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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시편 118편 1- 29절『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25절)
내가 좋아하는 한 목사님의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입니다. 중국어를 공부 했습니다 그때도 대학 입시가 중요했기 때문에 부모들은 주일에 자녀가 교회를 가거나 학생부 임원 맡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군대에 다녀와 학교를 졸업할 즈음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소련이 무너지고 중국이 문호를 개방하고 베트남과 교역이 이루어졌습니다. 말 그대로 세상이 바뀐 것입니다. 그러자 각 기업마다 그 언어를 하는 사람이 절실해져 목사님의 동기들을 모셔 갔다고 합니다. 실패를 함부로 논하지 마십시오. 무엇이 실패인지 사람은 모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자녀가 되는 것이 진정한 형통입니다. 오늘 무엇을 의지할 것인지 결정하십시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1:1-3)
사람들 사이를 이간하고 중상하며, 가정을 불화하고 파탄케 하며, 사회와 국가에 불신과 멸망을 가져다주는 사특한 자를 싫어하고 그들이 잘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므로 악인이 패망하면 온 성읍 사람이 기뻐 환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온 성읍에 덕을 쌓아 그 형통으로 이웃의 기쁨이 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잠11:10)
형통이란 말의 히브리어는 『찰레아흐』입니다. 이 말은 『번성한』(prosperous)이란 뜻입니다. 영어성경에는 『번성한』 또는 『성공적』(successful)이란 말로 번역돼 있습니다. 그리고 형통이란 『처음보다 끝이 좋아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요셉의 삶을 형통한 삶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으로써 형통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에 성실하여 그의 형통함을 모든 사람이 인정하고 보게 하였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삶을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인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또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인정하면서 살았습니다.
로리 베스 존스는 『주식회사 예수』라는 책에서 『예수님의 성공에 대한 정의는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는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공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형통의 뜻이 성공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형통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신29:9)시편 118편은 처음 절과 끝 절을 동일한 문장으로 시작하고 끝맺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 29절)
송영 (Doxology) 에 해당하는 이 부분의 요점은
첫째는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넘쳐야만 합니다.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으로다』(시106:1)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36: 26)
여호와께서 베푸신 큰 은혜에 배은망덕한 이스라엘의 행위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보여주신 은혜를 바라보았기에 시인은 간절하게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송축하고 있습니다. 『주께 감사하세 주는 선하시며』
실로 하나님은 모든 선의 원천이시며, 그에게는 선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라는 말속에는 하나님께만 선하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선하다고 번역한 히브리어의 원문은 하나님은 좋은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아론의 집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하였습니다.(2- 4절) 하나님의 사랑하심은 영원하십니다. 일회적인 사랑이 아니라 변덕이 있는 사랑이 아니라 영원한 사랑을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변함없이 끝까지 사랑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 아들까지 주셨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전심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시고 진실하심을 노래하고 찬양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셔서 형통하게 하여 주십니다.
본 시편에서는 세 종류의 그룹이 주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민족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긍휼하심을 경험하였습니다. 한국 민족을 생각해 봅니다. 교회가 아직 일부이고 크리스천이 소수인 우리 민족입니다. 우리 민족 전체가 하나님의 영원하신 인자하심을 힘입도록 힘써 전도하여야겠습니다.
두 번째, 아론의 집입니다. 아론의 집은 제사장 가문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 기업이 없고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고 요즘 말로 목사를 의미합니다. 목사의 집들은 여호와의 영원하신 인자하심을 송축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입니다. 이것은 예배자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예배하는 자들에게 임합니다. 노아를 보십시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사무엘, 다윗, 초대교회 성도들, 예배자들은 모두 주님의 영원하신 자비하심을 경험하였습니다. 다음은 우리를 고통가운데서 건지신 주님을 송축하고 있습니다. 5절에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도 고통을 경험합니다. 어려운 일이 생깁니다. 넘어질 수 있습니다. 좌절도 실패도 경험합니다. 외로움도 때로 우울증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넘어져 있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 주님의 도우심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넘어져 있을 때는 좁은 곳에 갇혀 있었으나 주님께 간구하니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습니다. 할렐루야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잠23:17)
여러분들이 때로는 사방에서 우겨싸임을 당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갖을 때가 있습니다. 더 이상 소망을 찾아볼 수 없다고 느끼실 때는 기도하십시오. 부르짖으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을 광활한 곳에 세우실 것입니다. 6절과 7절은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신다는 내용을 두 번이나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편이십니다. 축구 경기장에 가서 어느 편을 응원합니까? 우리 편 아닙니까? 사랑하신 자식이 힘겨운 싸움을 하는데 바라보는 부모들은 누구를 응원합니까? 자녀가 경기하다가 넘어져 있을 때 웃고 있는 부모를 보았습니까? 다시 일어설 때 박수갈채를 보내며 응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 이십니다. 우리의 넘어짐은 주님의 아픔이 됩니다. 우리의 일어섬은 주님을 흥분시킵니다. 우리의 이김은 주님의 기쁨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편이십니다. 사탄이 아무리 강해도 주님은 우리 편이시기에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 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때로 뭇 나라가 나를 에워싸도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끊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탄을 벌들처럼 나를 에워싸고 가시덤불처럼 나의 길을 막고 나를 밀쳐 넘어뜨리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도우셔서 이기게 하십니다. 할렐루야 아멘
로마서 8장 35- 39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시오 천지 만물의 창조자이십니다. 이러한 분이 성도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니 누가 성도들을 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내 편이시라! 실로 가슴 박찬 소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비로 내 편이 되어 주시는 하나님께 영원토록 감사의 찬미를 드립시다.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시122:7)
14절에서 시인은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요 또 나의 구원이 되셨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주님으로 인해 15절에서는 기쁜 소리 구원의 소리가 터져 나온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가정과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넘어져 있습니까? 어려움에 어쩔 줄 몰라하고 있습니까?
