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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해문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홍순옥
2021신춘문예당선시모음 2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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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순하지 않은 마음
강우근
별일 아니야, 라고 말해도 그건 보이지 않는 거리의
조약돌처럼 우리를 넘어뜨릴 수 있고
작은 감기야, 라고 말해도 창백한 얼굴은 일회용 마스크처럼
눈앞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어느 날 아침에 눈병에 걸렸고, 볼에 홍조를 띤
사람이 되었다가 대부분의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다.
병은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밥을 먹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걸어오는 우리처럼 살아가다가 죽고 만다.
말끔한 아침은 누군가의 소독된 병실처럼 오고 있다.
저녁 해가 기울 때 테이블과 의자를 내놓고 감자튀김을 먹는
사람들은 축구 경기를 보며 말한다. “정말 끝내주는 경기였어.”
나는 주저앉은 채로 숨을 고르는 상대편을 생각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 끝나지 않아서
밤의 비행기는 푸른 바다에서 해수면 위로 몸을 뒤집는
돌고래처럼 우리에게 보인다.
매일 다른 색의 빛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 아래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모이고 흩어지고 있다.
버스에서 승객들은 함께 손잡이를 잡으면서 덜컹거리고,
승용차를 모는 운전자는 차창에 빗방울이 점점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편의점에서 검은 봉투를 쥔 손님들이 줄지어 나오지.
돌아보면 옆의 사람이 없는, 돌아보면 옆의 사람이 생겨나는
어느새 나는 10년 후에 상상한 하늘 아래를 지나고 있었다.
쥐었다가 펴는 손에 빛은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었다.
보고 있지 않아도 그랬다.
내가 지나온 모든 것이 아직 살아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202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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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설원雪原
김겸
끝없이 펼쳐진 눈밭이다
바람이 마른 모래처럼 일어난 눈가루를 휘몰아간다
저 막막한 눈밭에 단지斷指한 손가락으로
정방형의 칸을 내어 너를 쓰고 싶다
그 설원의 원고지에 무제無題라고 할
너의 순일한 마음에 대해 쓸까
영어囹圄에 갇힌 너의 죄 없는 욕망에 대해 쓸까
새하얀 너를 앞에 두고 토해냈던
내 먹물 같은 설움에 대해 쓸까
저 막막한 눈밭에 단지한 손가락으로
정방형의 칸을 내어 너를 쓰고 싶다
그 설원의 원고지에 깨어나지 못한 너의
침묵에 대해 쓸까
이 쇠잔한 생에 표착한 너의 불운에 대해 쓸까
외로워, 외로워 말하는 가오나시顔無し 같이 끼니마다
밥을 보채는 너의 허기진 영혼에 대해 쓸까
정해진 과오를 범하고 정해진 책망을 듣는
너의 차갑 게 굳어진 습習에 대해 쓸까
저 막막한 눈밭에 단지한 손가락으로
정방형의 칸을 내어 너를 쓰고 싶다
하지만 내 가난한 가슴과 옹색한 문장으로는
너를 쓸 수 없다
너라는 이름의 눈밭은 오늘도 그만큼의
햇빛, 그만큼의 별빛을 받아 홀로 아득하다
너의 눈밭에 그물 같은 붉은 칸을 내려 한
미욱한 나를 연해 뉘우친다
아무도 미워해 본 적 없는
아무도 시기해 본 적 없는
너라는 이름의 눈밭
저 깊고 아득한 너의 설원
출처 : 2021년 《강원일보》신촌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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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최초의 충돌
김민식
나는 화면 너머의 테니스 경기를 본다
테니스 라켓이 공을 치는 순간
무수한 공중이 한꺼번에 태어난다
고래의 힘줄
산양의 창자
얇게 저며진 살점으로 직공은
라켓을 짠다
종선과 횡선이 지나간 사이에
태어나는 눈
공중에 이름을 붙이는 최초의 노동이었다
천사를 체로 걸러낼 수 있다고 믿은 프랑스인이 있었다
축과 축의 직교 속에서 성령은 좌표를 얻었다
의심 속에서
의심도 없이
체의 촘촘한 눈을 세는 귀신의 눈은 비어 있다
눈알만 파먹힌 생선들이
부둣가에 쌓여 있다
백경白鯨의 투명한 수정체
멸종된 거대 수각류의 담석
전체를 상상하면 그것들은 차라리 허공이었다
한국의 산에는 호랑이 모양 구멍이 반드시 하나씩 있으며
돌탑 위에 둥근 돌을 하나 올려도
산이 무거워지는 것은 아니었고
무수한 왕의 안구가 뽑혀나가도
지구가 가벼워지지는 않았다
믿음 속에서
믿음도 없이
삶의 질량을 변화시킬 혁명이 필요했다
어느 비 오는 날이었다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
이렇게 말하면 믿는 사람이 없었고
하늘에 빛나는 돌이 불과 물과 함께 떨어졌다
이렇게 말하면 믿음과 의심이 동시에 생겼다
외계에서 날아온 돌은 지구를 확실히 무겁게 만든다
그것은 종종 과학의 영역이었다
“마음 속에 천 개의 방이 있고,
그 안에서 천 개의 멜로디가 흘러나옵니다.
