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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 그레이스님이 오해가 있는 것 같아 굵기와 밑줄 첨가함)존 파이퍼의 거듭남, 제3부 어떻게 거듭나는가/ 제7장 믿음으로 거듭난다 중에서|연속적중생론인가 순간적중생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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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 그레이스님이 올리신 글을 보며 오해가 있는 것 같아 굵기와 밑줄을 첨가했습니다. 존 파이퍼, 거듭남(두란노), 130-3. 핵심은 하나님이 말씀을 거듭남의 도구로 삼으시고, 거듭남에서 말씀은 믿음을 일깨운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서 10장 17절에서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거듭남이 우리의 믿음(believing, 믿는 행위)을 포함하며, 말씀이 우리 믿음의 원인이며, 베드로전서 1장 24절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거듭남을 일으키신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말씀 뒤에, 우리의 믿음 뒤에 하나님의 결정적인 행위가 있다. 이것이 야고보 사도가 야고보서 1장 18절에서 말하는 바다.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따라 우리를 낳으셨다. 하나님은 믿으려는 우리의 의지에 속박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의지(뜻)가 우리의 의지를 가능하게 했다. 이 본문에서 하나님의 낳음이 우리의 믿음의 원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셋째 단서는 베드로가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공회에서 이와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이다. 베드로는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과 유대인이 똑같이 구원 받는다고 말한다. 베드로가 이 사실을 말하는 방식이 의미심장하다. “[하나님이]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행15:9).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장 22절에서 “너희가 진리의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라고 말한다. 이 말의 뜻은 바로 ‘믿음으로 너희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사도행전 15장 9절에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말한다. 다만 사도행전 15장 9절에서는 동일한 정화의 용어를 사용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통해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는 분명하게 말한다. “[하나님이] 믿음으로 그들의 믿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나님이 그들의 믿음을 통해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셨다. 이것은 우리가 거듭날 때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부분인 동시에 필수적인 도구라는 점을 보여 준다. 그러나 정화가 근본 원인은 아니다. 바로 우리 하나님이 근본 원인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다음 네 가지를 의미한다. 당신이 이 의미들을 기쁘게 받아들이길 바란다. 1. 우리가 구원 받으려면 믿어야 한다는 뜻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 거듭남이 믿음을 대신하지 않는다. 거듭남은 믿음을 포함한다. 거듭남은 믿음으로 나는 것이다. 2. 우리는 내버려두면 믿지 않으리라는 뜻이다. 죽은 자들이 스스로 호흡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3. 풍성한 긍휼과 큰 사랑과 주권적 은혜의 하나님이 당신 믿음의 결정적 원인이라는 뜻이다. 4. 베드로전서 1장 22절에 따르면, 거듭난 마음의 열매는 사랑이다. 이것은 삶에서 거듭남의 영향을 받지 않는 부분-인종차별, 지구온난화, 낙태, 제한적인 아동 건강보험, 노숙자 문제, 가난, 이라크 전쟁, 화이트칼라 범죄, 인신매매, 세계적인 에이즈 위기, 급속한 사생아 증가,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 뒤에 숨겨진 탐욕, 불법 체류자들 처리, 막 출소한 그리스도인들의 곤경 등-은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모든 부분이 영향을 받는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당신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영원히 예수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권하는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분을 당신의 삶의 구주요 보화로 받아들여라. 이미 신자라면,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 아래 자신을 겸손히 낮추고, 세상이 감당 못할 하나님의 자녀로서 고통을, 특히 영원한 고통을 제거하는 일에 자신을 바쳐라. 우리 주변에 있는 젊은 클레렌스 토마스들이 진리와 사랑의 관계를, 거듭남의 복음과 자유의 복음의 관계를 깨닫도록 도우라.
존 파이퍼의 '거듭남'이란 책 중에서 part3. 우리는 어떻게 거듭나는가? 7) 믿음으로 거듭난다. (130~133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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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님께서 윗 글에 대한 반론으로 올려 놓으신 자료입니다.
복사가 안되어 주소만 가져왔습니다. ->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OgJY/295
맨 아래는 이 글에 대한 홀리죠이님과 동자님의 댓글입니다.
