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7129]市南先生-立夏日杏花初開
立夏日杏花初開입하일행화초개
市南,兪棨(유계=1607~1664) 棨=창 계.
庭花初綻雨紛繽 (정화초탄우분빈)
四月關山似早春 (사월관산사조춘)
뜰 꽃이 처음 피자 분분히 비 뿌리고,
사월 달 변방 날씨 이른 봄 같은데
遙想故林濃綠晩 (요상고림농록만)
滿園桃杏總成仁 (만원도행총성인)
멀리서 고향 숲 저녁 녹음 생각하니
정원 가득 복사, 살구 꽃 모두 열매되리.
立夏日= 일 년 중 여름이 시작하는 때. 이십사절기의 하나로
곡우(穀雨)와 소만(小滿) 사이에 있다. 양력 5월 6일경이다.
杏花행화=살구꽃.
初開초개= 처음 피다.
兪棨(유계)= 본관은 기계. 자는 무중(武仲), 호는 시남(市南).
이이·김장생의 학통을 잇는 서인 학자로서, 성리학에 밝았고 특히 예론에 정통했다.
김상헌·김장생에게 성리학을 배웠고, 송시열·송준길·윤선거·윤문거·이유태 등과 교유했다.
1633년(인조 11)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1639년 벼슬을 단념하고 금산의 마하산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庭花정화=뜰에 핀 꽃.
初綻초탄=처음 (꽃이)피다.
綻=옷 터질 탄. 동자(同字)䋎, 䘺
雨紛繽우분빈=부슬 부슬 내리는 비.
紛繽(분빈)= 떠들썩하게 분분함.
紛=어지러울 분. 繽=어지러울 빈.
關山관산=변방의 산골은
似早春사조춘=마치 이른 봄 같네.
遙想요상= 아득히 그려보는
故林고림=고향의 숲.
濃綠晩농록만=짙푸르던 저녁 풍경
滿園만원= 뜰 가득
桃杏도행= 복숭아 살구꽃 피어
總成仁총성인= 모두 인을 이루었겠지
김장생(金長生.1548~1631)의 문인이자
명재(明齋) 윤증(尹拯.1629~1714)의 스승인 유계(兪棨.1607~1664)의
<입하일에 살구꽃이 처음으로 피다.(立夏日 杏花初開)>를 읽도록 하겠습니다.
뜰에 비로소 살구꽃이 피고 비 흩날리니
사월의 산골은 마치 지금이 이른 봄 같네.
아득히 그려보는 고향 산천의 짙푸르던 저녁 풍경
뜰 가득 복숭아 살구꽃 피어 모두 인을 이루었겠지 .
庭花初綻雨紛繽 四月關山似早春
遙想故林濃綠晩 滿園桃杏總成仁
이 시는 제목부터 살펴야 하겠습니다.
소한(小寒)부터 곡우(穀雨)까지의 4개월 8절기 동안 24번 꽃을 피우는 바람,
즉 화신풍(花信風)이 바뀌는데 이를 이십사번풍(二十四番風)이라고 합니다.
그 가운데 살구꽃을 피우는 행화풍(杏花風)은 우수(雨水) 절기에 부는 화신풍입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우수에 피는 살구꽃이 우수는 물론
경칩(驚蟄)·춘분(春分)·청명(淸明)·곡우(穀雨) 등 다섯 절기를 지나고
입하(立夏)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피었다고 하였습니다.
절기를 가늠하는 기준을 꽃이 피는 것으로 삼는다면 시인이 시를 짓고 있는
이 산골 지역은 이제 비로소 봄이 시작된다고 하겠지요.
깊고 높은 산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1구에서 비로소 살구꽃이 피었다고 하고
제2구에서는 입하인 사월의 산골이 이제 이른 봄 같다고 함은
바로 제목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상황을 그대로 풀어쓴 것입니다.
그런데 제2구의 관산(關山)이라는 말은
➀한(漢) 나라 횡취곡(橫吹曲)의 이름으로 이별을 슬퍼하는 노래 <관산월(關山月>
➁변방 ➂산골 등의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는 바,
그 가운데 어떤 것일까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여기서는 산골로 보았습니다. 사실 산골도 예사로운 산골이 아닙니다.
제3구의 고림(故林), 즉 고향 산천과 대비되는 공간으로서의 산골,
즉 유배지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유배를 간 것은 두 차례입니다.
첫 번째는 충청도 임천(林川)으로의 유배입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그는 시강원설서(侍講院說書)로 있었는데
척화를 주장하다가 화의가 결정되자 척화 죄로 유배되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함경도 온성(穩城)으로의 유배입니다.
1650년 효종이 즉위하고 돌아가신 인조의 묘호를 정할 때
조(朝)를 반대하고 종(宗)으로 할 것을 주장한 것이 선왕을 욕되게 했다는 죄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듬해에는 가까운 강원도 영월(寧越)로 옮겨 왔습니다.
