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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4월 대경상록자원봉사단 문화유적답사 계획
일시 : 2017년 4월 18일(화)
장소 : 이순신대교.여수흥국사.여수선소유적.진남관.순천왜성.충무사
반월당(08:00 출발) - (180.8km. 2시간23분) - 이순신대교(묘도휴게소)(10:23 도착. 관람 30분. 10:53 출발) - (10.3km. 17분) - 여수 흥국사(11:10 도착. 관람 1시간15분. 12:25 출발) - (10.9km. 20분) - 여수 선소유적(12:45 도착. 점심 1시간. 관람 45분. 2:30 출발) - (18.5km. 17분) - 진남관(2:47 도착. 관람 1시간. 3:47 출발) - (34.1km. 35분) - 순천왜성.충무사(4:12 도착. 관람 50분. 5:02 출발) - (195.4km. 2시간45분) - 반월당(7:47 도착)
* 현지 사정에 따라 변동 될 수 있습니다
* 신청 방법 : 대경상록자원봉사단 문화유적답사담당에게 직접 신청하십시오.
(선착순 40명만 신청 받습니다.접수는 대경상록봉사단에서 개인별로 직접 받습니다. 접수대장에 자필로 기록 부탁드립니다.)
* 답사경비는 자부담으로 25,000원이며, 40명 미달일 경우 계획을 취소합니다.
이순신대교(李舜臣大橋) : 여수국가산단진입도로 개설공사의 3구간에 해당하며 공사구간 중 하이라이트에 해당합니다.(2013년 2월 8일 개통) 총 연장 길이는 2,260m, 폭은 25.7m(왕복4차로)이며, 주각 간 거리는 1,545m 입니다.(주각 간 거리 1,545m는 충무공이순신의 탄생해인 1545년을 의미한다.) 높이가 270m인 교각은 H자형으로 개방감이 우수합니다.
대교 하부로 18,000 TEU급 선박의 통항 가능한 높이를 확보합니다.
세계 4위 규모 양쪽 주탑은 서울 남산(262m), 63빌딩(249m)보다 높은 270m로 현수교 콘크리트 주탑으로는 세계 최고 높이입니다.
주탑과 주탑을 연결하는 케이블은 세계 최초로 1,860Mpa(메가파스칼)급의 인장강도를 보유한 직경 5.36mm의 최고 강도 강선을 사용하였습니다.
지진규모 6.5진도 VIII단계의 강진에도 견딜 수 있는 내진1등급 기준으로 설계되어 1000년에 1번꼴로 발생하는 대형지진에도 견딜 수 있는 수준입니다.
선박 운항 폭은 국내 최장인 1,130m로 1만8천 TEU(21만톤)급 초대형 컨테이너 선박이 안정적으로 양방향 동시 통항이 가능합니다.
교량 상판에 적용되는 보강형은 내풍 성능이 우수한 트윈스틸박스를 적용하여 최대풍목 81.6m/sec(태풍매미 최대풍속 60m/sec) 강풍에도 안전합니다.
교량 상부의 포장두께는 일반포장보다 3cm 얇고 수명은 2배가 긴 에폭시 아스팔트(epoxy asphalt.석유아스팔트를 부자재 또는 증량제(增量劑)로서 혼합한 변성된 에폭시수지) 포장을 국내 최초로 시공하였습니다.
여수 흥국사 홍교(麗水 興國寺 虹橋.보물 제563호. 전남 여수시 흥국사길 134-11 (중흥동))
흥국사 홍교는 계곡물 양쪽을 뿌리 삼아 잘 다듬은 장대석(長臺石)을 반원(半圓)을 이루도록 서로 맞물려 스스로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절묘하게 구성하였다. 장대석의 개수는 총 86개이다. 흥국사 홍교 앞뒤 양측 벽은 자연잡석을 불규칙하게 쌓아 올려 완만하고 긴 노면(路面)을 형성하고 있다. 불규칙하게 쌓아올린 듯 하면서도 단을 맞추려 하여 홍교의 짜임새를 좀 더 튼튼하게 보완해 주고 있어 다리의 면모를 한결 돋보이게 하고 있다.
홍예 및 석축 위로 거대한 판석(板石)을 올린 후 흙을 덮어 통행하는 사람과 짐의 무게를 거뜬히 지탱해 주도록 장치하였고 통행에도 편리하게 하고 있다. 홍예의 중심 머릿돌은 용머리를 새겨 돌출시켜 다리의 격을 높이고 있는데, 마치 용이 다리 밑을 굽어보고 있는 듯하다.