나는 어떤 계열의 천사인 것만 같습니다”
처음으로 운석을 발견한 아이가 남긴 말이었다
그가 발견한 검은 돌은
검은 신전의 기둥이 되었다
운석이 떨어진 자리엔, 빛과 유리와 불과 물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하는데요
정말 그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자의 이글거리는 눈빛과
다만 우주의 조각을 만져보고자 하는 순례자들의
계획 속에서
계획도 없이
푸른 언덕에 모여 유성우를 구경하는 사람들
얼굴들이 깊게 파인 구멍 같다
나뭇가지에 걸린 셔틀콕을 올려다보는 아이의 표정만 같다
너, 라고 부르면 뒤돌아보는 사람이 여럿 있었는데
그중 아무도 귀엽거나 밉지 않았고
아나운서의 어깨 너머로
카메라가 풍경을 화소로 만들기 직전
나는 주머니에서 빛나는 하얀 공을 꺼냈다
아직 세상에 없는 구기 종목의 공인구였다
출처 : 202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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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변성기
김수원
접시는 바꿔요
어제 같은 식탁은 맞지 않아요
초승달을 키우느라 뒷면이었죠
숨기고 싶은 오늘의 숲이 자라요 깊어지는 동굴이 있죠
전신거울 앞에서 말을 터요
알몸과 알몸이 서로에게
내 몸에서 나를 꺼내면
서로 모르는 사람
우리는 우리로부터 낯설어지기 위해 자라나요
엄마는 앞치마를 풀지 않죠
지난 앨범 속에서 웃어야지 하나, 둘, 셋, 셔터만 누르고 있죠
식탁을 벗어나요
눈 덮인 국경을 넘어
광장에서의 악수와 뒤집힌 스노우볼의 노래, 흔들리는
횡단열차와 끝없이 이어지는 눈사람 이야기, 말을
건너오는 눈빛들과 기울어지는 종탑과
나무에서 나무와 나무까지 밝아지는
모르는 색으로 달을 채워요
접시에 한가득
마트료시카는 처음 맛본 나의 목소리
달 아래, 내가 나를 낳고 나는 다시 나를 낳고 나를 낳고
내가 누구인지 누구도 모르게
출처 : 2021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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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길 찾기
김진환
차창 너머 낯선 가게들
잠시 눈감은 사이에
내릴 정류장을 지나쳤나
인터넷 지도로 확인한다
버스의 노선과 파란 점의 위치를
나는 길 잃지 않았다
인터넷 지도에 따르면
이 길은 내가 아는 길
매일같이 지나는 왕복4차로
거기서 나는 흰색과 붉은색 보도블록의 배열을 배웠고
넘어져 뒹굴며 무릎으로 손바닥으로 아스팔트를 읽었는데
보도블록의 배열이 다르다
아스팔트의 굴곡이 다르다
인터넷 지도를 확인한다
버스가 정거장 몇 개를 지나는 사이
파란 점은 아직도 아까 그 길에 있다
멀리 손 뻗어 손바닥의 살점 패인 자리를 보면
핏기와 죽은 피부의 흰빛이 구분되지 않는데
하차 벨 소리가 울린다
흰 버튼 위로 붉은 등이 들어와 있다
뒷좌석 사람이 내 뻗은 팔을 보고
대신 눌러 주었다며 손짓한다
버스에서 내려 아스팔트를 만져본다
인터넷 지도를 확인하지 않아도
이 길은 내가 아는 길이거나
거기로 이어지는 길
걷다 보면 낯익은 가게들도 보일 것이다
출처 : 2021년 《광남일보》신촌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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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모천母川
김철
청계천 골목 어디쯤
모천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양양의 남대천이 아닌
뜨끈한 국수를 파는 국수 집 근처 어디라고
국수 발 같은 약도 적힌 메모를 들고 찾아간
미물도 명물로 만든다는 그 만물상
주물 틀에서 갓 나온 물고기 몇 마리 사왔지
수백 마리 수천 마리 붕어빵 구워낼 빵틀
파릇한 불꽃 위를 뒤집다 보면
세상의 모천을 찾아오는 물고기들
다 중불로 찍어낸 붕어빵 같지
한겨울 골목 경제지표가 되기도 하는
천원에 세 마리, 구수한 해류를 타고
