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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진실과 반전의 역사 – 서울대 권오영 교수
한민족이라면 한민족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나도 그렇다. 그러나 한민족의 뿌리가 중앙아시아 ‘파미르고원’에서 시작되었다거나 중국 북쪽, 몽골 쪽에서 발견된 ‘황산문화’가 한민족 문화의 시원이라는 주장에는 회의가 없지 않다. 증거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서 살았던 족속들이 한반도로 내려왔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또 일본이 자랑하는 《고사기》와 《일본서기》내용을 근거로 일본이 한반도의 남쪽 ‘임나 가야’를 지배했다는 내용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 삼국시대의 역사는 그래도 조금 믿음이 간다. 우리 선조들에 의해서 쓰여진 역사기도 하고, 현실적으로 그것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의 경우, 삼국시대로부터 1,000년도 더 지난 뒤에 써졌고, 필사본 외 원본이 남아 있지 않으며, 사대주의자인 김부식이 역사를 왜곡했다고도 하고 《삼국유사》의 경우는 저자 일련 스님이 아무래도 불교에 치우쳐 있다고 보지 않을 수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기는 쉽지 않은 난관에 부딪힌다는 데 역사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런 문제에 대해 이 책의 저자인 권오영 교수는 1970년 이전까지 1년에 고작 10여 건 유물발굴이 이루어지던 것에 비하여 현재는 1년에 1,000여 건이나 우리 손으로 유물발굴이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그 미비점을 보완하고 있다고 한다. 저자는 교수인데 더해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로 발굴 현장을 지휘하기도 하고, 현장을 누비면서 한국사의 방향을 찾고, 몽골, 러시아, 베트남, 카자흐스탄 등 여러 나라 유물발굴과 조사에도 참여하고 있다고 하니, 저자가 왜 이 책에서 그 유물발굴을 기초한 삼국의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한 것인지 알 것도 같다.
유물발굴을 통해 극적으로 역사적 사실이 바뀐 사례들의 예를 들면서 창원 ‘다호리’의 유적발굴은 소개하고 있다. 1988년 초겨울 추운 날씨에 도굴꾼들이 자백한 논바닥을 파헤치자 통나무 목관이 나왔고, 20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보존상태가 좋았다. 공기와 습기가 조성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뚜껑은 도굴꾼들의 전기톱에 잘려 나갔고 내부는 깨끗하게 비어있었다. 크레인으로 목관을 들어내자 목관 바닥에서 기적처럼 보물이 쏟아졌는데, 도굴꾼들이 가져가지 못한 것으로 중국에서 만든 청동거울, 일본에서 만든 청동 창, 현지에서 만든 각종 칠기류 등 중요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짐승의 털로 만든 붓이었는데, 붓대에 구멍을 내어 사용하지 않을 때는 걸어 놓도록 한 것이었다. 붓은 문자를 사용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해상교통의 중심지이던 이곳 창원에서 물건의 입출고를 기록하기 위해 붓을 사용했다는 것을 말해 주는 유물이었다. 함께 출토된 작은 손칼은 나뭇조각에 적은 내용을 지우거나 깎아낼 때 사용했을 것이고, 크고 작은 청동 고리들은 무개를 다는 저울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기원전 1세기 무렵 한반도 남해안에서 원거리 국제교역을 관장한 세력이 있었고, 엄청난 부를 독점했던 것이다.
