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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서갑: 단기4339년 병술년 음력(윤) 7월 24일 오후 3시 17분 申時에 비서갑 신모님이신 삼신 할머님께서 덕모라고 하는 선사에게 접신하였다. 서로 인사에 가까운 대화를 나누고 비서갑이 말하기를 ‘너희가 단군할아버지를 부르고 나 삼신할머니를 불렀으나 덕모 선사에게 올 수가 없다. 그래서 어떠한 말도 전해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첩첩산중에 업보가 둘러쌓아 있고, 동해바다에서 서해바다까지 업보가 차서 아우성치니 만나 볼 길이 아주 멀었다.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이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군의 황후가 비서갑인데 그분이 인간의 생명줄을 점지해 주는 삼신할머니라는 점이다.
*淳厖政治(순방정치): 인정이 도타운 정치. 요순의 정치와 같은 정치를 말한다. 여기서 순(淳)의 의미는 ‘순박하다, 인정이 도탑다, 흠뻑 적시다’ 등의 뜻이며 방(厖)은 ‘크다. 크고 넓다, 섞이다, 넉넉하다, 풍족하다’ 등의 뜻이 있어서 순방(淳厖)이란 ‘인정이 도탑고 넉넉하고 풍족한 상태나 모양’ 나타내며 만주어에 태양을 순(淳)이라 하는데 그런 의미로 본다면 순방(淳厖)의 뜻은 ‘태양처럼 밝고 크며 넉넉하고 풍족한 상태’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순방지치(淳厖之治)의 의미는 ‘태양처럼 밝고 어질며 거룩한 제왕의 영도력으로 모든 제도와 문물(文物)이 완비되고 의식주는 풍족하며 문명은 계화(啓化)되어 홍익인간과 재세이화 그리고 성통공완이 이루어지는 이상적인 치세’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순방정치는 최고 이상정치의 실현이며 신인정치(神人政治)이며 성인의 시대이고 태평성대를 일컫는 말이다. 하여서 순방지치는 역사상 2096년이라는 가장 오랫동안 존속을 하였던 쥬신의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회 문화가 활짝 꽃을 피운 자랑스러운 우리의 쥬신역사인 것이다.
단군의 마음공부
단군왕검 어린백성에게 하늘법칙은 하나이고 문이 둘이 아니니 천의에 따라 진심으로 정심을 갖고 심신을 수련한다면 하나님을 만난다고 말씀하였다네.
또한 천심도 하나 인심도 하나이니 성심성의를 다하여 본심을 얻는다면 타인의 맘 능히 살펴서 화평한 세상 만든다고 심신수련을 잘하기를 당부했네.
하니 천심본심을 얻어서 진심으로 살아서 믿음직한 국가의 동량되라 했다네.
*하늘법칙: 詔曰天範惟一弗二厥門爾惟純誠一爾心乃朝天 天範恒一人心惟同推己秉心以及人心人心惟化亦合天範乃用御于萬邦
단군왕검은 가르침을 내려 말하기를
"하늘의 법칙은 하나일 뿐이니 그 문은 둘이 아니니라. 너희 들은 오로지 순수하게 참마음을 다 할 것이니 이로써 너희 마음이 곧 한님을 보게 되리라. 하늘의 뜻은 언제 어디서니 하나이고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로 한가지라. 그러하니 스스로를 살펴보아 자기의 마음을 알면 이로써 다른 사람의 마음도 살 필수 있으리라. 다른 이의 마음을 교화하여 하늘 뜻에 잘 맞출 수 있다면 이로써 세상 어느 곳에도 잘 쓰일 수 있는 것이리라."
*어린백성: 어리석은 백성.
*본문 天範乃用于萬邦(천범내용우만방): 하늘 법대로 살면 모든 나라 즉 어느 나라 어디서든지 두루 쓰일 수 있어 좋은 직업을 얻고 크게 대우를 받는다는 말이다.
*심신수련 공부: 몸과 마음은 수련 전에는 그리 훌륭하지 않으나 수련을 통하여 자신의 행위와 마음을 알게 되면 인간이 얼마나 많은 욕망덩어리인가 깨닫게 된다. 우리는 선한 민족이고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 줄 아는 민족이다. 그것은 우리민족이 오래전부터 단군왕검의 교훈으로 천의를 따라 천심을 본심으로 알고 살아온 때문이다. 우리는 그 가르침을 따라 남을 아끼고 남의 마음을 살피며 남을 사랑하고 하늘을 공경하며 사는 마음공부를 해 왔으며 특별한 수련도 해왔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으나 밝달 법이란 호흡 수련법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이 수련법은 쥬신시대 부터 전해온 것으로 우주에너지를 섭취하는 호흡 수련법으로 마음공부와 동시에 몸도 건강해지는 공부이니 혹 단군왕검이 알려준 것인지도 모른다.
*천심 진심 정심 성심: 천의에 따라 인품에 따라 나타나는 사람의 마음 즉 인심이다.
사람 사는 도리
사람이 태어남은 부모에 연유하며 부모는 하늘로부터 내려오셨다고 하네.
그러니 부모를 바르게 받들어 모시는 것이 하늘을 받드는 것이며 이 같은 몸과 마음으로 나라를 위하면 충성이 되고 부모를 위하면 효도라고 하였네.
이 진리를 따라 행하면 하늘이 무너져도 제일 먼저 재앙에서 벗어난다하네.
짐승도 짝이 있고 짚신도 짝이 있나니 정음정양 서로 지키며 살라고 하였네.
*正陰正陽(정음정양): 남자와 여자가 서로 화목하여 원망과 질투함 없이 음란함을 삼가하고 살아가는 것이라 풀이 할 수도 있으나 그것이 사회제도화하는 과정은 크게 다르다. 먼저 사회상에 나타난 정음정양을 알려면 삼강오륜의 이해가 필요하다.
삼강(三綱)은 중국 전한(前漢) 때 유학자인 동중서(董仲舒)에 의해 확립되었고 오륜(五倫)은 오상(五常) 또는 오전(五典)이라고도 하며 맹자(孟子)에 그 원형이 나타난다. 현대에서 삼강오륜은 사람이 행해야 할 도리로 이해하고는 있으나 시대에 뒤쳐진 낡은 사상으로 취급하고 있으며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잊혀져가고 있다. 이렇게 고장 난 골동품으로 취급 받는 이유는 지난날 남녀와 신분 그리고 계층의 차별이 제도화되었던 우리 사회의 불평등한 구조에서 비롯된 좋지 않은 기억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반상의 구별, 남존여비, 적서의 차별과 같은 불평등한 제도는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우리나라는 조선 시대에 중국의 영향으로 유교를 국교로 삼았다. 조선(1392~1910)이 개국하는 시기에 중국은 명(明) 왕조(1368∼1644)가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고 한족(漢族)이 나라를 되찾아 대대적으로 국가를 재정비하는 정국이었다. 이때 중국에서는 주자학을 관학(官學)으로 하였으며 조선도 이것을 관학으로 받아들였다. 조선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주자학을 근본으로 하여 나라를 정비해 나갔으며 주자학은 학문적으로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과 같은 논의를 통해 진보하였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주자학 외의 다른 학문은 이단으로 배척하는 경향이 강화되었고 조선의 사회는 점점 양반 중심의 신분사회로 변모하면서 여러 방면에서 폐쇄적이고 불평등한 요소들이 심화되었다. 특히 주자학은 “음양은 ‘조화(造化)’의 근본이므로 없을 수 없어서 ‘선량함’과 ‘사악함’의 구분이 있을 뿐이었다.
대개 양은 선량하고 음은 사악하며 양은 좋은 것이고 음은 나쁜 것이니 이는 낮이 있으면 반드시 밤이 있고 더위가 있으면 반드시 추위가 있는 것과 비슷하다.”거나 “양은 항상 음을 겸하지만 음은 양을 겸할 수 없으며 양은 크고 음은 작다. 음은 반드시 양에 기대야 하는 것”에서 “양을 보존하고 음을 억제한다.”는 주장을 했다. 이와 같은 억음존양(抑陰尊陽)의 이론을 조선은 그대로 받아들여 제도화하는 과정에서 남존여비나 반상의 구별과 같은 폐단을 낳았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심해졌다.이로 말미암아 발생한 원한과 척은 조선 사회를 깊이 병들게 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삼강오륜은 수직관계를 강조하기 위한 지배 체제의 윤리가 되면서 유학의 근본정신에서 멀어져갔다. 유학의 정신은 인(仁)을 근본으로 한다. ‘인’을 근본으로 하여 삼강오륜의 윤리를 이해하면 자발적이고 본연적인 것이지 외재적이거나 강제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인’은 남을 사랑하는 것이고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않는 것이며 내가 서고자 하면 남도 서게 해 주는 것이다. 전국시대에 활동했던 맹자는 순임금과 같은 성인은 인간과 금수의 차이를 밝히기 위해서 인륜을 가르쳤다고 하며, 그 내용이 바로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의 오륜이다. 오륜은 인간이 금수의 세계에서 벗어나게 하는 조건이 되며 인의(仁義)에 입각한 윤리라 하였다.
그렇다면 억음존양(抑陰尊陽)을 바탕으로 하는 삼강오륜이 아니라 정음정양이라 할 수 있는 음양합덕(陰陽合德)의 근원이 되는 삼강오륜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그것은 음과 양의 관계가 상하나 수직에서처럼 어느 한쪽이 미흡해 의지하거나 보완하는 관계가 아니라 음과 양이 개별적으로 완전해 수평과 동시에 수직관계가 될 수 있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로써의 삼강오륜을 뜻한다 할 것이다.
단군왕검의 교훈
왕검이 열손가락을 깨물면 다 아프니 서로 사랑하고 헐뜯지 말며 소나 말처럼 먹이 감을 나누어 먹는데 다투지 말고 양보하며 조근 조근 살라했다네.
호랑이가 자기 힘만 믿고 난폭하여 신령스럽지 못하더니 비천하게 되었으니 너희는 인간 본래 성품을 가지고 난폭하지 않으면 서로 상처입지 않으리라.
하니 늘 천범 천도를 받들어 사랑하면 가정과 나라를 온전히 지키며 살리라.
*天範(천범): 하늘의 규범 즉 하늘의 뜻을 말함
*천도(天道): 고대 중국에서의 천의 관념은 매우 다양하여 이미 시경에서도 인격적인 천의 관념과 형이상학적인 천의 관념이 모두 나타나는데, 전자를 천명(天命)·천의(天意)라 한다면, 후자는 바로 천도(天道)·천리(天理). 천범(天範)이라 할 수 있다. 천도라는 말은 중국의 고대 문헌에서 대체로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자연의 법칙이라는 의미로서, 주역에, “하늘의 도(道)를 세워 음(陰)·양(陽)이라 한다”라고 할 때의 천도이다. 즉, 음양의 두 형식이 오고 가며 성하고 소멸하여 천도가 운행한다는 것이다.
두째 인도(人道)의 본원으로서, 성(誠)의 천도를 말한다. 중용에서 “성실한 것은 천도요, 성실하게 하는 것은 인도이다”하였다.
셋째 천지(天地)를 주재하는 존재라는 뜻으로, 노자에서 “천도는 편애함이 없으며 늘 착한 사람과 더불어 한다.”고 하였다.
천도에 대한 관념이 유학의 일부분이 된 것은 대략 진(秦)·한(漢) 대에 시작되어 한대에서 크게 성행하였다. 그리고 그 영향이 곧바로 송대 유학에까지 통하였다. 그러나 한대에서 천도는 인도(人道) 혹은 지도(地道)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되었으며, 송대 유학의 경우, 역전 易傳과 중용의 천도설(天道說)을 발전시켜 나갔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유학의 천도에 대한 사례는 수없이 많아 정도전(鄭道傳)은 고려 말 조선 왕조의 건립에 참여해 통치 이념을 도학적 이론으로 공고히 하였다.
그는 불씨잡변 佛氏雜辨에서 당대종(代宗)과 당시의 재상 원재(元載)와 왕진(王縉)이 천도를 버리고 부처의 인과설을 믿으며, 도덕을 수양하지 않고 부처를 받들었던 것을 미혹된 상태라고 비판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통치자란 천도를 바탕으로 하여 자신의 덕을 닦는 데 주력함을 주장했다.
조선 후기 실학사상의 흐름 가운데 거의 말기를 차지하는 최한기(崔漢綺)의 경우, 천도에 대한 언급이 두드러지게 많다. 그는 기측체의 氣測體義에서 천도는 주로 인사·인도와의 대립적인 의미로 파악하며, 천도가 유행하여 실리(實理)를 만물에 부여하고, 사람의 도는 만물에 부여된 그 실리를 어김없이 실현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단군왕검의 행복훈
오가 무리야, 들어 명심하라. 사람의 생명줄인 벼논에 불을 질러 벼가 탄다면 하늘이 노하여 벌 줄 줄 알라. 냄새란 아무리 숨기려 해도 공기의 흐름을 따라 냄새를 뿌리고 만다. 너희는 바른 성품을 공경스럽게 지니고 사악한 마음을 품지 말고 더럽고 악한 것과 재앙을 감추지 말라. 너의 마음을 다스려 하늘을 공경하고 만백성을 가까이 하라! 그러면 한없는 행복을 누릴 것이다.
*오가(五加)의 무리: 쥬신의 구성원이었던 5가의 부족이다.
*생명줄: 생명체의 목숨이나 수명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먹을거리의 제왕은 벼를 도정한 쌀이다. 쌀이 사람의 생명줄을 쥐고 있는 한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쌀을 외면하고 벼논에 불을 지른다면 하늘의 벌을 받아 생명줄이 끊어질 것을 비유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마음을 다스려 하늘을 공경하라: 마음을 다스리고 하늘을 공경하는 일이니 다른 말로 治心敬天(치심경천)을 말하는 것이다. 하여 여기서는 대학을 비유적으로 들어서 천명과 명덕을 들어 논해보기로 한다. 천명(天命)의 성(性)은 명덕(明德)의 갖춘 바이요, 솔성(率性)의 도는 명덕의 행한 바이다. 수도(修道)의 교(敎)는 신민(新民)의 법도(法度)다. 계구(戒懼)라는 것은 정존(靜存)하여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오, 신독(愼獨)이라는 것은 동찰(動察)하여 뜻을 진실하게 하는 것이다. 중화(中和)를 이룩하여 위육(位育)한다는 것은 명덕(明德)·신민(新民)이 지극하여 명덕을 천하에 밝히는 것이다.
치중화(致中和)의 공이 한 가정에 미치면 한 가정이 안정되어 가정이 밝아질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부자(父子)와 부부(夫婦)와 형제(兄弟)가 각각 그 분수를 바르게 하여 사회가 안정되게 하는 기반이 될 것이다. 자효(慈孝)와 우공(友恭)과 창수(唱隨)하여 그 정(情)을 다하면 이것이 만물이 생육하는 결과가 된다. 이리하여 한 나라가 안정되고 만물이 생육하여 명덕이 한 나라의 밝아짐으로 나타나 온 천하의 천지가 안정되고 만물이 생육하여 명덕으로 천하가 밝아질 것이다. 하여서 한 인간이 마음을 다스려 하늘을 공경하는 것은 결굴 온 세상을 밝은 세상으로 만드는 것이니 이러한 이치를 단군왕검은 가장 쉬운 표현을 사용하여 우리에게 행복의 길을 가르쳐 준 것이다.
