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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해김씨 삼현파(판도판서공 휘 관파) 원문보기 글쓴이: 강남
부산 금정산 범어사
(영남의 3대사찰,천년고찰 금정산 범어사)
범어사는 신라 문무왕 때(678년), 의상대사가 해동의 화엄십찰중의 하나로 창건하였다.
화엄경의 이상향인 맑고 청정하고 서로 돕고 이해하고 행복이 충만한 아름다운 삶을 지상에 실현하고자 설립된 사찰이다.
해인사 통도사와 더불어 영남의 3대 사찰인 범어사는 역사적으로 많은 고승대덕을 길러내고
도인을 배출한 수행사찰로 오랜 전통과 많은 문화재가 있는 곳이다.
범어사는 의상대사를 비롯하여 원요대사 · 표훈대덕 · 낭백선사 · 명학스님과 그대에 경허선사 · 용성선사 · 성월선사 ·
만해한용운선사 · 동산선사 등 고승들이 수행 정진하여 명실상부한 한국의 명찰로서 그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1950년대 동산스님이 불교정화운동을 주도하였고, 한국근대불교를 이끌었다.
선찰대본산은 마음을 닦는 맑은 도량이라는 뜻이다. 참선을 통해서 마음속에 일어나는 갖가지 잡념과 망상을 쉬게하고 자신의 내면세계의 참다운 불성을 깨닫게 하도록 마음을 수행하는 근본도량이라는 뜻이다.
구한말의 범어사에는 오성월스님이 범어사 주지로 소임을 보고 있을 때 성월스님은 먼저 범어사를 선찰대본산으로 명명하고 당대에 최고 고승 경허스님을 범어사 조실스님으로 초빙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이라는 존재의 본질을 가지고 있다. 어리석은 중생의 마음을 부처님의 마음으로 변화시키는 선수행 도량이다. 양산 통도사가 불보종찰이요, 합천 해인사가 법보종찰이며, 순천 송광사는 승보종찰이다. 그러면 범어사는 그 네번째 선종본찰로서 마음의 근원을 궁구하는 수행도량이어야 한다. 이것이 선찰대본산의 의미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동래현 북쪽 20리에 있는 금정산 산마루에는 금빛을 띤 우물이 항상 가득차 있으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 속에 금빛 나는 물고기가 오색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놀았다고 하여 '금샘'이라고 하였다.
하늘에서 내려온 금빛고기와 황금우물 그리고 산 이름을 따서 금정산 범어사라고 절 이름을 지었다.
범어사 유래
금정산 정상에 세길 정도의 높이의 바위가 있는데 그 위에는 황금색 우물이있고 그 우물은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을뿐더러 때때로 한 마리의 금빛나는 물고기가 오색 구름타고 범천(梵天)에서
내려와 그 속에서 놀았다 -동국여지승람
그래서 황금빛 우물 금정산(金井山)은 산이름이 돼고 사찰 이름은 하늘의 물고기 범어사(梵漁寺)가
되었다 .