이 골목 입구까지 헤엄쳐 왔을
따뜻한 물고기들
길목 어딘가에 차려놓으면
오고 가는 발길 멈칫거리는 여울이 되는 것이지
파닥파닥 바삭바삭
물고기 뛰는 모천의 목전쯤 되는
영하의 파라솔 아래
엄마가 하루 종일 서 있던 그곳
출처 : 《머니투데이 경제》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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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 이 거울이 마음에 든다
남수우
한 사람에게 가장 먼 곳은
자신의 뒷모습이었네
그는 그 먼 곳을 안으러 간다고 했다
절뚝이며 그가 사라진 거울 속에서
내가 방을 돌보는 동안
거실의 소란이 문틈을 흔든다
본드로 붙여둔 유리잔 손잡이처럼
들킬까 봐
자꾸만 귀가 자랐다
문밖이 가둔 이불 속에서
나는 한쪽 다리로 풍경을 옮기는 사람을 본다
이곳이 아니길
이곳이 아닌 나머지이길
중얼거릴수록 그가 흐릿해졌다
이마를 기억한 손이 거울 끝까지 굴러가 있었다
거실의 빛이 문틈을 가를 때 그는 이 방을 겨눌 것이다
번쩍이는 총구를 지구 끝까지 늘리며
제 뒤통수를 겨냥한다 해도 누구의 탓은 아니지
거울에 남은 손자국을 따라 짚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내게 뒷모습을 안겨주던 날 모서리가
처음 삼킨 태양을 생각했다
흉터를 간직한 햇살이
따갑게 몸 안을 맴돌고 있을 거라고
뒷모습뿐인 액자를 돌려세운다
거울 속에는
하얀 입김으로 떠오른 민낯들이 너무 많았다
출처 : 2021년 《문화일보》신촌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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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고독사가 고독에게
박소미
나는 자궁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태동을 알아채는 침묵 이전의 기억 밑으로 밑으로, 웅크리고 있다
두 팔로 무릎을 감싸 안고 재생에 몰두한다
어느 애도가 부재를 지나 탯줄로 돌아올 때까지, 타자의
몸 속을 오가는 이 반복은 고고학에 가깝다
생환의 뒷면은 그저 칠흑 덩어리일까 벽과 벽 사이 미세
한 빗살로 존재할 것 같은 한숨이 어둠 안쪽 냉기를 만진다
사금파리 녹여 옹기 만들 듯 이 슬픔을 별자리로 완성케 하는 일,
아슴푸레 떨어지는 눈물도 통로가 될까 북녘으로 넘어가는
해거름이 창문 안으로 울컥, 쏟아져 내린다
살갗에 도착한 바람은 몇 만 년 전 말라버린
강의 퇴적, 불을 켜지 않아도
여기는 발굴되지 않는 유적이다 잊기 위해 다시,
죽은 자의 생애를 읊조려본다
그래 다시, 귀를 웅크리지 태아처럼, 점점 화석이 되어 가는
기분이야 떠나면서 자꾸 뒤를 돌아본다
방안이 점점 어두워진다
2021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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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국수
박은숙
허리가 굽은 노인이
식당 구석진 자리에 앉아
국수 한 그릇을 시킨다
네 명의 자리에 세 명을 비워두는 식사
아마도 매 끼니를 빈자리들과의
합석이었을 것 같다
잘 뭉쳐져야 여러 가닥으로 나뉠 수 있는 국수,
수 백번의 겹이 한 뭉치 속에 모이는 일,
뜨겁게 끓인 다음에 다시 찬물에 식혀야 질겨지는 음식,
그 부피를 많이 불리는 음식은 힘이 없다지만,
그래서 여럿이 먹어도 한가지 소리를 내는 국수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는 저 노인의 슬하는
이남 삼 녀의 망종(亡種)
꽃핀 곳 없는 행색이지만
한때는 다복했었을 것이다.
잇몸으로 끊어도 잘 끊어지는 빗줄기 같은 국수,
똬리를 튼 국수를 젓가락으로 쿡 찔러 풀어 헤친다
치아도 없는 노인이 먹는데
후루룩, 비 내리는 소리가 난다
비 오는 날 마루에서 들리던 엄마의 청승같이
뚝뚝 끊던 빗소리,
맑은 물에 헹군 국수 발 같은 주름이
입안에 가득 고인 빗소리에
바람이 흩날리며 든다.