단군왕검의 치적
정사년 대홍수로 백성이 어려움에 빠지자 풍백 팽우에게 높은 산과 넓은 강을 치산치수케 하여 백성이 편해지자 우수주에 팽우의 공로 비석을 세웠다. 무오 51년 운사 배달신에게 혈구에 삼랑성을 짓고 제천단을 마리산에 쌓게하고 갑술 67년에는 태자 부루로 도산에서 우사공에게 5행치수법을 전수케 하고 유. 영주 회대지방을 평정하여 분조를 두고 우순에게 감독권을 주었네.
*정사년 대홍수: BC2284년 정사년(丁巳年)에 쥬신의 우수주(牛首州) 지역에도 대홍수가 발생하였다. 이때 단군왕검은 풍백(風伯) 팽우(彭虞)에게 치수를 맡겼다. 팽우는 큰 피해 없이 치수에 성공하므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여 우수주에 치수기념비를 세웠다. 그 치수법(治水法)이란 신시(神市) 황부(黃部)의 중경(中經)에 실린 비결(秘訣)로 BC2700년경 배달나라의 자부선인(紫府仙人)이 해와 달과 오행(五行)의 수리(數理)를 따져서 칠정운천도(七政運天圖)인 칠성력(七星曆)을 만들어 내었다. 후에 창기소(蒼其蘇)가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을 밝혔다. 소위 오행(五行)은 수목화토금(水木火土金)로서 상생(相生)과 상극(相克)의 이치로 물을 다스리는 오행치수법인 것이다.
요순시대 9년 대홍수와 쥬신의 대홍수에 관한 역사가 강원도의 화악산 설화에 전한다.
*牛首州(우수주): 산이 높고 강이 큰 곳이니 백두산부근의 만주지방
*삼항성: 강화도에 있는 고성. 참성단과 함께 단군왕검의 유적이다.
*마리산: 강화도에 있는 마니산
*도산: 중궁 안휘성 회원현을 흐르는 회하의 동쪽 강변
*우사공: 우씨로 사공 벼슬을 한 자. 소호김천씨 때부터 대사공이라 하다가 후에 사공으로 변함.
*유주와 영주: 중국에 있는 주
*분조: 평정한 땅에 작읕 정부를 설치하는 것. 식민통치의 지방정부.
虞舜(우순): 帝舜有虞(제순유우)를 말함. 맹자에 기록되기를 순임금은 제풍에서 태어나고 부하로 이사하고 명조에서 죽으니 제풍,부하, 명조는 동이족 땅이니 순임금은 동이 사람이다. 그러니 순임금은 단군의 제후인 것이다.(離婁章句: 舜生於諸風 移於負荷 卒於鳴條 諸風負荷鳴條 東夷之地 舜東夷之人也)
대쥬신국 단군의 붕어
경자 93년 왕검이 버들 궁전의 수풀은 두시고 몸소 흙 계단을 만드셨다.
단목과 숲이 무성하자 목축과 농경이 성하고 누에 치고 고기잡이도 하였다.
천정부강한 쥬신 백성들은 10월 상달에 천제를 드리고 환호하며 즐겼다.
왕의 교화가 만방에 퍼지고 5가64족이 따르니 천하의 대국으로 우뚝 섰다.
그해 3월 15일 봉정에서 붕어하시니 온 백성이 기를 들고 와서 경배하였다.
*경자 93년: BC2241년 3월15일 단군이 붕어하시니 버들 궁전 밖 교외 10 리 허에 장사지내고 백성들은 조석으로 함께 모여앉아 경배하며 사모했다.
*天祭(천제): 쥬신국왕인 단군이 하늘에 드리는 제사
2세 단군 부루 치세 58년
치수에 공이 큰 부루태자가 신축 원년에 부왕 왕검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네.
치산치수에 성공한 쥬신 백성은 근면성실하고 경천애국하고 화목 단결했네.
부루단군 어진 정사를 펼쳐서 백성이 고르게 잘살아 굶주린 자가 없었다네.
춘추로 전국을 순행하여 백성의 형편을 살펴보고 예를 갖춰 천제를 드렸네.
이 같은 부루단군의 선정이 쥬신국을 천하의 대국으로 우뚝 서게 하였다네.
*부루태자: 규원사화을 인용하면 단군왕검이 쥬신의 나라를 다스린 지 30여 년 만에 홍수로 높은 파도가 하늘에 닿을 정도로 요만(遼滿)의 들녘을 덮었다. 그리고 패수의 물이 넘쳐 평양이 물에 잠겨 버렸다. 이에 네 아들을 보내어 수몰지를 두루 살피게 하고 아사달(阿斯達) 아래 당장(唐莊)의 들녘을 차지하여 거처케 하였다. 그런데 수몰지를 살펴보니 사방 수백 리에 큰 강이 없고 물의 형세는 동쪽으로 내달으며 넓은 들녘의 땅은 높고도 건조하여 서쪽에서 오는 물을 피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아사달 아래에 모옥을 짓고 부루가 평양의 백성들을 모두 구제하고, 다시 물과 흙을 다스리기를 몇 년간 더하여 치수사업을 모두 마쳤다. 그리하여 당장(唐莊)의 백성들이 모두 그 땅에서 편안하게 기거하며 즐겁게 생활하게 되었다. 그런데 세속 선비들이 이르기를 단군이 홍수를 만나자 팽오(彭吳)로 하여금 산천을 다스려 백성들의 거처를 정하게 하고…… 라고 들 말하는데, 한서의 식화지(食貨志)에 무제가 즉위한지 몇 년 만에 팽오가 예맥 및 조선과의 길을 터놓았다. 는 등의 문구가 분명히 적혀 있으니, 이는 곧 동쪽과 서쪽에 두 명의 팽오가 연이어 앞뒤로 있으면서 조선의 물과 흙을 관장하는 일을 맡았다는 것인데, 역사에 어찌 이와 같이 기이하고 공교로운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는 아마도 '부루(夫婁)'와 '불우(弗虞)'는 음이 같고 또한 한나라 소리로 '우(憂)'와 '오(吳)'는 서로 통하며 '팽(彭)'과 '불(弗)' 두 글자의 초성이 모두 '부(夫)'의 음과 서로 가까우므로 훗날의 사람들이 '부루(夫婁)'라는 글자는 잊어버리고 단지 그 소리만을 기록하면서 또한 잘못 전하여져 단지 '팽오(彭吳)'라고 만 기록하게 된 것이다. 이 말은 그 때에도 왜곡되었다는 사실은 북애자는 적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치수의 공은 팽오가 아니라 부루태자의 공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부루단군의 어진 정사
쥬신국은 국토가 광활한 천하제일대국으로 여러 제후국을 거느리고 있었네. 부루단군은 제후들을 슬기롭게 거느려 국가를 안정시키려고 법을 세우고 공과를 확실히 살펴 상벌을 내리고 농경과 양잠을 권장하여 산업을 일으켰네.
고을마다 학교에 기숙사를 세워 학문을 장려하고 문화 창달에 크게 힘썼네.
유.영주의 우순을 남국이 범해 이를 정벌하고 동무와 도라를 제후로 봉했네.
*유.영주의 우순을 남국이 침범: 유주와 영주 2주 제후 제순유우가 남국의 침범을 받았다. 여기서 舜(순)은 BC2233부터 2183년간의 제후로 중국의 역사가가 받드는 삼황오제 중의 한 제왕이다. 그가 부루 단군 아래 제후로 있을 때 이웃나라 남국의 침범을 받았다. 여기서 남국은 연나라의 지경을 같이한 나라로서 남이라고도 한다. 藍夷(남이)는 九夷(구이) 가운데 하나이다.
*虞舜(우순): 우 나라의 순임금이란 말이다. 순임금은 바로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중신(重臣)인 유호씨(有戶氏)의 큰 아들로 요(堯)임금을 치러간 조선(朝鮮)의 사자(使者)였다. 우리 기록에 의하면 유호씨는 고수라고도 한다. 유호씨는 중국기록에서는 고수라고 적혀있다. 고수는 우매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장님이라는 말이다. 또 유호씨(有扈氏)라고도 적기도 한다. 중국기록에 의하면 유호씨(有扈氏)가 무도해서 하(夏)나라 우(禹)임금의 아들 계(啓)가 즉위한 후 감(甘)에서 싸워 멸망시켰다. 유호씨(有戶氏), 고수 유호씨(有扈氏)는 모두 동일인이다.
BC2357년 요(堯)가 제지(帝摯)를 멸하고 천자(天子)가 되었다. 이해 단군왕검(檀君王儉)은 14세의 나이로 웅씨국(熊氏國) 대읍의 비왕(裨王)이 되어 섭정을 하였다. 요임금이 BC2334년경까지 3차례의 난을 일으키고 급기야 단군왕검이 왕성을 나가 순치(巡治)를 하는 틈에 왕성을 점령하고 이때 웅씨국왕이 붕어하므로 단군왕검은 오가와 무리 800을 이끌고 배달나라 중심지를 떠나 송화강 아사달로 이동하여 BC2333년 10월 3일 나라를 세워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나라를 정비한 후 곧 단군왕검은 유호씨와 유호씨의 아들 순(舜)으로 하여금 환부(鰥夫)와 권사(權士) 100여명을 보내어 요임금을 깨치도록 하였다. 이에 요임금이 명령에 복종하고 유호씨 등을 공손히 대접하였다. 이때 요임금이 순의 사람됨을 보고 딴 뜻이 있어서 두 딸을 주어 유혹하니 순이 곧 미혹해졌다. 순은 곧 요임금에 붙어 협조하였다. 순은 이때부터 아버지 유호 씨의 뜻을 그르치기 시작하고 요임금의 촉탁을 받아 현자(賢者)를 찾아 죽이기도 하였다. BC2284년 요임금은 순에게 양위하였다. 순의 나라를 우(虞)라 하였다.
참전의 계
배달국 온 백성이 신시에서 모여서
임금님 덕을 찬양하는 어아가를 불렀다네.
어아가를 부르는 노래 가락에 조상을 기리는 정성 담겨 있고
화합하는 큰 모둠 이 행사가 곧 참전의 계였다네.
어아 어아 불러보고 외쳐보세.
우리가 누린 이 행복은 조상님의 크고도 높은 은혜며 공덕일세.
배달국 사람아, 내 말 한번 들어 보소.
어아 어아, 착한 맘은 큰 활이고 나쁜 맘 과녁이라
우리 모두 큰 활이며 활줄과도 꼭 같아라.
착한 맘은 곧은 화살이네.
우리 모두 한맘으로 한님을 공경하며 살아가세.
어아 어아, 기쁘고도 즐거워라.
우리 모두 큰 활 되어 과녁마다 뚫고 지고
끓는 마음 착한 마음 눈과 같은 악한 마음.
어아 어아, 우너와 나는 누구라도 큰 활이라.
굳게 뭉친 같은 마음 배달나라 영광일세.
천년만년 크신 은덕 너도나도 누려보세.
크신 복을 내려주신 대조신이시여, 대조신이시여.
*於阿歌(어아가): 東夷(동이)의 글자답게 표현된 교훈적인 노래로 대궁과 동이의 夷자가 생각나게 한다.
*참전의 계: 고려 공민왕 때의 행촌공 이암 선생이 편찬한 『단군세기檀君世紀』에서 "신시(神市) 이래로 하늘에 제사(祭天)지낼 때마다 나라 안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크게 노래 부르며 삼신의 큰 덕을 찬양하며 서로 화목을 다졌다. 어아가(於阿爲樂)를 부르며 조상에 대해 고마워하였으며 신인(神人)이 사방을 다 화합하는 식(式)을 올리니 이게 곧 참전의 계(參佺之戒)가 되었다.이 같이 어아가(於阿歌)는 쥬신의 2대 단군 부루 때에 만들어져 하늘에 제사드릴 때나 평상시에는 단군 왕검을 찬미 찬양하는 노래로서 전시(戰時)에는 군사들의 사기를 돋우는 군가(軍歌)로 불렀으며 오랜 세월 동안 불리어온 배달겨레의 가장 오래된 백성들의 합창가다.
*大祖神(대조신): 독화지신인 안파견이후의 환웅천왕들과 붕어하신 단군왕검을 통 떨어 한마디로 대조신이라 표현한다.
효도례의 시작
부루단군 내신 상례 소련대련선거상은 삼일 석달 삼년을 구분지은 효행일세.
게으르지 않고 느슨하지 않고 긴장하며 삼년동안 선고를 기리며 애통함일세.
성인공자가 본을 받아 천종지효 세웠으니 이 모든 것 부루 단군의 치적일세.
살아서 효도하고 별세하면 슬퍼하고 탈상하면 기제사로 가효국충 세웠다네.
어화 온 세상 사람들아! 어찌하여 천하대효대법 내신 부루 단군을 잊었는가.
*소련대련선거상(少連大連善居喪):소연과 대연이 부모장례를 잘 치렀다는 말을 예기下에서 전하고 있다. 그런데 그 註解에 3일不怠 3월不해 朞年悲哀 3년憂 東夷之子也라 하였다.
*성인공자: 공자는 동아시아 전 문명권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BC551년 주의 제후국인 노나라에서 태어났다. 6예, 즉 예·악·사(활쏘기)·어(마차술)·서(서예)·수(수학)에 능통하였고 고전에 밝았기 때문에 30대에 훌륭한 스승으로 이름을 날렸다. 유교전통에서 가장 성스러운 문헌으로 존경받는 <논어>는 공자의 제자들 가운데 제2세대가 편집했을 것으로 본다. 장래의 지도자들을 위한 인문과목 교육과정을 처음 실시했다. 모든 사람들에게 교육의 문호를 개방했다. 특히 공자는 배움에 대하여 지식을 얻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인격의 도야까지도 포함한다고 정의했다. 특히 천제 기제 등등 제사에 대한 연구와 실천 그리고 효도에 대한 근본 문제의 해결을 위해 크게 기여했다. 수십 년 동안 정치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정치라는 통로를 통해 인본주의 이상을 실현시키려고 애썼지만 자신의 이상을 펼 수 없음을 깨닫고 노나라를 떠났다. 67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며 저술과 편집에 몰두했다.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천종지효(天從之孝): 하늘 법도를 따라서 낸 효도예법
*가효국충(家孝國忠): 가정에서 부모님께 효도하고 나라에는 목숨을 다해 충성하는 것.
계묘 3년 9월 머리카락을 땋아서 목을 덮고 청의를 입어라고 조서 내렸다.
백성들의 저자질서 세우고자 도량형을 제정하고 저포가격을 통일하였다네.