범어사 조계문(曹溪門) 보물 제1461호 /부산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
범어사 일주문인 조계문의 중앙에는 “조계문(曹溪門)”, 좌우에는 “금정산범어사(金井山梵魚寺)” “선찰대본산(禪刹大 本山)”이라 편액하였다. 조계문이라는 이름은 1718년, 1720년, 1841년의 중수(重修) 상량문 등에서 확인되고 있다. 일주문은 사찰 경내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으로 법과 진리가 모두 갖추어져 일체가 통한다는 법리가 담겨 있는 문이다. 일반적으로 건물을 지을 때 건물의 안정을 위해 네 귀퉁이에 기둥을 세우지만, 일주문은 기둥만 일렬로 나란히 세우고 기둥 위로 공포를 짜 지붕을 받치고 있는 독특한 형식의 건물로, 문으로서의 기능보다는 신성한 공간인 사찰 경내로 들어가는 영역의 경계로서 성(聖)과 속(俗)의 공간을 구분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강한 건물이다. 높은 석조기둥 위에 짧은 나무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다포(多包)의 포작(包作)과 많은 중량을 가진 겹처마 지붕을 올려 놓음으로써 스스로의 무게로 지탱케 하는 역학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어 다른 사찰의 일주문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옛 목조건물의 건축공법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함께 창건하였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알 수 없고, 1993년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실측조사 시 발견된 종도리 묵서명에 의해 1694년(숙종 20)에 중창한 것으로 추정되며, 1983년 해체보수 하였다. 배치와 구조적인 합리성 등이 시각적으로 안정된 조형 및 의장성을 돋보이게 하고, 한국 전통건축의 구조미를 잘 표현하고 있는 건축물로서 우리나라 일주문 중에서 가장 걸작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건축사적 가치를 인정 받아 2006년 2월 7일 부산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2호에서 보물로 지정되었다
불교에서는 3보(三寶)를 뿌리로 한다 불, 법, 승 (佛, 法, 僧)이 그것이다. 산사는 스님의 수행 공간이자 사는 집이다. 일주문을 넘어서면 경내에 들어선 것이며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사찰 예절을 지켜야 한다 |
범어사대웅전(梵魚寺大雄殿)
보물 제434호
부산 금정구 청룡동 546 범어사 내
부산의 진산인 금정산에 자리잡은 범어사는「범어사창건사적기(梵魚寺創建史蹟記)」에 따르면 신라흥덕왕 10년인 835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였고 당시에는 왜구를 진압하는 비보사찰(裨補寺刹)로서
군사전략상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고 하나, 흥덕왕 10년은 이미 의상대사가 입적한 뒤라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대웅전이란 천지간의큰 영웅(大雄)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셔놓은 집이라는 뜻으로, 본존불인 석가여래를 중심
으로 양쪽에 미래에 성불하여 부처가 될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과 정광여래로서 과거불인 갈라보살
(伽羅菩薩) 등삼세불(三世佛)이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의 최초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때 불탄 것을 1602년(선조 35)에 관선사(觀禪師)가 재건 하였으나
불타버렸다고 한다.
지금의 대웅전은 1614년(광해군 6) 묘전화상(妙全和尙)이 건립한 것으로 1713년(숙종 39) 흥보화상(興寶和尙)이
중수한 것이다. 내부의 불단과 닷집, 삼존불상은 묘전화상의 중건 때 조성된 것이며, 불상 개금(改金)은 1824년
(순조24)경 해민대사(海敏大師)가 하였다고 전한다.
건물 양식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으로 평면은 거의 정사각형에 가깝다. 기단은 불국사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가구식 기단으로 면석에 동백잎이 조각·장식된 보기 드문 예이다. 아울러 기단의 동쪽 끝 면석에 ''강희
19년(康熙十九年, 1680년) ''이라고 새겨져 있어 대웅전 기단의 건립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건물 내부의 후불벽화는 비천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여 불단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으며, 불단 위의 닫집
또한 용과 봉황이 어우러진 화려한 구성으로 천상세계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천장도 보상화문(寶相華紋)과
연화문(蓮華紋) 등을 초각하여 화려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 건물은 규모가 그다지 큰 것은 아니나 아담한 교창(交窓), 기둥위의 두공(枓供)과 첨자 구조의 섬세함과 아름다움,
닫집과 불단의 조각이 정교하고 섬세하여 조선중기 불교건축의 아름다움과 조선시대 목조공예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대웅전은 스님이 예불을 올리는 곳으로 석가모니를 주불로 봉안한 건물을 말한다
범어사 대웅전석가영산회상도 (梵魚寺大雄殿釋迦靈山會上圖)
부산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67호
영산회상은 넓은 의미로는 석가모니부처의 가르침 또는 불교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불교의 상징적인 표상 이며,
좁은 의미로는 석가모니부처가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한 법회 모임을 말한다. 영산회상도는 이와 같은 의미와
내용을 표현한 불화로서 석가모니 부처를 주존불로 모시는 대웅전에 주로 봉안된다.
