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날을 세상 사람들에게 맡길 수 없잖아요?
32: 21-24
21.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 백성이 네게 어떻게 하였기에 네가 그들로 중죄에 빠지게 하였느뇨
22. 아론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소서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 23.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수 없노라 하기에
24.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어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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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잊어버려지지 않고 용서되지 않는 상처나 기억들이 있습니다. 개인도 그러하고, 가정이나 공동체도 그렇습니다. 어떤 가정은 늘 행복해 보여서 ‘저 가정에는 아무 문제가 없겠지?’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에도 남모르는 상처나 아픔들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위대한 사람일수록 위대함 못지 않은 상처들을 갖고 있기 마련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찔리는 가시와 같은 질병이 도리어 자신을 겸손하게 만들고 큰그릇이 되게 하시어서 감옥에서마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위대한 고백을 합니다.
마음 먹기에 따라서 상처를 잘 딛고 일어나면 오히려 은혜의 그릇이 될 수도 있고 상처를 치유 받을 뿐 아니라 상처가 영광의 상급으로 변화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상처 때문에 환경을 원망하며, 다른 사람을 탓하며, 인생을 비관하고 자신도 어둡게 살거니와 주위 사람들에게 쓴 뿌리가 되고 마는 불행한 인생을 살수도 있습니다. 주의 은혜 받고 능력 받아서 우리의 마음가짐이 새로워지고 우리를 얽매이고 주저앉게 하는 모든 응어리나 상처들을 해결받고 물리쳐 버려서 새롭게 출발하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가 하나님께서 주신 돌판을 가지고 산 아래로 내려왔을 때의 일입니다. 온 백성들이 금송아지 앞에서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춤추는 모습이 애굽에서 우상에게 제사 지낼 때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백성들이 이와같이 우상을 숭배하는 무서운 죄악을 저지르게 되었느냐는 모세의 질문에 아론이 답변한 것이 22~24절 입니다. 먼저 완악하고 말 안듣는 백성들 탓을 합니다. 신상을 만들자고 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백성들이고, 자신은 금 패물이 있으면 가져오라고 했을 뿐이며 그 금붙이들을 블에 던졌더니 송아지 신상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들어간 후 40여일간 모세를 대신하여 백성들을 지도했던 지도자로서는 너무나 무책임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 책임을 면하기에, 다른 사람에게 탓을 돌리기에 급급했던 아론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오늘의 현실들과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론은 책임을 백성들의 악한 심성에 돌립니다. 그들이 신을 만들어 달라고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용광로에 까지 책임을 전가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범죄 한 후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그랬고 여자는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나사로가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이 도착하셨을 때는 이미 나사로가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나 지난 뒤였습니다. 그때 마르다는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믿음 좋은 마리아도 똑같이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홍해 앞에 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하여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 하더뇨”
베데스다 못가에 있던 38년된 병자가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챙겨주는 사람, 거들어 주는 사람이 없어서, 다른 사람처럼 기운만 있었다면…, 지옥에 간 어리석은 부자도 “만일 죽은 자 가운데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 하리이다”
사람들이 흔히 갖는 생각 가운데 남을 탓하고, 환경을 탓하고, 비난하는 그 마음속에는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려는 마음, 그래서 자기는 항상 옳다고 생각하고 잘못된 것은 모두가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려버리며 잘못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심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행했던 과거의 책임을 부모님 탓, 남편 탓, 환경 탓, 직장 탓, 사회 탓으로 돌려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행복할 수 있다면 그렇게 살면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이유는 먼저는 남의 탓, 환경 탓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좋아하시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런 마음에는 참된 평안이나 만족이 없이 갈등하며 살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좋지 않은 환경이나 여건, 외모를 오히려 성공의 기회로 삼아서 역사의 위대한 주인공들이 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유명한 이스라엘의 여 수상 이었던 골다 메이어의 수기에 보면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하도 못생겨서 모든 사람으로 부터 업신여김을 받았다. 심지어는 부모도 나를 시원치 않게 여겼다. 그래서 애라 공부나 해야겠다고 열심히 했더니 결국은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여자로서 얼굴이 못생긴 것은 결정적인 콤플렉스지만 바로 그 때문에 이스라엘의 휼륭한 수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얼굴이 울퉁불퉁하고 눈도 작은데다가 튀어나오고 키도 조그맣고 정말 누가 보아도 못생긴 사람중에 하나로 많은 사람의 조소를 받고 살았고, 우리가 존경하는 칼빈도 빼빼마른 몸에 눈에는 항상 눈꼽이 끼어 있었고 신경질적인 사람이었으며 심지어 움직이는 종합병원이라고 까지 할만큼 많은 질병을 갖고 살았다고 하고, 아브라함 링컨은 몸과 얼굴은 깡마르고 다리는 유달리 길어서 고릴라라고 별명이 붙어 다녔고 정치가들 사이에서도 조소하고 비웃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성경의 가장 위대한 사도로 꼽는 바울도 키는 작고 시력은 좋지 않고 주기적으로 발작하는 병까지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보는 내가 있고, 다른 사람이 보는 내가 있고, 하나님께서 보시는 내가 있습니다. 사람은 외모나 능력, 가진 조건, 환경을 보지마는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진실한 사람이라 인정받는 사람되면 앞날은 내가 열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흔히들 일본 사람이나 미국 사람들을 정직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예수 믿는 성도가 천만이라고 하면서, 이 사회 지도층의 과반수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진대, 왜 우리는 정직하지 못하다는 평을 듣고 살아야 합니까? 이 나라 부분 부분에 거짓이 판을 치고, 남의 탓하기 급급한 인생살이를 살아야 합니까?
잠언 28장13절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이미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이기에 어느 곳에서나 정직하게 “내 탓입니다”“내 책임입니다”
나의 책임과 나의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 되야 합니다.
세상을 몰라서 하는 말이라 생각할지 모릅니다. “정직하게 어떻게 장사하고, 정직하게 어떻게 사업하고, 거짓말하지 않고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느냐?” 반문하실 수도 있습니다. 세상이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아니하고, 우리의 잘못된 근성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 세상 사는 동안 정직하게 사는 것은 어찌보면 전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폭포의 물을 우리의 손으로 막을 수 없듯이 주님의 크신 은혜를 체험하고 나면, 주님의 생수의 강 같은 말씀에 잠기기만 한다면 어려운 세상 속에서도 바로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순수하게 준종하며 사는 그길은 망할 것 같지만 흥하는 길이요, 안 되는 것 같으나 결국은 되는 길이요, 주님이 막히고 얽힌 것들을 열어주시고, 풀어 주실 때가 있음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나라의 앞날을, 이 사회의 앞날을 세상사람들에게, 세상 흘러가는 대로 맡기며, 두고 볼수는 없잖아요? 나 한사람 바로 서면 세상의 한 부분이 달라집니다. 이런 아름다운 역사가 오늘 복된 자리에 나오셔서 말씀을 듣는 여러분을 통해서 이 땅에 이루어 나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