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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 탄생의 조건(스가랴 9:9)
예수님의 탄생을 기대하는 강림절입니다. 우리 기독 신자들은 예수님의 탄생 모습을 보려고 동방박사들처럼 예수님이 탄생하신 곳으로 찾아가야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디에서 탄생하셔야 할까요? 물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탄생하셔야 합니다. 이 세상은 씨끄럽고, 소동이 많고, 평화가 없어 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 어지러운 세상에 예수님께서 태어나셔서 소망과 평화, 은혜주셔야 합니다. 덧붙여 특별히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교회에 탄생하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온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중심이 되실 때, 모든 성도들의 삶에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 모든 사람들의 가정에 탄생해야 합니다. 세월이 갈 수록 점점 깨져가는 가정 안에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셔서 가정의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에도 탄생하셔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불안하고 두려울 때, 마음에 깊은 분노가 있을 때,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에 찾아오시면 마음에 평안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얼마 전에 젊고 유망한 한 가수가 자살을 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가수는 자살하기 직전에 유서를 남겼는데, 그 유서의 첫머리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나는 속에서부터 고장난 것 같아. 우울이 나를 삼켰어.” 사람들의 많은 주목을 받는 대스타였지만 이 가수의 마음 속에는 허무와 공허가, 깊은 슬픔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이 가수의 속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 가수가 만약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제대로 만났더라면 그 마음 속에 평안이 임하고 삶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예수님의 탄생의 뒷 배경에는 메시아 신앙이 깔려 있습니다. 이 메시아 신앙은 구약 시대로부터 비롯한 것으로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민족이 고난에 처할 때마다 메시아가 그들에게 찾아와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메시아 신앙이 탄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증언하는 바에 따라 메시아는 어떤 곳에 임하십니까?
첫째로, 메시아 신앙은 현재의 삶이 고통스러운 곳에서 싹틉니다.
자기 삶이 고통스러운 사람, 그 삶이 깊은 고난 속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만날 확률이 큽니다. 흔히 인간의 삶을 고해(苦海)라고 합니다. 이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사람들은 삶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 수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동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주조개의 속 살 속으로 이물질이 들어가면 진주조개는 이 이물질로 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물질을 끈끈한 점액으로 둘러쌉니다. 그리고 이 점액이 굳어서 진주가 탄생하게 됩니다. 진주조개가 고통을 이기려는 과정을 겪은 끝에 진주가 생겨나는 것이죠.
메시아 신앙은 고통 속에 생겨난 진주와 같은 것입니다. 메시아 신앙이 싹튼 배경이 되었던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사후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단되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1년에 멸망했고, 남유다는 기원전 587년에 멸망했는데, 남유다의 멸망 이후 유대인들은 거의 2500년이 되는 시간 동안 나라 없는 민족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이렇게 나라없는 민족으로 긴 시간을 살며 엄청난 고통을 겪으면서 유대인들은 언젠가 메시아가 자신들에게 찾아와 이스라엘을 재건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실 것이라는 메시아 신앙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의 고통을 해결한 분으로서의 메시아를 기대하고 기다리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메시아 신앙은 고통의 역사 속에서 피어난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지금은 풍족한 생활 수준을 누리고 있지만 지금으로부터 수십년 전만 해도 보릿고개를 넘기기가 어려워 동네에 굶어죽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학교에는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학생들이 절반정도 되었고, 따라서 당국에서는 학교 학생들을 위해서 빵을 배급해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컬 하게도 우리나라가 이렇게 가난이라는 큰 고통 중에 있을 때, 대한민국의 기독교가 크게 성장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삶은 팍팍했지만 예배는 뜨거웠고, 성도들은 예수님을 만나길 사모하며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당시에 찬송가 534장을 자주 불렀던 듯 합니다.
찬송가 534장 1절
주님 찾아 오셨네 모시어 들이세
가시관을 쓰셨네 모시어 들이세
우리 죄를 속하려 십자가를 지셨네
받은 고난 크셔라 모시어 들이세
2절
보라 성자 오셨네 모시어 들이세
영광 중에 계신 주 모시어 들이세
헛된 교만 버리고 우리 구주 모시어
영원 복락 누리세 모시어 들이세
여기 1절에 나와있는 ‘주님 찾아오셨네 모시어 들이새’라는 찬송처럼 삶의 괴롭히는 고통 속에서 이 땅의 성도들은 예수님을 그 마음에 모셔드리고자 힘썼습니다. 만약 지금 고통과 고난이 우리를 괴롭힌다면, 예수님께서 반드시 우리에게 찾아와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메시아 신앙은 고난 속에서만 탄생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유발 하라리라는 작가가 “호모 데우스”라는 책을 써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 책의 제목에서 “호모”는 인간이고 “데우스”는 신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은 “신-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작가의 생각은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작가는 인간의 문명이 고도로 발달해서 가난, 질병, 전쟁이라는 인간을 괴롭혀오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더 나아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거의 신과 같은 지위를 얻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인간의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것은 맞지만, 인간을 괴롭혀온 가난과 질병, 전쟁이라는 고통의 원인들은 그렇게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도 세상의 수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들로 인해서 고통받고 죽어갑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들이 쉽게 해결될 것이라는 작가의 주장은 장밋빛 환상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고통의 매서움을 아는 사람이라면 쉽게 이 세상의 고통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고통은 인간에 의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찾아오실 때,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질 때 해결될 것입니다. 따라서 고통 중에 있는 우리의 삶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셔야 합니다.
