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김수영) 민근홍 국어 논술교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져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창작과 비평'' 가을호, 1968 .......................................................................................................... 1. 핵심 정리
(1) 감상의 초점
사소한 자연 현상 속에서 인간 세계의 여러 문제를 찾아내어 현실을 그대로 드러낸 시다. 하잘것없어 보이는 생명과 그것을 억누르려는 거대한 힘과의 싸움을, 반복되는 단순한 구조의 말로써 그려내고 있다.
이 시에서 ''풀''과 ''바람''의 상징 의미를 생각해 보자. ''풀''은 여리고 상처받기 쉽지만 질긴 생명력을 지닌 존재로, ''바람''은 무수히 많은 생명들을 괴롭히고 억누르는 힘으로 상정해 보며 시를 이해해 보자.
이 시에서 ''눕다''↔''일어나다'', ''울다''↔''웃다''라는 네 개의 동사가 반복적인 대립 구조를 이루고 있다. ''풀''과 ''바람''이라는 대립이 ''눕는다''와 ''일어난다''는 운동의 반복 속에서 하나로 합일되는 체험을 노래하고 있음에 유의하여 이 노래를 散文의 내용으로 바꾸어 보자. 문장의 기본 골격은 ''날이 흐리다'', ''바람이 분다'', ''풀이 눕는다'', ''풀이 운다'', ''풀이 일어난다''가 될 것이다.
(2) 성격 : 상징적, 의지적, 주지적, 참여적 (3) 운율 : 반복과 대구에 의한 리듬 형성 (4) 특징 : 대립 구조 (5) 구성 ① 풀의 나약함 - 수동적인 모습(1연) ② 풀의 생명력 - 수동성→능동성(2연) ③ 풀의 넉넉함 - 능동성 강조(3연) (6) 제재 : 풀 (7) 주제 :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
2. 감상의 길잡이(1)
시인들은 때때로 평범한 자연 현상 속에서 삶의 문제에 대한 의미 있는 비유 또는 상징을 발견한다. ''풀'' 역시 그러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표면적 구조는 매우 단순하다. 어느 흐린 날 비가 오기 직전의 스산한 바람이 부는 들판을 생각해 보자. 그 들판에는 아주 여린 무수한 풀들이 돋아나 있고, 비를 몰아 오는 바람은 점점 거세게 불어 풀들을 눕히고, 쓰러뜨리고, 또 울리고 있다. 그러나 바람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풀은 다시 일어나 웃는다. 이것이 이 시의 표면적 내용이다. 그러나 이 시는 풀과 바람의 단순한 현상적 관계만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시에 대한 더 분명한 이해는 풀과 바람의 의미를 바르게 파악하는 데에 있다.
풀은 만물 가운데 가장 흔하다. 또 한없이 연약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일부러 키우지 않아도 억세게 자라는 끈질긴 생명력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민중들을 이 풀에 비유해 왔다. 결국, 풀은 ''민중''이며 이 작품은 민중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면 바람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시에서 바람은 풀의 생명력을 억누르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바람은 민중을 억압하고 괴롭히는 올바르지 못한 세력의 상징이다.
제1연 : 풀과 바람의 관계를 설명한다. 풀은 바람에 의해 나부끼고, 눕고, 운다. 제2연 : 풀과 바람의 대조가 뚜렷하다. 풀은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더 빨리 울고, 먼저 일어난다. 우리는 여기서 풀의 연약함과 아울러 ''먼저 일어난다''는 끈질김을 볼 수 있다. 제3연 : 풀과 바람이 대립을 반복한다. 이 반복을 통해 이미지를 극대화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시의 의미는 대략 드러난다. 풀과 바람의 싸움은 이 세상에 있는 연약한 민중들의 굳센 생명력과 그것을 억누르고 괴롭히려는 세력의 싸움인 것이다. 이 싸움을 노래하면서 시인은 하잘것없어 보이는 생명의 끈질김이야말로 어떤 불의한 외부의 억압도 이겨내는 힘임을 보여 준다. 그러나 마지막 구절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에서 역사의 흐름이 비관적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결국, 이 시는 아주 일상적인 자연물인 풀과 바람이라는 소재를 통해서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을 노래한 것이다. .---<김태형,정희성 엮음 [현대시의 이해와 감상]-문원각>
감상의 길잡이(2)
이 시는 시인이 불의의 교통 사고로 타계하기 직전에 쓴 마지막 작품으로, 반서정성(反抒情性)과 참여시의 기치를 높이 든 그의 후기시 세계를 한눈에 보여 주고 있다. 60년대 민중문학을 신동엽과 함께 이끌고 온 김수영은 투철한 역사 인식과 건강한 민중성에 기초를 둔 신동엽과는 달리 모더니즘 속에서 자라난 모더니즘의 비판자로서, 4·19를 계기로 해서 강한 현실 의식에 바탕을 둔 참여시의 진수를 보여 줌으로써 마침내 이성부, 이시영, 조태일로 이어지는 1970년대 민중문학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풀''은 이 세상에서 가장 흔하면서도 가장 강한 생명력을 지닌 생명체로서 오랜 역사 동안 권력자에게 천대받고 억압받으면서도 질긴 생명력으로 맞서 싸워온 민중, 민초(民草)를 뜻하며, 이와 반대로 ''바람''은 풀의 생명력을 억누르는 세력, 곧 민중을 억압하는 사회적 힘[독재권력, 외세]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바람에 의해 눕는 풀의 수동성과 바람에 앞서는 풀의 능동성, 그리고 바람을 넘어서는 풀의 넉넉한 생명력을 통해 민중의 끈질긴 저항과 생명력을 노래하고 있다.
즉, 이 시는 사회적 상황이 나빠져[날이 흐리고, 흐려서] 폭력화되었을 때[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민중은 무기력하게 짓밟히지만[풀은 눕고 울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고 자신들의 나약한 힘과 의지를 하나로 모아 권력에 맞서 싸워 이기는[바람보다 먼저 웃는] 인류 역사의 총체적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또한, 이 시는 평이한 우리말 시어와 ''풀·바람'', ''눕다·일어나다'', ''울다·웃다'' 등의 시어를 과거시제에서 현재시제로 반복적으로 진행하면서 표현함으로써 ''풀''이 지닌 역사적 상징성을 뚜렷이 드러내 주고 있다. 이처럼 시인은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흔히 접하는 자연 현상의 한 순간을 포착하고, 그것을 통하여 중후하면서도 명징(明澄)한 현실주의적 의미를 제시하는 시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양승준, 양승국 공저 [한국현대시 400선-이해와 감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