경술 10년 4월 토지 분배 실시하여 민자무사리 퇴치하여 공평하게 하였다.
임자년 신지귀기 날짜 아는 칠회력과 도읍을 정비코자 구정도를 만들었다.
무술년 부루 단군재위 58년 만에 천수를 누리시고 붕어하니 일식이 있었다.
*저자(市場)질서: 시장의 물품가격 등을 서로 다르지 않게 정하여 실시
*苧布(저포)가격; 모시와 베의 가격
*民自無私利(민자무사리): 백성들이 스스로 사사로이 이익을 취하지 않게
*神誌 貴己(신지 귀기): 신지 혁덕과 같이 신지라는 벼슬에 있던 귀기
*七回歷(칠회력): 책력의 일종으로 오늘날과 유사한 칠일 단위의 태음력이 아닐까?
*邱井圖(구정도): 도읍 신시의 도시계획 지도
*부루단군의 崩御(붕어): BC2183년 부루 단군이 돌아가시고 그 해에 일식이 있었다. 현대과학으로 일식이 언제 일어났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쉽다. 이것은 이 역사서의 진위를 가릴 수 있는 가늠자가 된다. 지금의 중화부근을 상정하여 그때 일식현상이 있었는지 천문학도라면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일식이라는 이 사실이 증명되면 한단고기의 위서 문제를 접고 대한민국의 역사 찾기에 온 국민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역사는 정신이라서 만약 이것을 잃어버리면 그 국가는 망하고 말 것이다.
업주가리
부루단군 승하하자 온갖 들짐승이 무리지어 몰려나와 슬퍼하며 울었다네.
쥬신백성 다 같이 곡기 끊고 정화수 떠올리고 산발 통곡하니 천지진동했네.
부루단군 경모하여 집집마다 제단의 토기 독에 쌀을 가득 담고 정성 드렸네.
훗날에는 성취하여 살림을 따로나면 가정마다 계명으로 업주가리 모시었네.
이것이 지금까지 전해온 우리 집에 복을 주는 업신이신 부루단군 이시었네.
*쥬신의 백성: 쥬신의 건국자 단군의 실재를 부인하던 역사학자 이병도(李丙燾)씨가 아이러니칼 하게도 권위가 있는 단군단체 가운데 하나인 현정회 임원으로 있으면서 행사 때마다 단군초상 앞에 꿇어 엎드려 극진히 예를 올렸다. 이를 지켜보던 한 인사가 그의 행동의 모순성을 지적하자 이씨는 태연하게 ‘내가 학문으로 역사를 연구하는 것과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경배 드리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재야 사학계의 끊임없는 공격과 매도에 시달리던 이씨는 작고하기 2년 전 병석에 누워서 ‘단군은 신화 아닌 우리의 국조’라는 글을 그해 10월 9일자 조선일보(1986)에 기고하여 종래의 그의 사관을 180도 수정하는 결단을 내렸다.
이 작업을 착상하고 주도한 분은 일본유학시절부터 이씨와 막역한 교분을 쌓아온 법학자로 말년에는 역사연구에 전념하고 있는 최태영(崔泰永,당시 104세)옹이다. 이때 이씨는 이미 집필능력을 잃었기 때문에 그의 제자였던 이희수(李喜秀) 당시 현정회 상무이사가 구술(口述)에 따라 원고를 초(草)하고 필자가 교정정리를 맡아하느라 자주 동숭동 이씨 댁을 드나들었다. 이씨는 병석에 누운 채로 원고를 위로 치켜들고 자신의 이름으로 나갈 논문을 꼼꼼하게 교열했는데 어느 때는 토씨 하나를 첨삭(添削)하는 데만 몇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문헌사학의 한계극복을 위한 돌파구인 원고가 완성되어 갈 무렵 어느 날이었다. 이씨는 느닷없이 ‘무씨사당(武氏祠堂) 그림을 꼭 한번 보아야 할 터인데…하면서’ 안타깝다는 표정이었다.
문헌사학으로 일가를 이루었던 이씨는 그의 학문적 소신을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2천여 년 전의 이 고고학 자료를 통해 문헌사학의 한계를 극복하는 일종의 돌파구를 기대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무씨석실의 2천년 세월이 지난 화상석 26매 중 김박사가 토를 단 일부의 논문에 의하면 단군탄생설화의 첫머리 ‘父知子意 下視三危太白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個遣往理之’와 7, 8부 가량이 부합되는 장면이라고 보는 것이다. 구름위에서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두 사람 중 수염 있는 남자가 환인(桓因)천왕이고 맨 밑 지상에서 천사(사자) 넷이 붙들고 있는 3개의 원형판이 천부인 3개라는 것이다. 제3석에서는 세 마리 용이 끄는 수레에 탄 신인(神人)이 환웅이며 맨 앞에서 백성들이 엎드려 환웅을 맞이하는 모습이 보인다. 환웅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모두 날개가 없는 것은 지상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본다. 제3석 2층에 풍백(風伯)과 우사(雨師) 운사(雲師)가 주곡(主穀) 주명(主命) 주병(主病) 주형(主刑) 주선악(主善惡)한다는 장면이 나온다. 벼락을 맡은 뇌부중신(雷部衆神)들이 선악을 판단하여 형(刑)을 집행하는 과정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雄率徒三千降於太白頂神檀樹下……)
제3석 3층의 이인기수(異人奇獸)그림이 단군탄생설화의 핵심을 이룬다. 이 그림 역시 구름 위, 즉 천상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날개를 달고 있는 것도 아닌 지상의 일을 담고 있다. 그림의 중심은 바른쪽 두 괴인(괴수)의 모습인데 화면에 나타나는 모든 인물이 그곳을 향하고 있다. 두 괴인 중 바른쪽이 생김새로 보아 범이고 왼쪽은 곰이다. 범이나 곰이라 하기 보다는 호인(虎人) 또는 웅인(熊人)이라고 하는 것이 옳게 보인다. 이상과 샅은 내용을 통하여 이병도선생의 후회와 반성 그 자체가 오늘 이 글을 쓰는 역사 복원을 갈망하는 사람으로서 힘과 용가가 부쩍 나며 쥬신의 건국자의 실체성과 그 백성이 동이족이라는 사실 앞에 천손민족으로서 자긍심을 갖기에 충분하다.
*散髮痛哭(산발통곡): 국명으로 땋았던 머리를 풀고 아파하며 슬피 울다.
*業神(업신): 부루단지
*佺戒(전계): 전을 신선 또는 커발한이라 하니 거발한 천왕의 계명을 말한다.
*業主嘉利(업주가리): 민속으로 전해진 볏짚무더기로 그곳에 제물을 받치고 치성을 드린다.
보륵의 신왕종전의도
3세 보륵단군 기해 원년 5월에 삼랑 을보륵에게 신왕종전의도를 물었다네.
보륵이 엄지손가락 교차시켜 바른손 올리고 삼육대례법 말했으니 들어보소.
‘신은 능히 만물을 생겨나게 하여 각자 제 성품을 다하게 하심에 신의 깊은 뜻이 있어 백성들은 모두 의지하고 빕니다. 왕은 덕과 의의 바른 정치로 백성의 삶을 편안하여야 백성들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올바른 정치는 나라의 몫이고 선택은 백성이 할 일입니다. 온 백성이 7일을 기한으로 삼신님께 나이가 세 번 빌고 온전하게 되기를 다짐하면 구한이 바로 다스려질 것입니다. 그러하오니 아비는 아비답게 임금은 임금답게 선생은 선생답게 아들은 아들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제자는 제자답게 실행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시개천의 도는 신 을보륵이 가르침을 베푼 것이니 나를 알고 홀로 있기를 구하며 나를 비게 한 다음 물건이 있게 함으로써 능히 복을 세상에 미치게 할 것입니다. 왕은 천신을 대신하여 세상에 도를 넓혀 무리를 이롭게 하고 한사람이라도 본성을 잃지 않게 하여 만왕으로써 인간을 주관하며 질병을 제거하고 원망을 풀며 물건 하나라도 본성을 잃지 않게 하여 만백성이 망령됨이 없이 진실을 주장하고 실천하게 하소서...’
을보륵의 바른생활 이제라도 살려내어 천손민족정신으로 올곧게 살아보세.
*(神王從佺之道=倧訓신왕종전지도=종훈): 백성이 조물주를 믿고 의지하여 비는 도리
*삼육대례: 기해 원년(B.C 2182) 5월 부루단군이 삼랑 을보륵을 불러 神王倧佺之道신왕종전의도를 물으셨다. 보륵은 엄지손가락을 교차시켜 바른손을 올려놓아 삼육대례를 행한 다음에 나아가셔 말씀드렸다. 또 정사2년(B.C 424년) 예관이 청하여 三神迎鼓삼신영고의 제사를 지냈다. 곧 3월 16일이었는데 단군이 친히 행차하시어 경배하니 첫 번째 절에 세 번 머리를 조아리고 두 번째 절에 여섯 번 머리를 조아리고, 세 번째 절에 아홉 번 머리를 숙여 예를 올리는데, 무리를 거느리고는 특별히 열 번 머리를 조아렸다. 이를 三六삼육의 大禮대례라고 한다. 곧 삼육의 대례란 3번 절한다는 것이 삼배이고, 육고라 하면 머리만 여섯 번 조아리는 것을 말하니 삼육대례는 3번 절하고 6번 조아리는 것을 뜻한다. 天祭천제 때 天壇천단 앞에서만 행하는 배례법이다. 참고로 병자호한 후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의 용골대에게 3배 9고두를 한 슬픈 역사가 있다. 아마도 동족인 여진족을 지극히 경원시한 울에게 준 하늘의 벌이 아니었을까 라고 필자는 아쉬워한다.
단군세기에 나타난 엄지손가락을 교차시키고 바른손을 올린 뒤에 삼육대례를 행한다는 것을 설명해 보면 엄지손가락을 교차시킬 때 바른 엄지는 子자를 나타내고, 왼 엄지는 亥해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른 손을 더함은 태극의 형상을 만드는 것이다. 옛날에는 꿇어앉기에 앞서 반드시 읍을 한 후에 꿇어앉았으니 바로 보통의 예의였다. 읍은 이를 가리켜 聚취라고 말한다. 마음을 모아 손을 마주잡은 다음 하늘을 생각한다. 꿇어앉음은 順순이다. 氣기를 순하게 하고 무릎을 합쳐서 땅에 감사하는 것이다. 拜배는 獻헌이다. 몸을 바치고 머리를 땅에 대며 선조에 보답하는 것이다. 헌은 또 現현이라고도한다. 머리가 손에 닿는 것을 拜手배수라 하고 머리가 땅에 이름을 叩頭고두라 한다. 고두는 곧 이마가 땅에 닿도록 머리를 굽혀 절하는 것이다.
*만왕: 왕중의 왕. 여러 제후를 거느린 왕.
거발한천황의 계
보륵단군 3.7일에 만백성이 다 같이 거발한 내린 계율을 잘 지키게 하자 조정은 종훈을 백성은 전계를 따르니 순수한 우주정기 온 누리에 퍼져 내렸네.
그래서 백성들 머리에는 삼광오정이 모이고 뭉쳐져서 깊고도 오묘해졌구나!
한웅천황 은혜가 일시에 신시에 내려 온 백성이 상부상조하며 살게 되었네.
이것이 거발한이 구한백성에게 준 교화로서 다 같이 기뻐하며 복종했다네.
기뻐 지킨 거발한의 계율
3.7일을 기한으로 모든 사람이 모여 계를 지켰네.
이후로 조정엔 종훈이 있고 백성들에게는 전계가 있었어라.
우주의 자애로운 정기가 순수하게 온 누리에 내려 덮이고
삼광오정은 사람의 머리에 모여 뭉쳐서 깊고 묘한 도리를 얻었나니
저절로 서로 돕게 되는 것이 거발한 천황의 계라하나니
구한 천지에 두루 베풀어져서 구한의 백성이 모두 기뻐하며
불만 없이 복종하며 교화되어 하나로 뭉치었다네.
*三光五精(삼광오정): 삼광은 해.달.별이고 오정은 목화토금수이다.
*九桓(구한): 한국의 9갈래 제후국.
*相扶相助(상부상조):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상부상조(相扶相助)의 민간협동체의 원조가 보륵단군 시대에 시작된 거발한천황의 계인 것으로 정의하고 싶다. 그리고 후에 삼한시대(三韓時代)의 공동행사의 하나로 상호부조라는 주된 목적 아래 취미 또는 생활양식의 공통분야에서 성립되는 것으로 공동유희 ·제례(祭禮) ·회음(會飮) 등이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발전하여 신라 때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계가 성립되고 발전하였다. 그 예로서 여자들의 길쌈내기인 가배(嘉俳), 화랑들의 조직체인 향도(香徒) 등이 있었다. 또한, 궁중경제와 사원경제(寺院經濟)가 지배계급의 모든 활동의 중심을 이루던 이 시대에는 궁중에서 보(寶)라는 것을 조직 경영하였는데, 점찰보(占察寶) ·공덕보(功德寶) 등으로 기부 받은 금전이나 공동 각출한 재원 및 기본자산인 토지 등을 운영하여 그 이익으로 사회사업이나 대부(貸付)하는 조직으로 까지 발전하였다.
가림토 문자 창제
놀랍도다. 놀라워라.
참 글이 있다 해도 만백성을 생각하여 가림토 문자 만들었다네.
그 해는 보륵단군 경자 2년이라
만백성 풍속이 서로 달라 서로 기쁨 못 누리고
지방마다 말 다르고 뜻이 틀려 답답하기 짝이 없네.
참 글이 있지마는 열 집 사는 마을에도 소통하기 어려워라.
백 리 되는 큰 나라는 문자 소통마저 어렵더라.
이런 불편 아신 보륵단군 삼랑 을보륵에게 명령하여
정음 38자 가림토를 완성하니
만백성이 서로서로 소통이 원활하여
웃음소리 쥬신국을 진동하고 남았어라.
보륵단군의 문자 창제
경자 2년 가륵 단군 만백성이 쓰기 쉽고 배우기 쉬운 문자 창제를 명했네.
삼랑 을보륵이 명을 받고 풍속이 하나 되라고 쉽고 편한 정음을 만들었네.
이것이 38정음 가림토 문자로서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 모체가 되었다네.
새 글 나타나니 지방마다 다르던 말 통일되어 형상으로 전하던 일 없어졌네.
골골마다 가림토 문자로 통용하니 상형문자 진서가 지닌 폐단도 사라졌네.
*加臨土文字(가림토문자): 한글의 모체로서 홀소리는 11자가 같고 2자가 더 있으며 닿소리는 13자가 같고 9자가 다르다 그러나 ㅐㅒ의 경우는 홀소리가 아니고 닿소리가 되어 있고 영문 x와M 한자 工. 立자와 같은 모양이 더 있으니 상상해 보면 한글과 너무나도 유사하며 가림토 문자로 연유하여 만든 한글이 대한민국인만의 글이 아니요 전 인류의 자산이라는 사실을 천명하고 싶다.
