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용좌 작가의 산문집 『스물셋, 아무렇더라도 나를 사랑해준 사람』(푸른사상 산문선 56).
수필의 나이 스물셋에 이르기까지 매년 써온 글을 묶은 이 책은 저자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살아 숨 쉰다.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크고 작은 무늬를 그려내는 저자의 상념과 단상들이 펼쳐진다.
2024년 10월 9일 간행.
■ 작가 소개
2002년 『소설시대』에 단편 「태양은」 발표로 등단했다. 장편소설로 『열하나 조각그림』 『표현형』 『흐릿한 하늘의 해』 『숨』 『날마다 시작』, 연작소설로 『희미한 인(생)』, 소설집으로 『반대말·비슷한말』이 있고, 학술서로 『도이칠란트·도이치문학』 『창작과 사실. 양심으로서의 문학에 대한 고찰 1983~2009』 등이, 번역서로 『강 풍경을 마주한 여인들』 『행복한 불행한 이에게. 카프카의 편지 1900~1924』 등이 있다. 이화문학상(2004), 광주문학상(2014), PEN문학상(2017), 박용철문학상(2023) 등을 수상했다. 전남대학교 독일언어문학과 명예교수이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지금으로서는 이만큼 썼으므로 이만큼 썼노라고, 누구라도 필위 잘 쓸 수는 없노라고, 정직하면 되리라는 어설픈 변명으로 소설들을 더구나 감히 산문집을 내놓습니다. 어쩌면 무지가 용맹이 아니라, 부족을 인내한다는 의미에서 겸손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중략) 언제나처럼 미술을 전공한 둘째가 그려주는 표지에 숨어, 느슨한 또는 된 말들, 묽은 아니면 진한 글들이 숨 쉬고 있기를 바라면서, 저는 숨을 죽입니다.
■ 책 속으로
복숭아 껍질을 벗긴다. 아직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따 들인 것들이라 당도도 높고, 무엇보다 벗겨 드러난 속살에서 물기가 두둑두둑 듣는다. 두 개를 벗길 양이면 늘 어느 하나가 더 먹음직스럽다. 너무도 당연히 더 맛있어 보이는 쪽을 당신의 접시에 올려놓으면서 느낀다. 누군가에게 더 맛있어 보이는 것을 내밀면 그것이 사랑일 것. 나란한 두 베갯잇을 새로 갈아 끼우면서 풀기 더 고슬고슬한 쪽을 그리로 밀어놓으면 그것이 사랑일 것. 이 시시한 진부한 존중이 어우러져 나란히 서 있는 평행선. (「평행선」, 85~86쪽)
갑자기, 너무나 늦게 깨닫는다, 얼마나 서운하셨을꼬. 인생이 뭘까. 인생관이 다른 딸을 두고 평생 얼마나 참담했을꼬. 단 한 톨의 노력을 하지 않아도, 아무렇더라도 나를 사랑해준 사람이 이제는 없다.
나 홀로. 이제 나 홀로다. 나는 또 얼마나 죽을힘을 다해야 할까. 아름다운 관계를 얻기 위해 얼마나 나를 죽이고 참아야 할까. 내 멋대로, 아무렇더라도 나를 사랑해준 사람, ‘엄마’가 이제는 없다. 49재를 지났으니 어딘가로 정말 떠나시고 없다. 머리에 꽂았던 하얀 리본이 타들어가는 초라한 불꽃과 함께 영영 떠나버렸다. (「아무렇더라도 나를 사랑해준 사람」, 101~10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