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집에 오면서 보니까 탄금대 주위로 가을색이 확연해졌어.’
‘보았어? 계명산 정상은 벌써 잎이 지기 시작한 것 같던데? 단풍이 제법 내려섰어.’
‘내일 스케줄이 어떻게 돼? 난 비었는데? 당신도 비었으면 어디 가까운 데로 갈바람이나 쐬러 나갈까?’
‘나도 비었어. 그럼 어디를 갈까? 가고 싶은데 있어?’
‘옛날처럼 이럴 때 남산이나 대림산으로 단풍구경 가면 좋겠는데 등산은 안되겠고........ 어디 가을꽃 축제하는데 없나?’
‘가을 축제하는 곳이야 많이 있지. 한 번 검색해 볼게. 가볍게 산책 삼아 다녀올 수 있는 가을축제로 가까운데.’
다음날 아침 우리는 가벼운 마음으로 나들이를 나섰다. 산책을 겸해서 말이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바로 여주(驪州)다.
여주(驪州).
여주는 내 고향 충주랑 지리적이나 역사적으로 그냥 옆집이나 다름없다. 피를 나눈 사촌 형제처럼 모든 것이 많이 닮았다. 오히려 그런 이유에서인지 등을 맞대고 있는 지척이면서도 실제로 방문했던 기억은 거의 없다. 대학 때 역사 교수님이 거의 강제로 야외수업을 신륵사로 정하였는데, ‘출석을하던지 안 하던지는 상관 안 하겠는데, 좋은 성적은 기대하지 말라’ 하시는 바람에 졸쫄 거리며 따라다녔던 것이 전부였다. 역사와 여행을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정작 수업이라 하니까 뒤에서 딴짓만 열심히 하느라 아무런 추억 하나 남겨오지 못했다. 그 후로 살면서 한두 번 지나친 적은 있어도 어떤 목적지를 두고 여행으로 다녀 온 기억은 전혀 없다.
왜 그랬을까?
가을색이 짙어가는 어느 쉬기로 한 날에 여주를 향해 차를 몰고 다니는데 모처럼 쾌청한 가을하늘이 펼쳐지고 있다.
다만, 여주 근교 고석도로 휴게소엘 들렸는데 아뿔싸. 부는 바람의 세기가 장난이 아니다. 시베리아에서 오는 북풍한설까지는 아닐지라도, 이건 나들이엔 치명적일 수 있을만큼 세차게 찬바람이 몰어치고 있다.
집에서 아파트 창밖으로 맑고 파란 하늘에 눈부신 햇쌀이 내다보였지만, 나뭇가지가 세차게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보고 패딩을 챙겨오기는 하였는데, ‘아니 가을 나들이 좀 하자는데, 가을은 어디 가고 생판 기대조차 안한 겨울이 이렇게 들이닥친단 말이야?’ 하는 투정 섞인 걱정이 생겨난다.
‘이러다 갈바람 구경이고 뭐고 말장 도루묵 되는 것 아니야?’
그때, 불현 듯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과거 마르세유에서의 악몽이 되살아 난다.
‘설마. 마르세유 깔링크 트래킹이 다시 재현되는 것은 아니겠지? 갑자기 그날의 얼어죽을뻔한 악몽이 새삼스레 떠오르네?’
‘그렇게 까지야 되겠어? 거기다 오늘은 그래도 패딩을 챙겨왔잖아?’
‘안되면 어디 창밖 풍경이 멋진 카페에 앉아서 우리애들 이바구나 또 까다가 커피 마시고 돌아오면 되지 뭐.’
‘어디 잘 찾아봐. 마르세유 올드포트의 사마르테인 같은 카폐가혹시 있나 잘 살펴봐.’
카페 사마르테인(Cafe Samaritaine)이라............
우리가 기억하는 한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편안하고 낭만적이며, 멍때림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준 진정한 카페’를 떠올리다 보니, 마르세유 여행의 추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고, 마르세유를 떠올리자니 깔링크 해변 바위벼랑 길에 불어왔던 모질고 세찬 지중해 겨울바람이 떠오른다.
지금 피부에 와 닿는 여주의 가을바람이랑 마르세유 바람이랑 너무나 닯지 않았는가?
그런데 아무리 차를 달려보아도 <카페 사라르테인>은 보이지 않는다.
마르세유에 체류하는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수시로 드나들었던 사마르테인은 그만큼 좋았고 인상적이었다. 사마르테인 야외테라스 테이블에 앉아서 커피라곤 에스페레소가 전부인 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알롱제 커피를 시키고 유리잔에 뜨거운 물을 부탁해 희석시켜 아메리카노를 매번 만들어 마셨다 . 에스페레소야 이탈리아도 프랑스도 다 있지만, 아메리카노가 이탈리아에는 있는데 프랑스엔 없다. 듣자니 근자엔 프랑스에도 유명한 여행지에선 아메리카노를 파는 곳이 생겼다고 한다.
아!!!!! 그리운 지중해! 유럽이 몹시 그리워진다.