眞書(진서): 상형문자로 한자의 모체인 갑골문자.
배달유기 편수
가륵 단군 3년 신지고글에게 명하여 배달유기 역사서를 편수하게 하였다네.
왕 6년 열양의 욕살 색정에게 죄를 물어 약수에 종신토록 유리케 하였으나
색정이 회개하자 용서하고 그 땅을 주어서 훗날 흉노족의 조상이 되게했네.
왕 병오 8년에 강거가 반란을 일으키자 지백특에서 정벌하여 진압하였다네.
왕이 불함산에 올라 밥 짓는 연기를 살펴보고 조세에 차등을 두라 명했다네.
밥 짓는 연기
신지 고글이 <배달유기>를 편수하여 배달역사 살려내고
열양의 색정 욕살 죄를 물어 약수 땅에 종신유형 내렸으나
회개하는 모습보고 형을 용서하고
오히려 열양땅을 주어 그가 흉노의 조상되게 베풀었네.
병오 8년에는 강거가 반기들자 지백특까지 가서 정벌했네.
간난신고 끝에 정국이 조용해진 4월 어느 날 불함산에 올랐다네.
시정의 저녁 밥 짓는 연기를 바라보다 눈물을 지으시며
밥을 짓는 연기가 나지 않는 집이 많구나.
철저히 조사해서 조세를 줄이고 차등을 두라 명하였다네.
*神誌 高契(신지고글): 신지혁덕이나 신지 귀기와 같이 신지벼슬의 고글이다.
*培達留記(배달유기): 고구려 영양왕 11년 태학박사 이문진이 대달유기를 간추려서 신집5권을 지었으나 유기도 신집도 사라졌다. 그런가 하면 신지비사(神誌秘史)라는 역사서도 고려사에 서문만 인용되었을 뿐 사라졌다.
*列陽(열양): 열수는 황허의 하류가 9갈래로 나누어 황해로 흐르기에 황허의 하류지대를 말하며 양은 산남수북으로 황허의 북쪽으로 한국(桓國)과 배달국 그리고 쥬신의 기본 강역이다.
*褥薩索靖(욕살색정): 고구려 때에도 국토를 5대지방구로 나누어 그 지방장관을 욕살이라 하며 큰 성의 성주를 그와 같이 불렀다. 속삼국지에 나타나는 색정은 진나라 돈황 사람으로 여기에 언급된 인물과는 다른 동명이인이다.
*지백특: 테벳트 지방
*불함산: 불함산(不咸山)은 밝달산을 나타내는 이두식 표기이다. 즉, 불(不)은 벌, 발과 통하는 소리이며, 함(咸)은 모두 다 라고 할 때의 “다“의 뜻을 지닌 글자인 바, 불함산은 곧 ”발다 산“이 되어 ”밝달 산“의 소리를 적은 이두식 표기이다. 대표적인 불함산은 쥬신의 크게 밝은 산, 태백산(太白山)이다. 쥬신 제8세 우서한(于西翰) 단군시대인 BC1993년에 1/20의 세법을 시행하였는데, BC2175년까지는 정전법(井田法)에 따른 기본 세율을 적용한 것이 된다. 정전법(井田法)은 기본적으로 8호(戶) 또는 8가(家)가 정전(井田)에 따라 생산한 농산물의 1/9은 공동생산물로서 세금으로 납부하는 조세제도다. 가륵 단군이 높은 불함산에 올라가 백성들의 집을 두루 살펴보고 밥을 짓는 연기가 적게 나는 집은 곡식이 적다고 판단하여 조세제도를 적절히 조절하게 하였다. 이를 비유적인 표현이라고 본다면, 가륵 단군이 암행(暗行)을 하여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살펴서 조세제도를 개선한 것이다.
가륵단군의 반란평정
무신 10년 평화롭던 쥬신국 두지주 예읍에서 불온한 반란이 일어났다네.
가륵단군 대노하여 여수기장군에게 명하여 추장 소시모리를 참수했다네.
하여 그 지명을 소시모리로 부르다가 나중에는 우수국이라 바꾸어 불렀다네.
소시모리의 후손 협야노는 배를 타고 삼도로 달아나서 왜국천왕이 되었다네.
가륵단군 45년간 집정하다 계미년에 붕어하니 그 업적 천세만세 전해졌네.
*斗只州(두지주): 濊邑(예읍)이 속해 있던 주로 황허 유역
*素尸毛犂 (소시모리): 예읍의 추장으로 후손인 陜野奴(협야노)가 三島(삼도) 즉 일본 열도의 천왕이 되었다. 다시 말하면 이 때 일본명 陜野後裴幣命(협야후배폐명)이 망명하여 일본의 천황이 된 것이다.
예읍추장 후손은 왜왕이 되어
가륵단군 무신 10년에 두지주의 예읍에서 반란을 일어나니
단군은 신속하게 의견을 모아 여수기에게 기병하라 명하여
반란군 수괴 소시모리 추장의 목을 베게 하였다네.
이때부터 그 땅은 소시모리였으나 우수국으로 바꾸었네.
그런데 그 후손 중에 똑똑한 협야노라는 자가 나타났네.
협야노는 모험심이 커서 망망대해로 도망쳐 삼도에 웅거했다가
사람을 모으고 인심을 얻어서 큰 성을 차지하더니
마침내 자칭 천왕이라 하고 왜국을 세웠다네.
이것이 단군세기에 나타난 일본왕국의 첫 이야기일세.
*여수기: 한국에 이천서씨(利川徐氏)는 檀君時代(단군시대) 예국 군장 여수기[餘守己] 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하여, 그 공을 못잊어 백성들이 "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하여 중인변을 부쳐 余자를 徐라고 고쳐 사성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동이족의 대영웅으로 우리는 중국의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蚩尤天王:배달국 제 14세 한웅인 자오지 한웅)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동이족의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서이족(徐夷族)의 서언왕(徐偃王)이다. 쥬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 때 은의 침입을 받자, 조선은 은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지나 춘추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동이족, 아니 한민족의 대영웅 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과 서이족에 대해 자세히 쓰여 있다. 서언왕은 중원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신시 배달로부터 개시된 동방민족(東方民族:동이족)의 중원개척사는 발해 연안을 발판으로 쥬신때 까지 계속되었다. 한족 문헌에 동이 사람으로 명시된 인물은 신시(神市:배달국)의 태호복희(풍씨로, 동이족의 한 갈래인 풍이족의 조상), 염제신농, 청구(靑邱:배달국을 달리 이르는 말)의 치우천왕, 소호금천, 지나의 성군으로 알려진 순임금, 주 무왕을 도와 은 주왕을 토멸한 강태공 여상, 그리고 마지막 인물이 바로 지나족들이 치우천왕만큼 두려워한 서언왕(徐偃王)이었다. 다음 자료는 중화 서씨 세계인데 이곳에 서언왕(徐偃王)이 시조로 나오는데 놀랍게도 중국에서 인구 10위인 서씨(徐氏)는 단군에 후손이며, 여수기에 후손으로 나와 있다. 역대 단군들에 대한 고증에 있어서 유일하게 중국측 고대 정사 사료에 출현한 것이 번한과 서씨(徐氏)에 역사이며, 얼마 전 요동 옛 땅 번한에서 출토된 쥬신시기의 번(番)한 서인(徐印) 이라 새긴 인장 도장과 유물이 출토된 것과 서언왕에 대한 중국측 사료를 통하여 쥬신의 실체에 대한 한단고기에 수록된 기록과 중국(中國)의 고대의 기록이 합치하는 유일한 내용이다. 그러기에 중국 측에서는 고대로부터 내이(內夷) 즉 중국 안의 오랑캐로 불리우진 서씨(徐氏)가 세운 서국(徐國)을 두고 동이가 회땅에서 준동하여 주나라 정실을 위협한 뒤 지금의 서주(徐州) 땅에 나라를 세운 것이라 기록하였으니 이는 번한으로부터 출발한 서씨(徐氏)에 대한 고증이 완벽하다고 하겠다.
선약 인삼 발견되다.
오사구 단군 원년 오사달을 몽고리한에 중용하니 그가 몽고족의 조상이네.
갑신년 10월 북지순시 중 태백산에서 산신께 제사 드리고 인삼을 얻었다네.
인삼을 먹으면 정기를 보호하고 신묘한 영험을 하여 기적 같은 경험을 얻네.
그 후부터 쥬신에는 선약인 인삼이 있어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라 하였다네.
신선불사라. 동이에 불사군자라. 이 모든 말 인삼의 뛰어난 효능 때문이라네.
오사구단군 우애가 깊어 아우 오사달을 몽고리한으로 봉하였네.
한의 직분에 충실한 몽고리한은
몽고 땅에서 기반을 잘 닦아 몽고국의 시조가 되었다네.
갑신년 겨울 단군은 신려들과 태백산에 올라 삼신제를 드렸네.
하산 길에 신려 중 한사람이 처음 보는 약초를 가져왔네.
향기가 싱그러워 맛을 보니 눈동자가 흔들리고 어지러웠네.
신비한 약초라 명현현상이 일어난 것이네.
한잠 자고 깨어보니 날아갈 듯 몸이 가볍고 머리가 맑아졌네.
하여 오사구단군도 직접 맛을 보고 두루 채집을 명했다네.
사람을 닮은 이 약초를 장복하며 저절로 인삼이라 부르고
선약이라
불사약이라
약초중의 왕이라
군약이라고도 불렀다네.
이 약초 먹은 후로 쥬신에는 장수한 사람이 나타나자
이때부터 신선불사라 동이 군자불사라는 설이 나돌았다네.
그러나 쥬신국에 퍼지기는
‘이상하고 영험 있고 기적 같은 경험이 많다.’했다네.
화패의 시작
무자 5년 초에 둥근 구멍이 뚫린 조개 모양의 화패를 만들어 내었다네.
8월에는 하나라 사람이 찾아와서 특산물을 조공했네.
하나라 사신은 쥬신이 선진문화를 배우고자 신서를 가져갔네.
10월엔 조정과 백성의 구별을 돌에 새겨 써서 백성들에게 널리 알렸네.
이로써 쥬신은 제후국에는 대국의 도리를 다하고 국내에는 역사를 심었다네.
*화패: 화패의 사용은 쥬신의 오사구 단군 때부터임을 알 것이다. 그리고 조개가 화패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편리함 때문임도 미루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기록을 찾기 어려우므로 글자 모양에서 화패에 대한 관념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다음은 조개패에 묻어 있는 화패의 모습이다. 휴대가 간편한 조개가 화폐로 사용되었는데 그래서인지 오늘날 한자를 보면 조개 패(貝)가 돈과 관련된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재물 재(財) 재물 화(貨), 가난할 빈(貧), 살 매(買), 팔 매(賣), 탐할 탐(貪), 도적 적(賊) 등 많은 한자에 조개 패(貝)가 사용되고 있다.
*조정과 백성의 구별을 돌에 새기다: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을 보면, "지금 남해현 낭하리의 암벽에 신시의 고각이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양하리 금산 암벽에 사슴뿔 모양의 옛 문자(녹서)가 새겨져 있다. 지금도 그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영변지를 보면 천부경 81자를 한자로 기록하고 그 뒤에 흔히 신지문자라는 사슴뿔 모양의 문자가 소개되고 있다.
이상과 같이 환단고기에 문자가 있었다는 기록이 사실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환단고기를 위서라 함은 진실로 모순이며 녹도문 시대를 지나 진서와 가림토문자 시대인 쥬신의 4대 오사구단군 치세에 역사적린 사건을 돌에 새겼으니 이것이 비석의 시작이다. 그때 기록의 내용은 여러 제후국에 모범이 될만한 위대한 것으로 조정과 백성을 구별했다는 말은 한웅천황 이후의 국가의 전통성을 기록했을 것이며 위대한 동이족의 발전상을 기록했을 것이다. 아직도 그 흔적은 테베의 어느 돌 위에 남아 있을 것이다.
하의 국왕 상을 징벌하다
오사구단군 경인 7년에 조선소를 살수의 상류에 설치했다네.
임인 19년에는 하국왕 상이 덕을 잃고 폭정을 일삼자
단군은 식달장군에게 명하여 람, 진, 변의 3부의 병력을 주었다.
이에 식달장군이 대군을 끌고 가서 정벌하고 상을 징계하자
천하의 제후들이 벌벌 떨며 거역하는 나라가 모두 사라졌다네.
*蒙古里汗(몽고리한): 한은 임금이한 뜻
*갑신원년: BC2137년 4세단군 오사구 즉위
*신선불사의 설: 국고전 설문 풀이 중에서 동이를 풀이하며 하는 말 가운데 夷東方人也 夷者仁壽 有君子不死之國 이라 하여 인용하였다.
*인삼 선약: 쥬신국 오사구 단군 때 태백산에서 처음 인삼이 발견되어 약으로 쓰니 기적 같은 효험이 있었기에 선약이라 하였다.
오사구단군의 치적
단군 무자5년 조개화폐로써 물품교환을 편하게 하니 이를 주원공패라 했네.
동년 8월 하국인은 특산물을 조공하고 신서를 받아가니 제후국의 예법인 저.
10월에는 조야를 구별해 돌에 새겨 천하에 공지하여 질서와 안정을 꾀했어.
경인 7년 살수 조선소에서 배를 짓고 바다 길을 열어 해외무역을 시도했지.
오사구단군은 방국을 다스리고 돈을 만들고 배를 짓고 엄히 법도를 세웠다.
*鑄圓孔貝(주원공패): 둥글고 구멍이 뚫인 조개 모양의 주조화패
*夏國人(하국인): 쥬신의 제후국인 하나라 사절단
*朝野(조야): 조정과 민간
*薩水(살수): 중국의 欒河(난하) 살수를 청천강을 말하나 역사의 전개됨을 보면 전혀 옳지 않다. 살수대첩은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할 것이다.
*邦國(방국): 여러 제후국에서 조공하고 신서를 가져가 홍익인간 이화세계를 설유하였다는 기록이 있음.
오사구단군의 치세
오사구 단군 19년에 하나라 국왕 상이 실덕하자 대노하여 엄명하기를
식달 장군은 람.진.변 3부 군사를 오늘로 일으켜 당장 상을 정벌하라 오사구 단군 일갈 호령에 천하 방국도 모두 크게 놀라 복종하였다네.
추상같은 오사구 단군이지만 인삼 선약 발견하고 좋아하는 용안 일세.
그러나 재세 38년 신유년에 붕어하니 덕 있는 양가 구을이 즉위했네.
*하국 국왕 相(상): 하나라 국왕 상이 실덕하여 백성의 분노가 크다는 상소문을 읽고 오사구 단군이 장군 식달을 시켜 치려고 대군을 일으키자 하국 국왕 상이 크게 놀라 정신을 차리고 그와 동시에 이웃한 여러 나라 제후들이 덩달아 놀라 바른 정치를 실시하게 되었다.