나의 능력과 찬송이요 구원이신 주님으로 인해 의인의 장막에 기쁜 소리가 터져 나오는 꿈을 꾸십시오. 17절, 1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심히 경책하셨어도 죽음에는 이르지 않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결코 죽지 않을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주님의 경책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아주 죽이시지는 않습니다. 이유인즉 주님의 경책은 가지치기 (pruning)이기 때문입니다. 밑둥을 아주 자르지는 않으십니다. 또한 우리를 사망에서 건지심은 우리가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증거하고 선포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시128:1, 2)
찬송가 384장 (통 434장) 『나의 갈길 나 가도록』 를 함께 부르겠습니다.
1.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2.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어려운 일 당한 때도 족한 은혜 주시네
나는 심히 고단하고 영혼 매우 갈하나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나게 하시네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나게 하시네
3.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그의 사랑 어찌 큰지 말로 할 수 없도다
성령감화 받은 영혼 하늘나라 갈 때에
영영 부를 나의 찬송 예수 인도하셨네
영영 부를 나의 찬송 예수 인도하셨네 아-멘
전에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임동민군과 바이올리니스트 홍의연 양이 Royal Philharmonic Orchestra와 협연하는 장면을 감명깊게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임동민군과 홍의연 양이 세계 무대에 설 때 까지 그들에게 골방의 연습시간이 있었습니다. 베토벤의 곡과 차이코프스키의 곡을 연주하기까지 그들에게 하루에 8시간의 연습시간이 16년에서 18년 이상 필요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가까이 가는 고난 가운데 허덕이더라도 우리에게 찬란한 무대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저도 다시 성경책을 펴들기로 결심했습니다. 동민군과 의연 양이 연주곡을 외워 소화해 내는 것처럼 저도 성경을 외우기로 작정했습니다. 그것이 프로입니다. 19절에서 시인은 내게 의의 문들을 열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 문안으로 뛰어 들어가 여호와께 감사할 날을 꿈꾸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무대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건축가가 주목하지 않고 버린 돌처럼 되었어도 언젠가는 하나님 나라와 주님의 영광을 위한 집 모퉁이 돌이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고 그 분을 예배함으로만 가능합니다. 시인은 25절에서 이렇게 간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사랑하는 성도여러분. 26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오늘 교회에 처음오신 분들은 참 잘오셨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들을 축복합니다. 27절에서는 감사의 예물을 드리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그가 우리에게 빛을 비추셨으니 밧줄로 절기 제물을 제단 뿔에 맬지어다』
Teresa Theraphy 란 말이 있습니다. 미국의 의과대학에서 임상 실험을 하였습니다. 인도 켈커타 빈민지역에서 평생을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한 마더 테레사 수녀님의 일대기를 읽게 하고 신체 리듬을 조사했더니 면역 기능이 향상 되었다는 기록이 나왔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를 먼저 하는 것입니다. 제물을 제단 뿔에 먼저 매다는 것입니다. 봉사를 먼저 하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우상을 숭배한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페르시아 제국에 포로로 잡혀와 왕궁의 고위 관료로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형통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느헤미야 1:11절을 보면,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형통하기 위해서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페르시아 제국의 관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기도하지 않고, 절망 가운데 사는 사람과 믿음을 갖고 기도하는 사람의 삶은 천지차이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사람을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는 자에게 형통함과 하늘의 축복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니엘6장 28절을 읽겠습니다.『이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
형통이란 『처음보다 끝이 좋아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니엘은 처음 포로생활 동안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철저한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자굴에 들어가는 위협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다니엘은 남들보다 형통한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비록 처음에는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끝은 형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도 다니엘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함께 하시는 은혜로 인해 범사가 형통한 축복을 받게 될 줄로 확신합니다.끝으로 본문 28절과 29절을 다시 함께 읽겠습니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나님의 형통케 하심이 저와 여러분의 삶속에 임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존귀하신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도: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원망과 불평하지 않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하게 하소서.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여 성공적인 삶을 살게 하옵소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대로 순종함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이제 형통하게 하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편1:3 )