(유명산 글)
믿음이 거듭남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임
그런데 요한복음 1장13절에서, 거듭남은 우리의 믿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낳는 행위와 연결된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3절이 이 점을 강조하는 목적은 거듭남이 평범한 인간 대리자에게서 기인(起因)하지 않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다.
세 개의 부정 진술이 나온다. 혈통으로 나지 아니하고, 육정으로 나지 아니하며,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한다.
...중략...
이 모두의 대안은 인간의 그 어떤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다.
...중략...
요한복음 1장 12-13절은 거듭남이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중략...
다시 말해, 인간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낳음이 거듭남의 결정적인 요인으로 보인다.
그러나 요한이 거듭남에서 우리의 믿음과 하나님의 일이 어떤 관계라고 가르치는지 알아내기 위해 이 구절들만 의지해야 하는 건 아니다. 요한은 요한일서 5장1절에서 분명히 말한다. 요한일서 5장1절은 신약에서 믿음과 거듭남의 관계를 가장 분명하게 말하는 구절이다. 동사에 주목하며 요한일서 5장1절을 읽어 보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다음은 이 구절에 대한 존 스토트의 해석인데, 나는 그의 해석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현재시제(믿는/believes)와 완료시제(난/has been born)의 결합이 중요하다. 이것은 믿음이 거듭남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임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우리가 지금 계속하고 있는 믿는 행위는 결과이며, 따라서 거듭남이라는 우리의 과거 경험에 대한 증거다. 우리는 거듭남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다.>>
“존 파이퍼의 거듭남“중에서 part 3. 우리는 어떻게 거듭나는가? 8)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거듭난다. 142~144p
아래 파일은 윗 글에 대한 댓글을 복사할 수 없어 캡쳐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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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파이퍼의 거듭남'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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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거듭난 영혼은 세상을 이긴다
이제 거듭남의 결과와 증거에 눈을 돌리자. 우리는 이제 이렇게 묻는다. 거듭남은 어디로 이어지는가? 거듭남은 우리의 삶에서 어떤 열매를 맺는가? 당신의 삶에서, 하나님이 당신을 거듭나게 하셨다는 표시는 무엇인가?
이제 거듭남의 결과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성경에서 이 질문에 답하는 데 거의 전적으로 집중하는 요한일서에 눈을 돌려 보자.
요한의 열망
거듭남의 열한 가지 증거
요한은 거듭남의 증거로 적어도 열한 가지를 제시하는데, 믿음과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다.
1) 그분의 계명을 지킨다.
2)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대로 행한다.
3) 형제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한다.
4)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
5) 아들을 시인하며 영접한다.
6) 의를 행한다.
7) 습관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
8) 성령이 있다.
9) 사도들의 말을 순종하는 자세로 듣는다.
10)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
11) 세상을 이긴다.
거듭나면 완벽해진다?
믿음이 세상을 이긴다
10. 풍성한 관계의 열매를 맺다
첫째 고리: 사람들 사랑하기
둘째 고리: 거듭남
셋째 고리: 예수님을 믿는 믿음
이것은 어떻게 작용하는가? 4절 후반부가 이 질문에 답한다(사슬의 셋째 고리).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거듭남이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이기는 이유는 거듭남이 믿음을 낳기 때문이다.
우리가 거듭날 때 하나님이 하시는 가장 즉각적이며 결정적인 일은 자신이 창조한 새 생명이 예수님을 다른 무엇보다 가치 있게 보도록 하는 것이다(고후4:4, 6 참조). 이처럼 예수님을 가장 가치 있게 볼 수 있는 영적 눈이 열리자마자 예수님을 진정한 보화로 받아들인다. 우리의 눈이 열려 예수님의 진리와 아름다움과 가치를 보게 되어 그분을 참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믿음이다.
믿음이 세상을 이기는 이유가 여기 있다. 세상은 세상에 대한 우리의 갈망(정욕)을 통해 우리를 속박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거듭나서 눈이 열려 예수님을 세상보다 더 갈망할 만한 대상으로 본다. 예수님이 육체의 정욕보다 나으며 안목의 정욕보다 나으며 탐욕과 자랑(교만)으로 우리의 목을 죄는 재물보다 낫다(막4:19 참조).
순서가 중요하다
이제 중생,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사람 사랑하기 간의 관계에 관해 처음 던졌던 질문에 답해야 할 차례다.
