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안의 글
페르난두 페소아(1888~1935)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태어나 양아버지가 영사로 근무하던 남아프리카 공화국 더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열 일곱 살 때 리스본으로 돌아와, 1935년 그곳에서 일생을 마칠 때까지 무역통신문 번역가로 일하며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삶을 살았다. 생전에 그는 몇 편의 시를 발표했을 뿐, 작가로서 거의 활동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사후 발견된 유고는 시와 드라마 초고, 정치적 에세이 등을 포함하여 모두 27,543 매나 되었다. 그 중 1982년 출간된 유작 산문집은 문학계에 엄청난 편향을 불러 일으켰다. 오늘날 그는 포르투갈 현대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로 손꼽힌다.」
[거룩한 질투]
다른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갔다가 기분 좋은 느낌을 받을 때, 그리고 그들이 그 느낌을 나와 공유할 때 나는 질투를 느낀다. 그들이 나와 똑같은 감정을 향유할 뿐 아니라, 동일하게 느끼는 영혼 덕분에 내 영혼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것이 파렴치하게만 생각 된다.
어떤 풍경을 마주했는데 그것을 이미 누군가가 나와 똑같은 마음으로 지켜보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면, 너무도 고통스러운 탓에 나는 도저히 풍경을 평안하게 감상할 수가 없다.
그런 이유로 나는 늘 뭔가를 보게 되면, 그 대상을 논쟁의 여지없이 오직 나만의 것으로 바꾸어버리려고 노력한다. 나는 산을 바라보면서 산의 모양을 변화시킨다. 하지만 능선 하나하나가 완전히 똑같은 모양으로 흘러가도록, 똑같은 수준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도록 그렇게 변화시킨다. 특정 나무와 꽃들을 다른 종류로, 극단적으로 다른 종류인 나무와 꽃으로 교체하고, 황혼을 볼 때도 같은 효과가 나는 다른 색채를 본다. 나에게 익숙한 즉흥적인 시각과 경험에 힘입어 나는 외부세계와 내적 변화를 창조해낸다.
그렇게 하여 내 눈에 보이는 것들을 아주 간단하게 다른 것으로 교체한다. 하지만 강렬하게 최고의 단계인 꿈의 순간에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상상해낸다.
나는 풍경이 음악처럼 나에게 작용하도록 한다. 풍경이 내 안에서 그림들을 불러일으키도록 만든다. 이 일을 성공하면 나는 승리감에 도취된다.
[편지]
[폭포]
아이는 자신의 인형이 진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인형을 진짜 사람처럼 다룬다. 인형이 망가지면 심지어 슬프게 울기도 한다. 아이는 탈현실의 예술을 이해한다. 성(性)이 없으므로 삶이 부정되고 실제가 아닌 사물을 실제로 바라보는 놀이를 통해 현실이 부정되는 이 교활한 나이는 칭송받아야 한다!
다시 아이가 되어 그대로 영원히 아이로 머물 수 있다면, 세상 사람들이 사물에 부여하는 모든 가치와 그들끼리의 모든 관계를 단번에 무시한 채 살 수 있다면! 어린 시절에 나는 장난감 납 병정들을 거꾸로 세우는 놀이를 즐겼다. (....) 그런데 실제의 병정들은 절대로 거꾸로 선 채 행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나에게 확실하게 입증해준 논거가 있었던가?
아이에게는 황금이 유리보다 값지지 않다. 그러면 황금은 정말로 그런 가치가 있는 것일까? 아이는 어른의 행위에서 드러나는 열정과 분노 그리고 공포심의 부조리함을 막연하게 감지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든 공포, 증오, 우리의 사랑은 정말로 부조리하고 허망한 것이 아닐까?
오, 거룩하고 부조리하고도 유치한 직관이여! 우리는 아무런 꾸밈없는 사물의 진실된 모습에 인습의 옷을 입혀버리고, 순수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을 상상력의 베일로 뒤덮어버린다!
[위령탑]
어떤 과부도, 어떤 고아도 그의 입 속에 명부(冥府)의 노잣돈인 은화를 넣지 않는다. 그의 눈동자는 우리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숨겨졌다. 스틱스 강(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명부의 강)을 건너갈 때 그 눈동자는, 우리가 모르는 그의 얼굴이 수면에 비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어슴푸레한 강변에서 헤매고 다니는 그의 그림자는, 우리에게는 오직 다른 이의 그림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차이의 선언]
국가나 도시는 우리에게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장관이나 고위공직자들이 국가의 일을 잘못 처리한다고 해도 역시 우리에게는 상관없는 일이다. 어느 비 내리는 날 집 앞에 흘러와 쌓이는 진흙이나 다름없다. 설사 그것들이 우리와 관련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들에게 아무런 볼일이 없다.
우리는 선하지도 않고 자비롭지도 않다. 우리의 본성이 그 반대라는 말이 아니라, 이쪽도 저쪽도 아니라는 뜻이다. 자비는 자연 상태의 영혼이 갖는 민감함이다. 우리는 자비가 타인의 마음과 사고방식에서 발생할 때 관심을 갖는다. 우리는 그것을 시인하지도 부인하지도 않으면서 지켜보기만 할 뿐이다. 우리의 할 일은 오직 단 하나, 아무것도 되지 않는 것뿐이다.
[우연의 일기]-全文-
하루도 빠짐없이 질료가 나를 학대 한다. 내 감수성은 바람 속의 불꽃이다. 나는 거리를 걸어간다. 행인들의 얼굴에서 나는 그들의 실제 표정을 보지 않는다. 대신 나의 삶이 어떠한지, 내가 누구인지를 그들이 알았을 경우, 내 행동과 얼굴에서 수줍고도 우스꽝스러우며 비정상적인 내 영혼이 드러났을 경우 그들이 지어 보였을 그 표정을 읽는다. 나를 보지 않는 눈동자에서 나는 조롱을 짐작하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행동하는 인간들, 기쁨에 들뜬 인간들 사이에 있을 때 나는 품위 없는 예외가 되는데, 그들의 조롱은 그것을 겨냥하고 있다. 내 앞을 지나가는 다양한 얼굴 푲어들, 그들은 엉거주춤하게 끼어든 내 삶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지적하고 비웃으면서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저들의 조롱과 경멸은 순전히 나 혼자 느끼는 것뿐이라고, 그렇게 헛되이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하지만 내 우스꽝스러운 이미지를 타인들의 표정에서 확인하게 된다면, 이제 더 이상 내 이미지가 나 혼자만의 비밀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불현듯 나는 조롱과 적의로 가득한 온실 속에서 비틀거리며 질식해 죽어가는 느낌이 든다. 모두가 마음 깊은 곳에서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고 있다. 내 앞을 지나가는 모두가 조롱과 경멸의 돌로 웃으면서 나를 내리친다. 나는 병적인 환각으로 만들어낸 사악한 유령을 실제의 인간들에게 투사하고, 그들 사이를 움직이고 돌아다닌다. 모두가 내 뺨을 후려치며 나를 모욕한다. 간혹 그 누구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 거리 한가운데서 나는 우뚝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망설이면서 새로운 차원으로 향하는 문을 찾는다. 공간의 내부로 향하는 입구. 타인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곳, 살아 있는 타인의 영혼인 현실로부터, 초 객관화된 현실 개념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공간의 반대편 공간을 찾는다.
다른 이의 영혼에 나를 이입시키는 내 습관이 마침내 나 자신을 타인들의 눈으로 보듯이 관찰하게 만들었다면, 그러면 타인들은 과연 나를 인식하는 것일까?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나를 아는 타인들이 나를 어떻게 느낄지 처음으로 깨달았다는 것은, 그들이 그것을 실제로 느낀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지금 이 순간 정말로 겉으로 표출하고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타인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나에게 고통이다. 타인들을 나는 내 안에 지고 간다. 심지어 그들과 멀리 떨어져 있을 때도 나는 그들과 함께 살아가기를 강요당한다. 혼자 있을 때조차 군중의 무리가 나를 에워싼다.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한, 달아날 방법이 없다.
