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114:1-4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며 : 칼빈
이 시편에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약속된 기업의 땅으로 인도하실 때에 그의 능력과 은혜의 증거를 주심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억하게 하신 구원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포함하여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 기이하신 구원의 행적 속에 내포된 뜻은 특별한 선택을 받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완전히 하나님께 복종함으로서 거룩하고 특별한 백성이 되게 하려는데 있었습니다.
1. 본문 1-2절은 “(1)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며 야곱의 집이 방언 다른 민족에게서 나올 때에
(2)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 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대한 뚜렷한 증거요, 상징이기에 이 출애굽한 사실을 자주 기억하라고 해서 놀랄 일은 못 됩니다.
이 시편의 첫머리에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비싼 대가를 치루고 친히 사신 백성들은 이제 더 이상 자기들 자신의 것이 아닌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출애굽기 19:6절과 베드로전서 2:9절에 의해 당시 유다 지파가 하나님 섬기는 일에 위임되었다는 주석가들의 견해는 선지자가 의도한 것과는 이질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곧 이어지는 구절,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신의 통치하에 두셨다는 사실에 의해 모든 의심이 풀리는데 이는 단지 똑같은 내용의 반복일 뿐인 게 사실입니다.
유다는 다른 모든 지파들보다 강했고 숫자가 많았으며 모든 지파들 중에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다른 백성들보다 특별히 언급된 것 또한 사실입니다.
동시에 특별한 방법으로 그들을 묘사한 유다의 영광이 백성 전체에 똑같이 해당합니다
하나님께 성별되었다는 말씀은 선지자가 사람들의 표현 양식에 따라 설명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안에서는 높아지는 일이나 낮아지는 일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 라고 말씀한 것은 지금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하나님의 거룩하신 위엄이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과 함께 나타남으로서 목도한 모든 자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실 때에 하나님 자신을 위한 나라를 세우셔서 자신의 거룩하신 이름이 섬김을 받도록 작정하셨습니다.
시편 114 편
그러므로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그토록 현저한 실예를 늘 기억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무감각함은 비난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2. 본문 3-4절은 “(3) 바다는 이를 보고 도망하며 요단은 물러갔으며
(4) 산들은 수양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아 어린 양같이 뛰었도다” 입니다.
1) 선지자는 그때 일어났던 모든 이적을 계속 나열하지 않고 바다가 생명력 없고 감각 없는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놀라게 되었던 사실을 간략하게 말합니다.
그 당시 그 때에 요단강도 바다와 마찬가지로 도망하였고 많은 산들도 흔들렸었습니다
선지자가 바다와 요단강이 물러갔다고 표현한 것은 시편 기자의 시적인 표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선지자가 그 당시의 상황을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조물주에게 그렇게 순종했던 바다는 하나님의 이름을 성결케 해 주었습니다.
요단강은 창조주께 자신의 철저한 복종으로 스스럼없이 하나님의 권능을 찬양했습니다
또한 모든 산들은 흔들림으로서 하나님의 무서운 엄위 앞에 자신들이 얼마나 위압당하고 있는가를 분명한 방식으로서 보여 주면서 기뻐 뛰었고, 뛰놀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이런 실예를 들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권능이 교회 보존을 위하여 나타내시는 어버이 같은 보살핌과 참된 소망 그 이상이라는 사실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바다, 요단강, 산들과 구별되는 것은 매우 적절한데 택한 백성과 생명이 없는 것 사이에는 매우 현저한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2) 다시 요약하면 1-2절 말씀은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셔서 의롭게 하신 이스라엘을 하나님 자신의 소유된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사실에 있겠습니다.
거기에 더해 3-4절은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들은 순전한 방식으로 물러가기도 하고 수양같이 뛰며 노는 방식으로 어린양같이 기뻐하며 뛰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말씀들은 조금이라도 생각깊이 피조물을 살펴본 사람이라면 쉽게 공감할 수 있도록 구성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런 부분들은 옛 교회와 오늘날의 교회를 향한 은근한 책망의 말씀입니다.
동시에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과 우리의 구속주 하나님께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여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시편 114 편
시114:5-8 바다야 네가 도망함은 어찜이며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바로 자연계의 하나님이신 사실을 역설합니다(3-8).
하나님이 행하신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에 바다와 산들과 바위도 순종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구원하실 때에, 자연계도 필경 수종들 것을 보여줍니다.
범죄한 인생에게 대하여 자연계가 그들의 유익을 위해 협력하지 않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역사하실 때(특별히 주의 재림 때)는 모든 자연계가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을 위해 전적으로 수종들게 됩니다(계 7:16, 21:15, 22:2).
