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훈 2004년 작> |
투수가 던지는 공의 종류를 미리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타자가 있다고 상상해 보자. 투수가 그에게 맞설 수 있는 무기는 로케이션만 남게 된다. 타격 기술이 뛰어난 타자라면 좋은 로케이션의 공까지도 쳐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투수가 자신의 구종을 감추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고, 타자가 '투수 자신도 모르는 버릇'을 찾아내려고 애쓰는 이유다. (현역 시절 '캡틴 비디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던 토니 그윈은 그 작업을 가장 꼼꼼하게 했던 타자로, 지금은 모든 팀들이 그윈이 그랬던 것처럼 투수의 피칭 장면을 이잡듯이 뒤진다.)
현역 시절 오렐 허샤이저는 커브 그립을 잡을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왼 집게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대한 허샤이저의 해결책은 집게 손가락 덮개가 있는 글러브로 바꾸는 것이었다. 로저 클레멘스는 글러브를 오래 쓰면 그립을 쥐었을 때 구부러짐의 차이를 통해 타자가 구종을 간파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글러브를 수시로 교체했다.
2013년 라쿠텐 골든이글스에 입단한 앤드류 존스는, 다나카 마사히로(26·뉴욕 양키스)를 상대로 들어선 자체 청백전 타석에서 다나카의 손목 각도를 보고 패스트볼과 스플리터를 구별해 냈다. 그리고 이를 다나카에게 알렸다. 다나카의 2013년 대활약(28경기 24승 무패 1.27)에는 존스의 조언도 한몫했던 것. 다나카가 지난해 메이저리그 전문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은 것도 스플리터를 던질 때의 투구폼이 패스트볼을 던질 때와 판박이라는 것이었다.
샌디 코팩스는 역대 최고의 커브를 던진 투수로 꼽힌다. 그의 커브가 더 대단했던 것은 패스트볼을 던질 때와 커브를 던질 때의 투구폼이 고등학생도 알 정도로 차이가 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타자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최근 비슷한 경험을 이야기한 사례가 있다. 지금도 LA 다저스 역대 홈런 1위(270개)를 지키고 있으며(4위 맷 켐프 182개) FOX스포츠에서 해설을 맡고 있는 에릭 캐로스는, 명예의 전당 특집 방송에서 랜디 존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섭기로 따지면 랜디 존슨이었어요. 아이러니한게 뭐냐하면요, 마운드에서 그가 글러브를 타이트하게 오므리고 있으면 그건 패스트볼입니다. 그리고 글러브가 크게 펴져 있으면 슬라이더였어요. 타자들은 모두 언제나 그가 어떤 공을 던질지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도 칠 수가 없었습니다." (1월13일 몬스터짐 기사)
지금도 85마일을 던질 수 있다는 이 분(만 51세) ⓒ gettyimages/멀티비츠 |
랜디 존슨이 하나로 통일했던 '좌완 제국'은 현재 몇 개로 나뉘어 있다. '적통'이라 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좌완>은 클레이튼 커쇼(26·LA 다저스)가, <가장 닮은꼴>은 크리스 세일(25·시카고 화이트삭스)이, <가을 야구의 랜디 존슨> 자리는 메디슨 범가너(25·샌프란시스코)가 물려 받았다. 그리고 또 한 명. 존슨의 공포를 계승하고 있는 좌완이 있다. 바로 아롤디스 채프먼(26·신시내티)이다. 현재 채프먼이 유지 중인 피안타율 관련 기록은 그야말로 독보적이다.
랜디 존슨과 빌리 와그너의 위엄?
존슨 (22시즌) : 통산 .221 .297 .353 .650
커쇼 (07시즌) : 통산 .209 .273 .308 .581
와그너(16시즌) : 통산 .186 .262 .306 .568
채프먼(05시즌) : 통산 .147 .261 .224 .486
2010년 1월 신시내티가 채프먼과 6년 3025만 달러 계약을 맺을 때까지만 해도 회의적인 시각이 적지 않았다. 마치 미치 윌리엄스와 같은 채프먼의 제구를 과연 잡을 수 있겠냐는 것. 실제로 채프먼의 제구는 심각했다. 채프먼은 지금껏 많은 파이어볼러가 실패한 <구속 낮춰 제구 잡기>에 도전했다. 그리고 성공했다. A학점은 아닐지라도 제구에서 커트 라인을 통과하게 되자 채프먼은 다시 구속을 끌어올렸고, 지난해 PITCHf/x 시대 최초의 '평균 100마일' 투수가 됐다. [관련 글]
채프먼의 구속과 9이닝당 볼넷/탈삼진 변화
2011 : 097.9마일(157.6km) 7.38 / 12.78
2012 : 097.7마일(157.2km) 2.89 / 15.32
2013 : 098.3마일(158.2km) 4.10 / 15.83
2014 : 100.3마일(161.4km) 4.00 / 17.67
하지만 현재 채프먼은 더 큰 목표에 도전하고 있다. 현실 세계에 나타했을 때 얼마나 위력적인지를 과거 에릭 가니에가 잠깐 보여준 바 있는, 특급 구종 세 개를 가진 <스리피치 마무리>가 되는 것이다.