*羊加(양가) 구을: 쥬신의 5가 중 양가에 수장 구을이 단군이 되었다는 말이니 쥬신은 왕을 세울 때 혈통을 중시하여 장자세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가중 덕망이 높은 이로 계승되었다. 마치 태평천하를 보는 듯하다.
쥬신 5세 단군 구을
구을단군 즉위하자마자 태백산에 제단 쌓고 삼신제를 올렸다네.
계해 2년 황충 떼를 크게 생기매 단군이 삼신께 빌었더니 사라졌다네.
황충을 물리치니 풍년이 들고 을축 4년에는 60갑자책력을 사용했다네. 기사 6년 인도인이 표류하여 동해에 들어오니 살 곳을 마련해 주었으며 정축년 16년 장당경에 행차하여 삼신단에 봉축하고 한화를 심었네.
구을단군의 16년 세월
천하를 떨게 한 오사구단군이 신유년에 붕어하자
오가 중에 덕망 높은 구을단군이 즉위하고
임술 원년에 명을 내려 태백산에 단을 쌓고
믿음직한 사자를 보내 삼신제를 올리었네.
계해 2년 5월 황충의 떼가 크게 일어
들판에 가득하여 곡식을 다 망치매
구을단군 친히 나서 황충이 휩쓸고 전답을 둘러보고
삼신께 제사 드리고
황충을 없애주기를 간절히 빌었다네.
그게 영험이 있었든지
며칠을 사이 두고 모두 사라져버렸다네.
삼신의 위력이 만백성을 신앙하게 했다네.
을축 4년 연초에 처음으로 육십갑자를 사용하여
1년 12달 두고 쓸 책력을 만들어 반포했네.
구을 단군 기사 16년 옛 도읍 장당경에 행차하여
삼신 단을 규모 있게 봉축하고 무궁화를 심었다네.
7월에는 남쪽지방 순수하며 풍류강을 건넜으나
송양 땅을 돌아보고
이곳에서 병을 얻어 붕어하니
슬프도다.
구을단군 대박산에 장사하고
후사는 우가에서 덕망 높은
달문을 뭇사람이 뽑아 대통을 계승했다네.
*황충 떼: 메뚜기과의 곤충으로 식물을 갉아먹어 농사를 망치는데 비황 또는 황충이라 한다.
*60갑자 책력: 부루 단군 때 만든 칠회력을 발전시켜서 오늘날의 태음력과 유사한 책력을 구을 단군 때 만들어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를 뒷받침하듯이 중국사서전화지(서량지 지음)에는 中國曆法 始於東夷 造曆者羲和子也 系出殷商東夷先公也 東夷造曆之事實無疑問矣라하였으니 중욱의 역법은 동이에서 시작되었다고 밝히고 책력을 만든 사람은 희화자이며 은상계의 동이 조상이다. 동이가 달력을 만든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전혀 없다고 못을 박았다.
*장당경: 쥬신국은 평양. 백악산. 장당경. 아사달산신시대로 삼국유사는 4단계로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3번째 장당경시대는 BC1111년경 티벹에 있는 장당경에서 800년 동안 쥬신의 도읍이었다는 학설도 있으나 여기서 주의할 점은 평양도 장당경도 한반도와는 무관하고 중국대륙이라는 사실에 유념할 일이다.
*封築(봉축): 하늘에 지내는 제를 封祭(봉제)라하고 땅에 지내는 제를 禪祭(선제)라 한다. 봉제는 천자가 드리고 선제는 제후가 드리는 법인데 봉축이란 천자가 하늘에 제를 드리고자 제단을 쌓는 일이다.
*天子(천자): 중국 삼국지에 나오는 채옹이 쓴 獨斷에 적기를 天子之號稱 始於東夷 父天母地 故曰天子 라 하였으니 즉 천자의 호칭은 동이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는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하여 태어 낳기 때문에 천자 즉 하늘 아들이라 말한다.
*桓花(한화): 한웅이나 한인을 하느님 한님으로 부르고 한화는 하늘 꽃이다. 쥬신의 영역을 근역이라고도 하니 하늘 꽃은 근역화이고 槿(근)은 무궁화이니 무궁화가 하늘 꽃인 것이다.
신지발리의 서효사
신유년에 구을단군이 송양 땅에서 붕어하자 우가인 달문이 대중 가운데에서 뽑혀 대통을 이으니 그가 바로 6세 달문단군이네. 무인원년 개원하고 임자 35년까지 태평무사하게 통치하다가 그해 봄날 신지 발리에게 모든 제후를 구월산으로 모이게 하는 큰 행사를 벌렸다네.
그때에 신지 발리는 다음과 같이 서효사를 지어 불렀다네.
서효사
지은이 신지발리
‘아침 해 비치는 땅에 밝은 삼신 오시었네./
거발한 천왕 대덕 베풀고 여러 조상님 한웅을 음우하시어 개천을 도왔도다./
치우천왕은 청구에서 중원을 향하여 만고 무력으로 명성을 떨쳤네./
회대지방이 치우천왕의 수중에 들어가자 천왕을 하늘처럼 떠받들었네./ 단군왕검 대명받고 구한을 크게 움직이매 백성들은 살맛나는 세월이니 청초가 나부끼듯 덕화는 새롭기만 하더라./
상부상조 화목다짐 화기 애애 건강세상 충효만당 효자효부 광명세상에 가득하더라./
진한은 내치에 힘을 써서 길을 내고 또 고치니 모든 것이 새로워라./ 모한은 왼쪽을 보필하고 번한은 남쪽을 유비무환으로 암벽처럼 대비하고 경계했다./
성스런 단군 달문 신경으로 행차함은 저울추 저울 그릇과도 같아 보이는 구나./
저울 그릇은 백아강, 저울대는 소밀랑, 저울추는 안덕향이니 전후좌우 균형이 잘도 잡혔어라./
천하 만민 들어 보소. 덕을 신뢰하고 신정을 잘 지키며 나라를 다스리니 태평연월이 이때가 아닌가./
대덕 광명 법을 세워 바르게 편 고른 정사는 70국에 조공 받고 왕업이 왕성하여라./
그러하니 오래도록 삼한의 의리 잊지 말고 정성으로 천신 섬겨 흥폐를 말하지 마소./’
새로 써 본 서효사
남양산인 편시
동녁의 해맞이 땅에 삼신께서 오시네.
한님께서 넓고 깊은 덕을 심으시네.
하나님이 친히 한웅을 보내 개천하셨네.
치우천황은 청구에 우뚝 서고
만고 없는 무력을 떨치니
회대 지방이 순복했더라.
이에 한국천하는 넘볼 이가 없었더라.
그때에 왕검은 대명을 받아 구한을 움직이더라.
어수의 백성은 이에 되살아나고
바람결에 풀잎이 한 결 같이 나부끼니
덕화는 새롭기만 하더라.
원한 있는 자 먼저 원한 풀고
병 든 자 먼저 병을 제거하고
한맘으로 오직 효도를 강조하시니
사해에 두루 광명이 퍼졌도다.
진한은 유신으로 정사를 하고
모한은 왼쪽을 보필하고
번한은 바윗돌로 사방의 벽을 쌓도다.
성스러운 단군님 행하심이
마치 저울 추, 저울 그릇과 같아라.
저울 그릇은 백아 강이요 저울대는 소밀 랑이라.
저울추는 안덕 향이니 앞뒤가 균형이 잡혀 평균으로 나란하고
덕치에 힘쓰니 태평천국이니라.
70국을 항복시켜 제후로 삼았으니
길이길이 삼한의 뜻을 간직하여라.
왕업은 일어났다가는 망하는 법.
흥폐를 함부로 말하지 말지라.
정성은 오직 천신을 섬기는 일에 있음이라.
*誓效詞(서효사): 단군세기에 전하는 시가.(서효사를 시로 고쳐 씀)
*眞韓(진한): 韓과 汗은 몽고나 만주어로도 임금을 말한다. 쥬신에는 진한. 발한(번한). 막한이란 세 임금이 있었고 그 중 가장 격이 높은 자리가 진한이고 上皇(상황)이었다. 만주원류고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전한다. ‘예전에 삼국에는 반드시 三汗이 있었다. 각기 한 나라씩 통치했다. 그러니 汗은 군장을 뜻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慕韓(모한): 막한, 말한을 뜻한다.
*番韓(번한): 신한(辰韓). 番韓(불한). 말한(馬韓)이 바른 표현이다. 만주원류고의 삼국에 삼한이 있었다는 말과 통하며 韓한은 나라이고 여기서 汗은 임금이다.
*新京(신경): 크게 의미를 찾을 것이 아니고 새로운 도읍이다.
*저울추(秤錘:칭추) 저울 그릇(極器): 단군세기나 고려사에 의하면 신지비사에서 썼다는 글이 보인다. 저울추. 저울대접. 저울대. 저울 접시끈과 같은 모양의 것이 오덕의 땅이요 백아강을 저울대접으로 삼으면 70국이 항복해 오고 그 지덕에 힘을 입어서 신을 두호할 것이며 머리와 꼬리를 자세하게 하고 나라를 고르게 다스리면 나라가 태평하고 오래 보존하리라.
*백아강: 하르빈 남쪽의 완달산의 아사달
*소밀랑: 만주 길림성 영길현의 서남쪽 대진국의 중경인 현덕붙이.
*안덕향: 산동성 능현의 안덕
단군달문의 약속
단군 달문이 여러 제후들에게 약속을 세우고 말씀하기를
‘나와 약속한 사람은 한국의 오훈과 신시의 오사를 영원토록 준수하라. 봉제의식은 사람을 근본으로 삼고 국가흥성은 음식을 우선으로 하나니 농사천하지대본이요. 제사는 오훈의 근원이라. 마땅히 만백성과 더불어 나라를 잘 다스리고 산업을 일으키어 천대만대 영속케 하리라.’
*한국의 오훈: 誠信不僞 敬動不怠 孝順不違 廉義不淫 謙和不鬪(이맥이 지은 태백일사의 桓國본기에서 발췌)
쥬신의 영광
더불어 살아가는 한 겨레이다. 모두가 소중하니 죄인들도 용서한다.
사형과 외민 책임의 화도 없애고 국경을 지키고 화백회의를 공개했네.
서로 화합하고 겸손하고 조신하여 국력을 기르니 어진정치의 시작이라
동맹을 맺고 공물을 바친 곳이 2대국 20소국에 3624촌락이었다네.
계축 36년에 단군 달문 붕어하니 양가의 한율이 단군으로 즉위했다네.
*화백: 의결의 형태로 쥬신에서 기원한 화백이 신라에 전해 진 모양.
7세 단군 한율 치세 54년
천하대국 쥬신국에 영광이 있어 7세 단군한율 갑인원년에 개원했네.
재위 54년 긴 세월을 무사태평하게 천하제국 다스려 쓸 말이 없었네.
아무튼 단군 한율 BC2047년부터 BC1994까지 무사히 단제로 있었고
천수 누리고 편히 붕어하니 우서한 단군이 뒤를 이어 단제가 되었네.
알고 보니 역사서도 태평천하 이룩되면 글자마저 아껴서 썼나 보구려.
8세 단군 우서한 치세 8년
단군우서한 무신원년 즉위하여 20중1 세법 내어 홍보하고 시행했네.
이와 같이 백성을 아끼자 하늘이 감동하여 기유년엔 대풍작을 얻었네.
신해4년 단군이 변복하고 하국에 잠복하여 정보 얻어 관제를 고쳤네.
갑인 7년 삼족오가 대궐안 뜰로 날아들었는데 그 날개 석자가 넘었네.
다음해 삼족오가 날아들고 단군 붕어하니 태자가 세습 단제가 되었네.
*三足烏(삼족오): 나라를 상징하는 새. 고구려 깃발로 이어짐.
9세 단군 아술 치세 35년
단군 아술 병진원년 똥 눈 땅이 더럽지만 우로가 내리면 달라지느니
범법자를 용서하니 죄인들이 회개하고 교화되니 나라 안이 조화롭네. 정사 2년 쌍태양이 뜨더니 청해욕살 우착이 범궐하여 상춘으로 달아나
구월산에 도성을 신축하고 우지 우율을 시켜 역신 우착을 쳐 죽였네.
3년 후 구월산에서 환도하고 30년 지나 경인 35년 단제가 붕어했네.
*상춘으로 달아나다: 병진 원년 아술단군은 인덕정사를 베풀어 백성이 법을 어길지라도 말씀으로 설득하고 교화시키니 마침내 그 인덕에 감화되어 조화로운 나라를 만들어 내었다. 그런데 뜻밖에 두 개의 태양이 떠오르더니 정사 2년 청해욕살 우착이 군대를 일으켜서 궁성을 침범하여 아술단군은 달리 대책이 없어서 구월산이 가까운 상춘으로 몽진길에 올라야 했다. 하여 신궁을 구월산의 남쪽 기슭에 짓게 하고 우지와 우율에게 명하여 반역도 우착을 쳐 죽이고 3년 뒤에야 도성으로 환도하였다.
10세 단군 노을 치세 59년
신묘원년 양축을 시작하고 임진년은 마을에 행차하여 민의를 들었네.
을미 5년 궁밖에 신원목 설치하고 병오 16년 육지에서 연꽃이 피었네. 그 해 거석이 저절로 일어서고 천하에서 윷판그림 진 거북이 나왔네. 발해연안에서는 귀한 황금 열석 섬이 불거져 나오는 경사가 있었다네. 을축 35년 감성을 두고 기축 59년 단제 붕어하니 태자 도해 즉위했네.
*養畜(양축): 가축을 기르기는 것이 양축이다. 이때부터 돼지를 길 드려 기르기 시작했다고 본다. 家畜이라는 글자가 다 같이 돼지를 나타내는 亥와 豕자가 들어 있으며 중소가축이나 가금 대가축도 길 드려 기른 모양이다.
*伸寃木(신원목): 조선조 태종 때 재현된 신문고의 모델로 탄원할 일이 있는 사람이 탄원 사항을 표시해 둔 나무.
*天河(천하)에서 윷판 그림 진 거북: 천하는 송화강이고 하도의 시작으로 거북등에 8괘가 그려져 있었다. 이런 거북을 神龜(신구)라고도 불렀다.
신묘원년 노을단군 때
큰 동물 우리를 만들어 짐승을 기르라 했네.
몸소 야외로 마을로 즐겨 나가
산천 경계를 구경하고
촌노들과 대담하니 현자들이 몰려왔네.
현자의 조언으로 궁성 문에 신원목을 두어
민성 민원을 들어 해결하니
삼신의 도움인가
동문 밖 십리 허에 연꽃이 피었어라.
곱게 핀 연꽃이 시들 줄 모르더니
동산에 누워 있던 돌이 저절로 일어났네.
보는 사람마다 선돌을 보고
상서로운 큰 비석이라 말하더니
말이 씨가 되었을까?
천하에서 큰 거북등에 윷판 그림 나타났네.