첫째, 중생이 믿음의 원인이다. 요한일서 5장1절이 이것을 분명히 말한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즉 믿음이 있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결과가 믿음이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이 낳으셨다는 즉각적인 증거다.
둘째, 사람 사랑하기는 이러한 믿음의 열매다. 요한이 4절에서 이런 방식으로 주장한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 곧 사람 사랑하기의 장애물을 극복하는 승리는 우리의 믿음이다. 그러므로 원인과 결과의 순서로 보면, 우리는 거듭나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계명을 무겁지 않게 느끼면서 행한다(즉, 사람들을 사랑한다).
하나님이 거듭남을 일으키신다. 거듭남은 그리스도를 참모습 그대로 보고 영접하는 새 생명의 창조이며, 이러한 영접은 세상에 대한 갈망의 뿌리가 자르고 우리를 해방시켜 사랑하게 한다.
왜 이 순서가 그렇게 중요한가? 이 순서가 구원하는 믿음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혼동하지 않게 해 주기 때문이다.
“존 파이퍼의 거듭남“중에서 part 3. 우리는 어떻게 거듭나는가? "9) 거듭난 영혼은 세상을 이긴다
10) 풍성한 관계의 열매를 맺다" 에서 발췌함
(163~17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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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유명산 저의 글입니다.
홀리죠이님은 그레이스님이 동자님이 올린 글에 대한 반론으로 올린 글에 [holyjoy 07:48 그러니, 그 책을 전체적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그레이스님이 올려 놓은 이 부분과 동자님이 올려 놓은 부분을 종합해서 읽어 보세요.... 연중론이 나옵니다. 제발, 한 부분, 자기가 일고 싶은 부분만 읽고 주장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댓글로 핀잔을 주셨습니다.
누가 먼저 일부분의 글을 올렸는데 정작 동자님에게는 칭찬을, 그레이님에게는 [제발, 한 부분, 자기가 일고 싶은 부분만 읽고 주장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무람으로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누가 봐도 한 눈으로 홀리죠이님이 편견을 갖고 있다는 아주 좋은 증거입니다. 왜 이렇게 회원분들을 편견을 갖고 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곳의 글들을 관망만하다가 '존파이퍼의 거듭남'을 읽은 저로서는 어이가 없어서 이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홀리죠이님은 존 파이퍼도 연중론을 지지한다면서, 존 파이퍼를 읽어라! 라고 여러차례 회원들에게 추천을 하셨습니다.
제가 홀리죠이님에게 묻고 싶습니다. 위의 존 파이퍼의 책을 정말 읽고 그렇게 추천하시는지 그것이 궁굼합니다.
어떻게 이 책이 연중론을 지지하는 책으로 보시는지요? 이 책에서 거듭남과 믿음에 대한 주요 설명은 7장에서 10장 안에 모두 있습니다.
7장은 동자님이 올리셨고, 8장은 그레이스님이 올리셨습니다. 책에 있는 내용을 발췌하셨기에 모두 사실입니다.
제가 9~10장에 있는 중요 구절을 발췌해 올렸드시 이 내용이 전부인데 무엇이 연중론을 지지한다는 이야기이신지요?
7장에 나오는 "거듭남은 믿음을 포함한다"라는 문구를 보시고 연중론을 지지한다고 생각하셨나요? 그러면 "믿음은 거듭남의 결과이다. 중생이 믿음의 원인이다."라고 존 파이퍼 목사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면서 순서가 중요하다고 하신 말씀은 어떻게 해석하시겠습니까?
연중론을 지지하는 책인지 아니면 전통 중생론을 지지하는 책인지를, 회원님들께서 보시고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모두 좋은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이젠 동자님의 윗 글을 아예 공지사항에 올려 놓으셨군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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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유명산님, 죄송합니다만, 한 가지 부탁드려도 될까요? 올려주신 글을 살펴보니, 위 한글번역본은 장 제목에서 제가 가지고 있는 영어원서(2009년판)과 차이가 있습니다. 장 제목(그간 올라온 본문 일부에서도)에서 오역이 보이는군요. 게다가 영어원서의 한 장(chapter)는 아예 번역본에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1) 한글번역본이 번역한 영어원서의 출간연도와 (2) 위에 목차 올리신 한글번역본의 출판연도를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참고로 번역이 아예 안된 장은 원서의 제5장 Faith, Justification, Adoption, Purification, Glorification 같습니다.)