시냇가에 심은 나무 : 이는 의인의 복된 상태에 대한 비유이다. 즉, 의인이 하나님의 말씀안에서
항상 기쁨을 공급받는 상태를 시냇가에 심은 나무에다 비유한 것이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언제든지 생수를 공급받는다. 여기서 ‘시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팔라그’는 팔레스틴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간헐천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수로(水路)를 말한다.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 ‘시절을 좇아’란 문자적으로 ‘그의 때에’이며 이는 곧 인생의 추수기를 의미한다. 나무가 추수기에 열매를 맺는
것은 자연스런 결과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악을 멀리하고(1절) 하나님의 말씀안에서 끊임없이 기쁨을 누리는 의인은 인생의 추수기에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한편, 이 열매는 추수기에 맺히는 열매이므로 겉으로는 화려하나 속은 비어 있는 악인들의 열매와는 달리 완전히 익은
열매임에 틀림없다. 이처럼 의인의 행복은 인간의 잔재주로 인해 얻는 그런 종류의 행복이 아니라 끊임없는 경건의 노력을 통해 얻는 완전 무결한
행복인 것이다.
“생각은 말을 낳고 말은 행동을, 행동은 습관을, 습관은 인생을 결정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형통하는
생각은 좋은 말을 낳고, 좋은 말은 바른 행동을, 바른 행동은 건강한 습관을, 그리고 건강한 습관은 성공적인 인생을 낳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어떻게 습관을 들이느냐가 중요합니다.
습관이란 처음에는 약해서 거미줄처럼 끊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몸에 배면 밧줄처럼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형통하는 사람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형통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형통케 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형통하는 사람들에게는 대체로 3가지 공통적인 습관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성찰’의 습관입니다.
나 자신을 알고, 나 자신을 개혁하고 성숙에 이르는 것입니다.
어떠한 고난이나 어려운 문제가 닥치더라도 성공하는 사람들은 원망이나
시비하지 않고 자신에게서 먼저 문제를 발견합니다.
예화-주님의 위로가 임했기에
중국 모택동(毛澤東)시절에 지하교회 성도들의
영적 아버지라 불리우던 왕밍따우((王明道)목사가 있었습니다.
그가 공안당국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는 과정에서
너무도 고통이 심하여
예수를 부인하고 풀려난 적이 있었습니다. ]
그런데 석방이 되어 나온 그는 주님께 너무도 송구한 마음에 더 큰 정신적 고통을 겪었습니다.
두통이 떠나지 않고 그를 괴롭힌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징계임을 바로 깨닫고 기도하면서 결심을 합니다.
목에 현판을 걸고
북경거리를 돌아다니며 울면서 외쳤습니다.
"제 이름은 베드로입니다. 저는 저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배신했습니다. 제 이름은 베드로입니다."
그는 즉시 체포되어 19년 동안 감옥에 갇혀 지냈습니다.
만기가 되어 감옥에서 나오자
전도자인 라비 재커라이어스(Ravi
Zacharias)가 어떻게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는지 그에게 질문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찬송을 부르고 싶다고 말합니다.
몸은
늙었고 손마디는 뒤틀려 있었지만 눈동자만큼은 빛나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찬송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찬송에 이어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감옥에서 한시라도 이 찬송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찬송의 가사처럼 하늘의 위로가 저에게?임했습니다.
주님의 위로가 임했기에 19년동안 저는
행복했답니다".-http://cafe.daum.net/yacop
둘째는 ‘상황 분석’의 습관입니다.
바른 상황 판단을
위해서는 지식과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지식이 아는 것, 곧 정보라면 지혜는 지식을 상황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참된 지식과
지혜의 근본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예화-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화상으로 얼굴이 아주 흉하게
일그러진 한 소녀가 시각장애인과 결혼을 해서 아주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시각장애인은 유명한 외과 의사로부터 수술을 하면
시력을 되찾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맹인은 무척 기뻐하면서 그 소식을 아내에게 알렸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기뻐할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이 자신의 얼굴을 보면 자신을 더이상 사랑해 줄 것 같지 않아서였습니다.