황혼 속에 우뚯 솥은 그대 산맥이여, 달빛 아래 놓인 그대 좁다란 길이여, 그대들의 무의식을 내가 가졌더라면,(....) 그대들의 순수한 질료적 정신성을 내가 가졌더라면, 판단력도 없고, 감수성도 없고, 느낌과 생각 혹은 정신적 불안을 위한 자리조차 없는 정신성을! 오직 나무일뿐인 나무들, 오직 상큼한 초록일 뿐인 초록빛이여, 그대들은 내 근심과 곤궁으로부터 그토록 멀리 있으며, 공포를 목격할 눈이 없고, 눈을 통해 봄으로써 공포를 오해하고 조소를 보낼 수 있는 영혼이 없으니, 그대들은 내 공포에 크나큰 위로가 된다! 그대 길가의 돌이여, 베어진 나무여, 어디에나 있는 땅 위의 이름없는 흙덩이여. 그대들은 내 자매이다. 내 영혼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그대들의 감각이 참으로 부드러운 보살핌이기 때문이다. ....태양과 달빛 아래 내 어머니인 대지여, 내 어머니는 이토록 내적인 존재이니, 대지인 어머니 당신은 내 육신의 어머니보다 덜 비판적으로 나를 본다. 당신에게는 나를 무의식중에 분석할 영혼이 없고, 나라는 인간에 대한 생각은 눈빛으로도 드러내지 않으며, 당신 자신에게조차 털어놓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측정할 수 없이 광대한 바다, 떠들썩한 내 어린 시절의 동반자인 당신. 당신이 나를 달래고 잠재운다. 당신의 목소리는 인간의 것이 아니므로, 그 어떤 인간의 귀에도 내 허약함과 불충분함을 누설할 수 없다. 드넓은 하늘, 푸르른 하늘, 천사의(?)비밀과 가까이 있는 하늘이여, 당신은 나를 유혹하려고 음흉한 초록빛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머리에 별들의(고나을 썼지만)그것은 나보다 높은 자리로 오르려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을 포용하는 어머니인 자연의 평화는, 자연이 나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가능하다. 원자와 그 시스템으로 이루어진 냉담한 평온, 나에 대한 그들의 완벽한 무지 t고에 넘치는 형에애.... 나는 그대들의 드넓음에, 그대들의 고요함에 감사의 마음으로 기도를 올리고 싶다. 그대들의 존재가 나에게 사랑을 허락해주기를, 확실하게 의심 없이 사랑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기를. 나는 그대들의 듣지 않음에 귀를 선물하고 싶다. 그리하여 언제나 우리의 말을 들을 수 있도록. 그대들의 숭고한 눈멀음에 눈동자를 선물하고 싶다. 그리하여 언제나 우리를 볼 수 있도록. 우리는 그 상상의 눈과 귀를 통하여 그대들의 마음을 두는 사물이 될 것이며, 그대들의 무(無)에 의해서 인식되는 위안을 얻을 것이다. 마치 궁극의 죽음을 체험하듯이, 다른 삶에 대한 모든 희망으로부터 멀리 물러나, 신의 반대편으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반대편으로 물러나, 관능적이고 공허하게, 모든 질료의 영적 색채를 띠고...
[투명한 일기]-全文-
내 삶은 한 편의 비극이다. 신들이 조소의 휘파람을 불어대고, 1막 이상은 결코 공연되지 못한다. 친구는 한 명도 없다. 단지 나에게 호감을 느낀다고 스스로 믿고 있는 몇몇 지인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어쩌면 안타까워할지도 모른다. 어느 날 내가 달리는 열차 아래로 뛰어들고, 게다가 내 장례식 날비까지 내린다면 말이다.
삶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어떤 보답을 얻게 되는데, 그것은 결국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셈이 되는 타인들의 무능력이다. 그래서 그들은 나와 그 어떤 공감도 이룰 수가 없다는 생각, 냉혹함의 후광, 얼음의 빛무리가 나를 둘러싸고 타인들을 밀쳐낸다. 아직도 나는 고독을 힘겹게 여기지 않을 능력이 없다. 고립에게 두려움 없는 체념과 같은 고귀한 가치를 부여하기, 그처럼 숭고한 단계에 도달하기란 절대 쉽지가 않다.
사람들이 나에게 보여주는 우정을 나는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 완전하게 불가능하듯이, 우정 또한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비록 나는 스스로 내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바란 적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그들에게 실망만을 맛보았다. 나에게 부과된 고통의 능력은 그처럼 복잡하고 민감하다.
모든 이가 나를 배반하고 있음을, 나는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정말로 그런 일이 생기면 나는 늘 놀라고 말았다. 내가 예상하고 있던 것이 도래하면, 그것은 늘 예상치 못한 도래가 된다.
내 안에서 타인을 매혹할 만한 그 어떤 요소도 발견하지 못했기에, 타인이 나에게 끌릴 수 있을 거라고는 결코 믿지 않는다. 만약 예상하고 있던 예상치 못한 일이 자꾸 발생하여 이런 믿음을 더욱 확실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나 스스로도 이것을 어리석고 답답한 생각으로 간주했으리라.
그렇다. 심지어 동정심 때문에 나를 존중해줄 사람도 없을 것이다. 비록 내 육체가 엉성하고 볼품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타인들이 나를 보는 즉시 동정심이 솟아나 특별한 계기가 없는데도 무조건 나서서 도와주고 싶을 만큼, 그 정도로 신체적으로 망가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 안에는 동정을 유발할 만한 어떤 성향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에 호응 하는 종류의 동정심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정신적인 불구를 동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타인들의 경멸, 그 중력의 한가운데로 추락했고, 그 누구의 공감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내 삶은 이러한 상황에서 지나치게 혹독하거나 너무 심한 굴욕에 시달리지 않고 살아보려는 시도의 연속이었다. 자신이 다 부서진 한 척의 인간 난파선이며 살아남은 사산아이고, 아직은 병원에 갇힐 만큼 심각하지는 않은 광인에 불과함을 담담하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참으로 커다란 지적인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을 인ㅅ기하고 나면, 이번에는 반항하지 않고, 좌절하지도 않고, 유기체로서의 자기 자신에게 부과된 저주를 받아들이겠다는 어떤 특별한 행위도 취하지 않고, 심지어 그러겠다는 아주 약간의 암시적인 몸짓도 없이, 오직 운명에 온전히 순응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큰 지적인 용기가 필요하다. 게다가 이것을 고통으로 여기지 않으려는 희망은 너무도 큰 희망이다. 불행을 똑바로 응시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마침내 그것을 행복으로 바라보기란 누구에게나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을 불행으로 받아들이면, 고통에서 영영 헤어 나올 수가 없다.
나를 외부의 시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곧 나를 몰락으로 몰아넣는 행위이다. 내 행복의 몰락으로, 타인이 나를 보듯이 내가 나를 보았고, 이윽고 나 스스로를 경멸하게 되었다. 이것은 나 자신에게서 그 경멸을 유발하는 상질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타인의 눈으로 나를 보면서 타인들이 나에게서 느끼는 경멸의 감정을 몸소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지신을 알게 되는 굴욕을 체험했다. 이러한 순교적 행위에는 위대함도 없고 사흘째 날의 부활도 없다. 나는 오직 이 수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 누구도 나를 사랑할 수 없음을 ,나는 깨달았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 사람은 미적 감각이 결여된 것이리라. 그러므로 나는 그 사람을 경멸할 수밖에 없으리라. 누군가 나에게 공감을 표시하더라도, 그것은 나오는 아무 상관없는 낯선 이의 이유 없는 변덕의 결과 이상은 아닐 것이다.
우리 자신을 똑똑히 들여다보고, 타인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이 진실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는 마침내 자신의 진실을 똑바로 들여다 볼 수 있었을 때, 이렇게 최후의 비명을 질렀다. “신이여, 나의 신이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감성 교육]
꿈으로 이루어진 삶을 살고자 하는 자. 자신의 감각을 온실 식물처럼 잘 육성하여 그것으로 종교와 정치를 구축하려는 자들이 있다. 그들에게 첫 번째 단계는 자신 안의 허망한 것을 비범하고 뛰어나게 느끼는 일이다. 하지만 이 첫 단계는 말 그대로 오직 첫 번째 단계일 뿐이다.
감각으로 이러한 경지에 이르는 것은 감각의 애호가에게는 육체적 부담과 연결된다. 외부로부터 혹은 종종 내부로부터 그에게 고통으로 내맡겨지는 어떤 것을 불가피하고도 강렬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 순간에 그는 깨닫는다. 과도하게 강렬한 감각은 과도한 열락이 될 뿐이다. 과도한 고통이 될 수도 있음을. 이것을 알아차림으로써 몽상가는 이제 자기 자신으로 들어가는 두 번째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자기분석]
삶을 거짓으로, 즉 꿈속에서 사는 자는, 그럼에도 삶을 사는 것이다. 체념이 곧 행동이다. 꿈은 삶의 절박함에 대한 고백이다. 억제할 수 없는 삶의 의지에 대한 보상으로, 현실의 삶이 비현실의 삶으로 치환된다.
이 책은 유일한 영혼의 상태이며, 모든 측면에서 분석되었고, 모든 방향으로 샅샅이 연구되었다. 이렇게 하여 나는 뭔가 새로운 것을 조금이라도 얻었던가? 단 한 번의 위로도, 아주 약간의 위로도 얻지 못했다. 이 모두는 이미 헤라클리토스의 책에, 그리고 <정도서>에 다 적혀 있다. 삶은 아이가 모래밭에 놓고 잊은 장난감이니... 정신의 허영이며 분노이다.... 그런데 가엾은 욥은 오직 한 문장으로 말했다. 내 영혼은 삶에 지쳤도다.