원서상 제5장의 내용 중 일부는: "The answer is: The new birth and all of its effects, including faith and justification and purification and final conformity to Christ in heaven, would not be possible without the incarnation and life and death of Jesus..."
"First, consider that the aim of the new birth is to enable us to believe specifically in the incarnate Jesus Christ."...
"That’s the aim of the new birth. And so faith in Jesus Christ is the first evidence that the new birth has happened."... 입니다.
네, 디카이오스님 안녕하세요! 원서도, 한국판번역년도도 2009년 발행 동일합니다. 번역본 책 5장 제목은 하나님이 거듭나게 하신다 이고 그 안에 소제목은 영원한 생명, 대속과 부활 그리고 부르심,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입니다. 영어 원본을 갖고 계시면 비교하기가 좋겠네요. 옮긴이는 전의우 입니다. 빠진 것이 있으면 보충해 주시면 더욱 감사하구요.^^ 쪽지보세요.^^
정정합니다. 제가 갖고 있는 한글 번역본은 초판이 2009년12월14일이고, 8쇄발행 2012년 2월10일판 책입니다.
ㄴ 감사합니다. 번역에 기초가 된 영어원본은 제가 갖고 있는 것과 동일한 것 같은데, 혹시 번역본 어딘가에 왜 원서의 한 장 전체가 빠져 있는지의 설명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아~ 제가 다음은 메일밖에 안써서 쪽지수신 안함 설정되어 있어서 방금 수신가능 상태로 수정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ㄴ 유명산님 혹시 제가 쪽지수신가능 설정 전에 쪽지 보내신 거 있나요?
지금 올려주신 존파이퍼 거듭남 내용을 정리해보면 '말씀에 의해서 거듭남-> 말씀에 의해서 믿음' 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네요.
[질문] 여기서 이 <믿음>은 연중론에서 참된 회심이후에 갖게 되는 <믿음>으로 이해되어야지, 좁은 중생에서 넓은중생에 이르기 위한 (믿음)이라고 이해해서는 안되지 않나요? 보통 거듭남이라고 할때 연중론의 좁은 중생과 넓은 중생중, 넓은 중생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나요 ?
좁은 중생에서 넓은 중생을 이르기 위한 믿음이라는 말은 연중론에서나 이야기 하는 것이지 전통 중생론을 지지하는 분들이 그렇게 말한적 있나요? 믿음이 여러가지 있나요?
참된 회심을 전후로 해서 그 믿음이라는것은 다르지 않을까요?
네에~ 파이퍼 목사님 책에서는 사실 중생(regeneration), 수태(begetting), 새출생(new birth), 거듭남(being born again) 사이의 긴장이 없이 동의어로 사용됩니다. 그 중에서 New Birth가 가장 많이 사용되고요. (파이퍼 목사님 시무 교회가 '유아세례를 주지 않는' 침례교에 속했는지 구체적으로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더욱더 이해가 되고요.) 그래서 파이퍼 목사님의 글에서 논리적 인과적으로 새출생 이후에 믿음이 오는 것입니다. 새출생 이전에 믿음은 없습니다.
네, 책을 안본사람으로써 정말 헷갈릴수밖에 없네요^^
연중론이 워낙 본질적/해석학적으로 하나하나 구원의서정을 정립해놓은것이라 그냥 뭉뚱그려서 말하면 용어개념정립안되신분들은 혼동이 오실것같습니다 ^^;
새출생과 믿음의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파이퍼 목사님은 사실상 존 칼빈 목사님이 기독교강요에서 중생과 칭의에 대한 오시안더의 주장을 논박하실 때와 유사한 비유를 사용하고 계십니다. fire와 heat/light의 비유입니다. 불이 있는 순간 열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열이 불의 원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불이 열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요지는 논리적 인과적으로 새출생이 믿음에 선행한다. 하지만 새출생과 믿음은 시간적으로 동시적이다. (이런 면에서 파이퍼 목사님은 순간론자이십니다.) 아뭏든 카페의 토론이 "유효한 부름심"에 초점을 맞추었스면 합니다.