홍예 중심 머릿돌에서 양쪽 홍예 난간 부분에는 귀면상을 조각함으로써 잡귀를 막아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했으니 불국토에 이르고자 하는 중생들에 대한 지극한 자비정신을 느끼게 한다.
조선 인조 17년(1639)에 세워진 다리로, 지금까지 알려진 무지개형 돌다리로서는 가장 높고 길며, 주변 경치와도 잘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다리이다.
높이 5.5m, 길이 40m, 홍예 폭 11.8m, 내벽 폭 3.45m로, 지금까지 알려진 무지개형 돌다리로서는 가장 높고 길다
여수 흥국사 부도군(麗水 興國寺 浮屠群. 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17[흥국사길 160])
흥국사 홍교와 일주문을 지나면 좌측에 흥국사에도 부도가 12기 있다. 탑 12기의 명문은 보조국사탑, 중흥당법수대사탑, 낭월당탑, 일명승탑, 호봉당탑, 금계당탑, 능하당탑, 취해당탑, 경서당탑, 응운당탑, 우룡당탑, 응암당탑이다. 부도 12기는 원래 세 곳에 안치되어 있었고, 특히 보조국사탑은 정수암 계곡 입구에 부도탑에 공양하는 부도전과 함께 있었다. 부도전 옆에는 부도가 있었으나 방치되어 있다가 현재의 부도전으로 옮겨졌다. 나머지 부도 3기는 현 위치보다 아래쪽 계곡에 있던 것을 옮겨와 모두 12기의 부도를 모시게 되었다. 형식은 자연 상태에 부도를 안치했으며, 부도들은 대체로 석종형이다
여수 흥국사 중수사적비(麗水 興國寺 重修事蹟碑.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12호. 흥국사길 149(중흥동) 흥국사길 149(중흥동))
여수 흥국사 중수사적비는 1703년(숙종 29)에 건립된 것이다. 비문을 지은 최창대는 당대의 명문장이었고, 비문을 쓴 이진휴 역시 숙종때에「통도사사리탑비」「선암사중수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92호)등 많은 작품을 남긴 명필이었다.
비문의 내용에는, 창건자 지눌과 무의자 담당(無衣子)와의 관계, 송광사가 세워진 직후 흥국사가 창건되었다는 사실, 1560년(명종 15) 법수회상(法守和尙)에 의해 사찰건물 1천여간이 증축되었다는 것, 1624년(인조 2) 계특(戒特)의 대대적인 사찰중건의 사실, 그리고 통일(通日)의 법당 개축사실 등 흥국사의 사적들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중수비 뒷면에는 정동호(鄭東虎)가 지은 발문을 문세욱(文世郁)이 썼는데, 그 주요 내용은 흥국사의 창사와 중건 과정에서 공로를 세운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다. 즉, 보조국사가 흥국사를 창건한 이래 조선에 들어와 임진왜란을 겪으며 온갖 고충을 극복하며 약 470년 동안 중건한 승려들을 높이 평가한 내용이다. 바로 이어서 중건과정에서 협조한 김덕항(金德恒)을 비롯한 약 140명의 명단이 적혀 있다. 중건과정에 도움을 준 지방관과 중앙정계의 인물, 관련 승려, 여성을 포함한 신도, 그리고 석공들의 명단까지 기록되어 있어서 당시 중수비의 건립과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문화재청)
여수 흥국사 대웅전(麗水 興國寺 大雄殿.보물 제396호. 전남 여수시 흥국사길 160 (중흥동))
흥국사는 고려 명종 25년(1195)에 보조국사 지눌이 세웠다고 전한다. 임진왜란 때 이 절의 승려들이 이순신장군을 도와 왜적을 무찌르는데 공을 세웠으나 절이 모두 타 버려 지금 있는 건물들은 인조 2년(1624)에 다시 세운 것들이다.
대웅전은 인조 2년(1624) 계특대사가 절을 고쳐 세울 때 다시 지은 건물로 석가삼존불을 모시고 있는 절의 중심 법당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쌓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이 장식구조를 기둥 사이에 3구씩 배치하여 화려한 느낌을 주며 앞면 3칸은 기둥 사이를 같은 간격으로 나누어 키가 큰 빗살문을 달았다.