[소유의 호수]
[낯설음의 숲에서]-全文-
나는 잠을 자는 것이 아니지만, 내가 잠들어 있음을 안다. 삶으로 지친 내 늙은 육신이 말한다. 아직은 많이 이르다고.... 나는 냉담한 열을 느낀다. 나는 내가 짐스럽다. 왜 그런지는 알지 못한다....
맑고, 무겁게, 비육체적 몽롱함을 느끼며 나는 거기 누워 있다. 반쯤 잠이 든 채로, 반쯤 깨어 있는 채로, 꿈을 꾼다. 흐릿하고 모호한 꿈을. 두 세계 사이에서 부유하는 내 의식이 대양의 심연과 하늘의 심연을 본다. 이 심연들은 서로 연결되었으며, 서로가 서로의 내부로 파고든다.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내가 무엇을 꿈꾸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림자 바람이 불어오자, 실패한 의도의 잔해가 내 안의 깨어 있는 것 위로 날린다. 미지근한 지루함의 이슬이 어느 알려지지 않은 창공으로부터 떨어져 내린다. 압도적이고 둔중한 공포가 내 안에서 영혼을 움켜잡고 나를 변화시킨다. 마치 가벼운 바람이 높은 나무의 실루엣을 흔들 때 그렇듯이, 조금은 머뭇거리면서.
기운 없이 가라앉은 내 방안으로 바깥의 아침 여명이 어슴푸레한 흔적으로 비쳐든다. 나는 조용한 혼돈이다......왜 새로운 날이 밝아야만 하는가? .... 날이 밝은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이것을 알고 있음으로 내 마음은 무겁다. 날이 밝아오도록 하기 위해서 내가 무슨 행동을 취해야 할 것만 같은 불안한 느낌이다.
마비된 듯이 서서히, 나는 진정을 되찾고 나른해진다. 공기 속을 떠돌며 잠과 깨어남 사이를 부유한다. 새로운 현실이 탄생한다. 나는 그곳에 있다. 그 현실이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것은 이 가라앉은 방의 직접적 현실을 훼손하지 않은 채 발생하여 어느 낯설음의 숲 속 현실로 탄생할 것이다. 내 추방당한 의식 속 두 개의 현실. 두 줄기의 연기가 서로 섞인다.
영롱하게 어른거리는, 두 개의 투명한 풍경. 원래의 현실과 낯선 현실 속에서 이토록 맑고 깨끗하구나....
그런데 저 여인은 누구인가. 나와 함께 이 낯선 숲을 시선으로 감싸고 있는 여인은? 왜 나는 여기 멈춰 서서 질문을 하는가? ....그 이유를 정녕 알고 싶은 것인지. 그것조차도 나는 알지 못한다.....
어두운 창과 같은 어슴푸레한 방을 통해서 나는 이 풍경을 감지하고 있다...... 이미 오래전부터 내가 알고 있는 풍경. 그리고 이미 오래전부터 내가 알지 못하는 그 여인과 함께 걷고 있으면서 그녀의 비현실성으로 인해 하나의 현실로 착각하게 된 풍경. 이미 수백 년 전부터 나는 이 나무들을 알고 있으며, 이 꽃과 이 길. 잘못 들어선 길과, 거기서 헤메는 이 머나먼 나, 내 시선에 포착되는 늙고 오래된 나를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내가 이 방에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어둡게 그늘진 나 자신을.
나는 이 숲을 헤메는 나를, 멀리서 바라보고 느낀다. 숲에서는 간혹 느린 바람이 연기를 싣고 오며, 그 연기 속에서 지금 내가 있는 방의 모습이 어두우면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가구와 커튼, 그리고 밤 특유의 혼몽함까지. 바람이 사라지고 나면, 이 다른 세계의 풍경은 다시금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어떤 때는 이 좁은 방이 다른 세계의 지평선에 재의 안개처럼 뿌옇게 펼쳐진다....그러면 한동안 우리가 발을 디딘 대지는, 이 방의 모습으로 변한다.
나는 꿈꾸면서 나를 잃는다. 나는 이중으로 있다. 내 안에, 그리고 그 낯선 여인의 안에.... 깊은 피곤이 검은 불꽃으로 나를 갉아 먹는다.....심연, 비현실성의 그리움이 허위의 생으로 나를 압박한다....
오, 서글픈 행운이여!.... 오, 교차로에서의 영원한 망설임이여!...나는 꿈꾼다. 내 의식 뒤편에서 누군가 나와 더불어 꿈꾸고 있다..... 아마 나는 존재하지 않는 그 누군가의 꿈에 불과할 것이다.
창밖의 아침놀은 참으로 아득하여라! 나의 다른 눈앞에 놓인 숲은 참으로 손에 닿을 듯 가깝구나!
그 풍경에서 멀어지자마자, 나는 그것을 거의 완전히 잊는다. 풍경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그리워하고, 풍경 속을 방황하면, 풍경은 내 마음을 건드려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흐른다. 그러므로 나는 풍경이 다시 오기를 소망한다....
나무들! 꽃들! 잎사귀로 두텁게 덮인 길의 자기 은폐!....
종종 우리는 서로의 팔을 잡고 삼나무와 미모사 아래를 지나갔으며, 우리 중 누구도 삶을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의 살은 희미한 향기였으며 우리의 삶은 샘에서 울리는 메아리였다. 우리는 손에 손을 잡았고, 우리의 눋오자는 말하고 있었다. 감각을 느낀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랑의 환상이 실현된다면....
우리의 정원에는 최고로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 있었다. 꽃 이파리가 살짝 말린 장미. 노르스름한 희색의 백합, 붉은색이 아니었다면 눈에 띄지 않았을 양귀비. 화단의 경계석인 응회암 곁에 피어난 제비꽃. 조그만 물망초, 향기 없는 동백.... 그리고 키 큰 풀들 위로 여기저기 솟아난 해바라기가 놀라움에 커다랗게 뜬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의 영혼은 온전히 눈길이 되어 이끼의 푸르른 신선함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마치 다른 세계로 온 듯, 우리는 야자나무 아래를 걸었다. 생각만으로도 눈물이 솟아나왔다. 우리는 단 한 번도 우리가 행복했던 이곳에서도 행복하지 않았으므로....
수백 년의 옹이가 진 떡깔나무는 죽은 뿌리의 촉수를 뻗어 우리를 비틀거리게 한다..... 불현듯 플라타너스가 몸을 높이 치켜세운다.... 가까운 이들 나무 사이로 저 멀리 포도덩굴에 고요히 매달린 거무스름한 포도송이들이 보인다.
삶의 꿈이 우리 앞으로, 경쾌한 몸짓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둘 다 꿈을 향해서 똑같이 피어나는 미소를 지었다. 각자의 영혼 안에 머무는 미소를. 서로를 바라보지 않으면서, 의식적으로 기대고 있는 이 팔의 현존하는 느낌 말고는, 서로에 대해 그 이상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우리의 삶은 내면이 없었다. 우리는 외부였고 타인이었다. 우리는 우리를 몰랐다. 우리는 마치 꿈의 여행을 마치고 다시 영혼으로 돌아온 사람들 같았다.
우리는 시간을 잊었다. 무한한 공간은 우리의 감각 속에서 줄어들었다. 이 가까운 나무들, 저 먼 포도덩굴, 지평선에 펼쳐진 최후의 언덕들 이외에 달리 무엇이, 존재하는 사물들을 사색하는 우리의 열린 시선을 끌어당길 수 있겠는가?...
불완전함의 물시계는 규칙적으로 물방울을 떨어뜨리며 우리에게 비현실의 시간을 알린다..... 그 무엇을 위해서도 수고할 필요가 없다. 오, 머나먼 내 사랑이여. 아무것도 수고할 필요가 없다. 오직 아무것도 수고할 필요가 없음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달콤한지. 그렇다 그것만 알면 충분하다.
나무들 사이의 정지한 움직임, 휴식 없는 샘의 휴식. 깊숙이 우리는 체액의 리듬과 불가해한 호흡. 느리게 진행되는 사물의 황혼은 사물 자신의 내부에서 차오르는 듯이 보인다. 황혼의 손길은 정신의 합의 아래, 하늘의 높은 침묵이 자아내는 슬픔. 영혼과 유사하면서 아득한 그 슬픔됨에 가닿는다. 낙엽들은 끊임없이, 허망하게, 낯설음의 방울이 되어 떨어지며. 그 속에서 풍경은 오직 우리의 귀를 파고들어오며 고국의 기억처럼 우리 안에 슬퍼진다. 이 모두가 우리를 하나로 연결시킨다. 자꾸만 느슨해지는 허리끈처럼 불안하게.
