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 밤의 추억/이명철
내일이면 입대하는 날이었다. 오후 늦게 큰집에서 외가마을에 있는 어머니 집으로 갔다. 거기서 정읍농고 집결지까지가 훨씬 가까웠기 때문이다. 마침 한 살 위인 외사촌 형이 휴가 나와 있었다. 외사촌 형들과 알고 있는 친구들이 와서 군생활 이야기와 술 한 잔 하는 게 나름 송별식이었다. 그 자리는 거의 자정까지 이어져 평상 위에서 이야기의 꽃도 피웠다.
그때 그 자리에 어머니와 먼 친척 되는 아가시가 우리들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있었다. 마루 기둥에 걸어둔 희미한 등불과 초승달은 그녀의 얼굴을 하얗게 비추고 있었다.
내가 군대 갈 때는 방위병제도가 없어서 일자무식이라도 누구나 군대를 가야 했다. 나 같은 사람은 부선망독자(父先亡獨子)로 6개월만 근무하고 제대하는 의가사제대란 제도만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때 어머니뿐 아니라 큰어머니도 계셨다. 큰어머니는 딸만 있고 아들이 없어 내가 양가독신이었다. 큰어머니의 외손자와 외손녀도 있었지만 외손자들은 나보다 뒷전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안 갈지 몰라도 그때는 그러했었다.
젊은 친구들은 모깃불이 거의 꺼져갈 무렵까지 놀아주면서 나를 위로해 주었다. 그러나 나는 위로의 말들이 내 가슴에 닿지 않았고 모깃불연기만 하늘하늘 바람 따라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다만 내일 입대하고 나면 쓸쓸히 남아 슬퍼해야 할 어머니와 큰어머니 생각뿐이었다.
어른들은 일찍 자리를 피해 주셨고 친구들도 다 간 후 나는 잠이 오지 않아 외갓집 뒤에 있는 모정으로 갔다. 모정은 외할아버지께서 지으신 외갓집 전용 모정인데, 아름드리 정자나무가 여러 주 있어 여자들도 정자나무 밑에서 멍석이나 돗자리를 펴고 쉬곤 했었다.
밤중이라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정자나무 밑에 희미하게 움직이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어머니의 먼 친척이라는 그 여자였다. 그녀와 난 약속한바 없었으나 마치 약속한 듯 천천히 내가 먼저 모정마루에 걸터앉았고, 그녀는 서너 걸음 뒤에 와서 약 1미터 간격을 두고 나란히 앉았다. 서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방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혹시 그녀가 다른 사람과 약속이 있어 나왔는데, 내가 눈치 없는 행동이나 하지 않고 있나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둘이는 그냥 아무 것도 없는 빈 모정 마루에 앉아 하늘에 별들을 바라보다가 그녀가 먼저 침묵을 깼다.
“더운데 고생하겠어요.” “남자라면 다들 가는 건데요.” 언 듯 그 말뿐 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서로는 기억도 나지 않은 무슨 말인가를 몇 마디씩 했을 뿐이었고, 예고 없는 만남이었기에 당황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때 나는 집 나이로 22세였으니, 가슴만 쿵쿵 뛰었을 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녀 역시 말을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할머니를 우리어머니는 ○○○ 할머니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어서 먼 족 간이지만 분명 항렬(行列)은 나보다 위인 것은 분명하였다.
‘가끔 여기에 나오느냐’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는 것 같아 입안에서만 뱅뱅 돌뿐이었다. 그녀 역시 침묵을 지키며 하늘에 총총한 별들만 바라볼 뿐이었다. 먼 외갓집 친척이지만 그녀와 난 금기시 된 어떤 도덕률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아 ‘어설픈 사랑의 표현’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기 직전까지 서로 바라만 보다가 그녀가 먼저 천천히 일어나 어둠속으로 사라져갔다.
그날 밤이 지나고 나는 군에 입대했다. 그러고는 까맣게 잊었다.
집에서 누가 의가사제대 신청해줄 사람이 없어 입대한지 5개월 후 휴가 와서 내가 직접 의가사 제대 신청을 했고, 신청한지 4개월 후 제대를 했다. 그러니까 군에 입대한지 9개월 9일만에 제대를 한 것이다. 집에서 신청해주는 사람만 있었다면 6개월이면 되는데, 3개월 하고도 9일의 군대생활을 더한 셈이다.
그 뒤 나는 그녀가 그 여름밤에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에 대하여 물어볼 기회도 없었고 그녀의 소식도 듣지 못했다.
이사가 잦은 직장 따라 객지로 떠돌았고, 가끔씩 외갓집에 가는 때만 그녀의 소식을 물었다. 시집갔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참 묘한 일이다. 말 몇 마디 건넜을 뿐 아무 관계없었던 그녀가 젊어서는 별로 생각나지 않다가 늘그막에 가서야 솔깃이 생각나는 걸 보면, 그것도 가끔, 끊임없이 밀려오는 그리움 같은 게 추억으 일부로 쌓여가는 걸 보면 말이다.
그 허허로운 추억은 세월이 갈수록 내 가슴에 앉아 한 여름 밤의 그리움으로 남아 그녀의 얼굴만 동그랗게 떠올라 인생의 허무함만 맴돌 뿐이다.
우연이었을까?! 그녀도 가끔 나를 한여름 밤의 추억으로 떠올려 보고는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