그리고 그곳에 멍을 때리는 동안 내내 크리스 디 버그(Chris de Burgh)의 <나타샤 댄스(Natasha Dance)>를 듣고 또 들었다. 그의 노래 대부분을 좋아하지만, 이상하게도 이스탄불에서 보스포러스 해를 바라보거나, 마르세유에서 지중해를 바라보면 <나타샤 댄스>가 듣고 싶어진다.
여주에 불어오는 바람과 마르세유 깔링크 바람이 어딘지 모르게 닮았다고?
부랴 부랴 핸디폰에 저장해 둔 음악창고에서 노래를 하나 꺼내 선택하고는 재생 버튼을 눌렀다.
‘하이고야. 그놈의 청승도 점 점 깊이를 더 해가는 구만. 가을은 정말 가을인가벼? 가을이라 샹송이여?’
‘여강에 가을이 차니 이브 몽탕의 <고엽>이 실려 흐른다. 여주(驪州)
<고엽> - 'Les Feuilles mortes(Autumn Leaves)'
Oh! je voudrais tant que tu te souviennes
Des jours heureux où nous étions amis.
En ce temps-là la vie était plus belle,
Et le soleil plus brûlant qu'aujourd'hui.
Les feuilles mortes se ramassent à la pelle.
Tu vois, je n'ai pas oublié
Les feuilles mortes se ramassent à la pelle
Les souvenirs et les regrets aussi
Et le vent du nord les emporte
Dans la nuit froide de l'oubli.
Tu vois, je n'ai pas oublié
La chanson que tu me chantais.
C'est une chanson qui nous ressemble
Toi qui m'aimais, et je t'aimais
Nous vivions tous les deux ensemble
Toi qui m'aimais, moi qui t'aimais
Mais la vie sépare ceux qui s'aiment
Tout doucement, sans faire de bruit
Et la mer efface sur le sable
Les pas des amants désunis.
아, 네가 정말 기억해줬으면 해
우리가 친구였던 그 행복했던 날들을
그때는 삶이 더 아름다웠지
태양도 지금보다 더 뜨거웠고
--- 이브 몽탕의 초저음 나레이션이 여기까지고, 여기서부터 노래가 시작됨. ---
낙엽들이 삽으로 쓸어 담을 만큼 쌓여있어
봐, 난 잊지않았어
낙엽들이 삽으로 쓸어 담을 만큼 쌓여 있고
추억과 후회도 그렇게 쌓여있지
북풍이 그것들을 실어 가네
망각의 차가운 밤 속으로
봐, 난 잊지않았어
네가 나에게 불러주던 그 노래를
그건 우리를 닮은 노래야
나를 사랑하던 너, 그리고 너를 사랑하던 나
우리 둘은 함께 살았지
나를 사랑하던 너, 너를 사랑하던 나
하지만 삶은 사랑하는 이들을 갈라놓지
아주 조용히, 소리도 없이
그리고 바다는 모래 위에서 지워버리네
헤어진 연인들의 발자국을
너무나 그리운 마르세유 올드 포트의 <카페 사마르테인>과 불행한 여인 (에디트 피아프), 그리고 (이브 몽탕).
프랑스 파리의 가을을 떠올리면 언제나 0 순위로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 노래 ‘고엽(Autumn Leaves)’은, 1945년 작곡가 조제프 코스마(Joseph Kosma)가 본래 발레 음악으로 멜로디를 먼저 만들었다. 평소 코스마와 친분이 있던 영화감독 마르셀 까르네가 새 영화 ‘야간문(Les Portes De La Nuit)’을 제작하면서 주제가를 요청하자 당시 프랑스에서 아주 유명했던 시인 자크 프레베르(Jacques Prévert)가 사전에 코스마가 작곡해 두었던 곡에 가사를 붙이면서 샹송 불후의 명곡 ‘고엽(Autumn Leaves)’이 탄생했다.
이 영화를 통해 위대한 스타가 탄생하게 되었는데, 마르세유에서 올라온 이브 몽탕(Yves Montand)이란 청년이 이 작품을 통해 데뷔를 했다. 아울러 우연히 그의 노래 솜씨를 알게 된 감독의 배려로 영화 주제가를 불렀는데, 그 노래가 히트를 친 ‘고엽(Autumn Leaves)’이다. 1950년, 미국의 작사가인 조니 머서(Johnny Mercer)가 이 노래를 영어로 개사해서 영어권에서 발표하면서 ‘고엽(Autumn Leaves)’은 다시 한번 세계적으로 히트한 샹송이 되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고 일어났더니 세계적인 슈퍼스타가 되어 있더라’는 놀라운 이야기의 전형이 된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가수이자 영화배우로 평생을 살았다. 더해서 아랑드롱과 쌍벽을 이룰 만큼 숱한 여성 편력을 벌이며 평생을 살았다. 헐리웃(미국)에 진출해서도 마찬가지였다. 20세기 바람둥이 계보에 그를 빼놓고는 이야기가 성립될 수 없다. 거기다 ‘나쁜 남자’의 전형은 오히려 아랑드롱 보다도 한 수 위라고 할 수 있다.