범어사 대웅전 후불벽을 꽉 채운 채 걸려 있는 석가영산회상도는 족자형의 대형 탱화로서 괘불의폭과 맞먹는 대형
이면서도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한 작품이다. 화면 중앙에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한 채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
하고 있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8대보살과 1 0대제자 및 외호신중(外護神衆)들이 불격에 따라 크기를 달리한 채
부채꼴을 이루면서 좌우대칭적인 구도로 군중 형식을 띠며 묘사되어 있다. 또한 대형 화면에 자비로운 미소를
자아내고 있는 본존불을 위시한 협시상 들과 엄숙한 표정의 신중들이 조화를 잘 이루고있다.
전체적으로 화면을 상.중.하단부로 구분한 후 중단부 중앙에 협시보살상 보다 2배가량 크게 본존인 석가모니불을
묘사하였고, 화면 중단부 본존 좌우에는 자주색의 구름과 함께 상반신이 묘사되어 있는 보살상들이 각각 4구씩 협시
하고 있다.
그리고 하단부에는 불단 좌우에 옅은 먹으로 두광을 표현한 가섭존자와 아난존자가 협시보살상 보다 절반 가량
축소된 크기로 시립(侍立)하고 있으며, 그 옆에는 합장한 제석천과 범천이 서있다. 또한 하단부 좌우 양 가에는
사천왕이 묘사되어 있는데, 지물과 갑옷 및 수염 등이 섬세하면서도 화려하게 표현되어 있어 화면에 생동감과
무게를 더해주고 있다.
화기(畵記)를 통해 대웅전 내에 봉안되어져 있는 삼장보살도, 제석신중도, 관음전 백의관음도 등과 함께 1882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는 이 작품은 보존 상태가 양호한 대형의 후불탱화일 뿐 아니라, 구도와 채색 이 뛰어나며
제작 당시의 용상방(龍象榜)과 불화 제작에 참여한 17명의 명단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등 조선 후기 불화 연구에
귀중한 문화재로 판단된다.
범어사 대웅전 제석신중도 (梵魚寺 大雄殿 帝釋神衆圖)
부산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69호
대웅전 내부 우측 벽에 걸려 있는 이 작품은 좌측 벽의 삼장보살도와 같은 시기인 1882년에 기전(琪銓)을 중심으로
한 동일 화사(畵師)그룹에의해 그려진 것이다. 따라서 전반적인 화면 구성이나 색조는 삼장보살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상단부에 3목8비(三目八臂)의 마혜수라천왕과 좌우의 일천자(日天子, 향우), 월천자(月天子, 향좌)를 중심으로
왼쪽에 대범천과 동진보살, 오른쪽에 제석천왕 등 3위의 천부를 배치했다. 그 주위로 천동(天童)과 천녀(天女)가
묘사되어 있고, 천룡부와 명왕부의 신장들로 구성된 하단부 중앙에 각종 악기를 연주하는 10위의주악천녀와 함께
좌우측에 신장상을 배치하였는데, 많은 인물들을 좁은 화면에 배열하다보니 4단으로 열을 지어 표현함으로써
구도가 형식화되었다.
얼굴은 상단의 중심 인물을 흰색으로 칠한 반면, 천룡팔부를 비롯한 화면 하단부의 33위에 달하는 신장들은 붉은색이
감도는 살색으로 묘사하여 구분하였다. 신중탱화는 성격과 위계가 같은 신들의 모임, 즉 천부와 천룡부, 명왕부의
3요소로 구성되며 여기에 다양한 신장상이 표현되는데, 이 상들의 배치와 인물의 가감을 통해 변화가 풍부한
신중탱화를 구성한다.
