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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
얼마전 박정희와 박근혜에 대한 쇼킹한 증언을 하여 체포당한 조웅 목사의 정보라인이었던
문명자 기자의 취재 파일(단행본) 전문(全文)인데 분량이 많은 관계로 편의상 1, 2편으로
나눠 게시합니다.
1편(1~3부 수록), 2편(4~7부 수록)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문명자 지음
- 백악관 출입기자 문명자의 40년 취재파일
제 2장 김대중 납치 보도, 주미 중앙정보부 이상호 공사와의 악연
"김대중 취재가자" 하니 "나도 살아야겠다"던 주미 특파원
71년 4월 7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1백만표도 안되는 차이로 박정희 후보에게 패했다. 사실상 김대중의 승리였다. 이로써 그는 한국 야당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김대중이 박정희의 최대 정적이었슴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71년 5월 25일 7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군산-광주간 고속도로(바로잡음: 광주-목포간 국도)에서 김대중의 차가 트럭과 충돌한 교통 사고는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교통사고를 위장한 김대중 살해 기도였다.
이 사고의 후유증으로 김대중은 일본을 오가며 치료를 받았다. 유신이 선포되던 72년 10월 17일
마침 그는 치료차 일본에 가 있었다. 다음 날 그는 10월 유신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사실상
정치 망명을 선언한다.
11월 13일 김대중 씨는 도쿄를 떠나 미국으로 왔다. 해외에서 유신 반대 투쟁을 벌이고 박 정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에는 일본보다 미국이 적격이기 때문이었다.
김대중 씨가 워싱턴에 온다는 얘기를 듣고 나는 다른 워싱턴 특파원들에게 공항에 나가자고 했다. 그러나 가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나도 살아야겠다"던 한 특파원의 말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런 그가 김대중 씨 곁에서 중책을 맡고 있으니 이런 현실을 뭐라고 표현해야 하는지. 어쨌든 그 때 공항에 나간 것은 나와 동아일보의 권오기, KBS의 박성범 이렇게 세 사람이었다.
그런데 다음날 MBC 박근숙 보도국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문 특파원, 거기 김대중 씨가 있죠?"
"네 어제 왔어요."
-"김대중 씨하고 점심 같이 먹었어요?"
"김대중 씨가 저녁에 왔는데 무슨 점심을 같이 먹어요?"
-"여기서 그렇게 보고가 됐는데..."
"누가 말도 안 되는 보고를 했군요."
-"앞으로 김대중이나 김형욱 같은 사람들은 좀 만나지 말도록 하세요."
"아니 기자더라 이 사람 만나지 마라, 저 사람 만나지 마라 하면 취재를 어떻게 합니까?"
다음 날 MBC 이환의 사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다짜고짜로 "문 선배, 나 좀 살려 줘" 했다.
"왜 그래요?"
-"중정(중앙정보부) 때문에 살 수가 있어야지."
"난 언제든지 특파원 안 해도 되니까 당신이 알아서 해."
이환의 사장은 나를 MBC에 끌어다 놓은 후 "왜 문명자를 자르지 않는가"라는 중앙정보부의
등쌀에 상당히 고생했다고 한다.
그 후 김대중 씨는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교포들을 상대로 시국 강연회를 개최하는 한편 국내외
민주화 운동가들을 규합해 유신반대 투쟁조직을 꾸리는 사업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국 땅에서
벌이는 이같은 활동도 중앙정보부 요원들의 집요한 방해공작으로 순탄치 않았다.
73년 5월 14일 샌프란시스코 인터내셔널 홀에서 강연회를 열었을 때 한국영사관 부영사가 15~
16명의 폭력배를 데리고 2층 방청석에 진을 치고 있다가 날계란과 토마토 케첩 병을 던지기 시작했다. 결국 FBI가 출동해 그들을 연행함으로써 사건은 막을 내렸다.
우여곡절 끝에 73년 7월 6일 워싱턴 메이플라워 호텔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약칭 한민통) 미국 본부가 결성 되었다. 당시 분위기는 반유신운동 상황을 골백번 취재해서 기사를
보낸들 단 한줄도 보도되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역사의 현장을 지켜봐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이
같은 행사들을 충실히 취재했다.
이 날 행사에는 민주당 정권 때 서울시장을 지낸 김상돈 선생과, 역시 민주당 정권 때 유엔 대사를 지낸 임창영 박사 등 5.16 이후 미국에서 한국 민주화운동을 벌여 온 민주 인사들이 대거 참가했다.
