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성인 🍃🌹
성 루치아노 (Lucian)
축일 : 1월 7일
신분 : 신부 순교자
활동지역 : 안티오키아
(Antiochia)
활동연도 : +312년
같은이름 : 루치아누스 루키아노 루키아누스
시리아의 사모사타(Samosata) 출신인 성 루키아누스
(Lucianus, 또는 루치아노)는 수사학과 철학에서 당대의 최고 권위자였으며, 에데사(Edessa)에서는 마카리우스(Macarius)라는 사람의 지도로 성서를 연구하였다.
이윽고 그는 하느님과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이 자신의 최대 임무로 자각하였다.
그는 말과 행동으로 모범이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신구약성서에서 오류를 제거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이리하여 그는 70인역 성서의 다른 간행본을 서로 비교하고 또 히브리어 원문을 참조하여 구약성서 개정판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성 루키아누스 사본이다.
그러던 중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가 일어나 성 루키아누스도 체포되어 니코메디아
(Nicomedia)의 지하 감옥에 갇혔는데, 이때 그는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였다.
심문관의 모든 질문에 그는 자신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당당히 증거한 후 순교하였다. 그의 유해는 신자들에 의해 드레파눔(Drepanum)에 안장되었고, 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us I)는 그곳에 도시를 건설하고 그 이름을 헬레노폴리스
(Helenopolis)라 변경하였다.
성 루치아노는 시리아의 사사모다에서 태어나 12세 때 부모를 잃었다.
그는 부모가 남겨놓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고
에데사의 마카리오라는 학자의 슬하에서 성서 연구를 시작했다.
그가 얼마나 성서에 대한 연구가 깊었던가는 뒤에 그가 사제가 되어 여러 가지 성서의 엣 사본(寫本)을 보면서
그 중에서 부주의로 인해 잘못 기록한 장소나 악의(惡意)로 고쳐 기록한 곳을 일일이 교정한 사실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는 또한 엄격한 금욕 극기(禁慾克己)의 생활을 즐기고 끊임없이 많은 기도를 올리고,
특히 밤중에도 깨어 있기를 기도하며 육류를 취하지 않고 포조주를 입에 대지 않고 더위와 추위를 잘 참았다.
게다가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로써 말을 삼가며 어디에서든지 하는님의 말씀과 영혼에 대한 이야기 외에는 하지 않기도 했다.
그는 안티오키아에 가서 그곳에 학교를 세워 무보수로 아이들에게 학문과 종교를 가르쳤다.
그가 목적한 것은 다만 그들을 덕망이 높은 그리스도교 신자, 거룩한 신앙의 용감한 옹호자가 되도록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루치아노는 착한 신자들에게는 자비로운 아버지와 같이 공경을 받았으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학문과 덕행이 탁월했기 때문에 도리어 미움을 받았다.
어떤 때는 아리우스파(派)의 이단자들이 그를 중상모략하여 그가 주장하는 설은 그 저서에 의하며 온전히 아리우스파와 동일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 그는 즉시 자기의 정당한 신앙을 명백히 했으며,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도 그를 변호해 준 일이 있지만,
루치아노는 이같이 진리를 위해 이단과 싸운 결과 9년 동안이나 감옥 생활을 하게 되었다.
간신히 감옥에서 나온 그는 니고메디아의 어느 마을을 향해 여행을 떠났는데
마침 그곳에선 박해가 심해 40명이나 되는 신자들이 그 고통에 못 이겨 삽시간에 배교하게 되엇다.
그러나 루치아노가 그 배교자들에게 일장의 설교를 하자 그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전죄를 통회하며 전과 같이 믿음을 지키기를 선언하여 용감히 순교했다.
그 박해로 말미암아 많은 배교자가 있었으나 그의 설교로 인해 그들도 역시 회개했다.
311년 막시미아노 황제 시대에 유혈의 박해가 다시 일어나자, 학문과 덕망이 높아 유난히 원수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던 루치아노도 결국 법관 앞에 끌려나갔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게 바친 ’그리스도교 옹호의 반박문’은 황제를 대단히 감동시켜
"너는 참으로 훌륭한 학자다. 배교만 하면 재산이나 명예나 네가 원하는대로 주리라"는 말까지 들었으나,
그의 마음은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나는 그리스도교 신자입니다"라고 대답했으므로 재차 투옥되었다.
투옥된 후 수일간이나 음식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몹시 배가 고팠다.
그때 그의 앞에는 우상에게 바쳤던 좋은 음식이 식탁 위에 산더미처럼 차려 놓여져 있었다.
그러나 루치아노는 신자들에게 악한 표양이 될까 봐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먹기보다는 차라리 굶어 죽는 것을 더 원했다.
그는 또다시 황제 앞에 끌려나갔다. 그곳에서도 그는 "나는 그리스도교 신자입니다"라고 되풀이 할 뿐이었다.
그는 그 말 이외에는 모두 의미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관리들은 헛수고만 하여 그를 다시 감옥에 돌려 보낼 수밖에 없었다.

Last Supper - DUCCIO di Buoninsegna
1308-11. Tempera on wood,50x53cm Museo dell’Opera del Duomo,Siena.
같은 해 주님 공현 대축일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면회하러 왔을 때 루치아노는
등에 판자를 대고 받듯이 누워있기만 할 수 있어서 몸을 조금도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고통을 잘 참으며 아무런 원망스러운 기색도 없이 오히려 방문 온 사람들에게
"용기를 잃지 말고 끝까지 신앙을 잘 지키시오"라는 말로 격려했다.
신자들이 그에게 성체를 받고자 하자 몸도 움직이지 못하는 그는 자기 가슴을 제대로 삼고
그 위에 빵고 포도주를 놓도록 하고서,
성찬 제정과 축성문을 외우고 둘러 있는 사람들에게 영해 주었는데, 이것도 하느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리라.
그 기이한 미사 성제는 간수들의 간섭을 받지 않고 무사히 끝마칠 수가 있었다.
루치아노가 순교한 것은 그 이튿날 1월 7일이었다.
성 요한 크리소스도토모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목을 잘리었다고 하나,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황제는 이 거룩한 사제를 공공연하게 사형에 처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감옥에서 몰래 죽였다고 한다.
아무튼 그는 순교한 후에도 박해를 받았다.
황제가 어떠한 수단으로도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을 노하여, 그 사제에 큰 돌을 매달아 깊은 바다속에 던졌던 것이다.
그러나 2, 3일 후에 그의 시체가 바닷가에 떠 있는 것을 신자들이 발견하고 이것을 비디니아라는 곳에 정중히 매장했다.
그 후 그리스도교를 보호한 콘스탄티노 대제는 이 성스러운 순교자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그 장소에 도시를 건설하여 헬레노폴리스라고 이름지었다.
성 루치아노의 유골은 가롤로 대제 때 프랑스의 아루루에 이전되어 오늘까지 보존되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