다호리 현장을 찾아가 보기도 하고, 거기서 출토된 것을 보존하고 있는 김해박물관도 여러 번 갔었지만, 슬쩍 보기만 한 것을 후회하면서 다시 가게 되면 좀 더 자세히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외에도 경주 조양동, 천안 청당동 발굴유적은 삼국시대 초기사를 밝히는데 아주 중요한 유적들이다. 당연히 교과서에서 다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합천 쌍책면 옥전리의 다라국 가야유적은 수수께끼 같은 가야사를 밝히는 중요한 유적이다. 기원후 5∼6세기 유적으로 합천을 무대로 다라국의 성장과 영화를 짐작해 볼 수 있게 한다. 1980∼1990년까지 경상대에 의해 발굴된 옥전 고분군에서는 2020년 보물로 지정된 고리자루칼 4점, 금귀걸이 3점 등 다수의 장신구들이 출토되었는데, 수많은 무덤군에는 왕릉급과 신분이 낮은 것도 있었다. 이것은 다라국의 신분, 지배구조를 말해주는 것으로, 삼국시대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경주에서 보듯 초대형 무덤들은 5세기에 성행하다가 6세기에 이르면 점점 축소되고 유물과 부장품의 양도 줄어든다. ‘율령’에 의한 지배가 본격화되면서 나타난 변화인 것이다. 옥전고분은 아직 율령의 지배가 이루어지기 전의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분에서 출토된 무기와 마구는 당시의 군사 조직과 전쟁 방식을 대변하는데, 복천동 고분군에서 처음 발견된 쇠로 만든 말투구는 4세기 중엽 고구려 고분 안악 3호분의 벽화를 떠올리게 한다. 기수뿐 아니라, 말까지 온통 갑옷과 무구로 무장했다는 것은 중장기병을 표현한 것으로, 현대전의 탱크부대와 다를 바가 없다. 복천동 말투구는 고구려 중장기병 전술이 가야에까지 퍼졌음을 보여준다. 이런 유물을 부장한 무덤은 당시에 가장 신분이 높았던 자만이 묻힐 수 있었고, 이것은 위계와 신분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런 마구를 많이 썼다는 것은 고대에 전쟁이 다반사였다는 것을 짐작하게 하는데, 전쟁은 누구와 왜, 어떻게 싸웠는지에 대한 설명이 박물관에는 거의 없어서 궁금함을 자아낸다. 일본의 경우는 이웃 족속과 싸운 현장을 생생히 묘사해 두고 있을뿐 아니라 머리와 등에 화살을 맞고 쓰러진 마네킹 모형까지 전시해 두고 있어서 아이들의 관람을 제한하기도 한다는 것과 우리 현실이 조금 다른 것 같다.
발굴을 통해서 역사를 되찾은 사례는 하나둘이 아니지만, 대표적인 것이 ‘가야사’다. 《삼국유사》에 가야 기원에 대해 두어줄 쓰여진 것이 전부인 가야사는 실제로는 여러 곳에서 여러 나라가 존재했음에도 일연 스님은 ‘6가야’라고만 해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우리는 안다. ‘비화가야와 다라가야’에서 보는 창녕과 합천의 가야유적은 물론 남원의 운봉유적, 장수 지방 유적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일제가 그토록 끈질기게 주장한 ‘임나일본부설’에서 임나는 가야를 지칭하는 여러 이름 중 하나지만, 일본 야마토 왕권이 3세기 혹은 4세기 기야지역에 통치기구를 두고, 백제와 신라를 간접 통치했다는 것으로 조금 당황스럽다.
왜가 북쪽의 강국이던 고구려와 여러 차례 접전했지만, 562년 대가야가 멸망함으로써 임나일본부설은 끝이 났다고 하는데 야마토 정권은 한반도에 역사적 연고가 있기 때문에 663년 백제 부흥운동의 일환인 백강전투에 참전해 신라군과 싸웠고, 임진왜란도, 청일전쟁도 이런 맥락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또 근대 한반도를 식민통치한 것 역시 역사의 ‘필연’이라고 한다. 《일본서기》의 황당한 왜곡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더해 1949년 ‘스에마츠 야스카즈(末松保和)’라는 학자는 『임나흥망사』라는 책을 통해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모두 임나일본부가 통치했다고 그 구역까지 정해서 주장하기도 했고, 심지어 1800여자가 빼곡이 새겨진 광개토태왕비를 왜곡해 ‘왜가 신묘년(391)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 가야, 신라를 공격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기도 하고,또 일본 나라현 이소노카미(石上)신궁에 보관된 칠지도에 새겨진 명문이 ‘백제 왕세자가 왜왕에게 바친 물건’으로 탈바꿈시키기도 한다.