우리는 그곳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 시간을 살았고, 꿈속에서조차 측정할 수 없는 공간을 살았다. 시간의 외부에 있는 소멸. 모든 현실 공간의 규범을 무시하는 확장....오, 내 지루함의 동반자여, 그곳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행복한 불안을 마치 우리의 것인 양 보냈던가!.... 시간은 정신의 재였고 나날들은 공간으로 이루어진 현실이었다. 외적 풍경의 내적 세기를..... 우리는 이 모두가 무엇 때문인지 묻지 않았다. 우리는 이 모두가 공허하지 않음을 알았고, 그것이 기뻤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우리가 분명 우리가 갖지 않은 영감 덕분에, 우리 둘이 함께 있는 이 고통의 세계가. 만약 그런 세계가 정말로 있다면, 이 세상의 끝인 경계선 너머, 산들이 흐릿하게 불분명한 윤곽을 이룬 그곳에 존재함을 알고 있었다. 또한 우리는 경계선 너머의 세계가 오직 무(無)에 불과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러한 모순은 우리가 그곳에 머문 시간을 마치 미신 속의 인간이 사는 동굴처럼 어둡게 했고, 우리의 이 느낌은 황혼이 물든 가을 하는 아래 장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실루엣처럼 낯설었다....
우리 청각의 수평선에서는 알지 못하는 태양의 파도가 우리가 결코 보지 못할 해안을 휩쓸었다. 분명 유용함과는 완전히 반대인 어떤 목적을 띠고, 땅으로부터 체념된 상태로 항해하는 범선들의 태양. 우리가 우리 안에서 그것을 보고 있음을 청각으로 느끼는 것은 커다란 기쁨이었다.
우리는 살아 있음을 단번에 알아차리듯이 그렇게 단번에 알아차렸다. 대기는 새들의 노래로 가득하고, 우리의 내부는, 향수를 뿌린 공단(貢緞)천이 사각거리듯이, 이파리들의 술렁임으로 가득한데, 그 술렁거리는 소리가 그것을 듣는 우리의 의식보다도 더욱 강하게 우리를 채우고 있다는 것을.
새들의 지저귐, 나뭇잎들이 바람에 술렁이는 소리, 영원한 대양의 단조롭고 망각된 심연은 우리의 창백한 삶을 위하여 무인식이란 휘광을 배려해 주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깨어 있는 날들을 잠들었다. 아무 존재도 아니라는 것에 행복해하며, 어떤 소망도 희망도 품지 않고, 우리는 사랑의 색채를, 증오의 맛을 잊었다. 우리는 우리를 불멸로 생각하였다.
그곳에서 체험한 시간은 보통의 시간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그것은 공허하고 불완전한 시간이었기에 완전했으며, 비스듬하였기에 직각인 삶의 확실성을 갖추었다. 허물어진 황제의 시간, 색 바랜 보랏빛 의상의 시간, 다른 세계로부터 이 세계로 무너져 내린 시간, 더욱 더 무너져 내린 공포심을 더욱더 자랑스러워하는...
그런 기쁨은 고통스러웠다, 고통스러웠다..... 기쁨이 우리에게 보장해준 평화로운 망명의 환경에도 불구하고, 전체 풍경은 우리가 이 세상에 속했음을 상기시켜주었다. 풍경은 막연하고 요란한 권태에 젖어 있으며, 음울하고, 과도하며, 어느 알려지지 않은 제국의 몰락처럼 도착적이다....
우리가 있는 방의 코튼 위로 아침의 빛이 그늘을 드리운다. 지금 내 입술은, 창백하게 변해 있음을 내가 잘 아는데, 마치 삶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서로가 서로를 맛본다.
냉담한 우리들 방의 공기는 현관 입구의 커튼처럼 묵직하다. 모든 것을 둘러싼 비밀을 응시하는 우리의 느슨한 의식이 부드럽다. 마치 황혼의 의례에서 질질 끌리는 긴 옷자락처럼.
우리의 그 어떤 그리움도 존재의 정당성을 얻지 못했다. 우리의 의식은 활기찬 느림으로부터 승인받은 부조리이다.
어떤 그늘진 향유가 우리 육신의 심상을 축성하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가 느끼는 피곤은 피곤의 그림자이다. 그것은 멀리에서 온다. 마치 어딘가에 우리의 삶이 존재하리라는 상상처럼....
우리 중 그 누구도 이름을 갖지 않았다. 그 누구도 믿을 만한 존재성을 갖지 않았다. 스스로 웃고 있다고 상상할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웃을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우리가 살아 있다는 우리 자신의 믿음에 대한 비웃음일 것이다. 따뜻하게 데워진 침대 시트의 신선함이, 발가벗은 감촉이 서로 느껴지는(강신의 그리고 분명 나의)발을 애무한다.
연인이여. 우리가 삶으로부터, 삶의 시류로부터 떨어져 나올 수만 있다면! 그러면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향해 달아날 텐데.... 우리의 손가락에는 마법의 반지가 있다. 반지를 돌리면, 침묵의 요정이, 암흑의 정령과 망각의 난쟁이가 소환된다.
보라, 오직 보기만 하라. 그것에 대해서 말하는 일을 생각만 해도 그것의 모습이 나타날 것이다. 숲이,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울창한 숲이. 그러나 우리의 불안으로 더욱 불안해진, 우리의 슬픔으로 더욱 슬픔에 잠긴 숲이 나타날 것이다. 현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사라지는 안개처럼 현존을 잃는다. 중단이 없는 꿈속에서 나는 다시금 나를 되찾는다. 이 신비한 숲이 내 꿈의 테두리를 형성한다....
R초들, 그곳에서 내가 체험한 꽃들이여! 우리의 눈길이 알아보고 그들의 이름으로 번역한 꽃들. 우리의 영혼이 꽃들의 향기를 꺾었다. 꽃들에게서가 아니라 꽃의 이름이 가진 멜로디에게서.... 꽃들의 이름은 반복되는 멜로디, 향기의 오케스트라였다.....꽃들의 초록빛 관능은 그들의 이름에 서늘한 그늘을 선사했다..... 과실의 이름은 영혼 속으로 깊숙이 들어간 이빨자국이었으며... 그림자는 행복한 어제의 잔해였다. ...개활지, 빛이 가득한 개활지는 풍경의 환한 웃음이며 동시에 지루해하는 풍경의 하품이었다.... 오, 무한한 색채의 시간이여!... 꽃의 순간들, 꽃의 찰나들, 오, 공간속에서 얼어붙은 시간이여, 시간이여, 죽은 공간이며 꽃과 꽃향기, 향기로운 꽃이름으로 뒤덮인 시간이여!...
낯선 침묵 속 꿈의 광기여!...
우리의 삶은 총체적 삶이었다.... 우리의 사랑은 사랑의 향기였다.....우리는 우리의 존재로 채워진 불가능의 시간을 살았다....
우리가 현실이 아님을 우리 육신의 모든 살점으로 알고 있었으므로, 우리는 그 시간을 살았다....
우리는 인격을 탈피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이었다.... 자기 자신이라는 의식 속으로 사라져버린 그 풍경.... 그것은 현실과 환상이라는 두 개의 풍경이었고, 우리 역시 마찬가지로 불분명한 두 사람이었다. 둘 중 누구도 상대편이 정녕 자기 자신이 아닌지, 불확실한 상대편이 정녕 살아 있는 존재인지, 아무 것도 확실히는 알지 못하는채로...
그러다 문득 우리가 고요한 호수와 마주쳤을 때, 우리는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물은 풍경의 눈동자에 담겨 있었다. 가만히 정지한 눈동자, 존재의 무한한 권태인 눈동자 속에... 그렇다, 그것은 존재의 권태로움이었다. 현실 혹은 환상으로 존재해야만 한다는 권태로움. 호수는 그 권태로움의 침묵하는 망명지였으며 권태로움의 고향이자 목소리였다..... 그리고 우리가 계속해서 걷고 또 걸었다. 알지도 원하지도 않으면서. 그러나 여전히 호숫가에는 우리가 머물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 존재의 상당 부분이 그곳에 남아 있었고 그곳에서 거주했으며, 상징적인 몸짓으로 호수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런데 이 얼마나 신선하고 행복한 경악인지. 그곳에는 그 누구도 없었다! 심지어는 그곳으로 갔던 우리조차도 없었다.....우리는 그 누구도 아니었기 때문이다....우리는 삶을 갖지 못했다. 죽기 위한 삶도 가진 적이 없었다. 우리는 지극히 투명하고 지극히 아무것도 아니어서, 시간의 바람은 우리를 무위 속에 내버려두었고 우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지나가버렸다. 마치 야자나무 꼭대기를 흔들고 사라지는 바람처럼.
우리는 그 어떤 시대에도 속하지 않았고, 그 어떤 목표도 추구하지 않았다. 우리는 사물과 존재의 모든 목적성을 부재하는 그 낙원의 문 앞에 버려두고 떠나왔다. 우리가 그들을 느낌으로 느끼도록, 영혼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깊은 골이 파인 나무의 영혼, 널찍한 나뭇잎의 영혼, 결혼할 준비가 된 꽃들의 영혼과 과일의 매달린 영혼이....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죽었다. 우리가 우리를 하나의 존재로, 서로가 서로의 환영에 불과한 존재로 인식하지 않도록 떨어진 채로 죽음을 맞이했다. 우리 모두의 내면은 오직 스스로의 메아리일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파리 한 마리가 잉잉거린다. 희미하고 거의 들리지 않게...