출처 : 2021년《농민신문》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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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돌의 찬 손이 이마를 짚어주다
백향옥
부풀어오르는 흙이 좋아 맨발로 숲을 걸었다
바닷물에 발을 씻다가 만난 돌은
손바닥에 꼭 맞는 매끄러운 초승달 모양
열병을 앓을 때 이마를 짚어주던 당신의 찬 손
분주하게 손을 닦던 앞치마에 묻어 온 불 냄새, 바람 냄새, 놀란 목소리
곁에 앉아 날뛰는 맥을 지그시 눌러 식혀주던 손길 같은
차가운 돌을 쥐고 있으면 들뜬 열이 내려가고
멋대로 넘어가는 페이지를 눌러두기에 좋았는데
어느 날 도서관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져 깨져버렸다
몸 깊은 곳에서 금이 가는 소리를 들었다
놓친 손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두 동강 난 돌을 잇대보았지만
깨진 돌은 하나가 될 수 없고
가슴에서 시작된 실금이 무섭게 자라났다
식었다 뜨거워지는 온도 차이가
돌 안쪽에 금을 내고 있었던 걸 몰랐다
이제 그만 됐다고 따뜻해진 돌이 속삭였다
그 날, 달빛 밝은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
깨진 돌을 가만히 놓아주었다
달에게 돌려주었다
출처 : 2021년 《불교신문》신촌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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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블루
변영현
파란 동그라미를 그려요
당신은 호수인 줄 알고 뛰어들어요
팔랑팔랑 헤엄쳐요
바다처럼 넓고 깊어요 파란 동그라미
속의 당신이 파랗게 물들고
나를 찾아봐, 하는 목소리에
물이 뚝뚝 떨어져요
안 보여요 안 보인다니까요
여기 있어, 하는 목소리에
숨이 헉헉 차오르네요
파란 동그라미 위에 파란색을 더해요
내게는 다른 색이 없거든요
조금 다른 파란색이면 당신을 찾을지도 몰라요
몰랐어요 더 깊어질 뿐이라는 걸
바닥을 찾지 못할 거예요
하늘을 찾지 못할 거예요
파란 지구별에서 나갈 수 없듯
당신은 거기서 허우적거리겠죠
파란 동그라미 파란 동그라미
블루칩 같기도 하고 버튼 같기도 해요
속는 셈치고 한번 눌러 볼까요?
잭팟이 터질까요, 당신이 튀어 오를까요?
하나, 둘, 셋!
아, 물감이 덜 말랐네요
파랗게 질린 손바닥 좀 보세요
당신이 묻어 있는 건 아니겠지요
파란 동그라미를 그려요
파랑이 파르르 떨고 있어요
출처 : 2021년 《경상일보》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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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발포진 랩소디
서동석
하늘에도 물길이 있어요 비와 바람이 드나드는 길목이죠
낙엽도 허공에서 노를 저어요
겨울나무들은 흔들리지 않기 위해 허공 깊이
닻을 내리는 법을 알죠
좌현 쪽으로 기울던 오동나무 잎이 다급히
우현으로 몸을 틀어요
놀라지 마요
이곳에선 파도치고 배가 드나들 듯 흔한 일이죠
운이 좋으면 좌초된 해초 한 줄기에
당신의 오후가 생포될 수도 있어요
그럴 때는 그를 알아볼 순간이 필요해요
어쩌면 어선 위에서
젊은 어부가 되어 양식한 물김을 뜯고 있거나
또 모르지요 누각에서 홀로 일기를 쓰고 있을지도
해풍이 부는 밤바다에서 어떤 그림자를 보거든
신호를 보내듯 말을 걸어야 해요
이렇게 물어보는 건 어때요?
혹시 12라는 숫자를 좋아하세요?
아니면 푸른 버드나무 냄새가 훅, 스치거나
정강이 어디쯤을 조금씩 절고 있는지 재빨리 살펴요
그가 조금만 망설여도
당신은 바로 돌아서는 것을 잊지 말아요
고독한 수염 과묵한 입술과 눈빛
밤이라면 횃불 하나는 오른 손에 꼭 챙겨요
가끔은 내 안에서도 횃불이 번지긴 해요
나도 내가 누군지 잘 몰라요
우리는 서로를 모르기에 낯익은 사람들
물가에 가면 두정갑옷을 입은 듯 몸이 무거워요
온 몸이 비늘이에요 두드러기처럼 매일 철갑이 돋아나요
발포진에서는 환한 귀가 필요해요
깊은 밤 물가에 서서 눈 감고 하나, 둘, 셋, 세어 봐요
바람 속에서 갑옷의 기척이 먼저 말할 거예요
손 내밀 거예요
발포만호의 손에서 물비린내 날 거예요
손바닥에 짠 내 밴 굳은살이 쓸쓸할 거예요
밤이면, 그 날의 수군(水軍)들이 지금도
송판으로 판옥선을 만들고 돛을 달아요
거북선 위에서 망치질 소리 들려와요
잠깐, 포구 저쪽이 술렁여요
순시를 마치고 돌아온 그가 한쪽 손에 등채*를 들고
나를 향해 걸어와요
그의 한쪽 가슴에 활 맞은 자국이 보여요
설마 그의 눈에 내가 보이는 건 아니겠죠?