1. 본문 5-6절은 “(5) 바다야 네가 도망함은 어찜이며 요단아 네가 물러감은 어찜인고 (6) 너희 산들아 수양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아 어린 양같이 뛰놂은 어찜인고” 입니다.
선지자는 조금 전에 자연이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감정과 경의를 드러냈다고 묘사한 것처럼 친숙하고도 시적인 방법으로 바다, 요단강, 산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역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지혜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의 무감각함을 매우 예리하게 책망합니다.
바다가 도망했다고 말함으로서 앞을 보지 못하는 그들을 정죄하기에 매우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보이지 않는 일꾼을 사용하여 자신의 명령에 복종케 하지 않았다면 요단강은 마를 수도 없었을 것이고, 그 물이 뒤로 물러갈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이 겉은 바다와 요단강과 산을 말하나 실제 우리에게 직접 해당된 말씀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반성하여 이 문제를 주의 깊고 조심스럽게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대할 때마다 우리는 각자 그 의미를 재음미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변화는 자연으로 우연히 일어난게 아니라 주의 손길이 여기 나타난 것이다”
“어린양 ”과 “수양”에서 취한 비유는 지금 다루는 주제의 막중함에 미치지 못합니다.
선지자의 말은 그때 하나님이 놀라운 방법으로 권능 행하신 것을 겸손히 표현합니다.
땅 위에 있는 존재의 안정심은 대부분 산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이리저리 뛰면서 흥분하고 있는 수양이나 어린 양이 이 산과 무슨 관련이 있겠는가?
이토록 소박한 형식으로 말하는 것은 이적의 위대함을 경감시키려는 무식한 자들에게 이러한 특별한 하나님의 능력의 증거를 더욱 강력히 심어주려는 것입니다.
2. 본문 7-8절은 “(7)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8) 저가 반석을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입니다.
시편 114 편
선지자는 질문으로 사람들의 궁금증을 일으킨 후에, 이제 선지자는 많은 사람들이 땅을 의인화시켜 이해했던 문제에 대해서 진실하게 답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동사 חולי (홀리) 어미에 י (요드)를 붙여 땅이 주 앞에서 떠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말한 듯이 표현합니다. 이런 기이한 해석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땅” 이라는 단어가 곧 뒤따라 나오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타당성 있게 י (요드)는 다른 많은 구절들에서처럼 불필요하게 덧붙여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해석을 취합니다.
온 땅이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 앞에서 떨게 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또 많은 사람들은 חולי (홀리) 란 말을 명령형으로 번역합니다.
우리는 이 해석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선지자는 또 다시 사람들의 마음이 더 감동되게 땅을 들어 설명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 의미는 동일합니다. 온 땅은 자기의 왕 앞에서 떨 수밖에 없습니다.
이 견해는 ‘주 또는 주인’이라는 의미를 가진 אדון(아돈)이라는 말로 확증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사람들에게서 모든 민족들의 헛된 신들을 추방하기 위해 곧이어 “야곱의 하나님” 이라는 이름을 끌어들입니다.
그러니까 온 땅과 그 땅의 사람들이 그들의 주,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쉽게 속기에 참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우상에 빠지기 쉽습니다.
곧 이어서 또 하나의 이적이 언급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홍해를 건너게 하신 후에 광야에서는 그의 능력을 더욱 찬란하게 나타내신 사실입니다.
선지자가 우리에게 일러 주듯이 하나님의 영광은 하루만 나타났다가 백성들에게서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40여년이 아니라 영원토록 그리하십니다.
메마른 반석에서 갑자기 물줄기가 터져 나올 때와 같이 다른 일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은 계속해서 나타났습니다(출17:6).
물이 반석이나 돌밭 가에서 졸졸 흘러나올 수는 있으나 마른 바위에서 터져 나온다는 것은 분명히 평범한 자연현상을 초월한 것, 즉 이적적인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돌이 물로 어떻게 변했었는가 하는 교묘한 변론에 들어갈 의사는 없습니다.
선지자의 뜻은 전에는 메마르고 굳어 있는 곳에서 물이 흘러나왔다는 것 뿐 입니다.
이렇게 볼 때 소피스트들이 화체설을 꾸며내기 위해 사물의 변화를 일으킨 것처럼 말한 모든 성구들을 취하는 일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가? 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 광야에서 돌의 실체가 물로 바뀐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적적인 방법으로 물을 만드셔서 마른 반석에서 흘러나오게 하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