선명하고, 분산된 소리들이 내 의식 속에서 조용히 들려오기 시작한다. 내 의식은 밝아오는 날과 함께 우리의 방을 넘어 범람한다.... 우리의 방이라고? 우리의? 내가 혼자 있는데. 이곳이 내 방 말고 또 누구의 방이란 말인가? 나도 모른다. 모든 것이 희미해진다. 단지 안개와 같은 휘발성의 현실만이 남아 있다. 그 안에는 나의 불확실성이 가라앉아 있으며, 나 자신에 대한 이해가 아편의 혼몸(昏懜)으로 추락하고 있다...
아침이 도래했다. 시간의 창백한 정상에서 무너져내린 것처럼...
연인이여, 우리들 꿈의 장작은 삶의 화덕 속에서 다 타버렸다.
이제 희망을 떠나자. tfka은 먹여주지만, 배부르게 하지는 못하므로, 북음을 떠나자. 죽음은 원했던 것보다 더 많이 주지만. 그래도 열망한 것보다는 더 조금 주므로.
떠나자. 오, 베일을 쓴 이여. 우리들의 권태를 떠나자. 구너태는 저절로 잦아들어버릴 뿐, 자신의 본령인 공포로 완전히 발전될 용기가 없으므로.
울지 말아야 한다. 증오하지도 말고, 소망하지도 말고...
그대 침묵이여, 고운 아마포로 죽은 자처럼 굳어버린 우리의 불충분한 옆모습을 덮어다오....
(잡지<아가야>에 1913년 12월 6일 발표)
[침묵의 수녀]
간혹 나 자신이 한없이 작고 초라하게 느껴질 때, 그런 순간에는 꿈을 꾸는 능력조차도 이파리를 잃은 채 시들어버린다. 그때 나에게 남아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지나간 꿈들을 돌이켜 생각하는 것이다.
[시선의 여인1]
안테로스
지극한 사랑과 그런 사랑의 유용함과 관련하여, 나는 외적인 형태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나는 시각적인 열정에 빠져버렸고, 온 마음을 다 바쳐 계속해서 비현실의 규정을 따른다.
누군가의 이미지, 즉 순수한 외모가 아닌 그 사람 자체에게 더욱 깊은 사랑을 느꼈던 기억은 없다. 영혼의 역할은 이미지의 내부에서 이미지가 살아가도록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다. 화가가 자신의 그림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과는 또 다른 빙식으로.
[소령]
내가 타고난 불운한 본성을 가장 노골적으로 누설해주는 친숙한 형태는 몽상이다. 실제로도 나는 몽상을 지극히 아끼고 살아한다. 몽상은 내가 삶의 공포를 달래기 위해 매일매일 비밀스럽게 취하는 진통제이다. 내 갈망의 핵심은 이것이다. 삶을 잠들기, 나는 삶을 너무도 사랑하므로, 차마 그것을 살아버리고 싶지가 않다. 나는 살아지지 않는 삶을 너무도 사랑하므로, 그것을 향한 부적절한 욕망을 차마 느낄 수가 없다.
[소유의 강]
우리 모두가 서로 다르다는 것은 대전제이다. 오직 아주 멀리서 보았을 때만이 다들 비슷할 뿐, 가까이서 보면 유사성이 없다. 그러므로 삶은 규정되어 있지 않다. 공동의 삶이라는 것은 단지 자신을 결코 그 어떤 약속으로도 속박하지 않는, 서로가 서로에게 철저히 무의미한 사람들에게만 가능하다.
우리는 모두 둘이다. 그러므로 두 명의 사람이 서로 만나 가까워지고 행동을 함께 할 경우, 도합 네 명이 서로 일치하기란 매우 어렵다. 한 인간 안에 있는 행동의 인간과 꿈꾸는 인간이 자주 사이가 틀어지는 상태라면. 그들이 타인 안에 있는 행동의 인간 혹은 꿈꾸는 인간과 어떻게 사이가 좋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생명이고, 생명은 곧 힘이다. 우리 모두는 생명에게로 끌려간다. 그 사이사이에 잠시 타인의 곁에 머무는 것이다. 우리가 충분히 자존을 갖추었다면, 우리 스스로를 흥미롭게 여기고(...), 모든 가까움은 곧 갈등이다. 타인이란 길을 찯고 있는 이에게 언제나 장애물일 뿐이다. 오직 아무것도 찾지 않는 자만이 행복해한다. 아무것도 찾지 않는 자만이 발견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찾지 않는 자는 이미 그것을 갖고 있고,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이미 갖고 있다는 것은 행복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생각하지 않는 것이 부유함의 최고가치인 것처럼.
[감각주의자]-全文-
정신 훈련의 과정이 황혼기에 다다르면, 모든 믿음이 죽고 열광적인 숭배는 먼지로 화하며 오직 우리의 감각만이 유일한 실체로 남는다. 우리가 몰두하는 유일한 의심과 우리를 만족시키는 유일한 지식은 오직 우리의 감각에서만 기인한다.
우리는 삶을 세련되게 장식함으로써 더욱 숭고하고 더욱 명백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만약 정령이 수놓인 양탄자 안에서 내 삶이 진행되었더라면, 나는 심연의 공포로 떨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나는 과거에 대한 존중과 미래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모두 잃어버린 세대, 아니 그런 세대의 일부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처럼 탐욕스럽게 현재가 유일한 집인 사람처럼 허겁지겁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다. 감각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직 허망할 뿐인 꿈에서, 과거도 미래도 연상시키지 못하는 현재를 발견하는 우리는, 내적 삶을 향해서는 미소를 짓는 반면 부치를 가진 사물의 실제계를 향해서는 거만한 하품과 함께 무관심을 표명한다.
어쩌면 우리는, 실제 삶에서 오직 쾌락만을 추구하는 그런 인간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 이기적 관심사의 태양은 저물어가고 있으며 우리의 쾌락주의는 황혼과 모순의 색체 속에서 차갑게 식었다.
우리는 회복기의 환자이다. 예술도 기술도 배우지 못한 존재, 심지어 삶에 기뻐할 줄 아는 기술조차도 습득하지 못한 존재이다. 우리는 그 어떤 장시간의 모임도 거부하며, 가장 가까운 친구라 하더라도 반시간을 함께 보내고 나면 대개는 지겹게 느끼고 만다. 우리가 그들을 그리워하는 것은 오직 그들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뿐이며, 그들과 보내는 최고의 시간은 우리가 그들과 함께 있음을 꿈꿀 때뿐이다. 이것이 단순히 우정의 부족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다. 아마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것, 혹은 사랑한다고 믿는 것은, 오직 꿈속에서만 그 가치를 최대로 발휘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연극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배우와 무용수들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모든 연극은 오직 꿈으로만 꾸어져야 할 것들의 엉성한 모방이다.
우리는 타인들의 의견에 무관심하다. 이것은 원래 천성이 그래서가 아니라, 여러 가지 다양한 고통의 경험들이 우리의 감정을 그런 형태로 강제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보통 타인들을 예절 바르게 대하고, 심지어는 타인들을 좋아하기도 하고, 그들 모두에게 균등한 흥미를 보인다. 모든 인간은 흥미로우며 꿈으로, 다른 인간으로 전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능력이 없는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서 우리가 표현해야 할 말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피곤해진다. 우리 중에서 누가 사랑을 받았을까? 르네의 “사랑받는 것은 그를 피곤하게 했다”는 우리에게 완전히 적합한 말은 아니다. 사랑받는다는 상상만으로도 우리는 피곤해지기 때문이다. 불안하게 피곤해진다.
내 삶은 만성적인 열이다. 영영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다. 실제의 삶이 뜨거운 하루처럼 나를 괴롭힌다. 거의 불쾌할 정도로 파렴치한 방식으로.
[기둥으로 둘러싸인 회랑]
풍경이 삶의 휘광이 되고 꿈은 오직 스스로를 꿈꾸는 것에 불과한 시간 동안, 사랑하는 이여, 나는 내 불안의 고여 속에서 버려진 집의 열린 문에 도달하듯이 이 기이한 책에 도달하였다.
이 책을 쓰기 위하여 나는 모든 꽃들의 영혼을 꺾었고, 모든 새들의 모든 노래가 스쳐가는 순간들로 영원과 정지를 직조했다. 천 짜는 여공처럼 (...)나는 삶의 창가에 앉아서 내가 그곳에서 살았음을, 내가 그곳에 있었음을 모두 잊었다. 나는 천을 짠다.(....) 내 침묵의 재단을 순결한 아마포로 덮어 나의 지루함을 감싸기 위하여.