한민통 결성식에서 앞으로의 활동 방향을 놓고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미국 내에는 이른바 '선 통일 후 민주화'를 주장하는 일단의 통일운동 그룹이 존재했다.
그런데 한민통 의장 김대중은 결성식에서 "박 정권이 통일을 명분으로 민주주의를 짓밟고 있는데
우리가 통일을 앞세운다면 그의 책략에 걸려드는 것"이라면서 '선 민주후 통일'의 방향을 명백히
제창했다. 또 일부에서는 '망명 정부'를 수립하자는 급진론도 제기 됐는데, 김대중은 역시 이에 명백히 반대했다. 박정권에는 반대하나 엄연히 대한민국이 존재하는데 그에 반해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민통 결성식을 시작하기 전 돌연 임창영 박사가 미리 준비한 성명서를 좌중에 나누어 주었다.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나는 이북 정부의 초청으로 곧 평양을 방문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미 국무성이 아직 허가를
안 내주고 검토중에 있습니다."
당시로서는 대단히 놀라운 일이었다. 비록 개인 자격의 방북이라지만, 그가 한민통의 일원이므로
김대중을 비롯한 반유신운동 전체가 북한의 사주를 받는 집단인 양 조작할 수 있는 빌미를 중앙
정보부에 줄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나는 임 박사에게 물었다.
"박사님이 북한을 방문하시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갈라진 우리 국토가 통일되고 민족이 하나되기 위해서는 이북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서방세계
로도 진출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북은 서방외교 문제에서는 초년병입니다. 나는 유엔 대사를 지냈
으므로통일을 위해서 이북에 서방외교를 강화할 것을 조언하고 방법을 가르쳐 주고자 합니다."
김대중 의장의 의외의 사태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일본에서도 민단 내의 민주화운동 세력만을 규합했을 뿐 재일총련 쪽과는 철저하리만큼 손을 끊고 활동해 온 사람이었다. 그 모두가 사상 문제를 가지고 자신을 옭아매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박정권을 의식한 행동이었다. 그런 판에
한민통의 주요 참여 인사인 임 박사가 방북길에 오른다고 했으니 그가 얼마나 놀랐을 것인가.
김대중 씨는 "중앙정보부가 박사님의 방북을 민주화운동을 음해하는 데 악용할 것이니 방문을 중단해 달라"고 누누이 부탁했다.
임창영 박사는 "외세 지배하의 한반도에서 통일 없이는 민주화도 없다"는 소신을 가진 통일 운동가였다.
김대중 의장의 부탁 때문이었는지 혹은 미 국무성의 불허 때문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방북을
3년간 연기했다. 임 박사는 평생을 통일운동가로서 활동하다 96년 별세했다.
임창영 박사는 김대중 씨가 73년 8월 8일 도쿄에서 납치되었을 때 우연히 도쿄를 방문하고 있었다. 김대중 씨 납치 사건에 접한 그는 바로 그 사실을 미 국무성의 도널드 레이너드 한국 과장에게 알려 미국측이 한국 중앙정보부에 압력을 넣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생전에 김대중 씨로부터 이 문제에 대해 어떤 감사의 인사도 받지 못했다. 정치인
김대중은 북한을 드나드는 통일운동가 임창영과 거리를 둘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생전에 임 박사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떤 불만도 표한 일이 없다. 김대중이 그와 같이 처신한 이유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북이 분단된 우리 민족의 또 하나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7월 7일 한민통 미국 본부를 결성하고 난 뒤 김대중 씨는 8월 15일을 기해 일본 본부 결성을 위해 도쿄로 갈 계획이었다. 도쿄로 출발하기 직전 그는 우리 부부에게 항공우편 봉투에 든 편지 한 장을 보여주었다.
-"이런 편지가 왔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본 도쿄 신주쿠의 소인이 찍힌 그 편지 내용은 깜짝 놀랄 만한 것이었다.
"김 선생, 김 선생을 납치해서 암살하려는 계획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절대 조심하셔야 합니다."
편지에는 김대중 납치 계획에 대해 아주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나는 말했다.
"이 정도로 구체적으로 쓴 것을 보니 이것은 틀림없이 중앙정보부 내의 양심세력이 보낸 것 같습니다. 각별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김대중 씨가 말했다.
-"미국에 오기 전 일본에서도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나를 계속 미행했습니다."