2차 대전이라는 세기말적 상흔이 휩쓸고 간 세계는 어디나 마찬가지였다.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빼앗아 갔지만, 남겨진 사람들은 어떻게든 다시 살아나야만 했다. 전쟁내내 히틀러의 점령지였던 파리는 더더욱 그랬다. 아니 프랑스 전체가 모두 그랬다. 전쟁의 상흔을 딛고 일어서려는 프랑스인들에게 유일한 위안은 한 여성 가수가 따뜻한 위로와 용기와 사랑을 당부하며 불러주는 노래였다. 그 여성이 바로 ‘프랑스의 영원한 국민가수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다. 그녀는 프랑스를 사랑했고, 프랑스가 그녀를 열렬히 사랑했다. 그랬던 피아프가 지방 공연으로 마르세유를 찾았고, 공연 후에 저녁 식사를 겸해 쉴 수 있는 카페와 나이트 클럽을 섞어놓은 것 같은 곳을 찾았다. 마침 한 가수 지망생으로 아르바이트 삼아 클럽 무대에서 노래를 하던 한 청년을 만났다. 그 가수 지망생 청년이 바로 이브 몽탕(Yves Montand) 이었다. 무슨 운명이었는지 피아프는 첫눈에 몽탕에게 홀딱 빠져버리고 말았다. 6살 연하의 무명 신인에게서 큐피트의 황금 화살을 맞은 것이다.
그녀는 모든 것을 버렸다. 모든 것을 포기했다. 대신 사랑을 택했다.
마르세유에서 살림에만 몰두하면서 이브 몽탕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전부로 생각하며 살았다. 주변의 만류도 설득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저 이브 몽탕의 여자로 살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행복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몽탕을 위해 음악적 레슨도 하고 자신이 가진 인맥과 재산을 다 바쳐서 몽탕이 가수로 성공하기만을 바라며 헌신했다. 그러나 해가 바뀌고 또 바뀌어도 몽탕의 성공 조짐은 마냥 요원해 보이기만 했다. 점차 힘에 부쳐가기 시작했다.
거의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파리에 있는 연예 기획사의 매니저에게 부탁을 했고, 얼마 지나 연락이 왔다. 잠시 쉰다는 생각으로 기회를 찾아본다는 심정으로 영화계에 데뷔를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연락이었다. 그렇게 해서 피아프는 마르세유에서 기다리고, 이브 몽탕은 영화 데뷔를 위해 파리로 올라갔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의 계기로 다가온 영화가 바로 ‘야간문(Les Portes De La Nuit)’ 이었고, 우연히 부른 주제가 ‘고엽(Autumn Leaves)’이 히트를 치게되었던 것이다.
에디트 피아프는 크게 기뻐하면서 마르세유로 돌아올 이브 몽탕을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끝내 이브 몽탕은 마르세유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이미 스타였고 파리에서 스타로서의 삶을 마음껏 즐겼다.
연이어 신문에 오르는 몽탕의 낯뜨거운 염문 기사가 그대로 피아프에겐 이별 통지서가 되었던 것이다.
에디트 피아프는 서서히 죽어갔다.
술에 취하고 약물에 취하고 수시로 자살을 기도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말했다. ‘버려진 여자는 감내할 수 있겠는데 잊혀진 여자로는 살기 힘들다’고 까지 말했다.
하지만 끝내 이브 몽탕은 피아프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아예 돌아 보지도 않았다. 당대 프랑스 최고의 은막의 스타였던 시몬느 시뇨레와 동거에 들어갔다는 소식은 에디트 피아프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받아들여 졌다.
그 충격 끝에 그녀는 점차 현실을 자각하고 자신을 추스르며 다시 무대로 돌아갔다. 다른 사람도 만났고 재기도 했지만, 이미 무너졌던 정신과 육체는 점점 그녀를 깊은 수렁으로 이끌어 갔다. 약물 의존에다 알콜 중독에다가 심한 교통사고까지 겪으면서 무대에 다시 설 수도 없는 상황에서, 1963년 10월 10일 프랑스 남동부 그라스(Grasse)에 있는 그녀의 빌라에서 간부전으로 인한 동맥경화로 47세에 사망하였다. 시신은 현재 파리의 페르라셰즈 묘지에 묻혔다.
이브 몽탕은 평생동안 줄곳게 에디트 피아프를 멀리했다. 1991년 사망하면서는 시몬느 시뇨레 옆에 뭍혔다.
나쁜 남자와의 악연은 끝내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영원히 남았다.
가을이면 다시 생각나는 샹송 ‘고엽(Autumn Leaves)’의 가사처럼 말이다.
유튜브에 찾아보면 있을 터인데, 그런 ‘고엽(Autumn Leaves)’을 에디트 피아프도 불렀다. 누가 어떤 의도록 피아프에게 이 노래를 녹음하도록 이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노래를 녹음실에서 부르는 에디트 피아프의 마음은 어땠을까? 자신에게 불어닥친 모든 슬픔과 아픔이 모두 이 노래에서 시작되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아쩌면 그것은 너무 가혹한 고문이 아니었을까? 하여 나는 에디트 피아프 버전으로 이 노래를 듣는 것을 지극히 꺼린다. 그래서 그냥 ‘원래 나쁜 놈’의 목소리로 듣는 것이 훨씬 편하다.
‘너를 사랑하는 나,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너.’
미라보 다리아래 세느강에 가을을 닮은 붉은 낙엽 하나가 떠내려간다. 에디프 피아프를 닮았다.