본 작품은 조선 후기의 신중도 가운데 마혜수라천왕을 중심으로 범천과 제석천이 그려진 경우로는 그 사례가 드문
작품이다.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작품의 규모도 클 뿐 아니라, 특히 화면에 수많은 권속들이 등장하여 조선 후기
신중도 연구에 자료적 가치가있는 문화재이다.
범어사 미륵전 (彌勒殿)
용화전(龍華殿), 자씨전(慈氏殿)이라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 다음에 오실 미래의 부처님이다. 앞으로 사바세계에
오셔서 많은 중생을 제도해 주실 부처님으로 지금은 도솔천에서 천인들을 위하여 설법을 하고 계신다. 법당에
모셔진 미륵부처님은 서쪽을 향하고 있는데, 화재로 소실되었던 미륵전 밑을 파보니 미륵부처님께서 동쪽을
등지고 앉아 있어 그대로 안치하였다고 한다. (범어사 발췌)
미륵전은 종루 앞, 대웅전의 오른쪽에 자리잡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아담한 맞배지붕 건물이다.
안에는 목조 미륵불좌상을 독존으로 봉안하였다. 본래 임진왜란 이전에는 미륵전에 4위의 미륵불이 봉안되어 있었다.
서남북쪽의 3위는 석조였고, 동쪽의 1위만 목조였다. 석조 미륵은 모두 없어졌으나 목조 미륵불은 지금까지 남아있다.
이 미륵불은 특이하게 정면, 곧 입구의 문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른쪽 벽을 등지고 대웅전을 향해 앉아 있다.
이는 서쪽을 등지고 동쪽을 바라보는 형상이다. 임진왜란을 맞아 미륵전이 전소되는 불행을 겪었고, 이 때문에 일본을
등지고 있다.
미륵전에 봉안된 미륵전목조여래좌상
미륵전
범어사 삼층석탑(梵魚寺 三層石塔)
보물 제250호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 대웅전과 보제루 사이 마당)
이 탑은 범어사측 기록에는 675년(문무왕 15)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층급받침이나 기단의 안상(眼象,
조형물의 받침 부분을 가볍게 보이기 위해 아름다운 윤곽을 지니도록 조각한 무늬) 등으로 보아, 건립 년대는
범어사와 같은 830년(흥덕왕 5) 무렵으로보는 것이 무난하리라 생각된다.
이 석탑은 2층 기단 위의 3층석탑으로 상하기단에 모두 안상이 조각된 점이 특이한데, 일제강점기때 탑을 보수하면서
기단 제일 아랫부분에 하나의 돌이 첨가되어 원 모습과 달라졌으며, 주위의 난간도 이 때 만들어진것이다.
지대석 위의 하층기단 면석에는 각 면마다 3구의 안상을 우주(隅柱, 기단이나몸돌의 가장자리에 기둥모양으로
조각한 부분)사이에 조각하였고, 갑석(甲石) 윗면에는 2단의 받침이 있어 상층기단 면석을 받치게 하였다.
상층기단 면석은 크고 높으며, 각 면의 넓은 면적에 꽉 들어차게 큼직한 안상이 한 구씩 조각되어 특이한 조각수법을
취하고있다.
탑신부(塔身部)는 몸돌(塔身)과 지붕돌(屋蓋石)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탑의 체감율은 1층 탑신에 비해
2층부터는 반 이하로 급감하여 비례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옥개석은 평평하고 얇아 신라 하대의 양식을
보이며 추녀는 수평을 이루었고 층급받침은 4단으로 줄었다. 상륜부(相輪部)는 노반(露盤)이 뒤집어져 있고 그 위에
뒤에 보충한 보주(寶珠)가 있을 뿐 다른 부분은 없어졌다.
이 탑은 제일 아랫부분에 돌을 첨가한 까닭에 이례적으로 우뚝 솟아 보이며 이색적인 느낌을 갖게 한다. 그러나
신라 후기의 특색이 보이며, 특히 상하기단의 안상 조각장식수법이 주목되는석탑이다.