신시내티에는 다른 팀들의 부러움을 사는 비기(秘技)가 하나 있다. 체인지업 하나 만으로 통산 100승을 거두고 은퇴했으며 매년 스프링캠프에 참가해 투수들을 지도하고 있는 '체인지업 마스터' 마리오 소토 특별 인스트럭터다. 자니 쿠에토의 사부이기도 한 소토에게 지난해 주어졌던 특명은 채프먼에게 체인지업을 이식하라는 것. 채프먼은 곧바로 6.7%의 체인지업을 던지는 큰 성과를 나타냈다.
투스트라이크 이후 구사율(좌타자 상대)
2011 : 패스트볼 78% / 슬라이더 22%
2012 : 패스트볼 79% / 슬라이더 21%
2013 : 패스트볼 79% / 슬라이더 21%
2014 : 패스트볼 82% / 슬라이더 18%
투스트라이크 이후 구사율(우타자 상대)
2011 : 패스트볼 71% / 슬라이더 29%
2012 : 패스트볼 86% / 슬라이더 14%
2013 : 패스트볼 86% / 슬라이더 14%
2014 : 패스트볼 66% / 슬라이더 29% / 체인지업 5%
패스트볼(평균 100.3마일, 최고 103.8마일)과 슬라이더(평균 88.5마일, 최고 93.3마일)에 비하면, 체인지업(평균 88.3마일, 최고 91.9마일)의 사용은 아직 제한적이다. 지난해 채프먼이 체인지업으로 잡아낸 타자는 5명뿐이다(네 명이 삼진이긴 했지만). 하지만 체인지업은 그보다 더 중요한 2차 효과를 불러왔다. 슬라이더와 거의 똑같은 구속으로 들어오지만 움직임이 전혀 다르다 보니, 슬라이더의 위력을 높여준 것이다. 이에 채프먼은 우타자를 상대로 했던 패스트볼 일변도의 피칭에서 벗어났고, 그 결과 우타자 상대 성적이 크게 좋았다. 그나마 우타자에게는 남아 있었던 일말의 희망마저도 사라지게 된 것이다.
좌타자 상대 성적 변화
2013 : .137 .241 .137 .379 / 0피홈런
2014 : .132 .214 .158 .372 / 0피홈런
우타자 상대 성적 변화
2013 : .172 .276 .316 .592 / 7피홈런
2014 : .118 .239 .176 .415 / 1피홈런
올해 만약 채프먼이 체인지업을 결정구 수준까지 끌어올리게 된다면, 메이저리그 타자들은 필자가 어린 시절 책 모서리가 닳도록 봤던 <괴수 대백과>에 나오는 머리 세 개 달린 괴물의 공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채프먼이 통산 252.2이닝에서 허용한 홈런은 14개. 그 중에서 좌타자에게 허용한 것은 단 한 개로, 채프먼은 2011년 6월27일 데뷔 첫 피홈런을 루크 스캇에게 허용한 이후로 더 이상 좌타자에게 홈런을 맞지 않고 있다.
류현진을 상대로 19타수8안타(.421 .450 .684)를 기록 중인 폴 골드슈미트는 대표적인 좌완 킬러다(통산 우완 .281 .368 .497 좌완 .323 .417 .599). 골드슈미트는 채프먼을 상대로도 5타수2단타 2삼진이라는 성공을 거두고 있다. 버스터 포지(통산 좌완 .333 .393 .578)는 5타수3안타와 함께 장타 두 개(2루타)를 뽑아냈다. 역시 좌완에게 강하며 채프먼을 9번이나 상대한 앤드류 매커친도 7타수2단타 1볼넷 1몸맞는공의 선전. 그러나 삼진도 네 개를 당했다.
가장 부드럽게 뿌려지는 100마일 ⓒ gettyimages/멀티비츠 |
채프먼을 상대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두고 있는 타자는 올해 시카고 컵스가 1년 260만 달러 계약으로 영입한 우타자 외야수 크리스 데노피아(34)다(류현진 상대 12타수4안타 2루타 1개). 데노피아는 채프먼과의 다섯 번 승부에서 안타 두 개를 때려냈는데, 두 개는 모두 장타였고(2루타 홈런) 모두 끝내기 안타였다. 채프먼이 지금까지 허용한 끝내기는 7개가 전부다(2013년 7월31일에 때려낸 끝내기 홈런은 98마일짜리를 넘긴 것이었다). [영상]
데노피아가 때려낸 두 개의 끝내기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모두 초구로 들어온 패스트볼이었다는 것. 반면 2구 이상 이어진 나머지 세 번의 승부는 모두 땅볼아웃이었다. 실제로 채프먼의 통산 초구 피안타율은 .224, 피장타율은 .397로, 2구 이후 피안타율인 .142, 피장타율 .257에 비해 크게 높다. 채프먼을 상대할 때마다 초구를 때릴 수는 없겠지만, 득점권이나 끝내기 같은 상황에서는 초구를 노리고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채프먼은 강정호가 피츠버그 선수가 되기 전부터 꼭 한 번 상대해 보고 싶다고 했던 투수다. 피츠버그는 올시즌 개막전(한국시간 4월7일 오전 5시) 포함 첫 3연전을 신시내티 그레이트아메리칸볼파크에서 치르는데, 강정호는 빠르면 개막전부터 선발 혹은 대타로 채프먼을 상대할 수도 있다.
과연 강정호는 채프먼을 상대로 어떤 모습을 보여주게 될까. 두 달이나 더 기다리려면 꽤나 인내심이 필요할 듯하다.
[관련 기사] 강정호를 기다리고 있는 투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