고려 말 목은(牧隱) 이색(李穡) 선생은 여주의 산과 강을 이렇게 노래했다. ‘여강 굽이굽이 산은 그림처럼 아름답구나. 절반은 단청 같고 절반은 시(詩)와 같구나.’ 라고 기록으로 남겼다.
육상교통이 발달하기 전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과 물산이 강의 뱃길을 통해 오고 가던, 아마 당시로는 국가의 고속도로 역할을 하였던 것이 바로 한강이었다. 그 한강에 생겨난 조선시대에 4대 나루 중 이포나루(梨浦)와 조포나루(潮浦)라는 2개의 나루가 이곳 물류의 중심지랄 수 있는 여주에 있었다. 하여 옛사람들은 황포돛배를 타고 여강을 오가며 신륵사를 지날 때 동대 위 높게 솟은 벽탑을 보며 무사운행과 안녕을 기원했을 것이다. 강과 어우러지는 절경을 간직한 그곳에 세워진 신륵사는 예나 지금이나 탐방객의 사랑을 받으며 여강과 함께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강원도 태백 검룡소(儉龍沼)에서 발원한 남한강(南漢江)의 물줄기는 아우라지를 흘러서 도담삼봉을 거쳐 청풍을 지나 탄금대에서 속리산에서 발원해 흘러온 지류인 달래강(甘川)과 합쳐져 거대한 물줄기를 형성하면서 흐르고, 부론 법천에서 다신 한번 강원도 원주 지역에서 흘러내린 섬강(蟾江)을 받아들이면서 진정한 남한강(南漢江)이라는 한반도 중앙을 관통하는 대동맥을 왕성시키게 된다. 이 거대한 남한강 줄기가 여주(驪州) 고을을 지나치면서, 사람과 물산이 쉬어가는 시장이 섰으니 바로 조포나루(潮浦)다. 조포가 발전하면서 확장을 필요로 하자 비교적 인근인 30리 하류에 이포나루(梨浦)가 생겼다. 이 구간의 남한강 줄기를 처음부터 현지 사람들은 여강(驪江)이라 바꿔 부르면서 고을에 대한 자긍심으로 삼았다. 그 여강은 한참을 더 흘러내려 가다 양수리에서 강원도에서 흘러내려온 북한강(北漢江)과 합치면서 진정한 한강(漢江)으로 거듭났던 것이다. 팔당을 지난 한강을 광나루터를 지나 남한강 수운의 시작점이자 종점인 마포나루에서 사람과 물류를 내려놓고 다시 흐르고 흘러서 강화도를 통해 서해로 빠져나갔다.
그 과정에서 여주는 교통과 물산의 중요 거점이자 곡창지대를 품고있는 사람 살기에 아주 적합한 고을이었던 것이다.
여주(驪州)를 가리키는 고을 주(州)는 본래 내 천(川)에 점이 세 개 더해진 것이다. 여기에서의 점은 사람과 주택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거대한 하천가(驪江)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살면서 마을을 이루고, 더 커져 고을(도시)을 형성한 것이 바로 여주(驪州)다. 우리나라의 많은 지명 중에 주(州)를 붙인 도시들이 많이 있다. 원주. 나주. 공주. 광주. 상주. 영주 등이 있는데, 이들의 공통점이 바로 강가에 들어선 지리적 특징을 가지고 있는 고을(州)이라는 뜻이다.
그중에서도 여주(驪州)를 이야기하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살가운 친척형이나 삼촌 쯤 된다고 할까? 아니면 여러 면에서 멘토 역할을 한 아주 중요한 고을이 있으니 바로 인근 남한강 상류의 충주(忠州) 고을이다. 고을의 경계를 일부 직접 맞닿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 만, 역사적으로 고을로 형성된 시기에서 차이가 나고, 고을로서의 중요성에서도 차이가 제법 있다. 굳이 되집어 말하자면 어느 정도의 레벨 차이는 분명 있었다 라고 하겠다. 지금의 시점에서까지 우월적 지위를 논하고자 함은 아니니 혹 여주 현지인들 입장에서 다른 견해가 있다면 양해를 구한다.
백제 영역에서 고구려 영역으로, 다시 신라의 영역으로 변모하는 과정도 비슷하지만, 충주는 고대사 이래로 통일신라의 경주 다음의 중심 도시였던 중원경(中原京)이라는 신라 제2의 도시로까지 중요시되었고, 따라서 그만큼 발전된 도시였던 것이다. 중부지방 일대가 대부분 중원경의 관활이었던 것이다. 통일을 하고 보니 남쪽 구석에 극단으로 치우친 경주만으로 통일 신라를 다스리기에 어렵다고 판단하여, 중원경을 세우고 영역의 중간에서 왕족과 귀족과 관리를 파견하여 원만한 통치행위를 지속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여주가 나루터(浦. 교통) 위주의 고을이었다면, 충주는 교통의 요지로서는 더말할 나위가 없었고, 그 나루터의 업무 위에 보다 더 중요하고 큰 업무랄 수 있는 창(倉)이 더해졌다. 강원도 일부, 경상도, 충청도 북부의 세금을 거두어 보관했다가 한양의 도성으로 실어나르는 임무를 위한 가장 중요한 요충지였던 것이다. 조선시대 설치된 가흥창(嘉興倉)은 남한강 수운의 가장 중요한 나루터 이자 창고였으며, 어찌나 크게 번성했는지 웬만한 고을만 했다고 한다. 지금의 목계(牧溪里) 땅으로, 그 가흥창의 일부가 지금 (충주목계 야영장)이 되었다.