건물 안쪽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의 우물천장으로 꾸몄고 불상이 앉아 있는 자리를 더욱 엄숙하게 꾸민 지붕 모형의 닫집을 만들어 놓았다. 불상 뒷면에는 숙종 19년(1693)에 그린 ‘석가후불탱화 (보물 제578호)’가 있다.
같은 양식을 가진 건물들 중 그 짜임이 화려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며, 조선 중기 이후의 건축기법을 잘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여수흥국사목조석가여래삼존상(麗水 興國寺 木造釋迦如來三尊像. 보물 제1550호. 전남 여수시 중흥동 산17번지 흥국사)
이 삼존상은 흥국사 대웅전의 주존불로 모셔져 있는데, 협시 보살상의 보관 뒷면에는 각각 자씨보살대명숭정(慈氏菩薩大明崇禎), 제화보살대명숭정(提花菩薩大明崇禎)이라는 명문이 타출기법으로 새겨져 있다. 따라서 이 삼존상이 수기삼존상(授記三尊像)으로 17세기 전반의 숭정연간(1628~1644)에 조성된 것으로 알 수 있다.
이 삼존상은 조각수법이 매우 뛰어나서 양감이 잘 표현되었으며, 손과 발의 표정이 잘 살아있고, 옷 주름이나 장신구의 표현도 유려하다. 불상은 17세기 조각의 단순함을 잘 반영하고 있고, 두 보살상은 자연스러운 자세와 장대한 신체비례를 보여준다. 17세기 전반의 상으로 이와 같은 크기의 보살상을 동반한 삼존불이 드물고, 도상과 양식면에서도 조선후기 불교조각을 대표하는 상으로 평가된다.
여수 흥국사 대웅전 관음보살 벽화(麗水 興國寺 大雄殿 觀音菩薩 壁畵. 보물 제1862호. 전남 여수시 중흥동 산17번지 흥국사 )
여수 흥국사 대웅전 관음보살 벽화는 한지에 그려 벽에다 붙여 만든 첩부벽화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첩부벽화는 미황사 천불도 벽화에서 보듯이 보통 천장의 장엄화나 대량의 별화에 사용되었으나, 후불벽 전면에 예불화로서 그려진 예로는 이 벽화가 유일하다. 현재 국내에 전하는 조선후기 주불전 후불벽 뒷면의 관음보살도는 10여 점이 남아 있는데, 대부분 벽에다 직접 그린 것이다.
이 벽화는 양식적으로 관음보살 상호와 어깨에 늘어진 보발, 의습에 시문된 문양 등이 수화승 天信이 조성한 흥국사 대웅전 영산회상도(1693년)와 유사하며, 특히 어깨의 보발 표현 및 선재동자의 착의방식, 정병의 기형 등에서는 17세기 불화의 특징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이와 함께 바다 가운데 피어 오른 연꽃을 좌대로 하여 관음보살과 선재동자, 정병 등을 표현한 독특한 구성은 어떤 그림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특징적인 도상이다
흥국사수월관음도(興國寺水月觀音圖. 보물 제1332호. 전남 여수시 중흥동 산17번지 흥국사 )
관음보살은 여러 모습으로 중생 앞에 나타나 고난에서 안락의 세계로 이끌어 주는 자비를 상징하는 보살로 수월관음도에는 관음보살이 사는 정토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흥국사 수월관음도에는 둥근 몸광배를 하고 있는 관음보살이 화면 중앙을 가득 채우고 있으며, 오른 무릎 아래쪽에는 선재동자가 허리를 약간 구부린 채 합장하고 서 있다. 맨 하단에는 일렁이는 물결이 묘사되어 있다. 관음보살의 양팔 좌우로는 푸른 대나무 및 버들가지가 꽂힌 꽃병과 새가 표현되어 있다.
조선시대 관음도의 전형적인 모습을 잘 따르고 있는 관음도로서 부분적으로 도식적인 면이 엿보이지만, 안정된 구도에 적·녹·청색의 조화로운 배색으로 화려함과 따뜻한 느낌을 준다. 또한 단정하고 적당한 얼굴표현과 신체비례, 바위면 처리에 있어 회화성 넘치는 표현 기법 등을 보여주는 우수한 작품이다.
18세기 최고 화승으로 꼽히던 의겸 스님이 그린 그림으로, 비록 화면 하단부에 일부 손상이 있기는 하지만 짜임새 있는 구도, 섬세한 필치, 조화로운 색채 등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흥국사노사나불괘불탱(興國寺盧舍那佛掛佛幀. 보물 제1331호. 전남 여수시 중흥동 산17번지 흥국사)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진행할 때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기 위해 만든 대형 불교그림을 말하는데, 흥국사노사나괘불탱은 본존불만을 전체 화면에 꽉 차도록 그린 단독불화 형식이다.
