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가을, 펜실베이니아 랭커스터(Lancaster, PA)의 Route 897을 따라 천천히 달리던 어느 오후, 아미시 농가가 이어지는 고요한 길 위로 부드러운 햇살이 내려앉고, 한적한 들판에서는 가을 바람이 옥수수밭을 스치며 잔잔한 소리를 내고 있었는데, 뜻밖의 풍경을 만났습니다.
그때, 길가 너머로 하얗고 둥근 물체들이 잔뜩 놓여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호박만 한 크기의 둥근 것들이 들판 위에 줄지어 놓여 있었고, 가을빛 속에서 그 하얀 색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습니다.
호기심에 차를 멈추고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 정체는 바로 대형 백색 박(gourd). 그곳은 아미시 지역에서도 유명한 Smucker’s Gourd Farm이었습니다.
농장 입구에는 오래된 나무 간판이 걸려 있었고, 회색 금속 지붕 아래에는 갓 수확한 박들이 커다란 통에 담겨 쉬고 있었습니다. 멀리에는 말이 천천히 걸어가며 들판을 가로지르고, 농가의 고요함이 가을 공기 속에 그대로 스며 있었습니다.
농가에서는 이 박들을 직접 재배하고, 일부는 장식용으로 꾸며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가을 햇살 아래 놓여 있는 박들은 마치 자연이 만든 조각품처럼 보였고, 미국 아미시 농촌에서 이런 예술적인 박을 만난다는 사실이 참 신기했습니다.
회색 금속 지붕의 창고 앞에는 갓 수확한 박들이 커다란 통에 담겨 있었고, 멀리에는 말이 풀을 뜯는 평화로운 아미시 농가의 모습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농장 안으로 들어가니, 수천 개의 박이 종류별로 정리되어 있었고 벽에는 다양한 형태의 박이 걸려 있었습니다 —
길게 휘어진 것, 둥근 것, 그리고 예술적으로 변형된 것들까지. 건조된 박들은 예술가의 손길을 거쳐 아름다운 조각품과 새집, 장식품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습니다.
윤이 나는 색채와 정교한 그림이 더해진 박들은 마치 도자기처럼 빛났습니다. “Autumn Blessings”, “Choose Joy” 같은 문구가 새겨진 박들은 가을의 따뜻한 감성과 신앙심이 함께 담긴 작품처럼 느껴졌습니다.
건조된 박들은 예술가의 손길을 거쳐 아름다운 조각품과 새집, 장식품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습니다. 농장 뒤편 들판에는 아직 수확되지 않은 박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고, 햇살에 반짝이는 모습이 마치 작은 등불처럼 보였습니다. 아미시 농부들이 손수 재배한 박들이 이렇게 예술로 이어진다는 사실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날 구입한 박 세 개 중 두 개는 손녀와 함께 아크릴 물감으로 꾸몄습니다. 작은 손으로 색을 칠하며 웃던 손녀의 모습은 이 농장에서 느낀 평화로움과 함께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습니다. 손녀와 함께 꾸민 박 두 개는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라 세대를 잇는 따뜻한 추억이 되었고, 지난해 가을 랭커스터에서 만난 박 농장은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을 여행의 한 장면이 되었습니다. 가을빛 속에서 우연히 만난 박 한 알이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을 줄은 그날까지는 미처 몰랐습니다.
박을 바라보며 문득 떠오른 옛 기억이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정월 대보름 새벽에 서로의 집에 박을 던져 넣던 풍습. 장난기 가득한 그 풍경, 웃음소리로 가득했던 동네의 모습이 아미시 농가의 들판에서 다시 되살아나는 듯했습니다. 한국의 옛 풍습과 미국 농촌의 가을 풍경이 한 자리에서 이어지는 듯한 이 묘한 인연은 여행이 주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 중 하나였습니다.
글 / 사진 손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