아직 나를 들켜선 안 돼요
붉은 두정갑옷이 내 앞에 당도 했어요
해풍의 냄새를 맡은 장군 어깨의 견룡이
구름을 박차고 날아올라요
내 말을 아무도 믿지 않겠죠? 심장이 터질 듯한 밤이에요
출처 : 2021년《뉴스N 제주》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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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해감
설현민
새벽 물때다 사촌들과 바지락을 캐러간다
이모를 도와야 했다 엄마, 엄마,
나는 한 번도 이모를 본 적 없는데요
가족이잖니 단숨에 알아차릴 거다
모래사장은 구덩이로 가득하다
저 안에서 움직이는 게 보이니 저기 너희 이모가 있잖아
움직이는 게 너무 많은걸요
네 이모처럼 움직이는 것은 하나뿐이란다
등을 돌려 앉은 엄마는 쇠갈쾡이로 발 밑을 푹푹 퍼 올린다
나는 양동이를 끌어안고 움푹한 바닥을 들여다본다
모래 속에는 모래가 들어 있다
어린 사촌들은 껍데기를 손에 쥐고 땅을 헤집는다
또 다른 껍데기를 주워 자랑한다
바지락을 얼마나 더 캐야 하나요
노인들의 배를 채우기에는 아직 모자라구나
이모는 왜 그렇게 깊이 파들어 가죠 깊은 곳엔 먹을 게 없잖아요
네가 그렇게 태어났지 모래를 툭툭 털고 너를 꺼냈단다
바지락이 쌓여간다
나는 그것을 씻어 다른 양동이에 옮겨 담는다 빈 껍질을 골라낸다
아이들은 조개껍데기를 묻어 성호를 긋고
너는 어쩌면 이렇게도 다 커버렸구나 이젠 무엇도 몰라보겠구나
검은 천으로 양동이를 덮는다
내 입안에 서걱거리는 것이 들어있다
나는 이모가 엄마를 닮았다고 말했다
이모는 엄마보다 많이 늙어 있었다고
저기 모래를 뱉고 있는 것이 있다
나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다
출처 : 2021년 《영남일보》 문학상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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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작명소가 없는 마을의 밤에
신이인
오리너구리를 아십니까?
오리너구리, 한 번도 본 적 없는
고아에게 아무렇게나 이름을 짓듯
강의 동쪽을 강동이라 부르고 누에치던 방을
잠실이라 부르는 것처럼
나를 위하여 내가 하는 일은
밖과 안을 기우는 것, 몸을 실낱으로 풀어,
헤어지려는 세계를 엮어,
붙들고 있는 것
그러면 사람들은 나를 안팎이라고 부르고
어떻게 이름이 안팎일 수 있냐며 웃었는데요
손아귀에 쥔 것 그대로
보이는 대로
요괴는 그런 식으로 탄생하는 겁니다
부리가 있는데 날개가 없대
알을 낳지만 젖을 먹인대
반만 여자고 반은 남자래
강물 속에서도 밖에서도 쫓겨난 누군가
서울의 모든 불이 꺼질 때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알고 계셨나요?
기슭에 떠내려오는 나방 유충을 주워 먹는 게 꽤 맛있다는 거
잊을 수 없다
모두가 내 무릎에 올려두었던 수많은 오리너구리
오리가 아니고 너구리도 아니나
진짜도 될 수 없었던 봉제 인형들
안에도 밖에도 속하지 못한
실오라기
끊어낼 수 없는
주렁주렁
전구 없는 필라멘트들
불을 켜세요
외쳐보는 겁니다
아, 이상해.
출처 : 202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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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두렵지만 머물고 싶은 시간
은시영
두렵지만 머물고 싶은 시간
그건 사랑의 시간이었다.
바람은 언제나
나에게 속삭임으로
진실을 말해줬지만
나는 바람의 진실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는
또 이렇게
아픈 시간들이
나를 지나간다.
나의 눈물은 시가 되고
시는 그대가 되어
다시 내 안에 머문다.
그리고
눈물 가득한 나에게
바람은 다시 속삭여준다.
눈물, 그것은
아무나 흘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늦은 것도 같지만
이번 바람의 위로를
나는 놓치기 싫었다.