나는 당신에게 이 책을 선물한다. 이 책이 아름다우며 무용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책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아무 것도 믿게 만들지 않는다. 아무 것도 느끼게 하지 않는다. 이것은 재의 심연으로 흘러간다. 바람에 흩날려버리는 재는 열매를 맺지 못하며 해를 입히지도 않는다. (....) 나는 이것을 내 영혼으로 썼다. 이것을 쓰면서, 쓰는 것에 대해서 생각했다. 오직 슬픔에 잠긴 나만을 생각했다. 오직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아닌 당신만을 생각했다.
이 책이 부조리하므로, 나는 이것을 사랑한다. 이 책이 무용하므로, 나는 이것을 당신에게 건넨다. 당신에게 준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나를 위해 기도하라. 이 책을 사랑함으로써, 나를 축복하라. 그리고 잊어라. 오늘의 태양이 어제의 태양을 잊듯이. (그리고 내가 결코 꿈속에서 보지 못했던 꿈의 여인들을 잊듯이.)
강들, 영원한 강들이 내 침묵의 창 아래를 흘러간다. 나는 언제나 반대편 강변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왜 그곳에서 다른 사람이 되어 행복하게 살기를 꿈꾸지 않는가. 그 이유는 알지 못한다.
[묵시론 적인 느낌]-全文-
삶의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나는 항상 새로움이라는 공포와 접촉하게 되었고. 매번 누군가를 새로이 알게 될 때마다 나는 마치 상대편이 소름 끼치는 일상의 관찰을 위해 내가 책상에 펼쳐놓곤 하는 미지의 무언가로부터 그대로 튀어나온 날선 파편이라는 느낌을 받곤 했다. 그래서 나는 모두 중단해버리기로 결심했다.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기로, 모든 행위는 최소한으로 축소하고, 세상의 인간과 사건으로 부터 최대한으로 멀리 떨어져 머물기로 했다. 그리하여 철저한 금욕 속에서 나를 더욱 완전하게 만들기로, 체념을 극한까지 훈련하기로 결심했다. 산다는 일은 나에게 그 정도로 극심하게 두려웠고 고통스러웠다.
무언가를 끝까지 밀고 가겠다고 결심하기, 의혹과 의심을 내려놓는 일은 나에게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우주적 대재앙과 마찬가지이다. 그렇다 나는 tfka이 묵시록이며 대재앙이라고 느낀다. 날이 갈수록 나는 무의미한 몸짓을 취하려고 시도하는 것조차 점점 힘들어지고, 현실적인 어떤 명확한 생황에 처하는 것을 상상만 해도 견딜 수가 없다.
타인들의 현존, 그것을 생각하면 내 영혼은 움츠러든다. 나는 고통스럽고 우울해진다. 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때면, 온 몸에 싸늘한 냉기가 흐를 정도이다. 타인들이 나에게 관심을 보이면, 나는 달아난다. 그들이 나를 쳐다보면, 나는 흠칫 놀란다(....)
나는 늘 방어적으로 몸을 사린다. 나는 삶과 타인을 앓으며 산다. 나는 현실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가 없다. 심지어는 태양조차도 나를 낙담시키며 울적하게 만든다. 오직 밤에만, 밤에만 나는 나 자신이며, 다른 모든 사물에게서 멀리 떨어져 잊힌 존재로, 버려진 존재로 있을 수 있다. 현실과 아무런 연관도 맺지 않은 채. 그 어떤 세상의 소용과도 무관한 채, 나는 오롯이 나로 있는 나를 발견하며, 위로를 얻는다.
삶이 나를 얼어붙게 만든다. 내 삶은 오직 축축한 지하실이며,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지하무덤이다. 나는 취후의 군대가 겪은 대패(大敗)이며 최후의 제국의 몰락이다. 나는 어느 시대를 지배했던 낡은 문명의 종말이다. 타인들 위에 군림하던 내가 이제 여기 홀로 남겨졌다. 항상 누군가로부터 길 안내를 받던 내가 이제 친구도 없고 안내자도 없이...
내 인에 무언가가 끊임없이 동정을 호소한다. 예배도 없고 제단도 없이 죽은 신을 애도하듯이, 스스로를 한탄하며 눈물을 흘린다. 흰 피부의 야만인 아이들의 무리가 국경을 침범해온 이후로 삶이 등장하여 제국에게 행복한 세월에 대해서 물은 이후로. 사람들이 나에 관해서 이야기할 것이, 나는 늘 두렵다. 모든 면에서 나는 실패한 자이다. 아무것도 될 엄두를 내지 못했고, 그런 생각을 할 용기도 없었다. 꿈속에서조차 그러고 싶지 않았다. 꿈속에서조차 순수한 몽상가의 예지적인 시선으로, 내가 삶의 무능력자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머리를 파묻고 있는 이 베개에서 나를 들어 올릴 만한 감정은 없다. 나는 육체를 다룰 수 없으며, 내가 살아 있다는 생각조차도 자유롭게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삶이 무엇인가. 오직 그것을 상상하는 것조차도 불가능하다.
나는 현실의 언어를 말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을 병상에서만 보내다가 처음으로 침대 밖으로 나온 병자처럼 나는 삶의 사물들 사이를 비틀거리며 돌아다닌다. 단지 침대에 누워 있을 때만 나는 삶을 자연스럽게 인식한다. 그렇게 한없이 가라앉은 상태에서는 어떤 열병도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그래서 내 마음은 기쁘다. 오직 폐쇄된 공간의 죽은 공기 속에서만 나는 내 삶의 자연스러움을 호흡할 수 있다.
해변의 부드러운 미풍을 느낀 적도 없으며, 그립지도 않다. 나는 내 영혼을 수도원으로 받아들인다. 나는 메마른 들판 위에 펼쳐지는 가을 그 이상의 것이 아니다. 연못 위로 드리운 어둠의 궁륭에서 꺼져가는 불빛의 반사보다 더욱 희미한 하나의 생명을 가졌을 뿐이다. 언덕 위로 저물어가는 추방당한 태양의 보랏빛 광채보다도 더욱 미약하고 흐릿한 색채를 가졌을 뿐이다.
내가 가진 유일한 삶의 즐거움은 내 고통의 분석이다. 휘발되어 소멸하는 감각이 기운 없이 흐늘거리며 떨어져 내린다. 이것이 내 유일한 관능의 행위이다. 불확실한 그늘 속을 가볍게 걷는 발걸음 소리가 우리의 귓가를 부드럽게 스친다. 그러나 우리는 돌아보지 않는다. 누구의 발걸음인지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나직한 노래가 멀리서 들려오지만 그 가사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노래의 불확실한 출처보다도 알아들을 수 없는 그 가사가 우리를 더욱 편안하게 한다. 창백한 물의 민감한 비밀(....).
밤의 공간은 머나먼 가벼움으로 가득 찬다. 여기서는 들리지 않는 방만함의 기운을 싣고, 어딘가에서 돌아오는 먼 전차의 종소리. 가을의 기색 속에서 여름이 스스로를 망각하는 이 오후. 미지근한 느림의 대기에 나른하게 다가오는 전차의 소리.... 정원의 꽃들은 죽었거나 시들었다. 희미하게 퇴색한 노란빛으로 더 늙고 더 고귀해진 꽃들은 비밀과 침묵과 고독에 더욱 가까워졌다. 연못 수면의 물거품 들. 그들 존재의 근원은 꿈이다. 멀리서 들려오는 개구리들의 울음소리! 오, 하찮은 내 삶이여. 빈둥대는 방랑자와 다를 바 없구나! 풀밭의 향기가 안개처럼 그의 영혼으로 스며드는 가운데, 무와 무가 결합한 심오하고도 충만한 영원의 시간. 밤마다 별빛의 차가운 동정을 받는 방랑자는 피곤에 지친 유목민처럼 길가에 쓰러져 투명하고 신선한 잠에 빠진다.
나는 내 꿈의 진행을 따라간다. 이미지를 계단처럼 밟고 다른 이미지로 들어간다. 우연한 은유를 부채처럼 펼치고 광대한 내면 회화의 세계로 진입한다. 삶을 내게서 분리해낸 후, 너무 작아진 옷처럼 한쪽으로 치워둔다. 나는 길에서 멀리 떨어진 나무들 사이로 가서 숨는다. 나는 길을 잃는다. 그리하여 덧없이 흘러가는 w마시 동안, 나는 삶의 맛을 잊는다. 나는 빛과 활동에 관한 생각을 파묻어버리고, 내 모든 감각 속에서, 의식적으로 그리고 부조리하게, 짓눌린 폐허의 제국을 치워버리고, 승리의 깃발이 나부끼고 축제의 북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최후의 대도시로 진입할 수 있다. 그곳에서 나는 그 무엇을 위해서도 울지 않고 그 무엇에도 기도하지 않으며 나 자신의 존재조차도 기원하지 않는다.