어쨌거나 여주는 충주의 집안 사촌 동생 정도로 형의 전철을 고스란히 밟아가면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필자는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 지리적 자연적 환경이나 역사적 배경까지도 너무나 닮았다.
목계 나루터에서 100mm 스티로폼 두 장 포개서 띄워 놓고 올라타고 드러누워서, 낮잠 한숨 즐기고 깨면 아마도 그새 신륵사 정자 아래 조포나루(潮浦)에 도착했을 것이다.
정말로 남한강 물줄기로 따지자면 충주와 여주는 개울건너 옆마을이다. 방금 피력한 나의 이야기는 정말 사실이다.
내 친구의 부친이 실제 영월 아우라지에서 한양 마포나루까지 뗏목으로 목재를 내다가 파시던 목상(木商)이셨다.
집은 금수산 아래 청풍 능강리셨는데, 가을이 지나면 영월. 태백. 봉화에서 좋은 목재(건축 자재. 땔감용)를 사서 벌목을 하고, 다듬어 건조를 시키면서 영월지역 남한강 상류로 날라 모아놓았다. 봄이 되어 눈이 녹아내리고 4월 봄비가 쏟아져 강물의 수위가 높아지면 밧줄로 엮은 뗏목을 타고 험난한 급류를 타고 넘으면서 한양 마포나루까지 운송했다고 하다. 물이 차야 운행이 가능하니 물살은 거세기가 그지없었고, 이 운행은 브레이크가 없어 멈출 수가 없는 논스톱 F1 그랑프리와 같았단다. 물길을 잃어 아무데나 부딪치면 뗏목은 부서지고 7~8명의 인부들은 모조리 수장되기 일쑤였다. 한해 농사는 물론 목숨까지 잃는 것이다. 날시가 더더욱 중요했단다. 야간에도 멈출 수가 없었으므로 달빛에라도 의존해야 하는데, 날이 흐려 구름에 달이 가리거나 비가 내리면 라이트가 모두 고장난 차를 몰고 야간에 고속도로를 달리는 경우가 되고 말았다.
새벽 미명이 밝을 때 아우라지를 출발하면, 굽이쳐 흘러내려가는 수량(물길)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이틀 밤을 지내고 사흘째 오후에 마포나루에 도착했다고 한다. 늦어도 해질녁까진 도착을 해야 기다렸다가 뗏목을 붙잡아 강변에 당겨서 매줄 인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포나루를 그냥 지나치게 되면 다시 엄청난 운반비 부담이 뒤따르는 것이 뻔하지 않겠는가.
네이버 지도에 자전거 여행 경우로 거리 체크를 해보니 지금 당장 영월 아우라지에서 마포나루까지 약 261km가 나온다. 그 거리를 물길로 사흘 만에 주파를 하는 것이다. 마포에서 목재 거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은 빠르면 12일, 보통은 15일 정도가 걸렸다고 한다. 당시의 길은 지금과 전혀 달라서 강과 개울을 돌아서 건너고 산길과 언덕길을 통해야 했rh, 밥을 먹고 잠을 자야 하는 고을이 지금처럼 없었다면, 얼추 350km 정도로 잡아야 하지 않을까? 친구의 부친은 마포에서 능가리를 7일에서 10일 사이에 다니셨단다.
그렇게 힘이 든 만큼 벌이는 제법 컸다고 한다. 일 년에 한두 번, 많으면 세 번 뗏목을 타고, 농사를 지으면서 내 친구를 충주로 유학을 보내셨다. 가끔은 허리춤에 몫돈을 움켜쥐고 집에 가다가 주막에서 예쁜 주모를 만나거나, 투전판을 기웃거리다 빈털터리가 되는 사람도 실제 있었다고 한다.
<언제고, 이런 내용들을 가지고 (내고향 문화 기행)을 기획해 볼까 궁리를 하고 있는 중이다. 기대해 주시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여주 나들이로 택한 첫 방문지는 당남리섬(대신섬)이라는 남한강 가운데 있는 섬으로 계절마다 바꿔가면서 꽃밭을 가꾸는 아름다운 곳이다.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찼는 명소라는 소식을 접하고 찾아가는 중이다.
여주(驪州)를 염두에 두었을 때, 가장 먼저 찾아가려고 마음먹은 곳은, 당연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인 ‘세종대왕릉(英陵)’ 이었다. 하지만, 그 역사적인 장소를 생각하자니 또....... 우리 병아리들이 떠오른다. 국내이던 국외이던 역사와 문화가 담긴 장소는 이 할아버지가 함께 다 보여주고 싶은 게 이 할아버지 바람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생각을 바꿔 당남리 섬으로 목적지를 바꾸었다. 대신 여주는 꼭 다시 온다. 우리 소중한 병아리들과 함께 말이다. 그때 세종대왕과 효종대왕의 이야기를 많이 나눌 것이다.