출처 : 2021년 《경인일보》 신촌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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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책 등의 내재율
엄세원
까치발로 서서 책 빼내다가
몇 권이 기우뚱 쏟아졌다
중력도 소통이라고 엎어진 책등이
시선을 붙들고 있다
반쯤 열린 창문으로 햇살이
배슥이 꽂혀와 반짝인다 정적을 가늠하며
되비추는 만화경 같은 긴 여운,
나는 잠시 일긋일긋 흔들린다
벽장에 가득 꽂힌 책제목 어딘가에
나의 감정도 배정되었을까
곁눈질하다 빠져들었던 문장을 생각한다
감각이거나 쾌락이거나 그날 기분에 따라
수십 번 읽어도 알 수 없는
나라는 책 한 권,
이 오후에 봉인된 것인지
추스르는 페이지마다 깊숙이 서려 있다
벽 이면을 온통 차지한 책등
그들만의 숨소리를 듣는다
어둠을 즐기는 안쪽 서늘한 밀착, 이즈음은
표지가 서로의 경계에서 샐기죽 기울 때
몸 안의 단어들이 압사되는 상상,
책갈피 속 한 송이 압화 같은 나는
허름하고 시린 과거이거나 목록이다
나는 쏟아진 책을 주워 천천히 넘겨본다
벽은 참 출출한 비결이다
출처 : 2021년 《전북도민일보》신촌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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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야간산행
여한솔
공룡처럼 죽고 싶어
왜
뼈가 남고 자세가 남고
내가 연구되고 싶어
몸 안의 물이 마르고
풀도 세포도 가뭄인 형태로
내가 잠을 자거나 울고 있던 모습을
누군가 오래 바라볼 연구실
사람도 유령도 먼 미래도 아니고
실패한 유전처럼
석유의 원료가 된대
흩어진 눈빛만 가졌대
구멍 난 얼굴뼈에서
슬픔의 가설을 세워 준 사람
가장 유력한 슬픔은
불 꺼진 연구실에서 흘러나왔지
엎드린 마음이란
혼자를 깊이 묻는 일
오래 봐줄 것이 필요해
외계인이거나
우리거나
눈을 맞추지
뼈의 일들
원과 직선의 미로 속으로
연구원이 잠에 빠진다
이게 우리의 이야기
강이 비추는 어둠 속에서
신발 끈을 묶고
발 밑을 살펴 걷는 동안의
2021년 《매일신문》신촌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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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저녁의 집
유수진
아침이라면 모를까
저녁들에겐 다 집이 있다
주황빛 어둠이 모여드는 창문들
수줍음이 많거나 아직 야생인 어둠들은
별이나 달에게로 간다
불빛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건
다 저녁의 집들이다
한 켤레의 염치가 짝짝이로 돌아왔다
수저 소리도 변기 물 내리는 소리도 돌아왔다
국철이 덜컹거리며 지나가고 설거지를 끝낸 손가락들이
소파 한 끝에 앉아
어린 송아지의 배꼽, 그 언저리를 생각한다
먼지처럼 버석거리는 빛의 내부
어둠과 빛이 한 켤레로 분주하다
저녁의 집에는 온갖 귀가들이 있고
그 끝을 잡고 다시 풀어내는 신발들이 있다
적어도 창문은 하루에 두 번 깜박이니까 예비별의 자격이 있다
깜박이는 것들에겐 누군가 켜고 끄는 스위치가 있다
매번 돌아오는 관계가 실행하는 수상한 반경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있고
스위치를 딸깍, 올리면 집이 된다
별은 광년을 달리고 매일 셀 수 없는 점멸을 반복한다
그러고 나서도
어수룩한 빛들은
얕은 수면 위로 귀가한다
출처 : 2021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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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노이즈 캔슬링
윤혜지
우리는 한껏 미세해진 우리를 내려다보며 기내식을 먹었다
책을 뒤적거렸다 구식 (舊式) 동물에 대한 흥미로운 글을 읽었다
그것은 동물들이 있다, 로 시작된다
유기인지 실종인지 자연발생인지 모르겠지만
어디선가 구식의 동물들이 발견되었고
그들은 제각기 살고 있다
매일 똑같은 구절을 읽어줘도 너는 언제나 놀라워한다
연하게 와서 끊임없이 훼손되는 마음으로
침목(枕木)을 고른 적이 있다
비를 맞고 볕을 쪼이길 반복한 나무토막들 위로 뜨거운
기차가 규칙적인 소리를 내며 달렸다
모든 것이 멈추면 아웃렛에 가서 새 셔츠를 사고 카페에 앉아
아주 뜨겁고 단맛이 나는 차를 마셔야지 하다가 자신이
데려올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영영 잊어버린 사례도 있었다
이것이 소음으로 소음을 지워내는 방식입니다
설명을 들으며 우리는 각자 잊어버린 것을 접어 올리고
등받이를 세우고 얌전히 차례를 기다렸다
가팔라지는 날개
여러 개의 의자에 앉아야만 생각나는 것이 있다
이국의 빛과 온도
잎사귀와 해변의 선량한 사람들
규칙적인 것은 예상 가능해서 지울 수 있다 다만 어떤 통화 소리
바빠, 계속 바빠서 그래 배회하듯 하는 사과 그것은 틈입이다
나 좀 안아 줘, 같은 말은 꼭 돌아누우면서 하는
어떤 나쁨은 너무 구체적이어서 꼭 대낮 같다
물결이 물결로 공들여 썩는 냄새를 맡았다
그 것을 생각할 때
깨끗한 공기 속으로 무언가 빠르게 나아가는 소리가 들렸고
눈앞에서 파도가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
저마다의 계단처럼
출처 : 202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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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여름의 돌
이근석
나는 토끼처럼 웅크리고 앉아 형의 작은 입을 바라보았다.