거대하고 화려한 몸광배에 둥근 머리광배를 하고 있는 노사나불은 머리에 조그만 불상이 있는 보관을 쓰고 있으며 두 손을 어깨 위까지 들어 좌우로 벌리고 있는 모습이다. 화면 상단에는 노사나불과 관련이 있는 천궁과 같은 건물의 처마 끝이 표현되어 있고 하단에는 좌우로 보탑이 배치되어 있다.
18세기 최고 화승으로 꼽히던 의겸 스님과 함께 활동했던 비현 스님이 참여해 그린 그림으로, 색채가 선명하고 아름다우며 장식성이 돋보일 뿐만 아니라 선이 아름답게 구사되고 있어 세련미를 엿볼 수 있다. 불화의 뒷면에는 후에 괘불을 보수하면서 기록한 화기가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 괘불 제작의 실태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흥국사십육나한도(興國寺十六羅漢圖. 보물 제1333호. 전남 여수시 흥국사길 160, 흥국사 (중흥동))
여수시 영취산에 있는 흥국사는 고려 명종 25년(1195)에 보조국사 지눌이 창건한 사찰로, 나라가 번성하면 이 절도 함께 번창 할 것이라는 흥국의 염원을 담고 있어 흥국사라고 전한다.
나한은 아라한이라고도 하는데 수행을 거쳐 깨달은 성자를 말하는데 흥국사십육나한도는 응진당(應眞堂)에 보관되어 있다.
중앙의 영산회상탱은 없어지고, 지금은 나한도 여섯 폭만이 남아 있다. 좌우 각각 세 폭씩인데, 중앙의 본존불을 기준으로 좌측에는 1·3·5·7·9·11·13·15존자가, 우측에는 2·4·6·8·10·12·14·16존자가 대칭을 이루면서 서로 마주보고 있는 독특한 구성법을 보여주고 있다. 여섯 폭 모두 황토색 바탕에 인물과 함께 명암처리가 두드러진 바위와 고목을 자연스럽게 배치하였으며, 전반적으로 부드러운 중간색을 많이 사용하여 차분한 느낌을 준다.
여섯 폭 가운데 좌1폭은 중앙 본존불을 향하여 예를 갖추고 서 있는 늙은 비구 모습의 가섭존자와 1·3·5존자가 차례로 자리하고 있다. 좌2폭은 7·9·11·13존자 순서로 배치되어 있으며, 좌3폭은 15존자와 대범천 및 그 권속들이 그려져 있다. 우1폭에는 중앙을 향해 단정하게 서있는 청년 비구 모습의 아난존자와 함께 2·4·6존자를 그렸고, 우2폭은 8·10·12·14존자가 그려져 있다. 우3폭은 다소곳이 앉아 합장하고 있는 청년 비구 모습의 16존자와 하원장군과 직부사자를 거느리고 있는 제석천으로 이루어져 있다.
불화에 수묵화 기법을 도입한 의겸 스님의 화풍을 잘 보여주는 십육나한도로, 이후 조선 후기 십육나한도의 본보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여수 흥국사 동종(麗水 興國寺 銅鍾. 보물 제1556호. 전남 여수시 중흥동 산17번지 흥국사)
조선시대 주종장 가운데 김용암(金龍岩)·김성원(金成元) 등과 더불어 사장계(私匠系)를 대표하는 김애립(金愛立)이 순천 동리산의 대흥사 종으로 1665년에 주성하였으며, 높이가 121㎝나 되는 대종에 해당한다. 종의 외형은 상부가 좁고 아래로 가면서 약간씩 벌어져 마치 포탄과 같은 모습을 하였다. 간단하면서도 힘이 있는 쌍룡(雙龍)을 종 고리로 삼고 천판에는 큼직한 연화문대를 돌렸다. 천판과 만나는 종의 어깨부분에는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이 둘러져 있으며, 몸체에는 연곽대와 보살상 및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전패(殿牌)가 마련되어 있다. 종신에 새겨진 문양은 전반적으로 섬세하고 화려하며 잘 정돈된 느낌을 보여준다.
