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요한계시록 1장 12-20절
설교제목 : 두가지 주님 얼굴
영혼의 명랑함으로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 주간 건강하셨습니까? 겨울의 시간이 되면 저의 뇌리에서 그림 하나가 늘 떠오릅니다.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아몬드 꽃’입니다. 정신적 혼돈 속에서 자신의 귀를 자르고 생레미 정신 병원에 입원했을 때, 동생 테오의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고흐는 조카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지만, 볼 수 없었기에 조카를 생각하며 그린 그림이 바로 ‘아몬드 꽃’입니다. 그가 죽기 전(1890년 7월) 마지막 봄에 남긴 작품이기도 합니다. 초봄에 피어나는 아몬드 꽃은 한겨울의 혹독한 고통을 이겨내고 꽃을 피우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뒤틀린 가지처럼 몸은 점점 쇠퇴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영혼만은 아몬드 나무에서 피어나는 꽃처럼 재탄생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겨울의 차디찬 시간 속에 있고, 세계는 온갖 전쟁과 불안의 소식 속에 있지만, 그 시간을 지나 새로운 희망의 꽃이 피어나고 있음을 마음에 품고 마음의 명랑함으로 주님을 굳건히 붙들며 든든하게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메타노이아
밧모섬에서 유배 중인 요한은 주님의 날에 성령에 사로잡혀 나팔 소리처럼 울리는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요한은 그 음성을 알아보려고 돌아섰습니다. 요한의 뒤에서 들려오는 큰 음성은 하나님의 목소리Vox Dei로 심리학적으로 자기의 목소리입니다. 이런 목소리는 상위의 인격이 자아를 압도하는 현상입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날 때 자아가 취약하면 엄청난 힘에 압도되어 사로잡히게 됩니다.
오래 전 상담했던 20대 후반 청년은 군대 말년 휴가 때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이런 음성에 사로잡혔습니다. 그의 말로는 갑자기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렸고, 너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옷을 전부 벗어야 된다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몸을 통제할 수 없어서 옷을 벗으려고 했고, 스스로 경찰에 신고하였습니다. 이런 증상은 일종의 환청입니다. 이런 경우 원형적 힘이 자아의식을 붕괴시키기 때문에 정신병을 일으킵니다.
요한의 환상에서 들은 목소리와 그 청년의 사례는 본질상 동일한 신의 음성이었지만 자아의식이 이 음성을 어떤 식으로 조응할 수 있는지, 없는지, 자아의 강도와 의식성에 따라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일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요한은 그 음성을 알아보려고 돌아섭니다. 돌아서는 행위는 ‘메타노이아metanoia’, 곧 돌아섬, 회심의 특성과 유사합니다. 그 음성을 주의깊게 살피려는 태도로 전환하는 것이말로 우리의 후면에서 들려오는 압도적인 힘에 굴복당하지 않고, 오히려 창조적인 방식으로 우리 자신을 세울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주님의 형상
요한은 돌아섰을 때 엄청난 주님의 형상을 목격합니다. 이것은 환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깨어있는 상태에서 무의식이 의식에 침투하여 그 내용을 보는 것은 환상입니다. 먼저 일곱 금 촛대가 있었고, 그 촛대 한가운데 ‘인자와 같은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의 모습은 발에 끌리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띠고, 머리와 머리털은 흰 양털과 같이, 눈과 같이 희었습니다. 눈은 불꽃과 같았고, 발은 풀무불에 달구어 낸 놋쇠와 같았고, 오른손에는 일곱 별을 쥐고, 입에서는 양날 칼이 나오고, 얼굴은 해가 강렬하게 비치는 것과 같았습니다(12-16). 여러분 성서의 구절을 잘 읽어보면 “무엇과 같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일종에 비유 혹은 은유로서 확정할 수 없는 이미지의 특성을 드러냅니다. 마치 꿈처럼 동일한 진술을 합니다. “이것은 무엇이다”고 정의내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의 내리는 순간, 그것은 이미 하나님이 아닐 수 있습니다. 무의식도 정의를 내리는 순간, 무의식이 아닙니다. 그리고 확정적으로 결코 단언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신현현의 장면, 환상의 장면입니다.
신성한 형상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먼저는 색에 있어서 금색, 흰빛의 특성이 있습니다. 금은 영원과 불멸을 상징합니다. 금은 변하지 않는 실체로서 신성한 특성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흰색은 모든 광선을 흡수하는 색으로 무채색이지만 모든 것을 아우르고 담아내는 색입니다. 죽음과 탄생, 순결과 정화, 영원성의 특성을 지닙니다. 그런데 그분의 머리와 머리털이 흰 빛을 띠고 있다는 것은 신성하고 영원한 사고와 인식, 신성한 지혜를 표상합니다.
두 번째 특성은 불의 이미지입니다. 불꽃은 찌꺼기와 불순물을 정화하고 새롭게 변환시키는 역동적 리비도의 특성을 지닙니다. 반대로 불은 파괴와 분노의 정서적 폭발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눈이 불꽃같다는 것은 촛대의 이미지와 비슷합니다. 이는 모든 것을 보고, 안내할 수 있는 특성을 시사합니다. 그리고 오른 손에는 일곱 별을 귀고, 입에서는 양날 칼이 나오고 얼굴은 해처럼 빛났습니다. 이런 이미지는 바로 태양의 이미지입니다. 이 모든 형상들을 종합해 보면, 부성상의 특성을 명백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환상 속에서 본 주님의 형상을 통하여 요한은 새로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생겼을 것입니다. 기존의 자신이 품고 있던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계시록에 나타난 환영들의 목적을 심리학적으로 융은 다음과 같이 진술합니다.