그 입에선 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형한테선 지난여름 바닷가 냄새가 나, 이름을 모르는
물고기들 몇 마리 그 입 속에 살고 있을 것만 같다.
무너지는 파도를 보러 가자, 타러 가자, 말하는
형은 여기 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
미래를 이야기했다.
미래가 아직 닿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형을 들뜨게 했다.
미래는 돌 속에 있어, 우리가 아직 살아보지 못한
이야기가 번져있어, 우리가 미래로 가져가자, 그때
우리는 서로를 바라본다.
그동안 우리는 몇 번 죽은 것 같아.
여름, 여름 계속 쌓아 올린 돌 속으로
우리가 자꾸만 죽었던 것 같아.
여기가 우리가 가장 멀리까지 온 미래였는데 보지 못하고
우리가 가져온 돌 속으론 지금 눈이 내리는데
내리는 눈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내리는 눈 속으로 계속 내리는 눈 이야기.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우리가 우리들 속으로 파묻혀 가는 이야기들을
우리가 했다.
전화벨이 울렸다, 계속
전화벨이 울리고 있다
202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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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냄비의 귀
장이소
뜨거운 냄비의 귀를 잡다가 내 귀를 잡았다
순간이 순간에 닿는다
귀 하나 떨어진 양은냄비를 안고 골목을 지난다
삼삼오오, 얼룩이를 가리킨다
얼룩이는 번쩍번쩍 얼룩덜룩하다
고흐는 왼쪽 귀를 자르고 왼쪽으로 들었을까
어떻게 오른쪽을 들었을까
당신은 떨어진 귀를 버리지 못한 사람 뚜껑을 마저 잃고
배가 된 사람 이마는 당신이 키우던 물고기 떨어진
귀는 물고기의 어디쯤일까
귀를 기울인다
귀는 기울기 물고기가 지느러미를 자른다
어디나 그런 귀 하나쯤 있다 절반이 절반에 매달려 가운데를
안고 돌면 떨어진 한쪽을 위해 두 배속 태엽을 감는다
꼬리에 풀리는 물 무늬 아가미로
쏟아지는 물살 삼킨 것들이 중심을 세운다
멱을 잡고 중심을 도는 것은 붙잡지 못한 것들이 많다는 것
밖이 안을 떠받는다
쓸모를 잡는 동안 바닥에는 차고 오르는 온도가 있었다
끓어 넘치던 냄비 뒤집어 보여주지 못한 뚜껑을
버리면 더 가까워서 가볍다
기억을 잃고 바닥을 태우던 사람이 있었다
붕대를 푼다
고흐가 별이 빛나는 밤하늘에 은빛 물고기를 그린다
지느러미가 키를 잡는다
풍등이다
붙잡지 못한 것들이 손잡이를 흔든다
떨어진 귀가 어떻게 자신을 부르는지를
2021 《경남신문》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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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붕어빵 안에는 배고픈 고래가 산다
조효복
아이의 웃음에선 생 밀가루 냄새가 났다
접시 위에 수북이 담긴 고기를 자랑하는 아이
가쁜 숨을 내쉬며 조그마한 얼굴이 웃는다
콧등을 타고 오른 비음이 아동센터를 울린다
해를 등지고 앉은 언니는 아빠를 닮았다
그늘진 탁자에는 표류 중이던 목조선 냄새가 비릿하게 스친다
구운 생선을 쌓아두고 살을 발라낸다
분리된 가시가 외로움을 부추긴 친구들 같아 목안이 따끔거린다
흰 밥 위에 간장을 붓고 또 붓는다
짜디짠 바람이 입 안에 흥건하다
훔쳐 먹다 만 문어다리가 납작 엎드린 오후
건너편 집 아이가 회초리를 견딘다
튀어나온 등뼈가 쓰리지만 엄마는 버려지지 않는다
매일 다른 가족이 일기 속에 산다
레이스치마를 입은 아이가 돈다
까만 유치幼齒를 드러낸 아이가 수틀을 벗어난 실처럼 돌고 있다
귀퉁이를 벗어난 아이들이 둘레를 갖고 색색으로 돈다
먹어도 먹어도 허기진 뱃구레 속에 고래가 산다
골목은 높낮이가 다른 파동들이 그려놓은 바다 놀이터
제자리가 두려워 아래로만 내달리는 모난 고래들
풍덩 골목 아래로 제 몸을 던진다
가라앉은 먼지위로 고래가 헤엄친다
팥물 묻은 고래 비탈을 구른다