7월 10일 김대중 씨는 일본으로 출발했다. 박정희가 얼마나 독한 사람인지를 잘 알고 있는 나로
서는 염려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가던 길을 멈출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김대중 씨가 일본 도쿄의 그랜드 팔레스 호텔에서 납치당한 73년 8월 8일 나는 멕시코의 해변도시 아카풀코에 있었다. 아카풀코는 멕시코가 자랑하는 세계적이 휴양지다. 당시 나의 딸 줄리아는 열한 살, 아들 리처드는 열 살이었다. 정신 없는 특파원 생활로 아이들이 그 나이가 되도록 여름 휴가라는 것을 가 본 적이 없었다. 한 해도 여름 휴가 안 가고 배기지 못하는 미국인들 사이에서 자라나는
아이들로서는 이만저만 불만이 아니었다.
해마다 여름이면 한국 외무장관은 유엔 외교차 남미를 돌곤 했다. 그 해에 김용식 외무장관은 멕시코를 방문했다. 필자는 아이들에게 진 빚을 갚으려고 외무장관 수행 취재 때 아이들을 맡겨 놓고
취재를 마친 후 그들 부부와 함께 아카풀코에 들러 여름 휴가를 보내고 올 생각이었다.
계획대로 취재를 마치고 이창희 대사 부부와 함께 아카풀코 해변의 한 호텔에 도착해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 날 새벽, 들떠서 어쩔 줄 모르는 아이들과 함께 해변에 나가려던 참이었다. 워싱턴의 남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남편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여보,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듣기만 하시오."
"아니 대체 무슨 일이에요?"
-"김대중 씨가 도쿄에서 없어졌소. 틀림없이 중앙정보부의 짓이오. 김대중 씨는 평소에 수첩에다 중요한 사항들을 깨알같이 메모해서 다니는 사람인데 그 수첩도 지금 중앙정보부 수중에 들어가 있을 것이오. 그러니 한민통 미국 본부 결성에서 당신이 한 역할도 이미 다 파악 되었을 것이요.
당신 신변에도 어떤 위해가 가해질지 모르는 상황이니까 이창희 대사 부부에게는 아무 얘기 하지 말고 급한 일이 생겼다고 말하고 당장 미국으로 돌아오시오. 아무리 친구라 하지만 그들 부부는
국가 공무원 아니오? 위에서 지시가 내려오면 그대로 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오."
"알았어요."
충격 때문에 나는 잠시 휘청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지만 설마 했는데 남의 나라 수도
한복판에서 대낮에 야당 지도자를 납치해 가다니. 이게 내 조국이 하는 짓인가.
발리 해변으로 나가자며 내 손을 잡아끄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얘들아, 정말 급한 일이 생겼어 워싱턴으로 돌아가야 해. 미안하다."
울상을 지으며 비명을 지르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나는 이창희 대사 부부에게 갔다.
"대사님. 본사에서 즉시 워싱턴으로 돌아 오라는 연락이 왔네요. 무슨 비상사태가 터졌나 봐요."
그런데 이창희 대사는 이미 소식을 들은 듯 했다.
-"소식 들으셨군요. 빨리 가 보십시오."
급히 짐을 챙겨 들고 아이들과 함께 공항으로 향했다. 휴가철 세계적인 휴양지에 미국행 비행기 표가 남아 있을 리 없었다. 급한 김에 공항 카운터 직원을 붙들고 사정했다.
"여보세요. 나는 MBC 특파원인데 본사에 급한 일이 있어 빨리 워싱턴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비상용으로 남겨 놓은 표 좀 풀어주세요."
그러자 공항 카운터에 앉은 여성의 표정이 달라졌다.
-"NBC 리포터라구요?"
그러더니 그녀는 없다던 표를 선선히 끊어 주었다. MBC를 미국 NBC로 잘못 들었던 것이다. 내가 거짓말한 것도 아니고 자기가 잘못들은 것을 어찌하랴. 어쨌든 그녀 덕분에 바로 워싱턴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돌아오니 남편은 사색이 되어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을 집에 데려다 놓고 바로 국무성으로 나
갔다. 기자실에 가서 AP통신의 스펜서 데이비스에게 물었다. 그는 과거에 도쿄 지국장을 지냈기 때문에 한국 문제를 많이 다룬 기자다.
"국무성 기자회견 때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해 질문했나?"
-"중동 문제 때문에 유태계 기자들이 모두 들고일어나 질문을 퍼붓는 통에 물어 볼 시간이 없
었다."
"다른 코리안 기자들은 질문 안하던가?"
-"아니, 그런 질문 없었다."
나는 분통이 터졌다. 당시 워싱턴에는 10명이나 되는 한국 특파원이 주재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해 질문하는 기자가 없었다니.
이 날 12시 정례 기자회견 때 바로 국무성 대변인에게 질문했다.