그러더니 거듭해서 경사 나니
발해연안에서 금괴 13섬이 나왔구려.
이에 단군은 삼가는 마음으로
감성을 두고 하늘을 관찰했다네.
*監星(감성): 별을 살펴보는 천문대.
도해 단군 국선소도 설치
단군도해 경인원년 오가에 12명산에 국선소도를 설치하라 명령했네.
그곳은 신성한 곳으로 쥬신의 화랑들이 자주 모여 회의하는 곳이네.
국조 거발한 한웅천황의 목조 상을 모시고 경건하게 경배하였으며 울타리를 거창하게 꾸미니 쥬신의 상징인 박달나무를 심은 일이었다네. 사람들 여기를 웅상이라 하고 때를 맞추어 정성으로 제사를 드렸다네.
*雄像(웅상): 한웅천왕 거발한의 상
*국선의 蘇塗(소도): 쥬신국(고조선. 숙신)의 화랑의 회의하던 곳이다
국자랑 스승 유위자의 계책
‘우리가 사는 이 신시는 실로 거발한 한웅천왕께서 개천하시고
무리를 거두심에 온전하게 하는 것으로서
가르침을 세워 만백성을 교화하시었습니다.
이에 天經神詁(천경신고)는 위에서 조술하신 바요,
衣冠帶釰(의관대인)은 기꺼이 아래로 본을 보이시는 것이니
백성들은 조금도 범하는 일이 없고 함께 다스려지니
들에는 도적떼도 없이 저절로 평안합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병 없이 장수하며
온 세상 사람들이 굶주리는 이 없이 풍요로우니
온 세상 사람들이 산에서 노래 부르며 달맞이 춤을 추었습니다.
단제께서 방방곡곡을 다 아우르며 품어주시니
흥하고 덕성스런 가르침을 칭송하는 소리가 사해에 넘쳐서 흐릅니다. 이에 온 세상 사람들이 뜨거운 情(정)이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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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관대일: 의관과 허리띠 그리고 장식용 칼.
*情: 請과 같은 의미로 해석하면 된다.
국조 거발한 상을 모시다.
10월 상달에 대시전을 세우고 한웅상을 모시자 현란하고 장엄하였다. 머리위에서 번쩍번쩍 광채가 발산하여 마치 태양이 빛나는 것 같았다.
한웅은 살아 있는 듯 우주를 비추며 박달나무 밑 한화 위에서 계셨다.
천부인을 가진 대원일의 그림을 누전에 걸어 놓고 보니 거발한이시다.
3일간 재계하시고 7일간 그 뜻을 말씀하시니 위풍이 사해에 넘치었다.
*臺侍殿(대시전): 도해단군 재위 원년인 경인(BC1891)년 겨울 10월, 임금께서 대시전大始殿을 건축하도록 명하셨다. 대시전이 완성되니 그 모습이 지극히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대시전은 사찰의 대웅전의 처음 이름이다. 고구려 소수림왕 때 불교가 들어와 대기전인 대웅전을 석가에게 내어주고 대시전에 모셔야할 거발한 한웅천황을 삼성각으로 내어 몰았다. 그것이 진실한 역사로서 이민족이 국조에 대한 태도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대시전에 환웅천황의 유상遺像을 받들어 모시니 머리 위에서 광채가 찬란하여 마치 태양이 온 우주를 환하게 비추는 것 같았다곶너한다. 그때 한웅천황께서 신단수 아래 환화桓花 위에 앉아 계시니 마치 진신 한 분[一眞神]이 원융무애한 마음으로 손에 천부인天符印을 쥐고 계시는 것 같았다. 누전樓殿에 대원일大圓一을 그린 기旗를 걸어 놓고 명호를 거발한이라 하셨다. 3동안 재계하고 7동안 강론하시니, 그 덕화의 바람이 사해를 움직였다.
돌에 새긴 사람의 도리
‘하늘은 깊고 고요함에 큰 뜻이 있으며/
그 도는 온 누리에 막힘없이 가득하다네./
다만 모든 일은 참된 것으로부터 시작 된다./
땅은 온갖 것을 다 품어 줌에 큰 의미가 있어서/
그 도란 것이 어디서나 나타나는 것이다./
다만 모든 일은 애써 일함으로써 시작 된다./
사람이란 살펴서 앎에 큰 뜻이 있어서/
그 도는 선악을 가리어 원만하게 하나니/
모든 것이 서로 간에 조화를 이루게 한다./
그런고로 신은 정성을 다하는 마음을 찾아오나니/
그때 성품은 광명을 이루어 온 세상에 가르침을 펴는 것이니/
온 누리를 이롭게 하고자 이글을 이 돌에 새겼도다./
단군도해의 치적
정사 28년 진귀한 물건을 모아 전시한다 하자 서로가 헌납하였다네.
정묘 38년 개병을 실시하고 선사 20명이 하국에 국훈을 전하게 했네.
을해 46년 송화강 가에 관청을 세우자 온갖 문물 세상에 퍼져나갔네.
3월에 양지바른 곳을 가려 제물을 갖추고 정성껏 삼신 제를 올렸다네.
왕은 밤에는 백성들과 함께 술 마시고 여러 재주를 관람하며 즐겼네.
*夏都始傳國訓以示威聲: 본문을 하나라 도읍에 쥬신국의 가르침을 전하여 나라의 위력을 보였다는 내용을 ‘하국에 국훈을 전했다고 표현함’
단군도해의 논강
단군도해는 삼신제와 뒤풀이 마무리하고 나서 단위에 올라가서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논강하고 나서 특별히 오가를 바라보며 말씀하시기를
‘이제 살생을 금하고 옥을 열고, 부랑자는 밥을 주고 사형을 없애노라.’
천하에 선정 베푼 도해가 병술 57년 붕어하자 우가 아한이 즉위했네.
허나 만백성은 부모상을 당한 듯 가무음곡 멀리하고 3년간 근신했네.
*論講(논강): 천부경을 논하고 삼일신고를 강연하다. 본문에는 論經演詁라 하였으나 이것을 천부경과 삼일신고로 보았다.
*牛加 아한: 우가 출신의 아한 단군.
유위자의 웅변
12명산에 국선의 소도를 설치하고
박달나무로 울을 만들고
가장 큰 나무에 한웅의 상으로 모시고
제사 드리며 웅상이라 했다.
이때 유위자가 나와 힘 써 말하기를
한웅천황께옵서
신시개천하시고 무리를 가르쳐서
만백성을 교화하셨습니다.
천경신고는 위에서 조술하신 바요
의관대일은 아래로 본을 보이시니,
나라가 두루 평안하였습니다.
병 없이 장수하며 주리지 않고 풍요하니
달을 맞아 노래하고 춤을 추었습니다.
방방곡곡의 만백성에게 천황의 덕이 미치니
칭송하는 소리가 사해에 넘치게 되었습니다.
하늘 뜻과 사람의 도리
하늘은 깊고 고요함에 큰 뜻이 있어
그 도는 온 누리에 널리 퍼질 것이다.
만사는 참된 것으로 시작되고
땅은 참된 것을 간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도는 언제 어디에나 드러나리니
도리를 아는데 힘 써야 할 것이다.
사람은 하늘의 뜻을 두고 공부해서
참된 도를 구별해야 할 것이니
그 목적은 천지가 조화됨이라
그러기에 신은 정성스러운 마음에 찾아들어
올바른 성품으로 광명한 세상을 만들게 해서
온 누리를 이롭게 하는 것이다.
단군도해 송화강에서
을해 46년에
송화강
그윽한 기슭에 관청을 세우니
해상교통이 원활해서
온갖 물건이
각국으로 퍼져나가니
쥬신은
진정 풍요로운 나라가 되었다네.
3월에 남산에 올라가
성심성의를 다하여
삼신제를 드리고 나서
남은 술과 음식으로 음복하고
여러 사람들과 2부 행사를 즐기었네.
3부 행사로 누각에 올라가
천부경을 논강하고
다시 삼일신고를 강연하였으니
단군도해의
온갖 통치행위는
애오라지
백성을 근심 없게 하는 일이었다네.
12세 단군 아한 치세 52년
정해 원년은 전왕의 어진정사 덕으로 무난히 지나가고 무자 2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4월 어느 날 외뿔 짐승이 송화강 북쪽에 나타났다. 유니콘일까? 외뿔소일까? 무소일까? 그해 8월에 요하에 순수관경비를 세워 역대제왕의 이름을 새겼다. 을묘 29년 청아욕살 비신과 서옥저욕살 고사침과 맥성욕살 돌개를 왕으로 봉하고 무인 52년 단제 붕어하다네.
*요하: 남만주 대륙의 남쪽으로 흐르는 강 요나라 성종 4년(1345년)부터 요하라 불렀다. 옛글에는 구려하, 구류하, 거류하라 하였으니 고구려의 물이다. 그러나 고구려가 당에 망하고 대진국이 요에 망한 후부터 요하가 되었다. 그러나 遼史(요사) 지리지에는 이 강을 압록, 아리수라고 써서 남겨 놓았다.
*菁莪(청아): 인재 교육을 맡았던 욕살로 고사침은 서옥저의 욕살이기도 했다. 서 옥저는 서 개마고원일 것이다.
훗날 창해역사 여홍성이 순수관경비를 보고 시를 지었다.
창해역사 여흥성의 시
‘마을 밖의 변한이라 부르는 곳에/
홀로 빼어난 돌 하나 서있네./
밑받침은 깨어지고 철쭉꽃만 붉게 피었는데/
한 글자도 보이지 않고 이끼만 더덕더덕 푸르구나!/
다듬어져 처음 만들었을 때 그대로/
흥하고 망함이 저녁노을 바라보며 서서 있으니/
문헌의 자취가 희미하구려./
하지만 이 어찌 단군의 자취가 아닐쏜가./
*창해역사 여홍성: 장자방이 망국의 한을 풀려고 천하장사 여홍성을 만나 진시황제를 저격한 사건이 있었다. 이 여홍성이 창해역사이고 장자방이 창해역사를 만난 곳이 하북성이니 창해역사는 동이족이며 창해는 하북성 가까운 곳이다. 장량은 BC208년에 진시황의 저격사건을 일으켰다. 그가 창해의 임금을 만나 공동으로 진시황 모살계획을 수립하여 창해역사를 찾았다. 그리고 무게 120근의 철추를 제작하여 진시황의 동쪽 순행 길을 날게 되었다. 원래 임금과 신하가 타는 마차의 규정을 보면 황제는 6필의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신하들은 4필 마차를 타는 것이 법이다. 그래서 자객의 목표는 당연히 6필 마차였다. 장량은 진시황이 무양현에 도착한다는 것을 알고 창해역사 여홍성과 함께 무양현의 박랑사에 매복하고 있었다. 멀리서 36량의 마차가 박랑사로 오는 것을 보고 장량과 여홍성은 숨어서 진시황의 마차가 도달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마차는 뜻밖에 4필의 말이 끄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중간의 마차가 가장 호화로웠다. 그래서 장량은 여홍성에게 그 마차를 치라했다. 야홍성이 던진 120 근 철추 한방에 마차는 박살나고 타고 있던 사람은 죽었다. 장량은 숲에 숨어 있다가 몸을 피했다. 그때 여홍성이 내리쳐 목숨을 잃은 마차를 부거(副車)라 한다. 진시황은 자객을 자주 만났기에 방비를 하고 다녔다. 수레를 모두 4필마로 꾸미고 수시로 바꿔 탔다. 그래서 장량이 어느 수레에 진시황이 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진시황은 죽음을 면하고 관련자의 체포령을 내렸다. 그래서 박랑사는 이 일로 유명해졌다.
13세 단군 흘달(대음달) 치세 81년
즉위 후 16년간 전왕법제 따르더니 주현을 분리하고 직책을 정하였다.
갑오 16년부터 관리는 권력을 정치는 법칙을 남용하지 않고 준수하니
온 백성이 안심하고 일하며 거문고 타고 즐기니 온 누리가 평화롭네.
겨울에는 은국이 하국을 치자 걸왕이 구원을 청하니 원군을 보냈다네.
읍차 말량의 9한군이 나타나자 은의 탕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네.
*9桓軍(구한군): 쥬신의 군대를 알고자 한다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즉 배달국의 제18대 거불단 환웅이 웅씨족의 왕녀와 결혼하여 왕검을 낳았다. 거불단 황웅이 붕어하자 왕검이 BC2333년 10 .3 9한(九桓:九夷)백성의 추대를 받아 송화강 아사달(현 하얼빈)에서 단군이 되었다. 그는 국호를 쥬신(朝鮮)이라고 하였다. 이때는 동이 9족이 단일통치권으로 통합된 한민족의 최대전성기였다. 제1대 단군왕검단 제47대 고열가 단군 때까지 총 2096년간 지속되었으며 그때의 군대의 총칭이 구한군이었다.
쥬신국의 천지화랑
승전한 읍차 말량이 어명으로 회군하자 걸왕이 배반하고 길을 끊자 신지우량을 보내 은군과 낙랑군도 불러 연합하여 걸왕을 치라 명했다네.
쥬신연합군이 득세하여 관중의 빈.기 땅에 웅거하고 관청을 설치했네.
무술 20년 소도를 늘리고 한지화를 심고 미혼 자제를 공부하게 했네. 독서하고 활쏘기 배우고 머리에 천지화를 꽂으면 천지화랑이라고 이름 하여 불렀다.
*관중의 빈.기 땅: 섬서성으로 동쪽은 함곡관 남쪽은 무관 서쪽은 산관 북쪽은 소관으로 그 사관 가운데 있는 땅. 진의 옛 땅으로 四塞(사새)라고도 한다.
*國子郞(국자랑): 화랑의 다른 이름. 별칭.
*天指花郞(천지화랑): 쥬신국시대의 화랑으로 桓花(한화=무궁화)를 머리에 꽃고 있는 국자랑을 천지화랑이라 하였다.
오성취루 현상 나타나다.
무진 50년에 다섯별이 모여들고 황학 한 무리가 도성을 배회하더니
마지막에는 제집인양 드넓은 대궐 뜰 해묵은 소나무가지에 깃들었다.
기묘 61년 단제 붕어하니 만색성이 밥을 거르고 대성통곡하였다네.
조당에서 의논하기를 죄수를 석방하고 살생을 금하고 방생을 권했네. 해를 넘겨 다음해 단군 흘달을 장사 지내고 우가인 고불이 즉위했네.
*오성이 모여 들고: 원문에 五星聚婁 黃鶴來라 하였으니 별이 모여드는 현상으로 길상사로 보았다. BC1733년 오성취루 현상이 있었는지 오늘날 발달된 지혜를 동원하여 천문학자들이 따져 볼 일이다. 만약 이 사실이 증명된다면 이 역사서 한단고기의 깊이를 증명하게 될 것이다. 오성취루 현상을 일명 奎聚(규취)라고도 하니 후학들이 이 역사서의 진실을 밝힐 일이다.