“묵시록 환영들의 목적은 평범한 요한이 자신의 밝은 성질 밑에 얼마나 많은 그림자를 감추고 있는가를 알도록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예언자에게 신의 무한성에 대해 눈을 뜨게 해 주는데 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인식할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이 신을 사랑했고,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데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그에게 영지Gnosis, 즉 신인식이 생겼으리라 말할 수 있다... 신은 사랑받을 수 있으며, 공포의 대상일 수 있다.”[C.G. 융, 융기본저작집 4권, 인간의 상과 신의 상, 솔출판사, p419.]
요한의 환상의 궁극적 목적은 새로운 신인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건과 현상, 꿈이나 환상을 경험할 때 가장 중요한 물음은 그것의 목적의미를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속에서 신성한 의미가 깃들여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묵시의 두 얼굴
우리가 주목해야 보아할 환상의 내용은 주님의 모습이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사실입니다. 심판의 특성을 지닌 쇠와 칼의 이미지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양날 칼은 모든 것을 분별하고 심판하는 로고스의 특성을 드러냅니다. 계속적으로 칼과 낫의 이미지로 파괴적이고 무서운 주님은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이런 엄청난 형상은 두려움에 떨게 합니다. 요한은 죽은 사람처럼 엎드려져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경험을 누미노제numinose, 신성력있는 강렬한 체험입니다.
우리는 이미 언급한 대로, 그리스도의 형상이 좋으신 하나님의 얼굴이 아닙니다. 사랑의 대상임과 동시에 두려움(공포)의 대상으로 등장합니다. 묵시적 두 얼굴이 아주 분명하게 펼쳐집니다. 개인의 삶과 집단에서 우리는 이런 두려운(공포의) 하나님, 양날 칼로 무섭게 심판하는 듯한 주님의 얼굴을 마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묵시적 두 얼굴을 하고 있는 하나님의 상은 실제로 우리에게 기독교 교리가 가진 체계에 관해 다시금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가진 어둠, 신의 그림자의 측면에 대한 재고입니다. 묵시적 환상 속에서 요한은 하나님의 어두운 측면을 목격했고, 새로운 신인식을 할 수 있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어두움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무자비한 전쟁의 신이었고, 질투하는 신이어서, 선택받은 백성이 다른 신을 섬기면 가차없이 심판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하나님은 그런 야만적 본능적 특성에서 발달하여 높은 정신적 원리로 고양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리스도는 신인으로서 어두움은 사라지고 밝은 빛의 측면, 선한 면만 강조되었습니다. 어쩌면 요한은 다가올 먼 미래의 새로운 신의 형상을 목격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어두운 하나님의 측면을 어떻게 수용할 수 있는가가 중대한 물음으로 제기됩니다.
지난 주 그동안 미루어놓았던 번역작업을 다시 시작하고 정리하면서 우리 시대의 배경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다시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한수엘리 에터 박사는 2022년 런던 융 클럽 학회에서 ‘원형’이란 주제로 발표했습니다. 한수엘리 에터는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집단적 무의식은 단지 집단적 인간 경험 그 이상입니다. 융에 따르면, 그것은 개인적 발전과 집단적 발전 속에 있는 모든 창조적이고 파괴적인 과정의 배후에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극적인 변화의 이면에는 어떤 원형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대답은 코로나 위기의 초기 꿈에서 나에게 주어졌습니다. 나는 마치 밤새도록 한 문장을 반복해서 듣는 것 같았습니다. “위기는 변화와 갱신을 위한 촉매제입니다. 모든 것을 재고하라.” 그러므로 나는 우리 모두를 사로잡은 그 원형을 자기의 원형인 갱신의 전형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폰 프란츠가 언급했듯이, “그것 역시 정적인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 갱신의 과정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배열될 때, 모든 기본적인 변환의 조건인 비밀스럽고 무한한 질서의 원리가 작용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원형 역시 파괴와 건설을 포함하는 양극성입니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어디로 이어질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융심리학과 동시성, 융심리학연구소, 근간]
촛대 가운데 계신 분
그런데 오늘 이런 어려운 문제 앞에서 우리에게 부과된 중대한 일 하나를 오늘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20절에 의하면 일곱별은 일곱교회의 심부름꾼인 천사이고, 일곱촛대는 일곱교회입니다. 일곱교회 가운데 주님이 그 형상을 드러내셨습니다. 촛대는 빛을 비춤으로 아직 어둠에 있는 무의식적인 것을 의식의 차원으로 안내하여 의식화하는 도구입니다. 이는 교회의 기능이자, 우리 안에 종교적 원리의 중대한 역할입니다. 이런 의식의 불을 밝히는 것은 개인과 교회의 사명일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과제는 한 개인이 하나의 촛대로서 무의식의 어둠을 밝히는 것입니다. 융의 그의 자서전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토록 강조했던 내용입니다.
인간의 과제는 - 무의식으로부터... 엄습해 오는 내용들을 의식화하는 것입니다. 무의식 상태에 머무르거나 무의식과 동일시하는 것은 점점 더 많이 의식을 만들어가야 할 그의 사명에 불충실한 것이다. 인간 실존의 유일한 목적은 단순한 존재의 어둠 속에 불을 밝히는 것입니다.[아니엘라 야훼 엮음, 회상, 꿈 그리고 사상, 집문당, p407. MDR, p326.]
그리스도의 빛은 우리 개인과 교회의 촛대 위에서 불로 나타납니다. 우리의 어둠, 무의식성은 무엇인가요? 이 시대의 어둠과 무의식성은 무엇인가요? 그 어둠에 겸손하게 불을 밝힐 수 있는 우리 모두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