"한국 중앙정보부가 일본 도쿄에서 한국의 야당 지도자 김대중을 납치해 가서 현재까지도 그의
소재가 확인되지 않고 있는데 이 사건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무엇인가?"
대변인은 바로 답했다.
-"한국의 야당 지도자 김대중 씨가 일본에서 실종된 것은 사실인데 우리는 현재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 중이다."
나중에 들으니 국무성에서는 기자회견 때 쥬리 문이나 스펜서 데이비스가 반드시 질문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미리 답을 준비했다고 한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왔는데 한 시간쯤 지난 후 주미 한국대사관 이상옥 정무참사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문 기자님, 오늘 국무성 기자회견에서 하신 질문 내용은 무엇이며 대답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내가 "한국의 중앙정보부가 김대중 씨를 납치해 갔다"고 질문했다는 얘기를 벌써 전해 듣고 그가
전화로 문의해 온 것이다. 나는 기가 막혔다.
"기자가 기자회견에서 질문한 내용까지 대사관에서 조사합니까? 정 알고 싶으시면 국무성에 오늘 기자회견 질의 응답에 관한 풀 텍스트 나와 있을테니 그것을 베끼세요."
-"복사는 안 됩니까?"
"네 안돼요."
전화를 끊고 났더니 연신 전화벨이 울려댔다. 일본 각 신문사와 통신사 기자들의 질문 전화였다.
71년 김대중 씨가 워싱턴에 왔을 때 내가 그를 도왔던 사실을 알고 있던 그들은, 그의 행방에 대해
서도 아는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답답하기는 나도 마찬 가지였다. 한국 중앙정보부가 그를 납치해 암살하려는 것이 분명한데 어디로 끌고 갔는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그날 이후 날마다 국무성 기자회견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해 질문했다. 미국의 정부기관은 기자회견에서 나온 질문에 대해서 반드시 답변을 해야 한다. 그 자리에서 답변하기 어려운 내용이면 사후에 서면으로라도 답변해야 한다. 그 때문에 기자회견에서 문제화하면 관계부처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효과를 볼 수 있었다.
내가 그 같은 질문을 계속한 이유는 한국 언론이 김대중 납치 사건을 제대로 보도하지 못하고 있는 판에 납치 사건 발생국이 일본 언론들이라도 사건을 이슈화해 주기를 기대해서였다. 다행히도 일본 언론들은 김대중 납치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들은 백주 대낮에 일본 주권을 침해하면서 김대중을 납치해 간 한국 정부의 처사에 대해 규탄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일본 정부나 경찰도 사건에 대해 '자작극'이니 '북괴의 음모'니 하는
말을 다시 하지 못하고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나오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전 민단 간부이면서 민주화운동가인 배동호 씨, 김재화 씨 등이 주동이 되어 국제여론을 환기시키려는 '김대중 구출운동'을 집요하게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구출운동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해서는 김대중 씨가 없는 가운데서도 한민통 일본 본부 창립식을 예정대로 치러 그 단체의 명의로 운동을 진행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보고 최선을 다해 뛰어다니고 있었다. 결성식이 73년 8월 13일 일본 각지에서 1백여 명의 대표들이 도쿄에 모여들었다.
이들의 노력으로 한민통 일본 본부가 결성됭 8월 13일, 김대중 씨 가 돌연 서울 동교동 자택으로
돌아왔다. 돌아왔다기보다는 납치범들이 그를 동교동에다 데려다 놓고 연금했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런 어처구니 없는 사건 중에서도 어김없이 광복절이 돌아왔다. 주미 한국 대사관에서 광복절 기념 파티가 열렸다. 나는 당시 워싱턴 대한부인회 회장을 맡고 있던 언니와 함께 파티에 참석했다.
김동조 대사 부인 송두만 씨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언니가 옆에 와서 쿡쿡 찔렀다.
"왜 그래? 언니"
-"얘 아까부터 저 남자가 담배를 피우면서 너를 째려보고 있어."
힐끗 돌아보니 주미 한국 대사관 중앙정보부 공사 이상호(가명 양두원)였다. 나는 언니에게 말했다.
"째려보면 어때?"
-"얘, 무서운 얼굴이다."
그가 나를 째려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내가 국무성 기자회견에서 '한국의 중앙정보부가 김대중 씨를 납치했는데'라고 발언한 데다가 이상호 공사의 부하 몇 명이 사건 발생 시점에 도쿄로 갔다는 사실을 폭로했기 때문이었다. 돌이켜보면 이상호의 무서운 얼굴과 함게 나의 수난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