얼마만큼 시간이 흐른 뒤
남편은 아내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나는 당신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그냥 시각장애인으로
지내려오. 내게는 눈보다 당신의 행복이 더 소중하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참으로 크고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각장애인이 자신의 아내를 사랑한 것보다 훨씬 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바로 우리를 위해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을 내어준
분이십니다
셋째는 ‘자기 헌신’의 습관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불사르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 맡은 직업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특별히 주신 은혜인 줄 믿고 거기에 모든 정열과 사랑을 쏟는 것입니다.
‘하프 타임’이라는
책의 저자 밥 버포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는 삶이 잠깐 타고 마는 촛불이 아니다. 삶은 지금 내가 들고 있는 활활 타는 횃불과
같다. 나는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기 전까지 가능한 밝게 활활 타오르기를 원한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습관을 동시에 가능케 하는
좋은 습관이 있습니다.
바로 본문 이전의 말씀에 기록된 여호와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과
만사형통하는 일이 대체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묵상은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마음에 심는 것입니다.
나아가 말씀으로 하나님과의 교제, 개인적이고 은밀한 사랑의 순간을 즐기는 것입니다.
묵상하면 자기 자신을 성찰하게 됩니다.
또한 말씀에 비추어서 상황을 분석하고 바르게 대처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묵상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면 안됩니다.
이제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의 인생을 불사르겠습니다”는 결단과 함께 온전히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바라보면 상황은 변하지 않아도 내 가슴이 하나님으로 충만해져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묵상은 우리를 형통케 하는 최상의 습관입니다.
날마다 묵상을 통해 형통의 복을 누리는 복된 인생, 복된 가정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복있는 사람은 다 형통하리로다
` □ 시편1편1∼6절 □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1-6절)
요즘 사람들이 관심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뿐입니다.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오래 살까? 어떻게 하면 돈 많이 벌어 잘 쓸까? 어떻게 하면
편하고 멋지게 살까? 자신의 만족과 행복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 믿고 천국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사람들까지 자기 중심적인
복(福)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는 복(福)을 가르치고 복(福)을 말하는 종교입니다. 교회에서 '복(福)'을 말하면 비난하지만
성경전체에 흐르는 메시지가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 복(福), 천국 가는 복(福), 영생하는 복(福),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빛 되고 소금 되기 위해… 자신을 녹이고 태우는 복(福)을 말합니다.
물론 교회가 샤머니즘적인 복(福)
타령을 하는 것은 비난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복(福)의 종교입니다. 성경에 면면히 흐르는 이야기가 '복(福)'입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우리는 예수 믿고 구원받았으며, 영생을 얻었으며, 천국을 보장받은 복(福)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복(福)과 무관한
사람이라면 오늘 이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복(福)을 외적인 요건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내적인 요소가 먼저 변화 될 때 찾아지는 것이 복입니다. 복(福)은 중심이 변한 자가 갖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외적인 조건을
변화시켜 복(福)을 찾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오복(五福)을 최고의 복으로 여겨왔습니다. 수(壽), 부(富),
귀(貴)-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입니다. <수>는 오래오래 장수하는 것입니다. <부>는 재산을
많이 모아 가지는 것입니다. <귀>는 존귀하게 되고 건강한 것입니다. <강녕>은 좋은 평판을 듣는 덕있는 것입니다.
<고종명>은 죽을 때에 객사하지 않고 집에서 자녀들이 임종을 지켜보는 중에 잘 죽는 것입니다. 이것을 최고의 복으로 쳤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이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다 많은 돈, 보다 좋은 집, 보다 넓은 집, 보다 좋은 자동차… 그런 것들이 복을 가져다 주는 줄
알고 그런 것에서 복을 얻으려고 합니다.
돈 많으면 행복합니까? '돈이면 다 된다'는 황금 만능주의가 우리들 주변에 깊이 자리잡고
있지만 돈이 많다고 행복하지 않습니다. 우리 몸의 외적인 조건이 행복을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키가 크면 행복합니까? 키 작으면 불행합니까?
날씬하면, 몸매 좋으면, 얼굴 예쁘면 행복합니까? 눈예쁘고 가슴 크면 행복합니까? 권세 많으면, 공부 잘하면 행복합니까? 공부를 많이 해서
박사학위를 가지면 행복합니까? 요즘은 박사학위 가진 사람들이 박사학위가 있어서 오히려 취업이 안된다고 합니다.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해서 자연히
복 받는 것도 아닙니다.
1. 복있는 사람은 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복(福)있는 사람일까요? 오늘 성경 말씀 1절에는 복(福)있는 사람이 하지 않는 3가지가 있습니다.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나쁜 사람들의 꼬임에 따라가지 않는 사람. 죄인들이 가는 길에 함께
서지 않는 사람, 빈정대는 사람들과 함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악인>,
<죄인>, <오만한 자>는 그 죄의 정도가 각기 다릅니다. 악인은 부도덕하고 인격이 바르지 못한 자를 말합니다.