네, 디카이오스님, 더욱 확실하네요.^^ 인간이 중생에 끼일 자리가 어디 있습니까.. 확신의 좋은 글 감사합니다.^^ 그리고 여러날 전에 쪽지를 보냈는데 지금 핸드폰이라 저녁에 다시 보내겠습니다.^^
마우스님, 좁은 중생에서 넓은 중생에 이르기 위한 믿음이란 말은 결국 믿음을 중생안에 끼워 넣어 중생에 인간이 개입되는 아주 위험한 발상입니다. 중생은 전적으로 하나님사역인데 자꾸 그 자리를 인간이 넘보는 것이지요. 그래서 연중론 반대자들에게 비판받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을 자꾸 여러가지로 생각치 마세요. 혼선만 올 따름입니다.ㅠ
글 잘 읽었습니다. 존 파이퍼 목사의 거듭남이라는 책에서는 양쪽에서 긍정할 수 있는 표현이 다 나와있습니다. 책의 앞부분에 거듭남과 예수님의 관계 그리고 거듭남과 믿음의 관계를 간략하게 설명하면 "우리가 거듭날 때, 성령깨서 믿음을 통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함으로써 우리에게 새로운 영적 생명을 초자연저긍로 주신다."라고 요약하기도 합니다. 오히려 연중론을 비파하는 입장에서 보면 모순되게 이야기 하는 것으로 보이더군요. 제가 오독할 수도 있으니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차근 차근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그렇게 확인하시고 다시 읽어 보시겠다니 다행이고 솔직한 이야기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ㄴ 동자님, 사실 위에서 논란이 된 파이퍼 목사님의 글 일부는 사실상 오독 내지는 역자의 'reading into'의 결과입니다. 7장 "믿음으로 거듭난다"는 제목 번역의 원문은 "Through Faith in Jesus Christ"입니다. 8장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거듭난다"는 제목 번역의 원문은 "Through Intelligible Good News"입니다. 그리고 "본문 중 위에서 논란이 된 "거듭남은 믿음을 포함한다"는 원문 표현은 "The new birth involves faith."입니다. "포함(include)" 개념이 아니라 "연계성" 개념입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의 "유효한 부르심"에서 거론하는 것처럼, 유효한 부르심의 수단(instrument)에 관한 논의인 것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논리적 인과적으로 '새출생⇒믿음'의 순서를 강조하시는 것을 넘어서 파이퍼 목사님은 새출생과 믿음의 시간적인 동시성도 강조하십니다. 그래서 새출생은 믿음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순서가 뒤바뀌지는 않습니다.
번역의 오류가 많군요. 번역자도 잘 만나야 원작자의 글의 진가가 드러나는데요. 말은 아와 어의 차이가 큰데 말입니다.
디카이오스님 혹시 쪽지 내용을 공개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저도 그렇고 다른 분들도 읽어 볼때 참고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동자님은 희한한 성격이시네요! 아니 제가 디카이오스님께 쪽지를 보냈다는데 그 내용을 공개를 하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정말 도의에 어긋난 행동을 하고 계시는 것 아닌지요?
유명산님 저는 "공개하라" 가 아니라 공개해 주실 수 있는지 문의 했습니다. 님께서 이상하신듯 합니다. 그리고 비밀리에 논의하던 내용도 아니고 서로 논의하는 내용에 대한 것에 대해 공개할 수 있는지 문의한 것이 뭐가 잘못인지요? 제가 디카이오스님께 문의한 문구를 다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공개할 수 있는지 문의했습니다. 님의 모습이 저는 이해가 안 갑니다. 디카이오스님 공개하기 싫으시면 공개안하셔도 됩니다.
어떤 내용이 들어 있을줄 알고 공개해 주실 수 있나요?라고 합니까? 그렇지 않아요? 그 안에 지금 토론의 내용이 들어 있을지, 아니면 다른 내용이 들어 있을지 모르는 것 아닙니까? 그 쪽지 속의 내용을 떠나서 남의 쪽지를 보고싶어 묻는 것도, 개인한테만도 아니고 카페에 공개하실 수 없으신지요 .. 라고 하는 말이 평범하게 생각되는지요? 지금 오히려 이렇게 얘기하는 저한테 이상하다고 그러시는지요? 동자님?
