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이 준 편지
박경선
판자촌에 사는 아이가 있었다. 풀빵(국화빵) 구워 파는 엄마한테, 저녁거리로 국수 한 뭉치 살 돈을 얻으러 가는 아이였지만 학교 선생님이나 친구들은 아무도 그 아이가 가난하게 산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아이는 평소, 글쓰기 대회마다 나가서 청와대까지 갔다오는 큰 상을 비롯해서 여러 상을 타와 조회 시간마다 운동장 교단에 올라섰고, 국어 시간에 선생님이 책 읽기를 시키면 책을 보지 않고 줄줄 외워 낭독하는 별스러운 아이였고, 활달한 성격이라 아무도 무시하지 않았다. 그런데 학교에서 불우이웃 돕기 성미를 한 봉지씩 모은 날, 6학년 담임, 박일영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셨다.
“가난하다고 무조건 도울 일이 아니다. 가난해도 자기 할 일을 다 하고 열심히 사는 아이 집에 이 쌀을 갖다 줄 거다.”
아이도 쌀통에 없는 쌀이지만 달달 긁어 갖다 낸 터라. ‘맞는 말씀! 그런 아이가 누구지?’ 불쌍한 친구 순이를 점쳐 보았다. 그날 오후, 학교를 마치고 아이가 혼자 집에 있는데 선생님과 쌀자루와 학급 회장이 혼자 있는 아이 집 방문 앞에 나타났다.
‘아니, 우리 집을 어떻게 알고? 아니,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아이는 앞뒤 가릴 정신없이 선생님과 친구를 그 자리에 세원 둔 채, 뒷산으로 도망쳐 내 달렸다. ‘무뚝뚝한 선생님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을까?’ 선생님의 사려 깊은 사랑과 배려는 뒷전이요. 볼이 화끈거리는 창피함을 견딜 수 없는 12살, 사춘기였다.
그때, 자존심 강한 아이 가슴에 눈물이 떨어져 싹이 트고 그 자리에 꿈이 자랐다. ‘나도 커서 잘살게 되면 누군가에게 밥 한 그릇 대접하는 사람으로 살 테야!’
아이는 커서 선생님이 되고 대학원 강사로도 살면서, 그가 서 있는 자리마다에서 밥 나눌 사람들이 보였다.
학기 첫날 교단에 서면, 가난한 집, 불우한 집 아이들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고, 교감일 때 급식 없는 방학 날 때면 일직하는 선생님들의 점심을 사 먹이거나 밥해줄 보따리를 챙겨 메고 출근했다. 십년간, 대학원 시간 강사로 강의를 나갈 때는 학교 근무를 헐레벌떡 끝내고 대학원 수업을 들으러 오는 현직 교사들이 밥 나눌 대상으로 보였다. 대학 앞 식당에 모여 밥 한끼 먹고 수업하러 가는 게 일상이 되다 보니, 학기마다 새로 맞고 헤어지는 종강 날, 대학원생들은 하찮은 시간 강사에게 감사 편지를 남겨주었다.
`동화 창작 수업, 생각을 많이 하도록 만들어준 수업이었습니다. 맛있는 밥도 매일 사주시고, 밥은 하늘이라, 하늘은 혼자 못 가지듯, 밥은 서로서로 나누어 먹어야 한다하셨지요? 교수님께서 주신 특별한 시간 기억하겠습니다. -대구아동무학과 계절제 제자 박도유 올림‘
‘교수님 덕분에 매일 맛있는 저녁을 먹으며 재미있는 강의 들었습니다. 교수님의 열정과 가르침을 기리겠습니다. 서효주, 정지민 올림.’
2014년, 전원주택을 마련하여 남편의 퇴임식을 정원에서 하는 시작으로, 시골집 거실에 ‘손님은 신이 보내주시는 선물입니다.’ 는 현수막을 써 붙이고 손님 청하기를 즐겼다. 15가구가 사는 시골 동네라 모여서 점심 한때 즐기면 그냥 온 동네잔치가 된다. 대부분 홀로 사시는 할머니들이라 신부 놀이 하자며 모셔서 밥 한 끼 대접하고 비닐 테이블보와 미사포를 아래위에 들러 신부 드레스로 입히고 왕관을 세워 사진을 찍어드렸다. 세월이 흘렀어도 할머니들의 고운 옛날 모습이 되살아나 담긴 사진첩으로 남았다.
“오늘은 이장님 팔순 축하 놀이를 저희 집에서 합니다. 점심때 모여주세요”
“오늘은 심재근 님이 이사 오심을 축하하러 모입니다.”
이렇게 마을 어르신들 행사를 챙기고 추석맞이, 설날맞이, 어버이날 맞이 핑계 때는 버스킹하는 기타 치는 친구랑, 대구 시내 다도회장의 다도 봉사도 초대해서 함께 즐기니 이장님 왈
‘도대체 교장선생님은 사람을 왜 자꾸 청하는지 취미를 모르겠다.’ 하신다. 내 취미가 사람 불러 밥 한 끼 대접하는 게 취미인 걸 십 년 동안 보면서도 모르시다니.
내 취미에는 동네 어르신들만으로 마음이 차지 않는다. 굿네이버스 심리 치료센터에 다니는 친구들, 학교에서 단체로 문학 기행 오는 친구들, 문학 단체 회원들, 남편과 나의 제자들이랑 이런저런 모임 식구들을 초대한다. 시골집에 내가 근무하는 학교 전 교직원 80명을 주말마다 학년별로, 업무 부서별로 나눠 ‘귀진회(귀한 대진초 교사회), 아진회(아름다운 대진 교사회) 하면서 초대하여 힐링하며 쉬어 가는 밥 나누기를 즐겼다.
“교장 선생님, 저는 상 중에서 교장선생님이 차려주신 밥상이 제일 좋았어요.”
아진회, 신규 교사의 진솔한 고백이 귓전을 맴돈다.
대학 동기들 칠순 잔치 때도 우리 집 정원에서 합동 칠순 잔치도 하고 리마인드 웨딩 촬영도 하며 즐겼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남편의 초등학교 동창회원 20명을 초대하였을 때였다. 정원에서 점심을 먹으며 ‘코로나 때문에 칠순 잔치도 못 했어.’하는 누군가의 푸념에 남편은 얼른 들어가 <초등 동창 합동 칠순 축하연> 현수막을 한 장 써 들고 나와서 <초등 동창회> 현수막과 겹쳐 들고 사진을 찍고, 이튿날, 헤어질 때 수삼도 한 채씩 들려 보냈다. 동기 중에 한의사가 있어서 칠순 잔치 뒷날, 의료 기구를 한 가득 싣고 와서, 마을 어르신들에게 부황도 떠주고 허리 치료도 해주고 의약품도 나눠주며 의료봉사도 하고 갔으니.
들춰보면, 우리 집에서 쉬다간 사람들이 남겨둔 방명록 다섯 권에 1280명의 정담이 담겨있다.
그들이 적어둔 이야기를 보면, 밥 나눈 이야기 책이요. 내가 해준 밥 한 알이 그들 입에 씹혀 몸에 배어들고 마음에 스며 들어서 나온 향기가 밥이 준 편지로 남아 있다. ‘내가 칠십 평생 살면서 힘써 온 일이 이것이었구나!’ 이것만으로도 내가 헛살지 않았다며 나를 위로해주는 선물로 보듬고 산다. (16쪽) 2024. 11.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