<복있는 사람>이 되려면 악인의 유혹(꾀)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악인의 길을 버려야 합니다. 여기서 악인은 하나님앞에서나
사람앞에서 도덕성이 결여된 사람을 말합니다. 꼭 살인 강도짓을 해야 만이 악인이 아닙니다. 성경은 때로 악인을 사자나 개, 혹은 황소나
들짐승으로 비유하곤 했습니다. 악인들은 이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성이 없는 짐승의 특징은 본능대로 행하는 것 뿐입니다. 악인들은 바로 이러한
짐승들과 같이 먹고, 마시고, 뛰고 욕구를 채우는 것에 서슴치 않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를 가만히 보십시오. 정말 인간
사회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도덕적으로 얼마나 타락했습니까? 이 시대의 도덕성이 얼마나 천박해 졌는지 짐승사회와 하등 다를 것이 없습니다.
엊그제(04.1.30) 살해된 채로 발견된 부천의 초등학생 사건을 보십시오. 너무 절망적입니다. 요즘 돈 몇푼얻기 위해 사람을 죽이고
생매장 시키는게 일반사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보험금을 노리고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죽입니다.
어제 국민일보에
<해체되는 가정 이대로 놔둘건가>는 특집으로 문란한 성윤리에 대한 기사가 전면을 가득 채웠습니다. 불륜 드라마가 홍수를 이루고,
불황에도 불구하고 퇴폐업소가 북적거리며, 스와핑도 공공연하게 인터넷에서 사람들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스와핑>이라는 말 들어보셨어요.
부부팀들이 모여 서로 상대방을 바꿔가며 성행위를 하느 것입니다. 그들은 공무원, 대기업 임원, 의사들이었습니다. 음란 이메일도 상대을 안가리고
쏟아집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여중생 2명이 인터넷을 통해 원조교제를 하고, 더나아가 상대남성들이 집을 비우는 것을 알아가지고 그 집에
들어가 수천만원 어치의 금품을 훔치기도 했습니다. 더욱 한심스러운 것은 '친구에게 이혼위자료를 받으면 취직시켜주겠다'고 설득해 자신의 남편과
성관계를 맺게하도록 하고 그 현장을 덮쳐서 이혼에 따른 위자료 명목으로 돈을 뜯어내려던 여인이 지난 주간에 구속되기도 했습니다. 돈을 위해
자신의 친구에게 남편과 성관계를 맺도록 부탁하는 아내, 자신의 아내에게 다른 남자와 성행위를 하도록 하고 돈까지 주는 남편 등등 우리 나라의
도덕성 타락이 위험수위에 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모습입니다. 이처럼 도덕성이 상실된 사람이 악인입니다.
또한
악인들에게는 꾀가 있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교활한 꾀를 부리는지, 얼마나 자기 죄를 잘 감추고 남에게 덮어 씌우는 지 여러분은 잘
알 것입니다. 말도 능합니다. 행위도 민첩합니다. 사자와 같이 기동성도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그들이 성공하고 있는 것같이 보입니다만 사실
악인들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혼란케 하고 창조의 뜻을 파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악인의 꾀를 쫓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게 뜻입니까? 그들과 의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동행하거나 함께 일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악인과 타협하고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이들과
동행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형통의 길을 저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정말로 형통의 길을 소원하신다면 악인의 꾀를 쫓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악인은 간사해서 꾀도 많고 말과 행위도 민첩하여 사람들 보기에는 일시적으로 성공한 사람처럼 보이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결국 망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4절에는 악인의 길을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했습니다. 겨는 쭉정이를 말합니다. 알곡이 들어 있지 않는 겨는 허수아비와 같을 뿐입니다. 텅빈 것이요 무가치한 무용지물입니다.