범어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梵魚寺木造釋迦如來三尊坐像)
보물 제1526호
이 삼존좌상은 범어사 대웅전의 주불로서 개금(改金)할 때 복장에서 발견된 불상기문(佛像記文)과 불상기인발원축
(佛像記因發願祝)을 통하여 석가불과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의 수기삼존불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순치 18년(조선 현종 2년, 1661년)이라는 정확한 조성연대와 수두(首頭), 희장(熙莊)을 비롯한 보해(寶海),
경신(敬信), 쌍묵(雙?), 뇌영(雷影), 신학(信學), 청언(淸彦) 등이 조각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수조각승 희장은 1639년 하동 쌍계사 대웅전 목조삼세불좌상 및 사보살입상(보물 제1378호)을 조각한 청헌(淸憲)과
같이 활약하였고, 1646년에는 천은사 수도암 목조아미타삼존불을 조각한 승일(勝一)과도 함께 작업을 하였다.
1950년대는 선종대선사(禪宗大禪師)라는 칭호를 받으며 청도 대운암 불상(1654년)을 제작하였다. 이외에도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그의 작품이 확인되는데, 범어사 대웅전 불상은 그가 완숙기에 조성한 작품으로 추정된다.
현전하는 자료를 통해 그는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에서 크게 활약한 17세기 중. 후반기의 대표적인 조각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삼존불은 비례가 적당하여 당당하고 균형 잡힌 형태를 보이며, 상호(相好)는 풍만한 양감 속에
부드러운 미소가 어우러져 자비롭고 단정 우아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법의 주름은 직선의 선묘로 간략히 처리하여 여백을 많이 남겼지만, 전체적으로 힘이 있으면서도 잘 정돈되어 있다.
무릎 아래에는 넓은 띠 모양의 주름이 좌우대칭으로 펼쳐져 부채꼴 모양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양식적 특징은 희장
유파의 조각적 특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범어사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은 불상기문을 통하여 정확한 존상명칭은 물론, 조성시기와 조각가 그룹을 알
수 있는 불상으로서는 매우 완성도 높은 우수한 작품이다.
범어사 석등(梵魚寺 石燈)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6호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 삼층석탑 옆 )
이 석등은 의상대사가 범어사 3층석탑을 건립한 3년 후인 678년(문무왕 18)에 조성한 것으로 전하고 있으나 범어사
3층석탑과 같이 9세기 경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석등은 원래 용화전(龍華殿) 앞뜰에 있었던 것인데,
일제강점기에 이곳에 있었던 종루가 보제루(普濟樓) 북쪽으로 옮겨짐에 따라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석등의 형태는 하대석 위에 기둥(중대석)을 세우고 그 위에 상대석을 놓아 화사석(火舍石, 석등에서 불을 밝힐 수
있는 창이 나 있는 부분)을 받치고 화사석 위에 옥개석을 덮었으며, 각 석재의 평면은 모두 8각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양식은 통일신라시대 석등의 전형적이고 기본적인 형태에 해당되는 것이다.
지대석은 없으며 하대석의 윗면은 연화대로서 복련(伏蓮, 대좌에서 연꽃모양이 아래오 향해 있는것)이 조각되어 있고,
맨 윗부분에는 원형받침을 조각하여 기둥돌을 받치고 있다. 상대석의 아랫면도 역시 두 겹으로 된 8장의 연꽃잎
모양의 앙련(仰蓮, 대좌에서 연꽃모양이 위로 향해 있는 것)이며, 윗면에는 8각으로 된 한 단의 화사석 받침이
있다.
