이기는 비결은 하나님의 사랑뿐입니다. 포도나무인 예수님에게 가지로 붙어서 절대 떨어지지 않으면 됩니다. 가지가 뿌리에서 영양분을 받지 못하면 시들듯이, 주님의 사랑이 결핍되면 자신에게서 큰 결핍을 느껴야 합니다. 인생에서 최고 실패가 그분의 품을 떠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 십자가의 사랑이 없이는 자신이 얼마나 가난하고 치사하고 비참하며 추악한 존재인지 절감한다면, 그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어지게 됩니다.
지금 우리도 바울 같은 고백을 평소에 누구 앞에서나,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진솔하게 할 수 있는지 진지하게 되돌아보길 원합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빌3:7-9) 한마디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 은혜만 자랑하고 나머지 모든 것은 절대로 자랑하지 않는 자가 되었는지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실감 나게 말해서 관종 끼를 완전히 싹 다 버렸는지 살펴보라는 뜻입니다.
(3/29/2026) 박진호 목사
=====================================================
예수코리아 카페에서 알려드리는 글입니다
도움을 주셔야만 문서 선교를 할 수 있습니다
한분이라도 도와주시길 거듭 부탁드립니다..
카페에 후원이 필요합니다 카페지기는 아주 어렵게
지냅니다 투병중에 생활고로 어렵습니다
도와주신 분들께 박경옥 전도사가 하루 두번
기도해드리고 있습니다 다
먹을것도 없습니다 한 분이라도 도와주셔서...
용기릏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후원이 없다 보니 공과금도 못내고 먹을것도 못삽니다
1만원 이라도 도와주시면 카페지기는 큰힘을 얻습니다
건강문제로 박스나 고물도 줍지 못합니다
앿값이 없는데 먹을것을 사야합니다 오늘은 도와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용기를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먹을것도 못사고 공과금도 밀리고 치료비도 없습니다
공지글에 수급자에서 탈락되는 이유를 올렸습니다
지병으로 투병하며 카페일로 소일하며 지냅니다 수입이 전혀 없이 살고 있습니다
예수 코리아 카페를 도와주실분을 기다리고 작정기도합니다 매월
자동이체 정기후원 회원님이 계셔야 카페를 운영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동이체 회원이 없습니다
카페지기 전화입니다 010.2261~9301
카페후원계좌-국민은행 229101-04-170848 예금주.황종구
카페후원계좌-농협 233012-51-024388 예금주.황종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