또한 겨는 생명이 없습니다. 따라서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결국은 5절 말씀처럼 심판의 날 불속에 던지움을 받고 말 것입니다. 이러한 악인의
꾀를 쫓다가는 결국 함께 심판당하고 맙니다. 악인의 꾀를 쫓고 악인과 함께 먹고 살다가 악인과 함께 망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롯입니다. 롯이
사는 소돔과 고모라땅은 좋은 땅이었기에 만사가 형통하는 것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악인들과 함께 있다가 그들이 불탈때 모든 소유를 다 태워버리고
겨우 생명만 구원 받는 부끄러운 구원을 받았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기 위치에서 벗어나는 자는 천사라도
심판을 받습니다. 유다서 1장에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라고 했습니다(유1:6). 악인을 따라가지 마십시오. 그들과 함게 하지 마십시오. 신앙의 사람들과 어울리십시요.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둔 사람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아"(26절)라고 했습니다. 일하기 싫어하고, 현상유지나 하려는
사람이 악한 사람입니다. 남의 약점을 들추고, 비난하고, 모함하고, 칭찬할 줄 모르는 사람만 악한 사람이 아니라 일하는 것 자체를 겁내고
빈둥빈둥하는 것도 악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복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죄>라는 원어의 뜻은 과녁을
벗어난 화살을 의미합니다. 과녁에 못미쳤던지, 지나쳤던지 빗나간 것을 죄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못미치거나 지나치거나 빗나간
것이 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이란 활을 쏘아서 과녁에 맞추지 못한 자로 하나님의 뜻에 맞춰서 행동하지 못하고 탈선한 자를
말합니다. 이같은 죄인의 길에 서지 말아야 합니다. 죄인의 길은 반역의 길이요 불순종의 길이요 불법자의 길이요 하나님의 목표에 벗어나는
길입니다. 이 길은 반역자의 길이라 했으니 아담의 길이요, 불법자의 길이라 했으니 가인의 길이요, 불순종한 길이라 했으니 발람의 길이요, 배신자
의 길이라 했으니 가룟유다의 길이요, 하나님의 뜻에 못미친 자의 길이라 했으니 한 달란트 받은 종의 길인 것입니다.
나라의 법을 어기면
나라의 죄인으로 감옥에 갑니다. 학교의 법을 어기면 학생으로서 바르지 못했기 때문에 퇴학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면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을 거스리는 사람은 용감하고 잘난 것 같아도 결국은 멸망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6절에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주님과 동행하지 않는 길은
망하는 길입니다. 성경 찬송 들고 자신이 예수 믿는 사람임을 밝히고 갈 수 없는 길이라면 그 길은 복된 길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복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오만(傲慢)>의 만(慢) 자를 쓰는 단어가 성경에 세 가지로
나옵니다. 교만(驕慢), 거만(倨慢), 오만(傲慢)으로서 대단히 무서운 죄입니다. 성도는 이 세 가지 「만(慢)」자를 끊어 버려야 합니다.
<교만>은 남보다 뛰어난 것이 있어서 뽐내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나는 너보다 몸은 튼튼하고, 나는 너보다 돈이 많아! 나는 너보다
머리가 좋고, 나는 너보다 권세가 높아!" 이렇게 남보다 뛰어난 것을 내어놓고 남과 비교하여 우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십니다. <거만>은 남과 비교도 안될 정도로 부족하고 없는 데도 끄떡 거리면서 혼자 있는 척하는 것입니다. 거만은 눈뜨고 볼 수
없는 꼴불견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데 혼자 잘난 체 하는 사람은 남의 앞잡이를 노릇만 합니다. 자기 인격이 없기 때문에 밤낮 남에게 이용만
당합니다. <오만>은 무엇입니까! 사람만 업신여기는 정도가 아니고 하나님까지 주먹질하며 업신여기는 것인데, 이것은 거만보다 더
나쁩니다. <오만>은 자기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다고 나서는 태도를 말합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대신하겠다는 자세입니다.
무엇이 있다고 교만해도 복이 끊어 지는데, 아무 것도 없으면서 꺼떡 거리는 거만은 꼴불견이고, 하나님을 대신해 보겠다고 하는 오만은
미치광이입니다. 그런 사람이 무슨 복을 받겠습니까?
다른 성경 번역에는 오만한 사람을 '빈정대는 사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자기 생각,
자기 판단이 제일이고 절대적이어서 교회와 목사에 대해 빈정대고, 설교에도 빈정대고, 성도들에게도 빈정대고… 여하튼 자신이 심판자입니다. 자기
체험, 자기가 아는 것만 옳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 말씀, 성경에 대해서도 빈정거립니다. 그런 사람이 오만한 사람입니다. 빈정대는
사람은 대부분 수근거립니다. 여러분은 이런 사람과 어울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복(福) 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말아야 합니다.
오만한 자와 어울리지 않아야 합니다. 복있는 사람은 당연히 오만한 자와 함께 앉을 기회가 없습니다. 복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가 어울리고 싶어해도
상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을 돌아 보십시요. 나 자신이 악인도 될 수도 있고, 죄인의 길에 설 수도 있고,
오만한 자일 수도 있습니다. 나 자신이 부도덕하고 인격이 바르지 못한 악인일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마을에 질투심 많은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누가 자기보다 잘 되는 것을 눈뜨고는 보지 못하는 성품이었습니다. 특히 자기 앞집의 부인과는 불편한 관계여서
늘 그 앞집이 망하기만을 바랐습니다. 어느 날 천사가 찾아와서 무엇이든지 소원을 한 가지 들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너무나 반가운 소식이었지만
거기에는 한가지 조건이 달려 있었습니다. 여인이 무엇을 원하든 앞집의 부인에게는 두 배가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룻밤을 고민하던 이 여인은
천사가 다시 찾아왔을 때 이렇게 자기의 소원을 말했습니다. "천사님, 저는 다른 욕심이 없습니다. 그냥 제 눈 한 쪽만 빼주세요."