이 시에서의 관산(關山)은 함경도 온성(穩城)을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다섯 절기를 건너 뛴 입하에 와서야 살구꽃이 필 정도로 높고
깊고 외진 곳이라는 점과 문집에 작품이 수록된 편차를 보면
이 작품의 두 번째 위에 <別庚寅迎辛卯>라는 작품이 있는데
그 제목에 나오는 庚寅은 1650년(효종1)이고 辛卯는 그 이듬해이니까,
이 시 역시 거의 같은 시기의 작품일 것이라는 점을 고려한 결과입니다.
제3구 ‘遙想故林濃綠晩’는 그가 즐겨 사용하던 표현입니다.
두 수로 된 <낙사에 아파 누워 있다가 회포를 읊다(洛舍病伏有懷)>의 제1수
미련 ‘遙想故林秋色晩 一燈終夕耿無眠’과
세 수로 된 <후노가 보내온 시에 차운한 세 수. 스스로를 읊은 것 하나,
형제의 정을 말하는 것 하나,
후노를 권면하는 것 하나이다
.(次後老見贈三韻 一以自詠 一以道兄弟之情 一以勖後老)>의
제1수 미련 ‘遙想故林春又晩 定應門巷長蒿蓬’에서
모두‘遙想故林~~晩’라는 동일한 표현법을 구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들도 역시 온성(穩城)에서 지은 것으로 보이고,
고림(故林)은 고향 산천이라 하겠고
앞에 나오는 관산(關山)과 대조되는 공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4구는 시상의 전개로 보았을 때 고향의 풍광을 그려본 것입니다만
뒷부분 ‘總成仁’의 뜻풀이가 자못 의미심장하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축자적으로‘모두 인을 이루었겠지’로 풀이하였습니다만
뭔가 석연치 않습니다. 뜰 가득 복숭아와 살구나무가 꽃을 피운 것을 두고
인(仁)을 이루었다고 하는 표현이 무슨 의미인지 불분명합니다.
인(仁)이 과실의 씨라는 뜻도 있습니다만 성인(成仁)으로 씨를 맺다,
결실을 맺다는 용례로 쓰인 경우는 찾기 어려운 실정이고 보면
이 부분은 그가 유배를 가게 되었던 단초였던 인조의 묘호 문제를 암시하고 있지 않을까,
원문=市南先生文集卷之一 / 詩○七言絶句 一百七十五首
立夏日。杏花初開。
庭花初綻雨紛繽。四月關山似早春。
遙想故林濃綠晩。滿園桃杏總成仁
兪棨(유계) (1607~1664) 棨=창 계.
이이·김장생의 학통을 잇는 서인 학자로서, 성리학에 밝았고 특히 예론에 정통했다.
김상헌·김장생에게 성리학을 배웠고, 송시열·송준길·윤선거·윤문거·이유태 등과 교유했다.
1633년(인조 11)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1639년 벼슬을 단념하고 금산의 마하산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본관은 기계. 자는 무중(武仲), 호는 시남(市南).
아버지는 참봉 양증(養曾)이며, 어머니는 의령남씨로 병조참판을 지낸 이신(以信)의 딸이다.
김상헌(金尙憲)·김장생에게 성리학을 배웠고,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윤선거(尹宣擧)·윤문거(尹文擧)·이유태(李惟泰) 등과 교유했다.
1633년(인조 11)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시강원설서로서 예조판서 김상헌과 함께 척화를 주장하다가, 이
듬해 화의가 이루어지자 척화죄로 임천에 유배되었다.
1639년 풀려났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금산의 마하산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이때 송시열·송준길 등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학문을 논했고,
주자의 〈가례 家禮〉에 대한 여러 경전과 예서를 바탕으로 〈가례원류 家禮源流〉를 지었다.
그 후 다시 기용되어 1646년 무안현감이 되고, 1649년 인조가 죽자 홍문관부교리로서
왕의 장례절차를 상소하여 예론에 따르도록 했다. 이어서 인조의 묘호를 정할 때,
조의 사용을 반대하고 종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다가 선왕을 욕되게 했다는 죄로
온성과 영월에 유배되었다. 1652년 유배에서 풀려나 송시열·송준길의 추천으로
시강원문학이 되었고, 1659년 병조참지·대사간·부제학 등을 역임했다.
효종이 죽은 뒤 일어난 예송에서, 서인의 입장에 서서 송시열의 기년설을 지지하고
남인의 3년설을 논박했다. 1662년(현종 3) 예문관제학,
1663년 대사헌·이조참판이 되었다가 병으로 사직했다. 1715년(숙종 41) 손자인
상기(相基)가 〈가례원류〉를 간행했는데, 권상하(權尙夏)의 서문과
정호(鄭澔)의 발문에 이 책의 저자와 간행의 문제를 둘러싸고 소론인 윤증(尹拯)을
비방하는 내용이 있어서 이후 노론·소론 사이에 치열한 당쟁이 전개되기도 했다.
저서로는 〈시남집〉·〈가례원류〉·〈여사제강 麗史提綱〉·〈강거문답 江居問答〉 등이 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임천 칠산서원, 무안 송림서원, 온성 충곡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