담낭리 섬은 가을에는 코스모스와 메밀꽃이 섬을 가득 채우는데, 그 섬으로 들어가는 작은 개울 다리를 건너면 먼저 하양게 나부끼기 시작하는 억새밭과 노란 황화 코스모스 길이 시작된다. 이쯤에서 길이 왼쪽과 오른쪽으로 갈리는데, 메인 코스모스 가 가득한 꽃밭은 하류 쪽인 왼쪽이다. 비교적 코스가 짧은 오른쪽을 먼저 맛보듯 둘러보고 왼쪽으로 돌아가는 게 나은 선택으로 보인다.
도깨비 풀 같은 가시를 가진 노란 꽃봉오리를 보고는, ‘에이, 무슨 코스모스가 저래? 하얗고 보라색이고 분홍색이고 해야 코스모스지. 아니야. 김상희 선생님한테 물어봐?’라고 우겼는데, 네이버 생물도감 검색해 보니 황화 코스모스가 맞나고 나온다.
헐!!!! 쓰으 버어어어어얼.(개망신)
걷기 좋고 가을에 취해보기 좋았고 사진찍기 좋았다. 저만치 안쪽엔 천일홍 단지도 예쁘다는데.......
그런데 강변 벌판이다 보니 바람이 장난이 아니다.
하여 바람 핑계 대고 서둘러 철수 하기로 한다. 카페 사마르테인은 아니더라도 커피도 고프고, 가까운데서 늑기전에 점심도 먹어야겠다.
이럴 때 나는 곧 잘 외친다. '당 떨어졌어. 커피가 필요해.' 라고 말이다.
돌아 나오면서 보니 개울건너 저만치 야트막한 산자락에 성터 비슷한 것이 보이고 사람들도 보인다.
‘아! 저게 파사성(婆娑城)이구나. 충주로 치면 영락없는 장미산성(薔薇山城)이네. 한 번 올라가 보고 싶기는 한데....... 오늘은 나들이 산책하기로 한 날이지? 담에 병아리들 데리고 오면 올라가 봐야지.’
이포보와 파사성을 올려다보면서 이포 나루를 떠난다. 여주시 금사면 이포리와 대신면 천서리를 연결하는 이포보에서 돌아서 내려다보는 당남리섬의 전경이 그대로 가을의 정취를 보여주는 듯하다.
먼 옛날 영월과 정선의 아우라지에서 출발하여 마포나루로 향하는 뗏목이 아래로 향하고, 소금과 소금에 절인 해산물을 가득 싣고 올라가는 돛단배와 사람들을 실은 황포돗대의 풍경이 마치 조선 시대로 돌아간 듯 그대로 눈앞에 어른거린다.
차를 몰고 향한 곳은 오곡나루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여주 출렁다리다. 이곳에서 식사를 먼저하고 출렁다리를 구경한 후에 시간을 가지고 산책삼아 천천히 신륵사를 둘러볼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평일이어서 였을까? 아니면 경기가 영 신통치 않음 때문일까? 찾아간 두 군데 식당이 모두 굳게 문을 닫고 있다.
‘우리 동네서 막국수 안 먹은 지가 꽤 오래되었는데 모처럼 막국수 먹어볼까? 유명한 천서리 막국수가 본래 이 동네 근처잖아? 뭐가 다른지 한번 먹어보자.’
하여 행사장 입구의 천서리 막국수 집엘 들렸는데 나름으론 맛있게 잘 먹었다. 우리 고장에 널리 퍼져있는 메밀 새싹 막국수와는 다소 차이가 분명한 그런 맛이다. 음식의 맛 평가가 지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전제를 깔고 간단하게 평을 하자면, ‘슴슴하다. 조금 강하게 끌어당기는 맛이 조금 아쉽다고나 할까?’ ‘좋은 음식이란 본래 식재료 본연의 맛을 최대한 살리는 것이라고 하잖아. 그동안 우리가 강한 향신료에 끌려다니는 막국수를 거의 먹었었나 보지. 슴슴하기는 하지만 밍밍한 것은 아니잖아?’ ‘그런 나도 그렇게 느껴.’라며 식당을 나섰다.
현재는 축제 기간이고 이곳에서 신륵사 입구까지 축제 노점 마켓이 열린다고 했고, 매장 설치는 분명히 있는데, 무언가를 팔고 있는 행사 코너는 단 한 곳도 없었다. 또 인근 행사장에서 버스킹 행사가 열린다고 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얼핏 생각에, 축제가 열리는 시간이 야간에 맞춰 진행하는 축제인 것으로 보인다.
바람 때문에 잠시 망설이다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출렁다리에 올라섰는데, 역시나........ 오늘의 갑작스런 모진 바람은 우리의 기대를 절대 실망시키지 않았다. ‘나 중간까지만 갔다가 얼른 돌아올래.’
흐메. 무섭다고 하면서도 카메라 들이대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다 받아준다. 작은 손녀 세리를 따라다니면서 배웠는지 그넘의 양 볼태기에 주먹을 올려부치고 흔들어대는 재롱이 지금 할망구 처지에 어울린다고 매번 세리 흉내를 내는거니? 헐!!!! 어이가 없네.