화사석에는 4면에 서로 마주보며 장방형의 화창(火窓, 불빛이 새어 나올 수 있도록 만든 창)을 내었으며, 창구(窓口)의
가장자리에는 음각된 부분에 화창을 달았던 10개의 작은 구멍이 있다. 옥개석은 추녀가 직면이고 전각(轉角)은
약간의 반전이 있으며 낙수면에는 합각(合角)이 뚜렷하다. 옥개석의 정상에는 정사각형의 노반(露盤)을 얹었으며
그 위에 연꽃 봉오리 모양의 보주(寶珠)를 만들었다.
기둥돌이 빈약하고 반면 상대석이 크고 비대하여 전체적인 균형이 잘 맞지 않는 것은 후세에 보완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범어사당간지주(梵魚寺 幢竿支柱)
부산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15호
부산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 경내)
범어사 당간지주는 경내 주차장 아래 의 송림 속에 서 있는데, 지금의 위치가 원 위치로 추정되며, 경내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당간지주를 거쳐 일주문으로 가도록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간석(竿石)과 기단부는 없어졌는데, 지주 아랫부분의 치석(治石) 수법으로 보아 별도의 단을 세우지 않고 지주
하단부를 깊에 묻어 세운 것으로보인다. 지주는 좌·우기둥 모두 가로 50㎝, 세로 87㎝에 높이가 4.5 m나 되는
거대한 석재로 되어 있어 웅장한 인상을 주고 있으며, 양기둥의 간격은 79㎝이다.
지주의 상단 안쪽 면에는 장방형의 간구가 있어 당간을 고정시켰으며,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하여 다른 간공(竿孔)
을 뚫은 것은 없다. 주두(柱頭, 기둥머리)는약간의 원호(圓弧)를 이루고 있으며, 지주에는 아무런 문양도 새기지
않았다.
『범어사창건사적(梵魚寺創建事蹟)』과 <범어사사적비명(梵魚寺事蹟碑銘) >에 의하면 범어사에는 철당간
(鐵幢竿)이 있었는데, 불교의 이상세계인 33천을 표현한 33층으로 조성하여 당간의 상징성과 관련되는주목되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이와같은 33단의 철통을 연결한 철당간은 조선 후기까지 남아 당간지주에 높이 세워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치석이 고르지 않아 다소 둔중한 느낌을 주는 범어사 당간지주는 경내에 있는 삼층석탑이나 석등보다는 늦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규모가 웅장하면서도 장식이 전혀없어 검소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팔상, 독성, 나한전(捌相, 獨聖, 羅漢殿)
부산광역시 지정 유형문화개 제 63호
정면 7칸 측면 1칸인 이 건물은 1902년에 조정된 자료에 의하면 당시까지는 중앙의 천태문(天台門)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팔상전과 나한전이란 별개의 건물이 서 있다가, 1905년 11월 부터 약 1년에 걸친 공사 끝에 현재의
모습으로 새롭게 단장되었다. 따라서 팔상전과 나한전의 건축 형식은 변형되거나 고쳐지지 않고 1906년 이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1906년에 단장된 독성전 부분은 문틀을 하나의 통재를 사용해서 반 원형으로 구부려 만든 독특한 모습이고,
삼각형 벽체 부분에는 넝쿨 형상을 초각하였으며, 창호도 화문살로 아릅답게 꾸미는 등
장식 수법이 유사한 예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나다.
범어사 팔상, 독성, 나한전은 300여년 전의 건축 형식을 상당 부분 유지하고 있고,
특히 하나의 건물에 세 불전(佛殿)을 모신점과 중앙에 위치한 독성전 출입구 부분의 뛰어난 의장과 초각 수법은
그 예가 극히 드물 정도로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갖추고 있는 건축물이다.