우리로서는 식민사학의 핵심인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할 자료와 근거가 필요했다. 하지만 《삼국사기》, 《삼국유사》어디에도 그런 내용은 없다. 남은 것은 단지 고분발굴 뿐이다. 3∼5세기에 만든 김해 대성동고분에서 흔적이 나왔다. 이미 도굴당했음에도 거기에서는 엄청난 부장품이 나왔다. 대표적인 것으로 ‘철제 비늘 갑옷’이 었다. 이 무렵 일본에서는 아직 쇠판으로 만든 갑옷이 사용되었으나, 가야는 이미 비늘 갑옷을 사용한 것이다. 이외에도 재갈, 발걸이, 방울 등 마구가 쏟아져 나왔는데, 이런 갑옷, 마구, 무기 제조술에서 우열의 차이를 감안하면, 왜가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는 가야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일제강점기 그들은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를 찾기 위해 가야의 무덤들을 수없이 파헤쳤으나, 관련된 유물을 하나도 찾지 못했다. 창녕 교동 고분군에서도 많은 양의 유물이 나왔는데 이를 열차 화차 두칸, 마차 7대로 서울로 옮겨 조사했으나, 그들이 원했던 것은 얻지 못했다. 일본 장군이 한반도에서 활동했던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를 찾지는 못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자 그들은 유물을 남겨둔 채 돌아갔다. 유물은 지금도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보관 중이다. 지금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일본인 학자는 거의 없다.
문헌자료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가야사회의 발전 수준과 역동성은 가야유적을 통해 확인되었다. 이에 가야사를 포함하여 ‘4국시대’라고 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된다. 김해의 금관(金官)가야는 532년, 대가야는 562년에 멸망했고, 백제는 부흥운동까지 포함해 663년, 고구려는 668년에 멸망했다. 가야는 백제, 고구려와도 상당 기간 공존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로는 가야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익산의 미륵사지는 백제 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미륵사를 창건한 무왕은 신라의 선화공주와 짝을 이루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향가인 〈서동요〉로 너무나 유명하다. 그런데 몇 년 전 미륵사지 서탑을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 사리봉안기가 발견되면서 《삼국유사》이래 800년간 통설이었던 것이 무너졌다. ‘사택씨’라는 무왕의 왕후가 등장함으로써 결국 무왕의 왕비가 여러 명이 아닌가 하는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또한 익산 쌍릉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밝히려는 조사가 이어지면서, 7세기 전반 백제사를 새로 써야 할 정도로 통설이 뒤집히고 있다. 이처럼 새롭게 출토되는 자료에 의해 기존의 정설은 붕괴되고 그에 따른 연구과제는 지속적으로 창출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의해 패퇴해 웅진으로 천도하였는데, 그것은 장수왕이 승려 도림을 백제에 보내 바둑을 좋아한 개로왕의 환심을 사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키게 해 결국 국고가 텅 비어 위기를 맞았기 때문이라고 썼다. 개로왕의 토목공사를 《삼국사기》에는 증토축성(蒸土築城)이라고 했는데, 한때 이 뜻을 잘 몰랐다. 그러다 중국 섬서성 유림지역의 통만성을 기록한 《진서(晉書)》에서 의문이 풀렸다. 흉노 출신의 ‘혁련발발’이 ‘만 가지 오랑캐를 통일했다’는 통만성을 쌓을 때 증토축성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황토와 석회를 물로 섞으면 화학반응이 일어나 수증기가 발생하는데, 이를 ‘흙을 찌다’는 뜻으로 증토라고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백제도 토목건축 공사에 석회를 사용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경산 임당동 고분군은 진한에서 신라에 걸친 장기간에 만들어진 무덤들로 발굴 결과 유래가 없을 정도로 많은 인골이 출토되었다. 인골 중에는 편두를 한 것이 적지 않았는데, 근세까지 중국인들이 전족을 하듯이 우리 고대인들은 편두를 한 것이다. 김해 예안리 고분에서도 편두 여인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김해박물관 ‘가야학 아카데미’를 통해 이미 알았지만, 편두를 왜 했을까? 고깔 모양의 관모를 폼나게 쓰기 위해서? 아니면 고귀한 신분을 과시하기 위해서? 신분의 차이를 표현하기 위해서? 예안리 고분 편두로 보아 굳이 신분이 높은 사람이라고 편두를 한 것이 아님이 밝혀졌다. 신분과시는 아닌 것이다. 한국인뿐 아니라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태평양, 중남미 등에서도 편두를 했던 것을 연구해 고고학자, 인류학자, 민속학자, 법의학자 등 여러 분야에서의 협업이 없이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라는 것이 밝혀졌다.