질투하는 마음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질투심의 노예가 되면, 미움의 노예가 되면 바른 판단력을 잃으며, 분노와 복수심에 불타게
되고, 상대를 파멸시킬 뿐 아니라 결국 자기도 망하는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런 악에 빠질 위험이 있다며
이렇게 절규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21-24).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을 잘 살펴야 하겠습니다.
2. 복있는 사람은 하는 것이 있다
복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 있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오늘 성경 2절을 보십시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첫째는 율법을
즐거워하는 것이고, 둘째는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즐거워 한다>는 것은 '갈망하다, 좋아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말씀을 대할 때, 즐거운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말씀을 대하는 것입니다. 복있는 자의 기쁨의 대상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즐거움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매달마다 불어나는 적금통장을 보며 살맛이 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내집 마련의 꿈 때문에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외에 먹는 즐거움, 술 취하는 즐거움, 돈버는 즐거움, 잠자는 즐거움 등등 사람들은 저마다 즐거움의 대상을 마련해
놓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복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 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교회에 나올 때 마지 못해 나왔습니까?
아니면 기다리던 마음을 가지고 즐거운 마음올 나왔습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예배드리고 나온 사람이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에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7절)고 했습니다. 경건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는 신앙의
핵심입니다. 심장이 멈추면 인간이 죽듯이, 예배가 멈추면 신앙도 죽습니다. 뇌가 거의 다 죽은 식물 인간도, 만약 그의 심장이 뛴다면, 소생의
희망은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심장이 멈춘다면, 인간은 곧 바로 죽습니다. 혈액과 산소가 공급되지 않는 인체는 죽습니다. 이처럼 신앙의
심장부인 예배가 죽는다면, 그리스도인은 곧 바로 죽습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이미 식물 인간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일주일에 한 두 번 예배드리기가 그렇게 힘드십니까? 일주일에 심장이 두 번도 안 뛴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니 그런 심장은 없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심장은 한 번도 멈추지 않습니다. 심지어 뇌가 멈추어도 심장은 멈추지 않습니다. 심지어 잘 때도 심장은 자지 않고 일합니다. 그런데
경건의 심장, 신앙의 핵심인 예배를 일 주일에 단 한 번도 못 드리시겠습니까? 주일 예배마저 빼먹는 성도들을 볼 때마다 저의 마음은 참으로
슬프고 안타깝습니다. 성도의 영혼이 죽어 가는데, 어찌 슬프고 안타깝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하나님은 얼마나 슬프시고
안타까우시겠습니까?
예배란 영어로는 워십(Worship)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Worthship에서 유래하는데,
"워스'(Worth)는 '가치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워십, 즉 예배는 '가치를 돌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최상의 가치를 돌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카리 테일러 장군은 대통령직보다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렸습니다. 에릭 리델은 올림픽
우승컵보다 하나님에게 최상의 가치를 돌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일을 빼먹을 수 없었습니다. 대통령직과 우승컵을 포기할지언정,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일로 여겼습니다
시편119편에는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나이다"(103절)고 합니다. 복있는 사람은 이러한 고백이 날마다 터져 나오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 하고 사모하기 때문에 말씀을 가까이 하게 됩니다. 우리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매일 밥을 먹듯이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매주일마다 주일 말씀을 가지고 깊이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영적 투쟁은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크게 축복하십니다.
말씀에는 말씀의 은혜와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은 하나님을
계시합니다. 말씀은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하며, 강하게 합니다. 말씀은 모든 사람을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며, 어떤 사람일지라도 말씀 앞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에 있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골수와 관절을 찔러
쪼개며 회개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를 창조하심같이 위대하고, 창조의 능력이 있는 반면, 우리의 작은 생각까지도
감찰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광대하면서도 정미하고 오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나아갈 방향을 제시합니다.그리고
말씀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하고 영혼을 소생시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를 즐거워하고 말씀을 즐거워하십시오. 예배 참석을 귀하게 여기십시오. 예배 참석할 때 하나님의 축복이
넘칩니다.
두 번째로 복있는 사람은 율법을 주야로 묵상합니다. 여기서 <묵상한다>는 것은 '계속 신중하게 생각하고 입으로
중얼거리며 암송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야로 묵상한다는 것은 말씀을 중얼거리며 암송하기도 하고 생각하기도 하면서 하루 종일 말씀에
사로 잡혀 지내는 것입니다.