이 종은 사인비구와 버금가는 기술적 역량을 지녔던 김애립 범종의 특징을 잘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인 동시에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여수 흥국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시왕상 일괄 및 복장유물(麗水 興國寺 木造地藏菩薩三尊像·十王像 一括 및 腹藏遺物. 보물 제1566호. 전남 여수시 중흥동 산17번지 흥국사)
여수 흥국사 무사전에 봉안되어 있는 지장보살삼존상을 비롯한 시왕·권속일괄은 1648년(인조 26) 수조각승 인균(印均)을 비롯한 12명의 조각승들이 참여하여 조성한 작품이다. 지장보살상은 동그란 얼굴에 살이 적당히 올랐으며, 부푼 눈두덩 사이로 짧게 치켜 올린 눈이 인상적이다. 단정한 신체에 표현된 옷 주름은 강직한 직선과 부드러운 곡선을 잘 조화시켜 신체의 굴곡과 양감을 잘 살려내었다. 시왕과 권속상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개성적인 특징과 역할을 다양한 표현력과 연출력으로 생동감 있게 묘사하였다.
흥국사 무사전 조각들은 17세기 불상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장보살삼존을 비롯한 권속들이 모두 존속하고, 조성주체와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발원문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흥국사 원통전(興國寺 圓通殿.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5호. 전남 여수시 중흥동 산17번지 흥국사)
흥국사는 고려 명종 25년(1195) 보조국사 지눌이 처음 지은 사찰이다. 나라가 번성하면 이 절도 함께 번창할 것이라는 흥국의 염원을 담아 이름을 흥국사라 하였다. 불법 그 자체보다는 나라를 보호하고 지킨다는 의미가 강한 절이었기 때문에, 나라의 안정과 번영을 기원하던 기도처로의 역할이 컸다.
원통전은 관세음보살이 모셔진 법당을 말하며, 관음전이라고도 한다. 조선 명종 15년(1560)에 크게 다시 지어졌다가 정유재란(1597) 때 불에 탄 것을 인조 2년(1624)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앞쪽과 양쪽에만 있고 건물의 뒤쪽에는 설치되어 있지 않다.
흥국사 원통전은 선암사 원통전과 함께 사찰 건물로는 특이한 양식에 속하는 건물이다
여수 흥국사 삼장보살도(麗水 興國寺 三藏菩薩圖. 전라남도 유향문화재 제299호.전남 여수시 중흥동 산17번지 흥국사)
여수 흥국사 삼장보살도는 1741년의 작품으로 일본에 전해지는 16세기의 작품(1550년 日本 愛知縣 新長谷寺 소장품 외)을 제외하고는 국내에 남아있는 작품 중에서는 빠른 시기의 작품이다. 흥국사는 18세기 전반에 대대적인 중수 불사를 하면서 당시 대표적인 화승 의겸을 모시고 많은 불화불사를 진행하는데 흥국사 삼장보살도는 그 시기의 작품으로 전체적인 색감과 화면구성, 각 군중의 표현 등에서 융성한 흥국사의 일면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흥국사의 삼장보살도는 제작시기도 빠르고 작품의 질도 우수하다. 제작에 참여한 화승들도 18세기 초반의 대표적인 화승인 의겸의 제자들이다. 또한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여수 흥국사 제석도(麗水 興國寺 帝釋圖.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00호. 전남 여수시 중흥동 산17번지 흥국사)
흥국사는 18세기 전반에 사세가 융성하고 대대적인 중수 불사를 하면서 당시 대표적인 화승 의겸을 모시고 긍척 등 많은 화승들이 불화불사를 진행하는데 흥국사 제석도도 이 시기에 그려지면서 전체적인 색감과 화면구성, 각 군중의 표현 등에서 18세기 전남지방의 우수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의 신중도는 조선전기의 작품으로 1583년에 제작된 일본 禪覺寺 소장 제석도와 일본 西大寺 소장 제석도, 일본 靈寶館 소장 십이신중도 열두 폭이 있다. 조선 후기의 작품으로는 1622년 순천 향림사의 신중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18세기나 19세기의 작품들이다. 따라서 흥국사의 제석도는 현존하는 제석도로는 빠른 시기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흥국사의 제석도는 시기도 빠르고 작품의 수준도 우수하다
여수 흥국사팔상전(麗水 興國寺八相殿.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58호. 전남 여수시 중흥동 산17번지 흥국사)
팔상(八捌相)은 법화경의 주존불인 석가여래의 일생을 크게 8가지로 구분해서 설명한 것이다. 팔상전은 법화신앙이 행해졌던 사찰에 많이 지어졌는데,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모시고 그가 살아가신 일생의 모습을 8폭의 탱화로 그려 모신 곳이다.