다시 익산 쌍릉과 무왕의 흔적을 찾아가 보자. 2009년 미륵사 서탑을 해체 복원함으로써 나온 ‘사리봉영기’에는 서동왕자와 선화공주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완전히 뒤업었다.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이 깨끗한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고 기해년(639) 정월 29일 사리를 받들어 모셨다”는 기록이 나온 것이다. 따라서 익산 쌍릉의 피장자가 누군지 눈길이 쏠렸다. 미륵사 남쪽 얕은 구릉 위에 있는 쌍릉을 큰 무덤을 대왕묘, 작은 무덤을 소왕묘라 불러왔으며, 전자는 무왕, 후자는 선화공주 묘라고 여겨왔으나 봉영기 발굴로 대왕묘는 무왕, 소왕묘가 선화공주가 아닌 사택왕후로 여기게 된 것이다.
이미 도굴된 뒤 일제의 의해 발굴되기도 한 이 쌍릉을 2017년 부여문화재연구소와 원광대학교가 공동으로 재조사했다. 그런데 일제가 보고 하지 않은 나무상자가 나와 조사단은 깜짝 놀랐다. 상자를 열자 인골이 소북이 담겨 있었다. 가톨릭 의대팀은 2018년 7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인골은 남자의 것으로,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결과 인골은 수명을 다한 시기가 620∼659년으로 측정되었다. 신장 161∼170㎝, 60대 이상 고령자로 젊어서 낙상해 골반에 상처가 남아 있고, '광범위 특발성 뼈 과다증'이라는 희소한 질병을 않았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말년에는 누워지냈을 가능성이 점쳐졌다. 7세기 전반 고령으로 생을 마감한 왕은 무왕뿐인데다 대왕묘의 규모와 석재 가공 수준 등으로 보아, 난상토론을 거친 뒤 무왕의 것으로 결론내렸다. 사택왕후가 사리를 봉안한 것이 639년, 무왕의 사망시점이 641년이므로, 왕후가 사리를 봉안할 때 왕은 이미 앓아누워 있었고 곧 죽음을 맞았음을 추리할 수 있다.
삼국시대 왕릉 중에 무덤의 주인이 정확히 밝혀진 것은 백제 무령왕릉 하나뿐이다. 경주의 황남대총은 내물왕 아니면 실성왕, 혹은 눌지왕으로 점쳐지고 있고, 집안의 태왕릉은 광개토태왕의 무덤이냐, 아니냐는 논쟁이 계속 되고 있다. 도굴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되었거나, ‘태왕릉’이란 글자가 새겨진 전돌이 발견되었음에도 주인공을 확정하지 못하는데 비하여 유골 하나로 주인공을 밝힌 것은 무왕의 경우가 처음이다.
인골 하나로 이런 성과를 거둘 수도 있지만, 단군릉의 경우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오류로 해석한 경우다. 1994년 1994개의 화강암으로 쌓아 만든 단군릉에는 곰과 호랑이 석상을 세워서 무덤을 지키도록 하고 있고, 집안의 장군총을 모델로 삼아 북한이 임의로 축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실제로 단군릉으로 전해진 무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전형적인 고구려 후기 돌방무덤으로 여기서는 3개의 금동관이 나오기도 했는데, 이를 북한 측이 오래전부터 단군릉으로 불러왔다는 사실을 들어, 출토된 인골을 단군과 부인이라 해석했고, 그것을 옮겨 단군릉으로 만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대동강 유역 문명이 세계 4대 문명보다 더 오래된 인류의 기원지라고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역사는 당대의 사람들이 만드는 건지, 후대 사람들이 만드는 건지 생각해 보게 한다.