분재와 화초를 좋아하는 사람은 분재와 화초를 항상 가꾸고, 아침에 일어나면 이것에 제일 먼저 가서 물을
주고 다듬어 줍니다.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날씨가 좋을 때나 비가 올 때나 밤이나 낮이나 항상 낚시 생각만 하고, 낚시하려 다닙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누가 술을 사준다면 어디든지 입을 헤벌리고 좇아갑니다.
그러나 하늘의 복을 아는 사람은 말씀에 사로잡혀 삽니다.
주일을 기다립니다. 성도들을 만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시편 19편에는 '말씀을 정금보다 더 사랑하고 꿀보다 더 좋아한다'(9∼10절)고
하였습니다. 시편 119편에는 '주의 계명을 사모함으로 입을 헐떡였다'(131절)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있는 사람은 이처럼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마음에 품고 깊이 음미하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한번 보고 잊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주야로 말씀을 묵상할 때, 우리의 영혼에는 말할수 없는 은혜와 힘과 기쁨이 넘칩니다. 주야로 깊이
말씀을 묵상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할 때, 인생의 근본 문제가 해결되고 기쁨이 충만합니다. 이렇게 말씀의 능력과 은혜를 체험할 때,
말씀을 헐떡거리며 사모하게 되고 야경이 깊도록 말씀을 읽는 자가 됩니다.
금년에 저는 거룩한 욕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의
세례교인 이상의 성도는 적어도 1년에 성경통독을 1회 이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롭게 성경 통독의 방향을 잡고 올해 반드시 성경 통독을 1회
이상해야 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100일 성경통독표>도 나누어 드렸습니다. 각 가정마다, 각 성도마다 야경이 깊도록
성경을 읽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3. 복있는 사람은 형통의 열매를
맺는다
이제 오늘 말씀의 결론으로 들어갑니다. 3절을 보십시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복있는 사람은 만사형통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하는 일마다 다 잘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지역은 사막이 많고 가뭄이 심합니다. 그래서 황량한 광야에서 겨우
생명을 부지하는 나무가 많습니다. 그러나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아무런 염려가 없습니다. 뿌리를 땅속 깊이 내려 무럭무럭 성장합니다. 어떤
상황가운데서도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않고 무성합니다. 끊임없이 수분과 영양분을 공급받음으로 생기가 넘칩니다. 또 철을 따라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시냇가의 심은 나무의 진가는 평소에는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심한 기근이 생길 때, 그 진가를 나타냅니다.
말씀을
사랑하고 죄의 길에 떠나 사는 사람은 삶이 풍성하고 생명력이 있습니다.
첫째는 열매 맺는 삶입니다. 악인의 꾀를 좇는 사람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소득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야로 말씀을 묵상할 때, 영적인 열매들로 가득찹니다. 외적으로는 전도의 열매를 맺히고, 내적으로는
9가지 성령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맺히게 됩니다.
둘째, 생명력이 충만한 삶입니다.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같이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항상 은혜가 넘칩니다. 그러나 말씀이 없는 자는 마치 사막의 건조한 땅에 거하는 나무와 같이 비실비실 말라가고 힘이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사랑할 때, 말씀이 주는 은혜와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충만한 삶,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게
됩니다.
셋째, 그 행사가 다 형통한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명기 7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정복시의 규례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하나님께서 명하신 모든 축복과 은혜를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토지 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케 하며, 모든 질병에서 떠나게 하며, 모든 열방중에서 으뜸이 되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사랑할 때, 우리는 총체적인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여러분 모두가 형통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성도
여러분!
어려운 문제가 닥칠 때 가장 먼저 성경을 펼치십시오. 성경 말씀 속에 해답이 있습니다. 장래 문제, 풀리지 않는 영적인 문제를
만났을 때, 무엇을 해야 합니까? 성경을 펼쳐야 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입니다(시 119:105).
그리고
무엇보다도 복에 대한 꿈을 가지십시오. 복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꿈꾸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복 주시기를 좋아하시고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신령한 복"(엡1:3)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작은 것밖에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이렇게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더 큰 것을 원합니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필립 브룩스(Philip
Brooks)> 목사님은 "하나님, 제 능력에 맞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게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그 일에 맞는 능력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꿈>이라는 것은 자신이 만족할 수 있어야 하고, 가족이 기뻐할 수 있으며 자랑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줄 뿐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꿈이 달라지면 기도가 바뀌고, 기도가 바뀌면 인생이 바뀝니다.
물론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구하는 사람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도우십니다. 붙드십니다.
성경 구석 구석에 보면 "하나님께서 붙드신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시편 73편에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23절) 이사야 41장에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10절)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붙드시고 우리와 함께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사십시오. 소망을 가지십시오. 포기하지 마십시오.
충실한 사람 믿을 만한 사람이 되십시오. 자신이 받은 복으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이 되십시오. 요셉과 같이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형통케 하는 삶(창39:1~6)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