흥국사 팔상전은 조선후기(17세기경)에 건립되어 중수한 다포계 3칸 팔작지붕으로 대웅전에 버금가는 부속건물이다. 어간문은 4합, 양옆은 3합문으로 빗살문과 정(井)자 문을 하였다. 기둥에 배흘림과 안쏠림, 귀솟음이 나타나 전통적인 형식을 띄고 있으며, 불단 위에는 ‘亞’자형 닫집이 있어 매우 호화롭게 하였다. 50여점의 조선후기 명문 기와가 확인되어 흥국사 불사의 연혁도 알 수 있다
여수 선소유적(麗水 船所遺蹟. 사적 제392호. 전남 여수시 시전동 708번지 외)
고려시대부터 배를 만드는 조선소가 있던 자리이다. 특히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한 거북선을 만들었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지도상으로 보면 가막만의 가장 북쪽에 조선소가 있으며 조선소의 바다 입구에는 가덕도와 장도가 조선소의 방패 구실을 하고 있다. 또한 먼 바다에서 보면 육지처럼 보이고, 가까이 봐도 바다인지 호수인지 알아보기 어려워 중요한 해군 군사 방어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이곳에는 거북선을 만들고 수리했던 ‘굴강’, 칼과 창을 갈고 닦았던 ‘세검정’, 수군지휘소였던 ‘선소창’, 수군들이 머물렀던 ‘병영막사’, 거북선을 매어 두었던 ‘계선주’, 칼과 창을 만들던 ‘풀뭇간’, 왜군들의 활동을 살피던 ‘망해루’, 말과 수군이 훈련하던 ‘망마기마대’, 창을 던지고 활을 쏘는 연습장인 ‘궁장사’, 일반인의 통행금지를 표시했던 벅수(석인) 등 다양한 관련 유물들이 남아 있으며 이순신장군의 어머니 변씨부인을 모셨던 곳인 ‘자당기거지’가 있다.(출처:문화재청)
지역민들의 혼이 살아 숨 쉬는 역사적인 장소인 선소(船所)마을은 고려시대부터 배를 만드는 조선소가 있었으며 조해소(朝海所)가 있었다고 전해지며, 성조대왕조 1470년 전쯤 고지도에 보면 이곳 선소(船所)는 순천부(順川府) 산하직속 선소(船所)로 명시되어 있다.
이때만 해도 선소(船所)에서 판옥선(板屋船), 전 선등을 만들어 수군들에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도 하고 보수도 하며 배를 대피시키기도 했다.
특히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한 거북선을 만들었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선소(船所)에 들어서면 누구나 수군요새임을 느낄 수 있고 선소(船所)의 중심부에는 직경 40m(면적 1,388㎡)정도의 굴강(屈江)(거북선을 건조하고 수리한 곳)이 있는데, 이는 선박의 노반장 또는 대피소로 쓰인 곳이 있다.
현재 이곳에는 거북선을 만들고 수리했던 ‘굴강(屈江)’, 집무 및 지휘소 기능을 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세검정(洗劒亭)’, 배와 관련된 창고 ‘선소창(船所倉)’, 수군들이 머물렀던 ‘병영막사’, 배를 매어 두었던 ‘계선주(繫船柱)’, 칼과 창을 만들던 ‘풀뭇간(대장간)’, 왜군들의 활동을 살피던 ‘망해루’, 말과 수군이 훈련하던 ‘망마기마대’, 창을 던지고 활을 쏘는 연습장인 ‘궁장사’, 일반인의 통행금지를 표시했던 벅수(석인) 등 다양한 관련 유물들이 남아있다.
선소를 나와서 차로 10여분쯤 가면 임란 5년 동안 효성이 지극한 충무공께서 모친 변씨부인(卞氏夫人)을 고음천(古音川, 현 웅천동)에 모셔 5년 동안 사셨던 곳이 있다.(출처:여수시청)
여수 진남관(麗水 鎭南館. 국보 제304호. 전남 여수시 동문로 11 (군자동))
여수 진남관은 1598년(선조 31) 전라좌수영 객사로 건립한 건물로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끈 수군 중심기지로서의 역사성과 1718년(숙종 44) 전라좌수사 이제면(李濟冕)이 중창한 당시의 면모를 간직하고 있으며, 건물규모가 정면 15칸, 측면 5칸, 건물면적 240평으로 현존하는 지방관아 건물로서는 최대 규모이다.