범어사 팔상·독성·나한전(梵魚寺 八相·獨聖·羅漢殿) 부산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63호 정면 7칸, 측면 1칸 규모에 겹처마, 맞배지붕인 본 건물은 현재 범어사 대웅전 서쪽 상단에 위치하고 있는 부속 불전의 하나로, 적어도 1706년 이래로 존속했던 위치에서 변함없이 존속해 온 건물이다. 1902년에 조사된 자료에 의하면 당시까지는 중앙의 천태문(天台門)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팔상전과 나한전이란 별개의 건물이 서 있다가, 1905년 11월~1906년 11월까지 약 1년에 걸친 공사 끝에 현재의 모습으로 새롭게 단장되었다.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보여 지며, 다만, 팔상전과 나한전의 노후화 된 부재의 교체와 내부 가구(架構)가 수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모습이고, 창방 사이의 삼각형 벽체 부분에는 통판(通板)으로 넝쿨 형상을 초각하였으며, 창호도 팔상전과 나한전이 교살창인데 비해 독성전은 화문살로 아름답게 꾸미는 등 장식수법이 유사한 예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나다. 등에서 1706년 이래의 건축 형식을 상당 부분 유지하고 있고, 특히 하나의 건물에 세 불전(佛殿)을 모신 점, 중아에 위치한 독성전 개구부(開口部)의 뛰어난 의장과 초각수법은 그 예가 극히 드문 만큼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충분히 갖추고 있는 건물로 평가된다.
따라서 서측의 팔상전 부분과 동측의 나한전 부분의 건축 형식은 변형되거나 고쳐지지 않고 1906년 중건 이전의
또한 1906년에 단장된 독성전(獨聖殿) 부분은 문틀을 하나의 통재를 사용해서 반원형으로 구부려 만든 독특한
이처럼 범어사 팔상·독성·나한전은 1906년에 중건된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간살, 가구(架構)와 평면, 입면 구성
나한전
나한전 내부
팔상전
독성전
독성전 천정
관음전 觀音殿
자비스러운 관세음보살이 모셔진 전각이다. 모든 이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풀어 주시며 일체 중생을 고통에서
구제하여 주시는 어머니이시다. 그래서 대성자모(大聖慈母)라 한다. 누구든지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관세음보살은 그 음성을 듣고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자유자재로 중생을 구제하시기 때문에 관자재보살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범어사 관음전은 금정산의 정기가 모인 곳이라 누구든지 간절히 기도하면 한 가이 소원이 뜻대로 이루어진다고
소문이 나있기 때문에 일년 열두달 항상 기도하는 불자들로 법당이 가득하다. 관음전 안에 백의 관음도는 자애로운
어머니를 연상하는 관음도로서 모습이 맑고 아름닫다. 유형문화재 53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통전(圓通殿), 보타전
(普陀殿)이라고도 한다.(범어사 홈페이지 발췌)
목조관음보살좌상과 백의관음보살도를 비롯한 관음전 내 전경
