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이인규 차장검사>
황우석 줄기세포 사건에 대한 검찰의 발표.
나는 검찰의 4개월간 수사결과 발표(2006년 5월 12일)에 대해 강력히 제동을 걸었다.
기자회견장에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아 주지도 않았다.
그리곤 서울중앙검찰청 14층 무궁화홀에서 사진기자 영상기자들은 출입을 못하게 하고 글쟁이 기자들만 들어 오게 하였다.
그런데 중앙에 기자들이 앉게 하고, 양 옆으로는 검찰에서 무술깨나 쓰는 무게들이 진을 치고 있어 공포심을 유발시켰다.
즉, 실시간 보도를 막게하는 차단용이었다.
검찰은 수사결과에 대해 30분 간이나 설명해댔다.
'김선종이 단독으로 쓰레기 통에 버렸다....'
검찰의 설명이 끝나자, 나는 3차례의 질문으로 강력한 의혹을 제기하였다.
" 1. 김선종이 단독으로 범행을 저지른 의도가 무엇이며 누구를 위한 범행이었나?
2. 왜 카메라 기자들은 출입을 못하게 하고 실시간 방송을 보내지 못하게 하는 저의가 무엇이이며, 국민의 알권리를 왜 방해하는가?
3. 검찰이 수사결과발표 따로, 기자회견 따로, 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당시 해외 언론과 국내 언론 기자들 50여명이 있는데서 검찰측은 꿀먹은 벙어리였다.
끝에는 강릉대 민경대 교수와 함께 '검찰이 이젠 박정희군사독재시절로 돌아가려 하는가?'라고 큰 소리로 말하자,
내 주위에는 무게들이 둘러싸 상관의 명령을 기다렸으나, 끝내 잡아 가두지는 못했다.
'검찰의 수사결과발표 따로, 기자회견 따로 하는 저의'
그날 밤 사실 그대로 검찰의 발표와 기자회견 내용 등 검찰을 강력히 비판하는 기사를 속보로 내 보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참석한 국내 언론은 단 한줄도 이러한 내용으로 기사화 하지 않고 꼭두각시처럼 검찰의 발표 내용만 보냈다.
단, 해외언론은 사실을 조금 다루었을 뿐이다.
이 기사로 난리가 나버렸다.
네티즌들이 검찰을 비난하는 글로 인터넷을 도배하고, 중앙검찰청사 앞에서는 수백명이 시위를 벌였다.
이 소식을 듣고 다음 날 배금자 변호사가 내 기사를 인용해
'대한민국 검찰은 공공의 적인가'라는 칼럼을 인터넷에 게재하였다.
'대한민국 검찰은 공공의 적인가'
검찰은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나와 배 변호사가 검찰의 명예를 더 이상 훼손하면 법으로 엄단하겠다'는 보도자료를 내고
언론에 뿌려 대서특필 되기에 이르렀다,
모 방송은 9시 뉴스에서 5분가까이 배 변호사와 나를 까대는 보도를 내보냈다.
울화통이 터진 나는 찾아가 그 기자의 멱살을 잡고 뺨을 후려갈겨 버렸다.
그리곤 다음 날 검찰측에게
'광주 망월동 영령들께 참배하러 갈테니 나를 구속시켜라'고 말하고,
광주 망월동 묘지를 찾아 참배했다.
참으로 얼굴딱지 억지뗏장이 무너져 내린 것 같아 서럽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구속시키기 위해 검찰은 윗선에 승인요청을 했으나 최종적으로 거부 되었다고 한다.
검찰 윗선까지 갔으니 총장부터 담당 검사장까지 뭐가 되었겠는가?
한마디로 엿된 것이다.
나는 다시 검찰을 비판하는 칼럼을 게재했다.
이때부터 검찰은 회유와 협박을 해왔다.
잘 아는 중앙지검 부장검사가 전화를 걸어와 협상제의를 했다.
정정기사를 써달라는 거였다.
그러나 나는 그 부장검사에게,
'죄가 있으면 구속시키면 되지 뭔 보도자료를 내고 지랄들이야.
정정기사는 쓰지 않는다. 구속시켜라'라고 호통을 쳤다.
(106명의 국민변호인단 대표들이 대책을 논의하는 장면)
검찰은 내가 회유와 협박에도 수그러들지 않자 배 변호사를 걸고 넘어졌다.
광주서 서울로 올라는 차안에서 배 변호사의 전화를 받았다.
배 변호사의 칼럼은 내 기사를 인용하면서 너무 강력하고 오바해서 내갈긴 글이었다.
배 변호사와 나를 중심으로 밤샘 대책 회의를 가졌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고 했다.
나를 원망하는 소리도 들렸다.
배 변호사는 '어쩌면 변호사복을 벗을지도 모른다'며 불안해 하며 말했다.
배 변호사측이 당황해 하자 검찰은 배 변호사에게 대국민 사과을 요구했다.
배 변호사를 살려야 되겠다는 마음이 굳어지게 되었다.
급기야 나는 검찰에게 강력의지완 180도 다른 정정기사를 쓰겠다고 조건을 제시했다.
-'배 변호사는 내 기사를 보고 한 것이니 잘못이 없다. 검찰이 계속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다면 더 강력한 기사를 내보내겠다.'
검찰은 밑진 장사치처럼 밝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내 제의를 받아 들였다.
결국 '대한민국 검찰을 신뢰한다'는 정정기사를 내보내고 서글퍼서 밤새도록 눈물을 쏟고 말았다.
이러한 여파로 내가 몸담고 있는 언론사 사주와 동조하는 언론사들은 겁을 먹었고,
겁을 집어삼킨 사주는 나를 정치사회부 차장에서 업무부장로 전보조치하고 말았다.
이에 강력히 항의하자 전남지방 취재기자로 발령을 내고야 말았다.
결국 사표를 던지고 잘 아는 언론선배로부터 '플러스코리아' 신문사를 무상양도 받아
2006년 7월 민족/ 통일/ 역사/ 신문으로 재창간하고 사주가 되었다.
지금도 나는 누구한테도 떳떳하고 정당하다.
배금자 변호사
서울중앙법원에서.
당시 검찰측의 움직임에 수많은 기자들이 배신해 버렸다.
황우석 사건은 그렇게 막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검찰은 나와 배변호사에 대해 배포한 보도자료를 대검찰청 사이트에 게재하고,
이후 내가 정정기사를 내보내자, 그 기사와 함께 마무리 됐다고 그 사이트에 다시 게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