한 잔의 커피, 피울 때마다 그윽한 향기가 폐부를 찌르는 약간의 담배와 함께 어둑한 방에서 눈을 감은 채.... 이것들과 내 꿈 이외에 내가 삶에서 바라는 것은 없다.... 너무 적은가? 그건 모르겠다. 무엇이 너무 적은 것이고 무엇이 너무 많은 것인지.
바깥은 여름날의 오후이다. 지금 내가 다른 누군가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창문을 연다. 바깥세상은 전부 온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막연한 고통처럼 모종의 불쾌감이 되어 다가온다.
어떤 최후의 것이 나를 아프게 하고 나를 갈가리 찢는다. 내 영혼을 뿌리채 뽑아버린다. 지금 이 자리에서 창가에 서 있는 나는, 이 슬픔의 온화한 사물들을 생각하는 나는 미학적인 존재여야만 할 것이다. 그림 속 형상처럼 아름다워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다. 조금도 그렇지 못하다.
이러한 지금과 여기는 과거의 망각에 속해버리기를..... 밤이 오기를, 거대하고 더욱 거대하게. 이 모든 것을 전부 뒤덮어버리고 영영 두 번 다시 몸을 일으키지 않는 밤이 오기를. 이 영혼이 내 영원한 무덤과(....) 그림자가 되기를. 그리하여 내가 앞으로는 영영 해낼 수 없기를. 느낌도 갈망도 없이 살아가는 것을.
[어느 불안한 밤의 심포니]-全文-
옛날의 도시에 어슴푸레하게 동이 튼다. 거대한 건물 검은 석벽에는 알려지지 않은 전통이 적혀 있다. 범람한 평원 위 영롱하게 반짝이는 이른 새벽. 해뜨기 직전의 대기 속에서 모든 것이 축축하게 젖었다. 이 작은 거리에는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있으니, 무거운 궤짝은 낡은 방에 있고 우물은 뒷마당 달빛 t고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할머니가 첫사랑에 빠진 시절 받은 편지, 옛날이 고여 있는 방의 곰팡이 냄새. 이재는 아무도 다루는 방법을 모르는 구식 엽총, 뜨거운 오후 창가의 열기, 아무도 없는 거리, 불안한 잠, 포도밭에서 점점 번져가는 노균병, 종소리, 수도원을 연상시키는 삶의 고뇌.... 축복의 시간, 당신의 부드러운 손.... 영원히 도착하지 않는 애무, 어둑한 박명 속 당신 손가락의 반지가 피를 흘린다..... 교회의 축제와 불신의 영혼, 볼품없이 흉측한 성인들은 그 질료로 인해서 아름답고, 낭만적 열정의 환상, 부두에 어둠이 내리면 짙게 밀려오는 바다내음, 차가워진 대기는 더욱 축축하다.....
당신의 가느다란 손이 삶에 감금당한 어떤 사람 위에 날개처럼 놓여 있다. 기나긴 복도, 담벼락의 틈새, 열려 있을 때조차 닫힌 창문, 바닥은 묘석처럼 차갑고 사랑의 그리움은 닿을 수 없는 나라로의 여행과도 같다. ...옛날을 지배한 여왕들의 이름... 유리창 옆에는 건장한 체구의 귀족들 초상화가 걸려 있다. ...교회당 내부로 차가운 향의 연기처럼 흐릿한 달빛이 한 줄기 스며든다. 더 이상 침투할 수 없는 바닥의 어둠에 붙들려 사라질 때까지.... 단단히 포갠, 메마른 두 손.
고대 문서의 부조리한 암호에서 신비주의의 교리를, 동판화 장식에서 비밀 교단의 위계를 발견한 수도사의 불안.
햇빛이 비치는 해변과 내 안의 열병..... 바다는 나를 질식시키는 공포의 빛이다. ....먼 곳으로 향하는 배가 내 곁으로 미끄러지며 항해한다...... 열에 들뜬 채 나는 해변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간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신선하고 따스한 미풍, 탐욕의 바다, 위협적인 바다, 어두운 바다, 아르곤 호의 선원들에게는 참으로 머나먼, 어두운 밤, 내 불타는 이마, 그들의 원시적인 배들....
모든 것은 타인들에게 속할 뿐이다. 오직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는 나의 고뇌만을 제외하고는.
나에게 바늘을 다오. ....오늘 그녀의 작은 발걸음이 들리지 않는다. 그녀가 어디 있는지, 주름과 색채의 바늘로 그녀가 무슨 마법을 부리려 하는지 모른다는 것이 안타깝다. 오늘 그녀의 바느질감은 영원히 장롱 서랍 속에 감금되었다. 꿈의 팔이 어머니의 목을 감싸안는 따스함은 그 어디에도 없다.
[편지]
[한 번도 떠나지 않은 여행1]
가을날의 희미한 황혼 속에서 나는 한 번도 떠나지 않은 여행길에 올랐다. 지금 불가능한 기억을 되살려보면, 하늘은 슬픔에 잠긴 황금빛에 꺼져가는 보랏빛이 섞여 있었다. 산들의 능선 위로는 죽음의 색체를 띤 광휘가 펼쳐졌고, 그것이 근육을 연상시키는 선명하고 날카로운 윤곽에 은은하고도 부드러운 기운을 불어넣고 있었다.
나는 기억한다. 바다는 그림자의 색조로, 일렁이는 희미한 빛의 형상들로 이루어진 양탄자였다. 행복한 순간에 떠오르는 슬픔의 상념처럼 비밀스러웠다. 내가 모르는 어떤 것을 선포하는 목소리였다.
나는 내가 아는 그 어떤 항구도 아닌 곳에서 출발했다.. 오늘까지도 나는 그 항구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나는 단 한 번도 그곳에 있지 않았다. 게다가 제의와도 같은 내 여행의 목적은 존재하지 않는 항구, 오직 항구로의 입항만이 있는 그런 항구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부록]
2. 두 통의 편지
“페소아는 다음 두 통의 편지에 적힌 몇몇 문장과 사색의 구절을 뽑아서 <불안의 서>에 인용해 넣으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어머니에게(발췌). 1914년 6월 5일
내 건강은 좋습니다. 게다가 요즘은 기분까지도 아주 예외적으로 그다지 나쁘지 않아요. 하지만 그런 것들과는 별개로 어떤 불안이 나를 괴롭힙니다. 그것은 아마도 흔히 말하는 일종의 지적인 가려움증에 가까워 보입니다. 마치 풍진을 앓는 듯한 그런 상태 말입니다.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을 이렇게 부조리한 언어로밖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군요. 이것은 그동안 어머니 당신에게 써 보냈던, 슬픔 자체가 개입되지 않은 슬픈 기분상태라는 것과도 그리 유사하지 않는 감정입니다. 최근의 내 기분이 이런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내게서 멀어지고 산산 조각나 버리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멀어지고 산산조각난다는 두 동사에 특별한 음울한 어조를 싣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단지, 내가 관련을 맺고 있는 인간들이 모종의 변화를 겪거나 겪을 것이라는, 생의 어떤 한 단계가 종말을 향해 나 자신도 구체적으로 어떤 식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튼 신비로운 방식으로, 마치 주변의 오랜 친구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고 있는 늙은 남자처럼, 내 삶 또한 변화해야 하고 그렇게 되리라는 느낌이 든다는 것입니다.
[Review]
벚꽃이 만발했던 지난 두 주간 꾸역꾸역 이 책을 읽었다. 에세이 형태의 글 37편, 다양한 주제로 쓴 글이다. 지난해 읽었던 <불안의 서>에서 큰 감흥을 받았다면 이 책 <불안의 글>은 좀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도중에 여러 번 책장을 덮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다시 읽으면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책이다. 어떤 글은 전혀 낯설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흥미롭기도 했다.
서로의 생각이 다른 사람과의 대화는 달갑지 않다. 그렇다면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기나 한 걸까? 사람은 의견이 일치한다고 해서 생각마저도 같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생각이 달라도 의견이 일치할 수 있고 또 생각이 같아도 의견은 다를 수 있다. 이 말을 ‘오토 랑크’는 <심리학을 넘어서>라는 책에서 ‘인간은 이성적이라고 해서 모두 따르지는 않는다’고 했다. 프로이트의 수제자였던 그가 스승과 결별하게 된 이유는 프로이트의 이성적 사고가 결코 인간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흔히 누군가 불통이다. 는 말은 생각과 의견이 조화롭지 못하다는 뜻이다.
요즘 정부의 의대생 증원을 두고 서로 간에 갑론을박하고 있다. 국민 대다수가 정부 정책을 찬성해도 소위 사회 엘리트층이라는 의사들은 그걸 반대하고 있다. 노동조합도 마찬가지다. 이런 것은 옳고 그름이나 서로 간의 이해관계를 넘어, 또 다른 인간의 심리적 요인이라고 ‘오토랑크’는 말한다.