제법 오래전에 고향 창녕 송현동 고분에서 발굴되어 복원된 송현이를 보고, 눈물이 날려고 한 적이 있지만.., 송현이는 18세쯤으로 그녀는 충치를 앓았고, 이모와 4촌 오빠 등과 순장되었다는 것이다. 지산동 고분에서는 많게는 30명까지 순장한 사례가 있고, 순장은 가슴 아픈 스토리가 함께 묻혀 있다. 경산 임당동 고분군에서 발견된 여러 기의 순장 무덤 중에 금동관을 쓴 어린아이와 순장 당한 나이 많은 여성은 어머니가 아닌 어릴 때부터 돌보던 유모로 추정되었다. 저승에서도 어린 왕족을 잘 보살펴 달라는 의미가 담겼을 것이다. 임당동 무덤의 DNA 분석결과 한 무덤에서 어린 딸과 아버지가 함께 순장 당한 경우도 있었다. 경주 국립박물관 부지에서는 우물 안에 아이 뼈와 소갈비 뼈가 함께 발견되기도 했는데,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어린아이가 죽자 동물을 함께 희생시켰다는 것이거나 추락한 어린 영혼을 위로 하기 위해 소갈비를 제물로 바쳤다는 것일 것이다. 소수의 지배집단이 사회적 특권과 부를 독점하고 대다수 백성은 고통 속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친, 순장된 인골들은 고대 사회의 내면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내물왕(402년 사망), 실성왕(417), 눌지왕(458 )중 누구 무덤인지 아직 의견이 분분한 황남대총은 전체 길이가 120m로, 규모면에서 삼국시대 최고지만, 부장품의 양과 질 역시 단연 최고 수준이다. 쌍분처럼 생긴 무덤의 남분은 왕이, 북분은 왕비가 묻혔고, 순장의 흔적도 확인된다. 남분의 주인공은 노년의 남자인데, 여기서 젊은 여자의 인골도 발견된 것이다. 502년 지증왕이 순장을 금했고, 이전까지 왕이 죽으면 5명까지 순장을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황남대총에서 5명의 순장자가 나온 것은 아니지만, 이런 대형 무덤을 만드는 데는 노동력과 부장품으로 여러 벌의 금동관과 목걸이, 허리띠, 팔찌, 반지, 신발 등과 토기, 철기의 양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은 현대의 명품이 아무리 고가라고 해도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경주에 가면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 선조들은 어떻게 저렇게 왕의 장례에 막대한 돈을 들였을까? 하고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이승의 안락함이 저승까지 이어진다는 계세(繼世)사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백성의 생활을 궁핍하게 하고, 국고를 축내는 일이었다. 고령 지산동 고분군의 경우는 넓지 않은 분지의 자원을 쥐어 짜내 만든 허상인지도 모른다. 5∼6세기에 걸쳐 계세사상이 널리 퍼지면서 殉葬, 厚葬을 특징으로 대형 무덤을 경쟁적으로 축조했으나, 한정된 자원은 점점 고갈되어 갔다. 502년 지증왕이 율령으로 순장을 폐지하고, 후장 풍습도 사라져갔다. 이후 신라는 현실 세계의 삶에 무게를 두면서, 산성을 축조하고 군사력을 키웠으나, 가야는 여전히 장례 풍습을 버리지 못했다. 신라가 흥하고 가야가 망한 이유를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순장을 가장 많이 한 나라는 신라와 가야였다. 고구려는 순장 대신에 주인공을 위해 봉사할 인물을 벽화에 그렸다. 고구려와 백제가 순장 풍습을 비교적 빨리 없앴던 이유가 불교를 빨리 수입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
중국 殷夏시대에 1,000명도 더 순장하던 것이 진나라로 오면서 사라진 것은 유교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진시황릉 병마용 갱에서 보듯이 사람을 죽이는 희생은 노동력을 마비시키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무덤을 축조하던 에너지를 종교시설 건축으로 옮겼는데, 고구려 광개토태왕 시기에 이미 평양에는 9개의 대사찰이 건설되었고, 백제 위덕왕은 567년에 부왕인 성왕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능사〉를 축조하고, 10년 후에는 아들이 죽자 〈왕흥사〉를 지었다. 금당에는 금칠을 한 부처를, 탑에는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셨으며, 사리탑을 봉안하는 것이 부처님을 모시는 것과 같게 되면서 유리병, 금그릇, 은그릇, 황동단지 등 최고품을 사리함으로 사용했다. 경주에는 황룡사, 분향사 등 수많은 사찰이 세워져 불국토를 구현하고자 했으며, 초대형 무덤을 축조하던 토목 기술, 건축 기술과 화려한 부장품을 만들던 금속 기술은 탑과 불상, 각종 공양구를 만드는 기술로 변했다. 사회가 바뀐 것이다.