범어사 관음전 백의관음보살도(梵魚寺 觀音殿 白衣觀音菩薩圖) 자연을 배경으로 암좌(巖座)에 앉아 세상 인간의 온갖 번뇌의 소리를 들어주는 자애로운 모습의 관음상은 고대부터 인기 있는 도상이었다. 본 작품은 역시 자애의 이미지를 시각화한 관음보살도이며, 관음전 목조관음 보살상의 후불화이다. 원을 그리고, 그 원 안에 도상을 배치하여, 마치 고려불화에서 둥근 달을 상징하여 관음도상을 감싼 거신광(擧身光) 처럼 표현하고 있다. 관음상은 해수면 위로 솟은 암좌에 오른손으로 바닥을 짚고, 왼손은 왼쪽 무릎 위에 걸친 편안한 정면향의 유희좌(遊戱坐) 모습으로 크게 부각되어 있다. 관음상이 입고 있는 백색 베일은 보관에서부터 양어깨를 감싸고 발 아래로 곡선을 이루며 몇 가닥으로 흘러 내리고 있으며, 영락장식과 붉은색 영락 띠가 흐름을 같이 하고 있다. 면에도 역시 인화문을 흩뜨리고 있어 이색적이다. 관음의 왼쪽 발 언저리 건너편의 나지막한 언덕에는 관음을 경 배하는 합장형의 선재동자를 배치하고, 그 반대측에는 허리를 다소 구부리면서 관음을 향하는 2명의 인물상이 있다. 위쪽으로는 청조(靑鳥) 한 마리가 날고 있다. 관음의 광배 주변에는 대나무와 구름무늬가 배경을 이루고 있다. 이 같은 도상을 갖춘 관음상은 고려 후기인 14세기와 조선 전기의 수월관음도 도상이 종합화된 것으로 조선후기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화풍상 필선의 섬세함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크기가 2m를 넘는 비교적 큰 작품으로, 비단 7폭을 연결하여 한 화폭을 이루고 있다. 사각형의 화면에 커다란
특히 관음이 앉은 바위는 금분 바탕에 녹청 안료로 인화문을 묘사하여 화려함을 더하고 있고, 백색 바탕의 바위
관음의 오른쪽 어깨 뒤편 암좌 바닥에는 금색 정병이 놓여 있고, 그 뒤편에 삼족의 청색 향로가 배치되어 있으며,
아울러 제작시기를 알 수 있고, 전체적으로 화면의 채색이 밝고 화려할 뿐 아니라 백색안료와 금분이 눈에 두드러지며
관음전 현판
비로전 (毘盧殿)과 목조비로자나삼존불좌상(木造毘盧遮那三尊佛坐像)
부산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71호
범어사는 화엄십찰의 하나로 창건되었기에 화엄종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건물이다. 비로전이 본전(本殿)
일 경우 대적광전(大蹟光殿)이라한다.
비로자나부처님은 법신불(法身佛)이다. 비로자나부처님을 청정법신(淸淨佛身)이라고 한다. 영혼이 맑고
아름다운 사람은 법신에서 법향이 난다. 비로전 법당은 조선 숙종9년(1683) 해민스님이 중창하였다. 나무로
조성한 비로자나삼존불좌상의 좌우에 있는 불상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다.(범어사 발췌)
범어사 비로전에 봉안되어 있는 본 목조비로자나삼존불좌상은 방형의 수미단 위의 연화좌에 각각 결가부좌한
자세로 앉아 있다.
중앙 본존불은 125cm, 좌우협시는 100cm 정도의 크기로, 중앙의 본존불이 협시불에 비해 규모가 크게 조성되었다.
본존불은 등을 세우고 얼굴을 앞으로 약간 숙여 아래를 굽어보고 있으며, 수인은 지권인이다. 보편적인 조선후기
불상과 마찬가지로 신체에 비해 머리가 큰 편이다. 좌우 협시보살은 본존불에 비해 규모가 작고 보살로서의 형식적인
차이가 있을 뿐 자세나 신체의 비례, 전체적인 얼굴 표현 및 기법, 인상등은 본존불과 거의 유사하다. 이 삼존불은
비교적 규모가 큰 불상으로 신체 비례는 관음전목조관음상과 차이가 있으나 안면과 머리 부분의 표현은 매우
흡사하다.
범어사에 전해오는 비로자나삼존불의 <중수도금기(重修塗金記) >에 의하면, 이 불상은 1638년 해민(海敏) 스님이
비로전을 중창할 당시에 조성되었으며, 이후 1722년의 중수·도금 작업에 관음전 불상을 제작한 진열(進悅) 외에
청우(淸雨), 청휘(淸徽), 관성(貫性), 옥홀(玉 ) 등이 관여하였다고 한다. <범어사지(梵魚寺誌)>, 범어사
관음전대좌묵서명 및 <중수도금기> 등에 기록된 비로전 불상의 중수와 조각승에 대한 기록이 동일한 것을 보면
<중수도금기>의 내용은 확실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본 작품은 관음전 목조불상과 함께 조각승 진열의 작품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보존상태가 양호할
뿐 아니라 작풍도 뛰어난 문화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