단군고불의 기도
경진 원년부터 5년간 우수풍조 하더니 을유년에 한발로 어려워지자
단제 몸소 하늘에 빌며 기도하기를
‘하늘이 클지라도 백성이 없으면 어찌 베풀며 비가 살찌운다하나 곡식이 없으면 어찌 귀하게 여기리오. 백성이 하늘처럼 여기는 것은 곡식이며 하늘이 마음으로 여기는 것은 사람이니 하늘과 사람은 한 몸일 진데 하늘은 어찌 백성을 버리나이까? 이제 비는 곡식에게 자양분을 주어 건지게 하소서...’
라고 말을 마치자마자 큰비가 수 천리 강역에 삼대처럼 내리었다.
*단군고불의 기도: 삼신전에 제물을 드리고 간절히 천제를 드리고 소원을 빌자 비가 쏟아져서 가뭄이 해갈되고 풍년을 들게 하였다. 아마도 이것이 기우제의 시초일 것이며 삼신의 강력한 힘이 온 세상에 증명된 처음 본보기일 것인데 한민족은 오늘날 이와 같은 강력한 천우신조를 외면하고 이민족의 종교를 끌어와 천매하고 환부역조하니 단군고불의 신성하심이 그리워진다.
*天賣와 換父易祖현상: 다 아는 일이지만 하늘을 팔아먹은 일은 오로지 한민족의 하나님을 성경은 야훼 또는 여호와 그리고 갓을 하나님이라 변조 왜곡하여 한글성경번역을 통하여 팔아먹고 있다. 환부는 애비를 바꾸었다는 말로 제 애비 아닌 남을 애비로 부르는 못난 볼 쌍놈을 말한다. 역조현상은 중화인이 일본인이 우리 조상을 모두 다 차지해 버리고 우리 한민족은 하늘이 내리신 조상을 외면하고 곰의 자손이 되어버렸다. 이는 역사를 잃어버린 민족의 당연한 비극이다.
단군고불 때 봉ㅎ항이 나타나다.
신유 42년 9월 말라 죽었던 나무마다 새싹이 파릇파릇 돋아나고
청황백록적 오색의 깃털을 가진 큰 닭이 성동쪽 지천에서 깨어나니
이 닭을 본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기더니 이를 봉황이라고 말하였다.
을유 56년 관리를 사방으로 보내 호구조사를 하니 1억8천만인이었다.
기묘 60년 단군 고불이 붕어하니 태자 대음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1억8천만인: 이 역사서의 정확함을 어찌 부인하리오. 이 인구는 양자강 북쪽 중국대륙과 몽고 만주 그리고 한반도의 전체 인구를 말한다.
단군대음의 철병기 장려
경진 원년 은왕 소갑이 쥬신을 배반하고 살기 어려워 화친을 구했네. 80/1 세정이나 신사년 대홍수로 주린 백성이 많아 창해사수곡물을 조달해 주었는데 다행히 10월에 양운국과 수밀이국이 조공을 바쳤다네.
기축 10년 7월 우루국 20인이 투항하자 염수에 살라하고 약수에 가서 신지 우속에게 금철고유를 채굴하여 신병기를 주조하라 엄히 명했네.
*소갑: BC1672년의 은나라 왕이다. 연대가 단군 대음과 같다.
*창해사수곡물: 북해 즉 발해 안쪽의 뱀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창해이고 그곳에서 나는 곡물을 옮겨서 신사년 대홍수의 재난을 막았다.(산해경중에 北海之內有蛇山者 蛇水出焉)
*수밀이국: 슈메르 즉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주체가 된 나라.
*우루국: 성경의 갈대아우르국일 것이다.(桓國의 12연방 중의 하나.)
후흘달단군 비석을 세우다.
단군은 정미 28년 태백산에 올라가 후세에 오래 알리고자 비석을 세우니 그 내용은 역대 단군의 이름과 재위기간과 공적을 진서로 새겼네.
기미 40년에는 아우 대심을 남선비국 대인에 봉해 다스리게 하니 그 자손이 선비산에서 번성한 흉노의 한 갈래로 훗날 선비족이 되었다네.
경오 51년 단군후흘달이 죽자 화백에서 우가 위나로 단군을 삼았네.
*남선비: 사마천은 동이족을 東胡(동호)라 썼는데 그 동호가 흉노의 모돌 선우에게 패한 후 둘로 나누어 일부는 선비산으로 또 일부는 동오산으로 들어가 각각 선비족과 동오족이 되었다. 여기서 남선비란 남쪽의 선비족을 말한다.
*우가 위나: 우가는 오가중의 하나로 우가에서 우나가 16세 단군으로 뽑혀 즉위했다.
단군위나와 산유화
신미년 단군 되어 28년간 쥬신국에 선정을 펼치더니 무술년에 9한의 한들을 불러 모아 영고탑에서 상제와 삼신께 성심으로 제사를 드렸네.
원하는 백성들이 서로 만나 즐기는 광장을 만들어 주야 5일간 연회를 열어 불을 밝히고 경전을 독경하고 낮에는 마당 밟기를 하고 즐겼네. 밤에는 횃불을 높이 들고 춤추며 애한의 노래를 큰 소리로 합창했네.
산유화(애한의 노래)
‘산에는 꽃이 있네./
산에는 꽃이 피네./
지난 해 만 그루 심고 올해 또 만 그루 심었지./
불함산에 봄이 오면 온 산에 붉은 빛/
천신을 섬기고 태평을 즐기네./’
*위나단군: 무진 58년에 단군 위나는 붕어했으며 생전에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즐길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었으며 영고탑에서 삼신께 제사도 정성껏 드렸다. 태자 여을이 대를 이었다.
*애한의 노래: 애한가 애국가와 유사한 것. 그런데 애한의 노래가 김소월의 시의 하나인 산유화와 유사한 점이 발견되었다. 알다가도 모를 일로 정서적으로 통하는 어떤 무엇이 흐르고 있는 것일까? 서정시 연구에 깊은 의미가 있다고 본다.
1단군 여을의 88년 긴 치세
기사년 즉위하여 52년간 친정타가 갑신년 오가와 함께 정사를 보았네. 단군 여을이 개사성에 이르자 청의노인이 하례 드리며 말하기를
‘오래 동안 선인의 나라 백성으로 살고 있지만
단군의 큰 덕이 두루 두루 미치고 편벽되이 다스리지 않아
가까운 이웃 간에
수심과 고통 그리고 아무런 책화가 없었나니
이는 믿음과 은혜로 성과 나라 경계를 관할하였기에
사람 간에 서로 치고 싸우는 일이 없었나이다.’
이에 단군 여을이 대답하기를
‘기쁘도다.
진정 기쁘도다.
짐이 덕을 닦은 것이 일천하여
늘
백성들의 바람에 보답하지 못할까
두렵고 두렵게 여겼노라.’
단군 여을은 병자 68년 붕어하니 88년간 단군의 위를 지키다가 태자 동엄에게 물려주었다.
*오가와 함께 정사를 보다: 여을 단군이 연치가 높다보니 친정을 피하여 오가의 자문을 받아 정사를 펼친 것으로 사료된다.
*청의노인: 쥬신시대의 염색기술이 궁금하다. 청이란 청출어람의 청색일 것이다.
*편벽되지 않은 정사: 화백제도의 활성화된 모습을 증명한다할 것이다.
*責禍(책화): 해당업무에 대하여 꾸짖고 따져서 벌을 주는 앙화.
*은혜와 성과 나라의 경계: 대국 쥬신의 모습이 역력히 떠 오르는 표현이다.
18세 단군 동엄 치세 49년
정축원년 병신 20년 까지 부왕의 치세를 본받아 바른 정사를 펼쳤다.
병신년 支伯特(지백특) 사람이 와서 특산물을 바치고 무역을 해 갔다.
멀고먼 지백특 사신들 천산산맥을 넘고 넘어 종주국을 찾아 왔네.
쥬신국 얼마나 강하고 광대했으면 차마고도를 넘어와 인사 드렸을까?
을축 49년 단군 천수를 다하고 붕어하니 태자 구모소가 즉위했다네.
*지백특: 오늘날의 히말리아 산맥 정상의 나라 티벹이다.
*특산물을 바치고 무역을 해 갔다: 조공을 바치고 문화서적을 가져갔다는 기록이 보인다.
*차마고도: '마방(馬幇)'이라 불리는 상인들이 말과 야크를 이용해 중국의 차와 티베트의 말을 서로 사고팔기 위해 지나다녔다. 이곳을 통해서 문화의 교류도 활발하였다. 전성기에는 유럽까지 연결된 적도 있었다. 해발고도 4000미터가 넘는 험준하고 가파른 길이지만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길로 유명하다. 동양에서 제일 오래 된 무역 상업이라고 추측이 되는데 먼먼 쥬신국시대에 조공을 바치러 온 기록이 보이니 놀라울 뿐이다. 다만 이 기록을 통하여 쥬신국이 중국대륙의 주앙부에 위치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주천력이 나타나다.
경인 원년 시작으로 기축 24년까지 바른 정사 살피어서 국태민안 이루더니 기축년 들어서서 섬나국 남장인을 중용하여 조정 일도 맡겼다네.
쥬신국 인재등용 만국인을 차별 없이 평등하게 보듬은 인사였고 기미 54년 지리숙이 지어 바친 주천력과 팔괘상중론은 천지운행 거울일세.
경신 55년 구모소가 죽으니 화백에서 우가 고홀을 단군으로 뽑았다네.
*구모소: 쥬신국의 19세 단군으로 55년간 통치했다. 인재등용에 각별한 지혜를 쓴 모양이며 학문하는 학자를 중용한 흔적이 엿보인다.
*南掌人(남상인): 운남성 부근에 있던 나라로 섬라국이다. 이 사실을 보고 추이해 보면 쥬신국은 중국 전토를 모두 제후국으로 삼고 있었으며 이종 차별 없이 인재를 등용했던 모양이다.
*지리숙: 지리숙(支離叔)은 단군 구모소(구牟蘇 ) (5763-BC1435 재위 55년) 기미 54년 지리숙이 주천력과 팔괘상중론을 지었으며 지리숙과 골개숙(滑介叔)의 만남을 우화에서 장자의 인물화를 드려다 보면 지리숙과 골개숙이 곤륜산을 지나다 고요하고 호화로운 곳에서 쉬었다. 그런데 지리숙과 골개숙이 무덤이 즐비하게 있는 언덕을 보게 되었다. 둘이 한가롭게 그곳에서 쉬는데 별안간 골개숙의 왼쪽 팔꿈치에서 큰 혹이 하나 불거졌다. 이에 지리숙이 놀라워하며 묻기를
“당신 그 혹 싫어하는가?”
“아냐 ,어이 싫어하겠는가. 삶은 참다움이 아닌 빌려 온 것으로 이 혹도 거짓으로 태어난 것일 뿐인데 뭐. 삶이란 티끌이나 때 같은 더러운 속세이고 죽음과 삶은 밤과 낮과 같음이라 난 당신과 더불어 변화를 보았지만 변화가 나에게 미친 것이니 내 어찌 싫어하겠는가.”
골개숙이 이와 같이 대답했다. 장자(莊子) 지락(至樂)편에 따르면 얼마 뒤 골개숙(滑介叔)의 왼쪽 팔에 버드나무 가지가 나왔다고 썼다.
*周天曆(주천력): 별 등이 궤도를 일주하는 것을 주천이라 하니 별들의궤도를 관측한 책력.
*팔괘상중론: 팔괘가 서로 중첩되었을 때의 변화를 논한 책.
구한 지도의 제작
신유원년부터 11년간 천지간에 변함없이 순탄했다네.
신미 11년 가을 구름도 없는 대명천지에 흰무지개가 섰다하네.
병신 36년 길림성 명안현에 영고탑을 고치고 별궁도 지어 들었다네.
경자 40년 공공 공홀이 구한의 지도를 제작하여 단군께 바쳤네.
계묘 43년 세상이 불안한데 고흘이 죽자 태자 소태가 뒤를 이었네.
*구한지도(九桓地圖): 쥬신국의 지도를 말하며 구이 구려 구한이 모두 다 쥬신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는 대동여지도가 우리나라 처음지도로 알고 있으나 이미 5천 년 전 쥬신국의 지도가 있었음을 믿기 바란다. 이 지도는 지금은 없어 졌으나 바이칼 호수 동쪽부터 양자강을 경계로 이북 그리고 티베트 까지 포함된 대제국의 지도였을 것이다. 아마도 공홀은 인류 최초의 지도 제작자일 것이다.(共工인 工忽)
*단군고흘: 쥬신국의 20세 단군으로 고흘은 43년간 통치했다.
*秋白日貫虹(추백일관홍): 구름도 없는 청천백일에 무지개라니? 역사서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숙제일 것이다. 제갈삼국지에는 동오의 제갈근의 아들인 승상 제갈각이 탄 수레가 부중을 나와 큰길로 나서자 묘한 현상이 벌어졌다. 수레 바로 앞에서 한줄기 흰 무지개가 하늘로 뻗어 오르더니 이내 사라졌다. 제갈각이 이 현상을 유심히 바라보며 중얼대기를
‘지난번 출전 때도 있었던 흰 무지개가 또 나타나다니...’
혼자 말로 그렇게 되씹자 심복 장수 장약이 아뢰기를
“오늘 궁중 연회가 이상합니다. 좋지 못한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경솔하게 들어가실 일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 나도 그런 생각이 든다. 참 이상한 일을 자꾸 만나고 있어.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어.”
제갈각은 대답은 그리 하였으나 일이 여로모로 꼬여서 장약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궁으로 들어가 오왕 손양에게 죽었다. 제갈공명의 조카인 천재 제갈각은 흰무지개가 이는 것을 본 후 가문이 멸족을 당했던 것이다.
*영고탑: 영고특 영고대 라고도 한다. 만주 길림성 명안현에 있다.
제후국을 누르고 조공을 받다.
소태 원년 제후국 은왕 소을이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치더니 경인 47년 은왕 무정이 귀방국을 침탈하고 색도와 영지를 전격 침공 했네.이에 쥬신국이 곧 원정군을 보내 무정을 굴복시키자 공물을 바쳤으며 임진 49년 개사원 욕살 고등이 은밀히 귀방국을 쳐서 멸망시켰다네.
그러자 일군국과 양운국이 크게 놀랐는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네.
*소태원년: 갑진년에 단군소태는 21세 단군으로 즉위하여 52년간 쥬신제국을 통치했다.
*小乙(소을): 소을과 무정은 쥬신의 제후국인 은나라 왕이다. 한단고기의 위대성을 알겠다. 무정의 귀방국 정벌의 사실은 갑골문자로도 전해오고 있으니 우리에게 소중한 문화유산인 한단고기라는 역사서 연구에 국력을 쏟아도 좋을 것이다.