천막 아래 등이 굽은 엄마가 붕어빵을 굽는다
출처 : 2021년 《무등일보》신촌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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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유실수有實樹
차원선
너의 눈 안에는 열매를 맺으려 하는
나무가 있다
너의 눈에 나무를 심은 사람이 저기
소각장에 앉아 있다
자신의 옷을 다 태우고도 헐벗은 너를
보고 있다
멀뚱히 있는 너와 떨어진 잎을 한데 덮는다
앙상해지도록
베고 누웠다
잔향 더미로 만든 모래시계
마른 낙엽을 주워 구덩이로 몰아넣었다
왜 내 얘기를 듣고 있어요?
낯선 사람인가 봐 쓸쓸하다고 하면 데려갈 텐데
그대로 있어요
반딧불이 무리 지어 올리는 온도
올라가는 건물
빈곳은 비어있었던 적이 없고
마지막으로 옮긴 불씨 조각이
다 자란 나무의 잎에 옮겨 붙는다
오랫동안 그를 알았다
열매를 남긴 나무, 앨범에 적히고
눈 안에 마른 씨앗을 품던 자리가 바스러져 날아간다
몇은 땅으로 몇은 모를 곳으로
출처 : 2021년 《한국경제》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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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돌고래 기르기
한준석
미소는 돌고래로 기르기 좋습니다
돌고래의 주파수를 라디오로 들어요
나는 무심하게 시작되어집니다
축축하게 연필심이 밤새 헐었습니다
돌고래는 미소에 좋습니다
나는 웅크리기 좋은 무게로 태어났어요
돌고래의 고도는 새떼의 무게 같아요
새들이 흩어지는 사이로 연필 소리가 들립니다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 나가는 새를
잃어버렸다 말할 수 있을까요
나무에 없는 새들을 세어보는 일은
열 손가락으로 모자라고
두 팔로는 충분한 일입니다
돌고래를 기르기에는 남해에 사는 당신이 좋습니다
눈 내리는 남해로 가는 버스 창밖
길러 본 적도 없는데
둥글게 헤엄치는 돌고래를 바라봅니다
나는 당신의 웃음을 빌려 가벼워지고 싶습니다
일기예보에 오늘 아침은 잔기침을 주의하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안정은 멀리 있습니까
나는 이런 예감들을 이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눈 감으면 버스의 흔들림만 남겨집니다
나는 돌고래가 아닙니다
나는 버스에서 내릴 줄 압니다
잘 가, 돌고래는 휘어지는 몸짓으로 수평선을 밀어내고 있어
끝에서 끝이 부드럽게 멀어져야 좋은 미소
나는 돌고래로 기울어질 수 있습니다
돌고래는 미소를 기르기에 좋습니다 슬픔을 조심합니다
세계는 서로를 미끄럽게 기를 줄 알고
나는 입김에서 햇빛으로 조용하게 옮겨집니다
나는 한 종류의 돌고래가 됩니다
출처 :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핑고
황정현
극지의 순록은 우아한 뿔을 가졌다
거친 발굽으로 수만 년을 걸어왔다
죽은 자식을 동토에 던지며 발길을 돌려야 했고
비틀걸음으로 얼음산을 넘어야 했고
살점을 떼어 어린 자식의 배를 불려야 했고
뿔을 세워 침입자에 맞서야 했고
온몸을 쏟아 무리를 지켰다
죽어서도 흙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치열한 싸움에서
늘 이기고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당신은 무덤을 등에 지고 돌아왔다
무덤은 살고 당신은 죽었다
무덤 속에서 얼음이 자라고 있다
얼음은 흙을 밀어 올려 산이 될 것이다
얼음의 계절이 오면 순록은
바늘잎나무숲으로 순례를 한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당신의 길이 보인다.
2021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http://www.gudosesang.com
첫댓글 좋은 시 공유시켜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