‘여기가 여주 신륵사(驪州神勒寺)란 말이야?’
‘우리가 신륵사를 잘못 찾아 온 것이 아니야? 이런거 하나도 없었어.’
‘여주 신륵사는 어디 가고 뜬금없이 봉미산 신륵사(鳳尾山 神勒寺)는 또 뭐야? 봉미산이 어디 있어?’
먼 과거엔 여주 강변에 밭뚝길을 걸어오면 객인(손님)들이 묶어가는 하얀 벽의 기와지붕을 한 객방이 출입구 양쪽으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게 첫인상이자 신륵사의 경계였다. 저렇게 일주문이니 불이문이니 하는 것들이 없었다.
여주 신륵사 하면 그 하얀 객사 건물에서 시작하여 안쪽으로 몇 걸음 옮기면 단청이 형편없이 색이 바래져 있는, 크기도 겨우 고만고만한 강변에 방치되다시피 한 그런 사찰 느낌이 전부였다. 함 교수님은 앞에서 열심히 뭐라뭐라 설명을 하셨지만, 다소 불량학생(?)이었던 우리 몇몇은 그저 빨리 우산동 학사주점에 가서 빈대떡에 막걸리 한잔하고 터미널 앞 당구장에서 한 판 치자는 약속과 더불어 ‘넌 너무 짜, 다마수 올려’ 타령만 늘어놓으며 마지못해 쫄랑쫄랑 따라다닐 뿐이었다. 여주 신륵사는 얼추 다녀가기는 했던 거의 ‘폐사 직전의 낡고 왜소한 사찰’이라는 기억이 남은 전부였다.
그런데 이렇게 찾아와 보니 변하다 못해, 옆 자리에 새로운 사찰이 들어선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변해 있다.
일단 사찰의 영역이 확 넓어졌다. 옛 사찰 출입문이었던 객방이 지금은 훨씬 안쪽에 확실한 안채로 변했으니 말이다.
사찰의 경계를 알리는 일주문이 떡하니 생겼다. 거기에 ‘봉미산 신륵사(鳳尾山 神勒寺)’라는 현판을 떡하니 내걸었다. 여기서부터가 분명하게 신륵사의 경내가 된다는 영역 표기인 것이다.
일주문(一柱門)은 통상적으로 사찰의 경계를 나타내며, 절간에 들어왔으니 세속의 번뇌를 씻고 한마음(一心)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의미와 가르침을 담고 있다. 수행자가 겸손하고 단정한 마음으로 부처나 진리를 생각하며 이 경계를 지나가라는 뜻이라 하겠다. 일주문은 양쪽으로 무조건 한 개씩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각을 올려놓은 것 같은 모습을 한다. 양쪽으로 기둥이 하나씩이라 해서 일주문(一柱門)이다. 일주문의 크기와 화려함은 곧 그 사찰의 위용을 간접적으로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 신륵사의 일주문이 통상적으로 보이는 적당한 크기의 알맞은 일주문의 전형이라면, 특정 일부 사찰의 일주문을 보면 거의 건물 한 채 크기를 하고있는 곳이 여럿 있다.
예전엔 없다가 뚝딱하고 생겨버린 ‘봉미산 신륵사(鳳尾山 神勒寺)’라는 현판을 보고 있자니, 은근하고 피어오르는 심술을 어쩌지 못하겠다. ‘아니 봉미산이 어디 있다고 가져다 붙인거야? 저기 저 절간 뒤란 언덕이 봉미산이야? 저 뒤란에 봉황이 꼬리털이라도 떨어트렸다는 말이야? 에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저 현판 당장이라도 바꿔야 돼.’
불문율처럼 모든 사찰의 현판 앞에는 산(山)이 들어간다.
가야산 해인사(伽倻山海印寺). 종남산 송광사(終南山松廣寺). 영축산 통도사(靈鷲山通度寺). 설악산 신흥사(雪嶽山新興寺). 조계산 선암사(曹溪山仙巖寺). 봉황산 부석사(鳳凰山浮石寺.). 덕유산 백련사(德裕山 白蓮寺) 등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유는 대부분의 사찰이 산속으로 깊이 들어간 여러 가지 이유가 뒤따르겠지만, 어쨌든 높은 산 깊은 골짜기 풍수 명당에 안겨서 영험한 산의 기운을 받아들이고자 했기 때문이다.
물론 거기에는 전통을 따르지 않는 예외적인 사찰 현판도 있다.
비슬산 용연사 자운문(琵瑟山 龍淵寺 慈雲門) 이라는 긴 이름의 현판이 있는가 하면, 속리산 법주사(法住寺)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이라는 두 개의 현판을 동시에 내건 사찰도 있다. 그런가 하면 불국사(佛國寺)처럼 ‘다들 여기가 토암산 자락인건 이미 잘 알고있지?’라고 되묻는 것처럼 떡하니 불국사만 달랑 내걸고 했다.
그런가 하면 자타 공인 이거다 저거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대한불교총본산조계사(大韓佛敎總本山曹溪寺)’라는 편액(扁額)을 당당하게 내건 일주문 현판의 최고봉도 분명히 존재한다. '내가 바로 산이여. 본산이라니까?' 하는 것 같다.