*개사원 욕살: 장당경은 소도경전본훈에 기록된 바와 같이 개원開原이다. 그리고 그 개원의 원래 이름은 개사원蓋斯原이다. 임진49년 개사원 욕살 고등이 몰래 군사를 일으켜 귀방을 습격하여 멸하니 일군국과 양운국 두 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이해에 고등이 반란을 일으켜 개성에 웅거하여 천왕에게 항명하였다. 개사원蓋斯原의 개는 한자로 개蓋이나 개원開原과 개성開城의 개는 한자로 개開다. 고구려국본기에서 “당산 서남에 있는 개평蓋平을 다른 말로 개평開平이라 한다.”고 기록했으니 그 때는 개蓋와 개開를 함께 썼음을 알 수 있다.
*鬼方國(귀방국): 은나라 때 그 곁에 있었던 작은 나라다. 고서에 오랑캐 적(狄:북방 오랑캐)을 말하며 은나라 때 섬서성 서북부일대 로서 갑골문자에 귀방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한단고기에 귀방(鬼方)이 나타나 있으니 이 책이 얼마나 소중한 역사서임을 알 것이다. 그리고 鬼는 귀신 귀 이기도 하지만 지혜롭다는 뜻도 함께 가지고 있으니 귀방이 국명임은 의시할 여지가 없다.
*색도 영지: 색도는 색륜과 관계되는 나라이고 영지는 춘추시대의 산융의 속국으로 천안현 서쪽에 있던 나라.
개사원 욕살 고등의 전횡
쥬신국 소태단군 임진 49년 개사원 욕살 고등이 자기 욕망을 채우려고
임의대로 기병하여 서북 땅을 쳐들어가 여러 제후국을 정복했다네.
그래서 세력이 강대하고 지경이 넓어지자 우현왕을 봉해 주기를 간청했으나 단군은 야욕이 너무나 커서 심히 위험하기로 한사코 거부했네.
하지만 날로 고등의 세력이 강성해지니 결국 두막루 벼슬을 주었다네.
*우현왕: 몽고와 흉노의 관제로 可汗(가한)의 좌우에 좌현왕과 우현왕이 있어 가한을 보좌하는 보좌왕이다. 제왕을 모시는 분봉왕 내지 제후를 말한다.
*두막루: BC1289년)에 개사원의 욕살 고등이 소태단군 모르게 군사를 이끌고 귀방을 습격하여 이를 멸망시키자 일군국, 양운국의 두 나라가 사신을 보내 쥬신국에 조공을 바쳤다. 이 무렵 고등이 많은 군대를 거느리고 서북땅을 공격하여 차지하여 세력이 매우 강성해지자 단군에게 사람을 보내 우현왕으로 임명해 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단군은 고등을 위험한 인물로 여겨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고등은 군사를 거느리고 모반을 하여 대항하며 거듭하여 왕으로 봉해 주기를 청하니 마침내 이를 견디지 못하고 허락하여 ‘두막루’라 부르게 하였다.
색불루 우현왕이 되다.
소태단군 을미 52년 우현왕 고등이 죽자 손자 색불루를 우현왕에 세습케 하고 민정을 살피려 남쪽 해성에 가서 노인들을 불러 담소를 했다.
뜻이 있어 예를 갖춰 천제를 드리고 백성들과 노래하고 춤추며 즐기고 나서 오가를 불러 자신이 연로하매 서우여에게 선위할 것을 말했다네.
이어 살수의 땅 백리를 서유여에게 기수로 봉하고 섭주가 되게 했네.
*해성: 지금도 만주의 요녕성 안산의 서남쪽에 해성이 남아 있다.
*색불루: 쥬신국의 22세 단군으로 구막루 고등의 손자로 48년간 쥬신국을 통치했다.
*서우여: 여기서도 역사의 왜곡이 발견되니 신중하기 바란다. 을미 52년에 우현왕 고등이 죽고 그 손자 색불루가 세습하여 우현왕이 되었다. 소태단군이 나라 안을 순수하는데 남쪽의 해성에서 노인들을 크게 모아서 하늘에 제사지내고 노래하고 춤을 추며 즐겼다. 그리고 나서 오가를 불러서 선위할 것을 의논하였다. 거기서 말하기를
"늙어서 부지런하기가 고달프니, 정무를 서우여에게 맡기고자 한다." 고 하며 살수 사방 백리를 서우여에게 봉하고 섭주로 삼으며 부르기를 기수라 하였다. 이에 색불루 우현왕이 듣고 사람을 보내어 단군에게 그 명을 멈추길 권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우현왕이 좌우와 더불어 사냥꾼 수천을 거느리고 마침내 부여의 신궁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이러하니 단군은 부득이하여 옥책국보를 전하고는 서우여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았다. 소태단군은 아사달에 숨어서 살다가 죽었다.
소태단군의 꿈은 깨지고
을미년에 소태단군 해성욕살 서우여에게 선양하려했으나 색불루가 자립이란 강수를 두자 마한군을 정비하여 몸소 해성에 가서 싸웠다네. 허나 근왕병이 색불루군에 대패하자 색불루가 대통을 승계하고 삼한을 장악한 후 국위를 선양하고 나라의 문무제도를 모두 새로 고쳤다네. 이에 은왕 무정이 급히 사신을 보내 앞으로 조공할 것을 약속했다네.
*색불루: 소태단군과 맞서서 힘을 비축하여 단군의 위를 계승함
*은나라 무정: 쥬신국은 단군을 칭하기를 천왕 단제로 기록하였으나 하 은 주의 왕들은 후(后), 왕(王), 주(主)로 썼다. 다만 중국기록에서는 은나라의 22대 무정(武丁)을 고종(高宗)으로 적기도 하였고, 29대 제을(帝乙)과 마지막 30대 제신(帝辛. 紂王)은 제를 썼다.
은나라 무정은 글자 그대로 무력으로 세를 떨치던 왕이다. 그러나 무정은 22대 색불루 단군때 쥬신과 전쟁을 하여 패하고 화평을 요청한 왕이며 조공을 바쳤다. 그러나 23대 아홀 단군천왕 이후 다시 쥬신국의 서쪽 번한국 영토를 침략하자, 마.번.진한 3한국의 연합군대가 은나라 영토까지 쳐 들어가 쑥대밭을 만들고 쥬신국의 백성들을 유입시켜 은나라를 직접 통치했다.
서우여가 폐서인이 되고
우현왕 색불루가 서유여 욕살을 소태단군의 후사로 삼는다 하니 크게 놀라 모반할 맘을 먹고 준비된 군대를 이끌고 도성으로 쳐들어갔다네.
마침내 대궐을 점령하고 사냥족 수천과 함께 부여 신궁에서 즉위식을 갖자 소태는 아사달로 달아나 숨고 서우여는 폐서인이 되고 말았다네.
이때 고죽군의 자손 백이숙제가 망명하여 동해에서 농사짓고 살았네.
*아사달: 위서(魏書)에 2천 년 전에 단군왕검이 아사달(阿斯達)에 도읍하고 나라를 열어 그 국호를 쥬신(朝鮮)이라 하였으니 요(堯)와 동시라 하였으며 중국사에도 샅른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또 일연이 삼국유사를 찬술(撰述)하면서 고기와 단군고기를 인용하였다 고 쓰고 있다.
*孤竹君(고죽군): 은나라 때의 제후국으로 지금의 북평 지방의 옛 이름. 고죽국의 백이와 숙제가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 먹고 절개를 지키며 살았다는 이야기는 바로 이때의 이야기로 이들도 동이족이다.
*동해: 하북성의 동해로서 요동만을 말한다.
단군색불루의 치적
병신 원년 관제를 고치고 9월에는 장당경에서 고등왕 제사를 지냈다 .
11월 대군을 이끌고 은나라 수도를 정복했으나 반항하여 다시 쳤다.
이듬해 2월 은의 패잔병을 추격하여 황하주변에서 승전축배를 들었다.
단군은 정복지를 편히 다스리고자 변한백성들을 진심으로 설득해서 회대의 땅에서 농사짓고 가축을 기르라 장려하니 국세가 크게 떨치었다.
*장당경: 지금의 전남 광주나, 요령성 조양(朝陽)이나 심양(審陽), 하북성의 열양(列陽)이나 악양(樂陽), 창려(昌黎)도 평양이며, 완달산 밑의 하얼빈도 장당경인 평양이다. 북한의 평양도 장당경이다. 우리말로 부르면 광주는 빛고을이고 열양은 줄빛골이며 창려는 새벽빛이고 악양의 발음은 요양으로 즐거운 빛 즉 호양(好陽)이며 심양의 발음은 센양이므로 곧 선일영휘(仙日永輝)의 선양(仙陽)이다. 또한 대련의 옛날 이름은 해성(海城)이므로 대련도 해시(海市)가 된다.
*고등왕: 21세 단군 소태 때 개사원 욕살 고등이 우겨서 힘으로 우현왕이 되었다. 그 후 세력이 커진 고등의 뒤를 이은 손자인 우현왕 색불루가 단기를 들어 소태 단군을 은퇴 시키고 22세 단군이 되었으니 그가 바로 고등의 손자이다.
*회대의 땅: 색부루단군 때부터 회대의 농경지에서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기 시작하여 정착촌이 이루어졌다.
천년제업의 땅
신축 6년 신지 육우가 ‘아사달은 천년 제업의 땅이라 해도 대운이 이미 다했으며 영고탑은 왕기가 짙어 백악산을 오히려 능가하는 듯합니다. 청컨대 성을 쌓고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시옵소서...’ 상주하였다. 하지만 단군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새 도읍에 이미 대궐이 있는데 어찌 다시 타지로 옮길 것인가? 아니 되노라.’ 못 박아 말했네.
*신지 육우의 말: 풍수지리도참을 말을 하고 있으니 연구대상이다.
*영고탑: BC1583년 16세 위나 단군 때에 구환九桓이 영고탑寧古塔에 모여 제사지냈다. BC1345년 20세 고홀 단군 때에 영고탑을 개축하고 별궁을 지었다. BC1285년 녹산 아사달에 정도한 색불루 단군은 BC1250년 변방 장수 신독의 침략으로 녹산 아사달이 함락되니 색불루 단군이 영고탑으로 피했다. BC1237년 아흘 단군 원년에 비로소 신독을 주살하고 녹산 아사달을 수복하여 76년을 녹산아사달에서 다스렸다. BC1112년, 25세 솔나率那 단군은 영고탑으로 천도하였다.
*백악산: 백악산아사달은 후기쥬신국의 수도이다. 위치는 아사달과 장당경인 개원 그 사이에 있는 지역인 상춘으로 추정한다. BC1285년에 제22대 단군으로 즉위한 색불루단군은 번한에 서우여를, 마한에 여원흥을 봉하였다. 선양받아 즉위하였으므로 무리를 달래어 따르게 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BC1285년부터 BC426년 국호가 대부여로 고쳐질 때까지 860년간 수도이다. BC2333년부터 BC425년까지는 합 1908년으로 삼국유사에서 단군의 나이를 1908세라한 것과 일치한다. BC426년 우화충이 난을 일으키니 제44대 물리단군이 피난 중 세상을 떠나고 명을 받은 백민성의 욕살 구물이 난을 진압하고 오가들의 지지를 얻어 단군이 되었다. 구물단군은 국호를 대부여로 고쳤다.
영고탑에 피신하다
을묘 20년 남국이 강성하매 고죽국과 여러 적을 쫓고 남으로 와서 은국경계의 엄독골에서 여파달장군을 빈.기에 웅거하여 유민을 모았다.
힘써 은국을 제후로 삼았으나 남국이 더욱 강성하여 항산 이남만 교화되고 신미 36년 신독의 난에 색불루는 백성들과 영고탑으로 피했다네.
계미 48년 단군이 죽자 태자 아홀이 그 뒤를 이어 쥬신국을 통치했네.
*藍國(남국): 쥬신의 제후국으로 색불루 단군 때 가장 강력한 제후국으로 단제의 교화를 남방의 미개지역까지 떨치게 했다.
*엄독골: 요동군의 18현 중의 하나
*黎國(여국): 산서성 장치현의 서남쪽에 여주가 있으니 여기가 옛 여국의 지경으로 요임금의 후손이 세운 나라.
*신독: 변방의 장수로 자기 병력의 강함을 믿고 난을 일으켜 색불루 단군을 영고탑에서 백성들과 함께 피신하게 할 정도로 강성했다.
아홀단군은 반적 신독을 주살하다
갑신 원년 단군은 숙부 고불가에게 낙랑홀을 완전 통치하라 명했네.
식민 6읍을 웅갈손과 남국왕을 주고 남방 정복군을 밝게 살피게 했네.
허나 망국 은민들이 소요를 일으키자 친위군을 증파하여 막으라 했네.
진압군이 활약하여 7월에는 반적괴수 악질 신독을 잡아 주살하였다네.
잡은 포로들은 수도로 압송하여 달래고 가르쳐 양민으로 살게 했다네.
*아홀: 쥬신국 23세 단군이다. 아홀은 단군의 이름으로 76년 동안 쥬신국을 통치했다.
*樂浪忽(낙랑홀): 대명일통지에 지금의 북경이 낙행군이라 명시했으니 여기의 낙랑홀은 중국 북경임에 틀림없다. 대명일통지의 본문을 보면 郡名 孤竹爲古名 北平爲秦名 盧龍爲魏名 北燕平州及 樂浪郡 北魏改樂浪爲北平郡영평부에 실려 있음.
*고불가: 색불루는 단군의 위에 오르자 쥬신국의 중심인 녹산 아사달로 천도해 가서 장자 아흘에게 단군 위를 주고 아우인 고불가에게 낙랑홀을 맡겼었다. 색불루의 태자 아홀은 단군이 되자마자 아사달 수도를 탈환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숙부 고불가를 낙랑군의 총독으로 삼았다. 낙랑군은 지금의 베이징 지역으로 훗날 고죽국의 수도이기도 하다. 쥬신국의 낙랑홀은 BC1237년 아홀 단군 때 숙부 고불가를 봉한 나라로 발해만 북쪽의 난하 중류에 자리 잡고 있었다.
*웅갈손장군: BC1237년 단군은 웅갈손(熊乫孫)을 보내어 남국군(藍國君)과 함께 남쪽을 정벌한 군사가 은(殷)나라 땅에 6읍(邑)을 설치하는 것을 살펴보게 하였다. 그런데 은나라 사람들이 서로 싸우며 결정을 보지 못하자 군사를 진격시켜 공격하여 쳐부수었다. 웅갈손은 쥬신국의 진한(眞韓)에서 파견된 장수이고, 남국군(藍國君)은 남국의 임금이며, 웅갈손의 군사와 남국의 군사가 연합하여 은나라 땅을 정벌하여 6읍을 설치하였던 것을 웅갈손과 남국 임금이 관망하면서 은나라 사람들의 동태를 살폈던 것이다. 그런데, 은나라 사람들이 서로 갈팡질팡하면서 혼란 속에 빠지자 군사를 진격시켜 쳐부수어 마무리 지었으며 그 땅의 6읍은 산동지역의 서쪽 지역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