진남관의 평면은 68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었는데 동·서측 각각 2번째 협칸의 전면 내진주를 이주(移柱)하여 내진주 앞쪽에 고주(高柱)로 처리하였다. 이 고주는 곧바로 종보를 받치고 있고 대량은 맞보로 고주에 결구하여 그 위에 퇴보를 걸었다.
전후면의 내진주와 외진주 사이에는 간단한 형태의 퇴량을 결구하였고 측면 어칸에는 2개의 충량을 두어 그 머리는 내부 대량위로 빠져나와 용두로 마감되었다.
기둥은 민흘림 수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위에 짜여진 포작은 외부로는 출목 첨차가 있는 2출목의 다포계 수법을 보이고, 내부에서는 출목첨차를 생략하고 살미로만 중첩되게 짜서 익공계 포작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외부출목에 사용된 첨차에는 화려한 연봉 등의 장식을 가미하였고 특히 정면 어칸 기둥과 우주에는 용머리 장식의 익초공을 사용하였다.
각 주칸에는 1구씩의 화려한 화반을 배열하여 건물의 입면공간을 살려주고 있으며, 내·외부 및 각 부재에는 당시의 단청문양도 대부분 잘 남아 있다.
또한 건물 내부공간을 크게 하기 위하여 건물 양측의 기둥인 고주(高柱)를 뒤로 옮기는 수법을 사용하여 공간의 효율성을 살리고, 가구는 간결하면서도 건실한 부재를 사용하여 건물의 웅장함을 더해주고 있다. 건물의 양측 면에는 2개의 충량(측면보)을 걸어 매우 안정된 기법을 구사하고 있는 등 18세기초에 건립된 건물이지만 당시의 역사적 의의와 함께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다. (출처 : 문화재청)
여수 통제이공 수군대첩비(麗水 統制李公 水軍大捷碑. 보물 제571호. 전남 여수시 고소3길 13 (고소동))
충무공 이순신의 공훈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된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대첩비이다. 전라남도 해남의 해남 명량대첩비(보물 제503호)와 함께 일제의 박해로 1942년 서울로 운반되어 행방을 알 수 없다가, 광복 이후 해남지역 유지들의 수소문으로 경복궁 근정전 앞뜰 땅 속에서 찾아내어 지금의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
비(碑)는 한 돌로 이루어진 바닥돌 위에 거북받침돌을 두고, 비몸을 세운 후 구름과 용, 연꽃 등이 조각된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비문의 글은 당시 이름을 날렸던 이항복이 짓고, 글씨는 명필 김현성이 썼으며, 비몸 윗면의 ‘통제이공수군대첩비(統制李公水軍大捷碑)’라는 비 명칭은 김상용의 글씨이다.
조선 광해군 7년(1615)에 세워졌으며, 비의 왼쪽에는 숙종 24년(1698) 남구만이 지은 비의 건립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기록에는 이순신의 막료로 활약하였던 수군통제사 유형과 좌수영지역의 유지 및 후손들의 노력으로 건립하게 된 경위를 비롯하여, 이 때 여수 타루비(보물 제1288호)도 대첩비 옆으로 옮겨 세우고, 비각을 세워 보존하였다는 비 건립 전후의 기록이 밝혀져 있다. (출처;문화재청)
여수 타루비(麗水 墮淚碑.보물 제1288호. 전남 여수시 고소3길 13 (고소동))
조선 중기의 명장인 이순신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타루(墮淚)’란 눈물을 흘린다는 뜻으로, 중국의 양양 사람들이 양호(羊祜)를 생각하면서 비석을 바라보면, 반드시 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고사성어에서 인용하였다.
비의 형태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돌에는 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머릿돌에는 구름무늬로 가득 채워져 있으며,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큼직하게 솟아있다.
비문은 ‘타루비’라는 비의 명칭을 앞면에 크게 새기고, 그 아래로 명칭을 붙이게 된 연유와 비를 세운 시기 등을 적고 있다.