경주의 경우 시내 중심에 수백 기의 고분이 널려 있는데, 신라하대로 오면서 이들 고분이 새로운 도시를 만드는 데 방해가 되자 기존의 왕릉은 그대로 둔 채, 이후 왕릉을 주변 산기슭에 자리 잡도록 했다. 6세기 이후에 만든 신라고분은 시내에서 발견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이와는 달리 가야 고분은 애초부터 구릉이나 야산 경사면에 만들어졌는데, 이는 김해평야가 바닷물이 차 있어서 사람이 생활할 수 없었던데도 이유가 있고, 대성동 고분과 왕성인 봉황동유적 모두 구릉 위에 있다. 대가야의 무덤들은 왜 산꼭대기에 지었을까? 왕릉과 귀족무덤을 능선 위에 배치함으로써 우월한 지위를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집안시의 고구려 고분도 압록강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지점에 자리하고 있고, 무덤들은 정면을 바라보는 방위에 따른 것이 아니라, 강의 흐름을 따라 짓도록 한 것 또한 이런 맥락이다.
고대국가의 수도였던 오녀산성, 집안의 국내성과 평양성, 하남위례성으로 판명된 서울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무령왕릉의 공주와 부여, 익산, 경주 등은 실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지만, 박물관이라는 말이 실감 나지도록 유적과 유물이 많다. 익산 왕궁리 유적은 30년간 발굴 끝에 전모가 드러났다. 서편에 위치한 미륵사지도 20년 동안 서탑을 해체 복원해 2019년 새롭게 선을 보였다. 최소 10년, 길게는 40년간 이어져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다고 조사와 연구가 끝나는 것도 아니다. 공주 공산성, 송산리 고분군, 부여 관북리 부소산성, 능산리 고분군, 익산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 모두 후속 조사를 이어가며 새로운 정보를 찾고 있는 중이다.
월성 또는 반월성이라고 하는 곳은 지금 엄청난 인력과 재원을 투입해 조사하고 있고, 청사진도 공개하고 있다. 본격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성 외곽을 감싸고 있는 해자는 저습한 환경이 유지돼 유기질 유물이 발견되는데, 여기서 터번을 쓰고 몸에는 카프탄 옷을 입은 소그드인 모양토제 인형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마치 원성왕릉의 아랍인을 연상케 한다. 또 벼,조,피,콩,박 등의 식물 씨앗도 대거 발굴되는데 특히 주목받는 것은 가시연꽃의 씨앗이다. 환경부 지정 멸종 위기 식물 2급인 이것은 아무 곳에서나 서식하는 식물이 아니다. 7∼8월에 주로 꽃을 피우고, 키가 2m나 되는 데다 잎 지름도 큰 것은 2m나 된다. 가시연꽃이 해자를 채운 수면을 상상하면 그 아름다운 풍경이 그려진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으로 대변되는 하남위례성을 보면, 475년 장수왕의 침략에 맞서 싸웠던 백제의 개로왕은 드디어 고구려군에게 생포되었다. 그는 강 건너 아차산으로 끌려가 죽임을 당한다. 이로써 한성백제는 망하고 만다. 이때의 수도가 위례성 또는 한성으로 기록되었는데, 이 위례성의 위치가 명확하지 않아 이후 1,000년 동안 양주, 천안, 광주, 하남 등으로 비견했지만 자료가 부족했다. 그곳을 찾으려고 김부식, 일연, 정약용 등 무수한 역사인들이 찾아 헤맸지만 실패했던 위례성을 한강 남쪽으로 지정할 수 있었던 것은 발굴조사 덕분이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중요 유물이 여기서 출토되었지만, 이것을 백제 왕성으로 보는 연구자는 드물었으며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사성莎城이라는 주장에 힘이 실려있었다. 그러나 1980년 몽촌토성과 이성산성을 발굴조사하면서 이곳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전체 길이 3.5㎞, 기저부가 40m 이상, 높이 12m의 구조물을 축조하려면 동원인력이 200만 명을 넘긴다. 왕성이 아니고는 이처럼 큰 규모의 성을 쌓을 이유가 없다. 축조 시기가 3∼4세기로 추정되고, 풍납토성에서 남쪽으로 8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몽촌토성은 일종의 산성처럼 자연 구릉을 이용한 성이다. 풍납토성이 평지의 넓은 면적에 많은 주민을 안고 있다면, 몽촌토성은 방어력이 강하도록 만들어졌다. 이 2개의 성이 짝을 이루면서 위례성 또는 한성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또 왕릉이 모여 있는 석촌동 고분군에 대한 발굴 조사도 진행 중이므로 이제 백제사의 비밀은 속속 밝혀질 것이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바야흐로 국가와 사회 모두 글로벌화, 국제화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역사는 중국과 일본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소그드인 토용이 나오고, 아랍인 석상이 원성왕릉 앞에 있고, 로만그라스가 출토되고, 인도 아유타국 허황옥이 김수로왕과 짝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음에도 이를 믿지 않는 것인지? 언제까지나 우물 안 개구리로 살 수는 없을 터인데 말이다.