유명산님 님께서 디카이오스님께 쪽지를 부탁하실 때 논의 내용에 대해서 문의하시면 쪽지를 부탁하셨지 않습니까? 제가 공개적으로 논의 하고 있는 내용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면 공개 가능 여부 문의는 안드렸겠지요. 그리고 저는 디카이오스님께 문의를 드렸지 님께 드린 것이 아닙니다. 가부는 디카이오스님께서 정하시면 됩니다. 제가 문의도 하지 않은 님께서 오히려 정색하시면서 다른 내용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시니 오히려 디키이오스님께서 이상해지시는 것 아닌지요?
[유명산] 17:12분 쪽지보세요.^^
[유명산] 18:23분 그리고 여러날 전에 쪽지를 보냈는데 지금 핸드폰이라 저녁에 다시 보내겠습니다.^^
[동자] 18:27분 디카이오스님 혹시 쪽지 내용을 공개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저도 그렇고 다른 분들도 읽어 볼때 참고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동자] 19:37분 쪽지를 부탁하실 때 논의 내용에 대해서 문의하시면 쪽지를 부탁하셨지 않습니까? 제가 공개적으로 논의 하고 있는 내용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면 공개 가능 여부 문의는 안드렸겠지요.
* 위 댓글에서 보시면 다른 아무 말없이 그냥 “쪽지보세요.” 라고 했고 그 아래 여러날 전에 쪽지를 보냈다고 했습니다.
여러날 전에 보낸 쪽지라면 현재 논의 내용도 아니고 분명 사적인 쪽지의 내용이었을 것을, 동자님은 오늘 디카이오스님과 논의 내용에 대한 쪽지라고 짐작 하시는지요? 19:37분에 하신 말씀은 이치에 맞지도 않잖아요?
* 제가 보낸 쪽지를 제 삼자가 “그 쪽지 내용 좀 모두에게 공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라고 하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을 사람이 어디 있지요? 이건 상식적인 문제이고 예의에 어긋난 바르지 못한 처사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예의에 어긋난 행동은 인정하지 않고 계속 당위성만 이야기하는 것은 동자님이 디카이오스님께 하신 그 요청이 바른 행동이라고 보시는 것입니까? 그렇게 말한 님이 아무 잘못도 없다는 것인지요?
유명산님~ 다시 확인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뭐가 오해였는지 이제야 알겠습니다. 님께 디카이오스님께 <쪽지보세요^^> 한 것을 제가 <쪽지보내세요> 라고 잘 못 읽었습니다. 님께서 기분 나쁠실 만합니다. 저는 님께서 디카이오스님께 쪽지 부탁을 한 줄 알고 그 내용이 책의 대한 내용이겠다 생각하여 공개를 디카이오스님께 부탁드렸습니다. 님께서 보낸 쪽지에 대해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잘못 보고 실례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널리 이해부탁드립니다.(-.-)(_._)(-.-)
그런 오해를 하셨군요. 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왜 저렇게 말씀하실까?라고 의문이 갔는데 이제 그 원인을 찾았으니 다행입니다.
실수나 착각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저도 이제 마음 편합니다.^^ 동자님, 편한 마음 가지세요. 감사합니다.^^
기분이 많이 상하셨을 터인데 이렇게 이해해주시니 고맙습니다^^
디카이오스님 제가 문의 드린 것은 다만 영문과 번역본이 비교가 가능하시니 틀린 점이 있거나 하면 알려 주십사 하는 마음으로 한 것이니 너무 부담은 갖지 마십시오. 그럼 저녁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ㄴ 네에 잘 알겠습니다. 두 분 서로 마음 상하지 않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감사합니다. (참, 전 한글본은 없습니다. 한글은 게시글에 올라올 경우만 볼 수 있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답변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 댓글에 의견 남겨 주셨네요. 제가 이제야 발견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잘 참조하겠습니다.
동자님, 제가 위에서 지적해드린, 논리적 인과적 순서성과 시간적 순간성(동시성, 불가분리성)을 참조하시며 파이퍼 목사님 책을 읽으시면 모호한 것이 확실해지실 것입니다. 파이퍼 목사님의 글은 '그런 면에서' 아무런 모순이나 모호한 점이 없습니다.
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