이순신장군이 세상을 떠난 지 6년 후인 선조 36년(1603)에 이 비를 세워두었다.(출처:문화재청)
동령소갈비(東嶺小碣碑 전라남도 여수시 고소동 620)
전라남도 여수시 고소동에 있는 ‘통제이공수군대첩비’를 세우게 된 내력을 적은 조선 후기 기실비.현감 심인조(沈仁祚)가 ‘통제이공수군대첩비’의 건립 경위와 여기에 참여한 인물들, 그리고 건립하기까지의 어려움 등을 상세히 기록함으로써 후세에 충무공이순신을 숭모하는 정신을 전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장방형 비신 뒷면 음기에 "숭정기원후주갑무술인정일립(崇禎紀元後周甲戊寅丁日立)"이란 명문이 있어 숙종 24년(1698)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순천왜성(順天倭城. 전라남도 기념물 제171호. 전남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산1번지 외 )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에 있는 낮은 구릉지대에 내·외성 2중으로 돌로 쌓아 만든 성이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왜장 소서행이 일본군의 호남 공격을 위한 전진기지 겸 최후 방어기지로 삼기 위하여 쌓은 왜성이다.
순천왜성은 왜교 또는 예교(曳橋)라 하며 일본사람들은 순천성이라 부르고 있고, 1997년 1월 1일 국가 사적 제49호에서 해제되기 전까지는 ‘승주 신성리성’으로 불려왔다.
성벽은 외성 3첩과 내성 3첩으로 쌓았는데 내성만 그 흔적이 분명하고 외성은 분명치 않으며, 성 주위에는 연못을 둘러 판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성은 1598년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과 소서행장이 이끄는 왜군 사이에 최대의 결전이 벌어진 곳이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소서행장을 노량 앞바다로 유인하여 대승을 거둔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출처:문화재청)
정유재란(1597年) 당시 육전에서 패퇴한 왜군선봉장 宇喜多秀家(우끼다히데이)와 堂高虎(도오다까도라)가 호남을 공략하기위한 전진기지겸 최후 방어기지로 삼기 위해 3개월간 쌓은 토석성으로 왜장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이끈 1만 4천여 명의 왜병이 주둔하여 조·명연합군과 두 차례에 걸쳐 격전을 벌였던 곳으로 남해안 26 왜성 중 유일하게 한곳만 남아 있다.
순천왜성은 수륙요충지로서 성곽 규모가 120,595m²(36,480평), 외성 2,502m, 내성 1,342m로 외곽성(토석성)3개, 본성(석성) 3첩, 성문 12개로 축조된 성곽으로 검단산성쪽의 육지부를 파서 바닷물이 차도록 섬처럼 만들고 연결다리가 물에 뜨게 하여 예교, 왜교성이라 하며 일인들은 순천성이라 부르고 있다. 임진란 패인이 전라도의병과 수군의 용전에 있었다고 보고 전라도를 철저히 공략키 위해 풍신수길의 야심에 따라 전라도 각처에 진지를 구축해 공세를 강화하였으나 무술년(1598년) 8월 그가 급사 후 왜성에 주둔해 있던 침략 최정예부대인 소서행장 왜군과 조·명 수륙연합군 사이에 2개월에 걸친 최후·최대의 격전을 펼친 곳이다.
순천시가지에서 여수 쪽으로 6㎞쯤 가다가 왼쪽으로 6㎞를 가면 200여호가 사는 신성리 마을과 이충무공을 배향한 충무사가 있고 남쪽 200m 지점 광양만에 접한 나지막한 송림에 위치한 왜성은 유정. 권율이 이끄는 육군 3만6천, 진린,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 1만 5천병력이 왜성을 비롯 장도 등을 오가며 왜군을 격멸했고 이충무공이 27일간을 머물면서 전사 하루 전 소서행장을 노량 앞바다로 유인하여 대첩을 거둔 유서 깊은 전적지로서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역사의 산교육장이기도 하다.(출처 : 순천시청)
충무사(忠武祠.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48호. 전남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산28-1번지)
임진왜란 때 공이 컸던 충무공 이순신과 정운, 송희립을 모시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은 조선 선조 12년(1579) 무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강포·한산도 등지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정유재란 때 명량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며 노량진에서 순절하였다.
충장 정운(1543∼1592)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선조 3년(1570)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장군의 휘하에서 옥포·당포·한산도 등 여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9월 부산포 해전에서 우부장으로 선봉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송희립 장군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운 장군의 군관으로서 영남지역에 원병파견을 주장하였고, 이순신의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숙종 16년(1690)에 주민들이 사당을 짓고 충무공의 위패를 모셨으나 1944년 일본인들이 불태워 순천향교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다시 지었다. 이순신장군의 탄생일과 귀천일에 제향을 모시고 있다.
건물은 모두 4동으로 중심 건물인 사당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다. (출처:문화재청)
첫댓글 희망회원님 참여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수고 많습니다. 반월당 어느 곳에서
승차하는지 알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