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유리화 40년, 하느님의 집 아름답게 짓는 기쁨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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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주출판단지에 있는 HK스테인드글래스 공방에서 색유리를 배경으로 선 김철중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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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K스테인드글래스가 시공한 부산교구 남천주교좌성당의 색유리화. |
그는 한때 국내 성당 건축 분야에서 손꼽히는 건설회사 대표였다.
하지만 그가 국내 최초의 스테인드글라스 생산업체였으며 40년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스테인드글라스 공방의 창업주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주) HK스테인드글래스 김철중(미카엘, 70) 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인천이 고향인 김철중 회장은 농대 출신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형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잠시 몸을 담았다가 서른 살이 되면서 독립했다.
“선친께서 염전사업을 하셨기에 어렵지 않았습니다. 농장을 운영해 볼까 하고 자리를 물색하던 차에 지인으로부터 스테인드글라스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귀가 번쩍 뜨였지요.”
서울 오금동에 작은 색유리 공장을 내고 한국스테인드글래스연구소라는 이름을 내걸었다. 1976년 겨울이었다.
이듬해 대량 생산을 염두에 두고 공장을 포천 송우리로 이전, 확장했다. 그해 10월 스테인드글라스용 색유리를 생산해냈다. 국내에서는 처음이었다.
1978년 4월에 (주) 한국스테인드글래스로 법인을 설립, 본격적 회사 체제를 가동했다. 이어 그해 7월 덩어리 색유리(슬랩글라스)를 개발,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8월에는 장로회 영암교회에 최초로 국내 생산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설치했고, 12월에는 마산교구 주교좌 양덕동성당에 슬랩글래스 작품을 역시 국내 처음으로 설치했다.
실패 끝 200여 색상의 색유리 만들어
하지만 거기까지인 듯했다. 색유리 대량 생산을 추진한 것은 가격을 낮추기 위한 것이었는데, 생산량에 비례하다시피 비용도 올라갔다. 실패를 거듭했지만 의미가 없진 않았다. 노력 끝에 200여 색상의 색유리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막내아들이 하는 일이 위태로워 보였는지 선친께서는 그만 접으라고 야단이셨습니다.”
마침 인천교구 주교좌 답동성당의 창문 보수 공사 소식을 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스테인드글라스 공사를 따냈고, 성공적으로 작업을 마쳤다. 답동성당 공사의 성공으로 김 회장은 다시 힘을 낼 수 있었다.
온 가족이 세례를 받은 성당, 자식들이 혼인한 그 성당에서 막내아들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언제든지 볼 수 있게 된 부모는 전폭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한국스테인드글래스는 성장을 거듭했다. 1980년대 이후 스테인드글라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성당뿐 아니라 개신교회나 법당 등에서 스테인드글라스를 설치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종교 시설 외에 지하철 역사, 호텔, 예식장, 백화점에서도 수요가 생겼다.
김 회장은 기술 개발과 저변 확대를 위한 노력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건축용 법랑에 색유리를 입혀 장식하는 당시로는 획기적인 방법을 도입했다. 스테인드글라스 교재를 출판하고, TV에도 출연해 저변화를 꾀했다.
김흥수 화백의 대표작 ‘군동’을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 본관에 모자이크글라스화로 재탄생시킨 것도 이 무렵이다. 1989년에는 국내 최초로 그래픽글라스 개발에도 성공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유리 공예가들을 위한 워크숍, 건축가를 위한 워크숍 등을 열어 스테인드글라스화의 보급과 질적 향상에 힘쓰면서 대구 계산동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화 보수 작업,
부산 남천주교좌 성당 스테인드글라스화 등 나름 의미 있고 굵직한 작업들을 해냈다.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을 하다 보니, 자연히 건축에 대해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면서 스테인드글라스와 함께 성당 건축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됐지요.”
김 회장은 1996년 생각을 실천으로 옮겨, 사명을 (주)한건종합건설로 바꾸고 건설업에 진출했다. 스테인드글라스는 인테리어 사업부에 편입시켰다.
김 회장은 성당 공사를 따내면 건축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본당 신부와 설계자와 의논하는 과정을 거쳤다. 사전 협의를 통해 건축 도중의 구조 변경 같은 불필요하고 비효율적인 요소들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효율성 제고, 공기 단축 등 여러 면에서 효과를 거뒀고, 이는 (주)한건종합건설이 빨리 성장할 수 있는 중요한 동력이 됐다.
성당을 건축하면서 김 회장은 현장 근로자들이 단지 공사판 막노동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집을 짓는다는 자부심을 갖고 또 자존감을 갖도록 하고 싶었다. 이를 위해 ‘존경받는 일꾼’ ‘행복한 일터’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공사장의 업무 환경 개선을 위해 공사를 시작하면 제일 먼저 현장 근로자를 위한 휴게소를 지었다. 또 자존감을 높여 주기 위해 공사장에 나뒹구는 못이나 고철을 팔아 모은 돈으로 직원들과 함께 봉사 활동을 시작했다. 기금이 부족하면 지원했다.
이런 노력을 통해 (주)한건은 2000년대에 들어와 성당 건축 부분에서 선도적 입지를 굳혔다. 스테인글라스 사업은 자연적으로 함께 성장했다.
하지만 섬세함이 요구되는 스테인드글라스 사업 분야를 투박한 건설업 산하에 두는 것은 아무래도 문제가 있었다. 김 회장은 2008년 스테인드글라스 사업은 (주)HK스테인드글래스(대표 이문희)로 독립시켰다.
“저는 평소에 기업은 가업이 아니라 오래 함께하면서 기업을 키울 수 있는 사람이 물려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문희(시몬) 대표는 25년 동안 저와 함께하면서 스테인드글라스 부문 책임자였기에 기꺼이 물려줄 수 있었습니다.”
이후 (주)한건종합건설은 지난 2014년까지 성당 건축에서만 60개의 성당을 지었다. 제2 전주 전동성당이라고 부를 만한 대전교구 태안성당, 의정부교구 참회와 속죄의 성당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김 회장은 2015년 1월 (주) 한건종합건설을 잠시 접었다. 경기 침체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경영난이 심각해져서다. 소유 건물을 처분해 불은 껐지만 당장은 쉬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그동안 ‘한건’을 믿고 함께했던 모든 분들께 죄송한 마음입니다. 하지만 뜻을 모아 다시 시작할 겁니다.”
40년, 그리고 새로운 출발 다짐
그 사이에 자신이 창업한 HK스테인드글래스는 올해 40년을 맞았다. 색유리 생산은 채산성이 맞지 않아 접고 수입 색유리를 사용하고 있지만 국내 최초의 스테인드글라스 공방으로서 역량과 자부심은 잃지 않고 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시작했을 때 이왕이면 국내 최고가 되자고 결심했다는 김철중 회장.
비록 자신의 직접적인 손은 떠났지만 HK스테인드글라스가 그 꿈을 실현해 국내를 넘어 세계적 공방으로 성장하도록 창업주로서 힘껏 뒷바라지하겠다고 다짐한다. 한건종합건설의 새로운 출발도 기약하면서.
이창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