이 책은 독특하다. 내용도 그러하지만, 저자인 ‘페소아’라는 인물이 그렇다.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출생한 그는 일곱 살 때 아버지가 죽고, 양아버지가 영사로 근무하던 남아프리카 ‘더반’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마른 몸매에 큰 키, 허리를 항상 구부리고 시력이 좋지 않은 눈동자로 주변 사람들을 세심하게 살피는 외로운 인상을 주었다. 그는 열일곱 살에 고국으로 돌아와서 통신문을 번역하는 조그만 사무실에서 일했다. 그 후 양아버지의 죽음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며 끊임없이 습작 활동에 전념하였다. 생전에 몇 편의 글을 발표했지만 모두 익명으로 하였고, 철저하게 자신은 베일 속에 가두었다. 사후에 27000여 매의 원고가 발견되어서 그의 이름과 함께 세상에 알려졌다. <불안의 서>로 출판된 이 책은 포르투갈에서 큰 인기를 얻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소개되었다. 이 책 <불안의 글>은 <불안의 서>에 부록으로 첨가된 부분만을 따로 엮은 책이다. 페소아는 수백 개의 산문에 따로 제목을 붙이지 않고 일렬 번호로만 표시했는데, 이 부록 부분의 글에는 각각 제목을 붙여놓았다.
자신의 생각과 의견이 다르다는 것은 인생의 괴로움이다. 조화와 협동은 이 괴로움을 이겨내고 피운 꽃과 같은 것이다. 페소아의 글을 읽다가 답답하고 지루한 생각이 드는 이유는 그의 글들이 자신의 생각에만 치우쳐 있기 때문이며, 다시 읽으면 또 그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이유로 페소아는 자신의 글을 세상에 알리는 데 그토록 주저했던 이유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나는 현실의 언어를 말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을 병상에서만 보내다가 처음으로 침대 밖으로 나온 병자처럼 나는 삶의 사물들 사이를 비틀거리며 돌아다닌다.” (본문)
“사람들이 나에 관해서 이야기할 것이, 나는 늘 두렵다. 모든 면에서 나는 실패한 자이다. 아무것도 될 엄두를 내지 못했고, 그런 생각을 할 용기도 없었다. 꿈속에서조차 그러고 싶지 않았다. 꿈속에서조차 순수한 몽상가의 예지적인 시선으로, 내가 삶의 무능력자임을 알았기 때문이다.”(불안의 서)
그러면서도 그는 계속해서 글을 썼으며, 글의 주인공은 항상 둘이다. 자아와 초자아,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서 오락가락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불안한 그의 마음에 유일한 탈출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부조리하고 앙상한 내 방 책상 앞에서, 이름 없고 하찮은 사무원인 나는 쓴다. 글은 내 영혼의 구원이다. 나는 멀리 솟아난 높은 산 위로 가라앉는 불가능한 노을의 색체를 묘사하며 나 자신을 황금빛으로 물들인다. 내 석상으로, 삶의 희열을 대신해주는 보상으로, 그리고 내 사도의 손가락을 장식하는 체념의 반지로, 무아지경의 경멸이라는 변치 않는 보석으로 나에게 황금의 옷을 입힌다."(불안의 서)
페소아는 1935년 11월 29일 복통과 고열로 인해 병원에 실려 온 뒤 사망했으며 나이는 47세였다.■
(본문)
“다른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갔다가 기분 좋은 느낌을 받을 때, 그리고 그들이 그 느낌을 나와 공유할 때 나는 질투를 느낀다. 그들이 나와 똑같은 감정을 향유할 뿐 아니라, 동일하게 느끼는 영혼 덕분에 내 영혼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것이 파렴치하게만 생각 된다.”
“어떤 풍경을 마주했는데 그것을 이미 누군가가 나와 똑같은 마음으로 지켜보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면, 너무도 고통스러운 탓에 나는 도저히 풍경을 평안하게 감상할 수가 없다. 그런 이유로 나는 늘 뭔가를 보게 되면, 그 대상을 논쟁의 여지없이 오직 나만의 것으로 바꾸어버리려고 노력한다.“
“기운 없이 가라앉은 내 방안으로 바깥의 아침 여명이 어슴푸레한 흔적으로 비쳐든다. 나는 조용한 혼돈이다......왜 새로운 날이 밝아야만 하는가? .... 날이 밝은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이것을 알고 있음으로 내 마음은 무겁다. 날이 밝아오도록 하기 위해서 내가 무슨 행동을 취해야 할 것만 같은 불안한 느낌이다. 마비된 듯이 서서히, 나는 진정을 되찾고 나른해진다. 공기 속을 떠돌며 잠과 깨어남 사이를 부유한다. 새로운 현실이 탄생한다. 나는 그곳에 있다. 그 현실이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것은 이 가라앉은 방의 직접적 현실을 훼손하지 않은 채 발생하여 어느 낯설음의 숲 속 현실로 탄생할 것이다. 내 추방당한 의식 속 두 개의 현실. 두 줄기의 연기가 서로 섞인다. 영롱하게 어른거리는, 두 개의 투명한 풍경. 원래의 현실과 낯선 현실 속에서 이토록 맑고 깨끗하구나....”
“어떤 때는 이 좁은 방이 다른 세계의 지평선에 재의 안개처럼 뿌옇게 펼쳐진다....그러면 한동안 우리가 발을 디딘 대지는, 이 방의 모습으로 변한다. 나는 꿈꾸면서 나를 잃는다. 나는 이중으로 있다. 내 안에, 그리고 그 낯선 여인의 안에.... 깊은 피곤이 검은 불꽃으로 나를 갉아 먹는다.....심연, 비현실성의 그리움이 허위의 생으로 나를 압박한다.... 오, 서글픈 행운이여!.... 오, 교차로에서의 영원한 망설임이여!...나는 꿈꾼다. 내 의식 뒤편에서 누군가 나와 더불어 꿈꾸고 있다..... 아마 나는 존재하지 않는 그 누군가의 꿈에 불과할 것이다. “
“내 삶은 만성적인 열이다. 영영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다. 실제의 삶이 뜨거운 하루처럼 나를 괴롭힌다. 거의 불쾌할 정도로 파렴치한 방식으로.”
“그런 이유로 나는 늘 뭔가를 보게 되면, 그 대상을 논쟁의 여지없이 오직 나만의 것으로 바꾸어버리려고 노력한다. 나는 산을 바라보면서 산의 모양을 변화시킨다. 하지만 능선 하나하나가 완전히 똑같은 모양으로 흘러가도록, 똑같은 수준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도록 그렇게 변화시킨다. 특정 나무와 꽃들을 다른 종류로, 극단적으로 다른 종류인 나무와 꽃으로 교체하고, 황혼을 볼 때도 같은 효과가 나는 다른 색채를 본다. 나에게 익숙한 즉흥적인 시각과 경험에 힘입어 나는 외부세계와 내적 변화를 창조해낸다.”
“그렇게 하여 내 눈에 보이는 것들을 아주 간단하게 다른 것으로 교체한다. 하지만 강렬하게 최고의 단계인 꿈의 순간에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상상해낸다.”
“나는 풍경이 음악처럼 나에게 작용하도록 한다. 풍경이 내 안에서 그림들을 불러일으키도록 만든다. 이 일을 성공하면 나는 승리감에 도취된다.”
“이 책을 쓰기 위하여 나는 모든 꽃들의 영혼을 꺾었고, 모든 새들의 모든 노래가 스쳐가는 순간들로 영원과 정지를 직조했다. 천 짜는 여공처럼 (...)나는 삶의 창가에 앉아서 내가 그곳에서 살았음을, 내가 그곳에 있었음을 모두 잊었다. 나는 천을 짠다.(....) 내 침묵의 재단을 순결한 아마포로 덮어 나의 지루함을 감싸기 위하여."
“나는 당신에게 이 책을 선물한다. 이 책이 아름다우며 무용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책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아무 것도 믿게 만들지 않는다. 아무 것도 느끼게 하지 않는다. 이것은 재의 심연으로 흘러간다. 바람에 흩날려버리는 재는 열매를 맺지 못하며 해를 입히지도 않는다. (....) 나는 이것을 내 영혼으로 썼다. 이것을 쓰면서, 쓰는 것에 대해서 생각했다. 오직 슬픔에 잠긴 나만을 생각했다. 오직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아닌 당신만을 생각했다.”
“삶이 나를 얼어붙게 만든다. 내 삶은 오직 축축한 지하실이며,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지하무덤이다. 나는 취후의 군대가 겪은 대패(大敗)이며 최후의 제국의 몰락이다. 나는 어느 시대를 지배했던 낡은 문명의 종말이다. 타인들 위에 군림하던 내가 이제 여기 홀로 남겨졌다. 항상 누군가로부터 길 안내를 받던 내가 이제 친구도 없고 안내자도 없이...”
Go My Book Review ~~
https://blog.naver.com/bookrev/22342236916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