그런데 ‘봉미산 신륵사(鳳尾山 神勒寺)’라니? 도대체 시방 산(山)이 어디있다고 봉미산이야?
찾아보니 여주 땅은 아니고, 인근 접경 지역인 가평군과 양평군의 경계지역에 봉미산(鳳尾山)이 있는데 높이가 856m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봉미산은 여주의 동쪽 7리에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 기록된 봉미라는 이름은 풍수지리에서 비봉귀소형(飛鳳歸巢形:봉황이 날아드는 형상)의 산 모양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봉황이 날아드는 산자락의 끄트머리 명당에 안겨있는 신륵사’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런데 조금만 따져보자. 그 봉미산이 여기 강변에서 이십 리 뚝 떨어져, 그사이를 도로와 논과 밭의 평지로 완전분리되어 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산자락 끄트머리에 연결되었을 것 같은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시방 무슨 봉미산이야? 봉미산이? 전라도에서 바다건너 한라산 아무절 이라고 하면 안되는 것 처럼, 아무리 생각해도 봉미산은 아니다. 고가도로라도 하나 만들어서 이어 붙이던가?'
그냥 단출하게 ‘신륵사(神勒寺)’라고 하던가, 아니면 한반도 최초로 산(山) 대신 강(江)을 넣어서 ‘남한강 신륵사(南漢江神勒寺)’라고 하면 어디가 덧났을까?
어쨌거나, 이래나 저래나 신륵사(神勒寺)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나 그럴만한 확실한 근거는 없다. 고려 말기 나옹선사가 머물렀던 곳으로는 실제 아주 유명하며 당시에는 200여 칸에 달하는 대사찰이었다고 한다. 조선 성종 3년(1472)에는 세종대왕릉인 영릉의 원찰로 삼아 보은사(報恩寺)라고 불렀다가 점차 유학을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면서 원찰로서의 의미가 약해진 뒤 다시 신륵사라는 이름으로 돌아왔다. 벽돌로 쌓은 다층전탑이 있어 벽절(甓寺)로 불리기도 했다.
비록 조선은 유학을 떠받들어 불교를 탄압했지만, 조선의 내놓으라 하는 유학자와 명문가의 과거에 응시한 유생들과, 시인과 묵객치고 여기 신륵사(神勒寺)에 들려 잠자고 밥 공양을 안 받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한양과 충청 강원 경상 전라 일부 지역을 오가는 양반네들 치고 신륵사만한 유식처와 안식처를 더는 찾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단히 중요한 길목의 나룻터 옆에 있는 대형 사찰에 떡하니 찾아가서 ‘하루 쉬었다 갑시다’ 하고 들어가 앉을 처지가 되는 양반들에게 대문이 아예 없이 열려진 신륵사는 그야말로 무릉도원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과거에처럼 신륵사(神勒寺) 하면 첫 인상이 ‘천년 사찰’이라기 보다, 여주를 지나치는 양반과 관리들의 훌륭한 리조트 쯤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입구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커다란 객방이 바로 그것을 여실히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절간 200여 칸에 거의 절반 이상은 불교를 탄압하는 유학생들의 휴식처가 되었다니........ 그리고 거기에 불순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의 은신처로 제공되기도 했고, 가난한 시인과 묵객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공양 숙식 대접을 받았다.
필자의 생각엔 대한민국 역사에서 특별히 불교와 직접 관련이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 뜨내기들이 가장 많이 드나들고 묵었던 절간으론 신륵사가 가히 으뜸이지 않았을까 싶다. 상원사와 칠장사에도 유독 아주 특별한 이유로 찾아와서 묵다가 떠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솔직히 신륵사는 산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아주 드물게 강 옆에서 강에 의지해 서있는 특별한 가람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이류를 결코 부정할 수 없다.
그 방이 바로 여강(驪江)이다.
신륵사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사나운 용마가 나타나 건너편 마을에 큰 피해를 주었는데, 인당대사가 나서서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다. 신력(神)으로 제압(勒)했다 하여 절의 이름을 신륵사(神勒寺)라 했다’라고 전해진다. 여기서 사나운 용마는 아마도 홍수 범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면, 이곳에 사찰을 세워 홍수의 재해를 막고자 했던 옛 사람들의 염원이 고스란히 사찰의 이름에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랬다면 차라리 ‘여강륵 신륵사(驪江勒神勒寺)라고 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괜한 딴지(?)를 걸어보면서 한없이 낯설기만한 사찰의 경내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아마도 내 느낌상으로 변하지 않은 것은 여강 바위 벼랑에 아슬아슬하게 올려다 세운 정자 강월헌(江月軒) 뿐이 아닐까 싶다. 고려말의 선승으로 널리 알려진 나옹(懶翁) 선사의 호인 강월헌(江月軒)을 그대로 따와 붙였다. 나옹 선사가 신륵사에 머무는 시간 내내 거의 여기에 앉아서 참선으로 보내지 않았을까? 저 무심하게 흘러내려가는 여강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 글 올리는 작업중입니다. 일과 병행하느라 조금 시간이 걸리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