카자흐스탄이라는 나라는 나도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 나라는 가난하고 국제적 위상도 별로인 것으로 안다. 한반도 12배의 영토에다 풍부한 자원을 가진 나라다. 동부는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기스탄과 접하고 있고, 중국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와도 맞닿아 있다. 2018년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은 〈황금인간전〉이라는 이름으로 기원전 6세기 사카족 왕자의 무덤에서 출토된 부장품 전시회를 가졌는데, 무덤의 구조와 부장품이 5세기 신라왕릉인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것도 아주 유사했다. 두 유적 사이에는 천 년이란 시차가 있는데도 말이다. 이 나라 사카와 오손의 문화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3∼5세기 훈족이 이은 무덤에서는 황금마스크가 발견되었는데, 3개의 나뭇가지가 신라의 금관과 너무 흡사했다. 새 날개 모양의 관장식이 판박이 같았다. 또 신라 계림에서 발견된 보검은 카자흐스탄 보에보에서 발견된 것과 쌍둥이처럼 닮았다.
징기즈칸의 후예인 티무르가 1405년에 세운 사마르칸트는 부하라 칸국이라는 독립국의 수도로 원래 소그드족이 살았던 도시국가다. 소그드족은 아이가 태어나면 입에는 꿀을, 손에는 아교를 발랐다고 하는데, 꿀처럼 달콤한 말로 상대방을 현혹하고 한 번 손에 들어온 돈은 절대 놓지 말라는 의미라고 한다. 그들의 이 가르침은 아이들이 커서 천하제일의 장사꾼이 되게 했다. 수·당을 거쳐 신라와 일본에까지 진출해 장사를 벌였던 이들과 물건값을 흥정하다가는 손해 보기 일쑤라고 한다. 7세기 소그드의 왕, 즉 서돌궐의 우두머리 벽화가 사마르칸트에서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코끼리를 타고 온 인도인, 곤돌라에 앉아 있는 중국의 귀부인과 출신을 알 수 없는 동양인 2명이 그려져 있는데, 키가 약간 작은 이들의 옆구리에 찬 칼이 눈에 익다. 고구려인인 것이다. 당시는 연개소문이 집권하던 시기로 점증하는 당나라의 침략을 타개하기 위해 고구려가 소그드족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외교사절을 파견한 것으로 보인다. 이 벽화가 우리 교과서에 소개되고 있는 것은 잘한 일이다 싶다.
며칠 전인 지난달 29일 나는 불국사를 답사하고 구정동까지 걸어 나와 방형분 무덤을 다시 찾았다. 전실에는 들어가 보지 않았으나, 무덤 밖은 둘러보았는데 거기에는 영락없이 12지상이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여기는 12지상 만 있는 것이 아니고 무덤 좌우에 2개의 호안상이 있었다는 것을 알지는 못했고, 책을 통해서 알았다. 다음에는 더 자세히 보아야 할까 보다.
(그런데 호안석 2개 중 하나는 일찍이 없어졌고, 남은 하나마저도 경주 박물관에 옮겨졌다고)
황남대총에서는 총 11점의 유리그릇이 나왔는데, 그중 백미는 봉수병(국보 193호)이다. 주둥이를 봉황의 머리 모양으로 만든 것으로 이런 형태의 그릇은 그리스에서 오이노코에라 부르던 것을 모델로 한다. 포도주를 담았던 그것은 그리스에서 수천 ㎞ 떨어진 시리아나 이란에서 주로 출토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왜 신라 땅에서 출토되었을까? 천마총에서 나온 페르시안글라스는 페르시아에서 사용되던 그릇으로 그것은 뱃길을 통해 전해진 경우도 있지만, 대개 초원길과 사막을 통해 들어온 것이다. 로만글라스와 페르시안글라스는 신라를 통해 일본으로도 전해졌다.
중국의 광동, 광서지역은 베트남 북부와 연결된다. 《전국지》의 남월 지역으로 중국에 점차 밀려나 중국 지역을 모두 잃었다. 한민족이 중국 동북 지역을 잃고 한반도로 밀려난 것과 흡사하다. 베트남 사람들은 자존심이 강하고, 불교를 수용했으며, 쌀을 주식으로 하면서 한자 문화권에 속하는 우리가 거의 같은 민족성을 지닌다. 비교자료다. 바다로 이어지는 원거리 교역의 실상을 밝히기 위해, 2018년 고려대 연구팀은 베트남 하노이 인근의 루이라우 유적발굴을 공동조사한 적이 있다. 한4군처럼 무제가 베트남에 설치한 7군에 해당하는 곳이다. 조사가 본격화되면서 중국-베트남-한반도-일본으로 이어지는 해상 교역망이 복원될지 기대가 된다.
양제의 아들로 그림의 천재로 불리는 소역(훗날 원제)이 형주자사일 때 그린 그림이 『양직공도』다. 양나라에 파견된 각국의 사절단이 있고, 그 나라에 대해 설명되어 있다. 백제와 고구려, 신라, 왜, 페르시아 등의 사신이 등장한다. 백제와 양나라의 관계는 친밀해서 무령왕릉이 양나라의 형식이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이 그림에 지금의 말레이반도에 사는 랑카수카인도 그려져 있는데, 백제 사신과 랑카수카인은 서로 알고 있었을까? 가설을 가지고 필자가 2016년 무작정 말레이반도를 찾아갔다고 한다. 거기서 “우리는 한국에서 왔으며 이곳에서 생산한 유리구슬이 한반도로 유통되었다는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서 왔다”고 하자, 말레이시아 공과대학 고고학자, 그중에 유리구슬을 전공한다는 교수가 필자 일행을 안내했다. 그들은 숭아이 바투 유적을 같이 조사하자고 했지만, 귀국한 뒤 한국에서는 일행의 공동조사에 긍정적이지 않았다. 이에 저자는 말한다. ‘앞으로 백제와 랑카수카가 교섭했음을 증명하는 결정적 자료가 나오기를 바란다’라고.
역사는 주관적이어야 할까? 객관적이어야 할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발해는 고구려 후손과 말갈족이 세웠다. 말갈족의 비율이 높다고 말갈족의 나라라고 하면 받아들이겠는가? 지배층이 고구려 후손이었으니 고구려 계승국이라고 하면 문제가 없는가? 남북국시대라는 용어는 단순히 종족의 비율을 가지고 말하는 개념이 아니다. 백제와 왜의 관계도 그렇다. 가야, 신라계도 있지만, 백제인들이 일본에 많이 이주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일본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무주공산에 백제인이 진출한 것이 아니었다. 8세기 일본 왕실에는 백제 여인이 많았다. 하지만 이를 침소봉대해 ‘일본 왕실은 모두 백제계였다’고 주장한다면, 고려 말 ‘忠’자 붙은 왕은 모두 어머니 혹은 부인이 몽골의 공주였으니, 몽골이 고려는 자기들의 역사라고 한다면 받아들이겠는가? 일선동조론도 문제가 있다. 우리는 ‘일본은 백제의 속국’이라고 하고 싶지만, 오히려 그것이 왜 왕실은 가야지역에 연고권을 갖고 있다는 명분을 주게 되고, 임나일본부설이 재등장할지 모른다. 역사는 양날의 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