둘째로, 메시아 신앙은 지금까지의 삶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변화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서 싹틉니다.
세상에는 종종 완전히 개과천선하는 삶을 살길 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남유다의 멸망 이후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을 때, 자신들이 왜 이러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는지 깊은 성찰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스라엘 공동체가 망가진 원인을 찾는 과정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 신앙을 싹 틔우게 된 것입니다. 메시아가 찾아오셔서 망가진 이스라엘 공동체를 회복하시고 새롭게 하시길 바라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통일신라 말기에 백성들의 삶이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궁예가 자신을 구원자, 미륵불로 사칭하기 시작했을 때, 수 많은 사람들이 궁예의 세력에 합류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현실의 삶이 잘못되었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구원자를 바라게 된 것입니다.
이와 달리 자신의 삶에 문제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사람은 메시아 신앙을 갖기가 어렵고, 예수님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삶에 결정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고, 예수님을 메시아로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세리 삭개오는 세리여서 경제적으로는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었지만 로마의 앞잡이로서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멸시받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삶에 대해서 불만에 차있던 그에게 예수님께서 자신이 사는 곳에 찾아오셨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야 겠다는 결단으로 뽕나무에 올라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덕분에 삭개오의 삶은 완전히 변화됩니다. 변화된 삭개오는 자신이 부당하게 거두었던 세금의 세배를 사람들에게 갚겠다고 예수님 앞에 다짐하기까지 합니다.
교부 어거스틴도 타락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결혼을 하지 않고 동거를 하면서 쾌락을 쫓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도저히 자신의 삶이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더 이상은 안됩니다. 이렇게 계속 살 수는 없습니다.” 어거스틴이 자신의 삶에 대해서 깊이 회의했기 때문에 그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그 삶이 변화되길 강하게 원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변화가 있는 곳에 예수님께서 존재하시고, 변화하길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셋째로, 메시아 신앙은 기대와 소망을 갖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싹틉니다.
현실이 아무리 어두워도, 소망을 놓지 않은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유대인들은 나라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메시아가 강림하여 무너진 이스라엘을 다시 재건하실 것이라고 소망하고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소망은 가시적인 이스라엘 나라 대신에 예수님을 통해서 이 땅에 실현된 하나님 나라로 이루어졌습니다.
희망이 없는 삶이란 죽음과도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인은 항상 지금보다 나은 내일이 있을 것이며, 미래는 지금보다 더 나을 것이라고 소망해야 합니다. 아무리 지금 내가 사는 현실이 처참하여도 미래에 대한 꿈과 소망이 있기에 우리는 절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민교회에서 약 20년 동안 목회를 했습니다. 그리고 과거에 이민 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처음 이민 올 때, 단돈 100달러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던 분들입니다. 우리나라에서의 삶이 너무나 팍팍해서 이민을 왔지만 이민자들의 삶은 부푼 꿈을 안고 찾아간 미국에서도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이민자들은 미국에서 직업을 3가지를 가졌고, 아침, 저녁, 밤을 가리지 않으며 생계를 책임졌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고생한 덕분에 수 많은 이민자들은 미국에서 현재 번듯한 기업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또 자녀교육을 하나 확실히 해보겠다는 일념으로 이민자들은 열심히 자녀들을 뒷바라지 하여서 지금도 대부분 한인 2세들은 미국에서 일류 대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이민의 삶은 너무도 힘들었지만 이민자들이 미국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삶에 소망과 기대, 희망을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빅터 프랭클이라는 사람이 쓴 “죽음의 수용소”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되었는데, 이 책은 그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생존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빅터 프랭클의 이 책에 의하면 이상하게도 사람들이 특정한 소문이 돌 때마다 수용소에서 죽어나갔다고 합니다. 그 소문은 이번 성탄절만 지나면 연합군이 와서 수용자들을 자유롭게 해줄 것이라는 소식을 내용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실제로 성탄절이 지나면 연합군이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소문이 거짓으로 밝혀질 때마다 수용소의 혹독한 생활을 버티던 사람들이 자살을 하기도 하고, 병으로 앓던 사람들도 죽는 일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희망과 소망이 끊어지니 수용자들이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렇듯 소망과 희망이 없으면 우리의 삶이 무너집니다. 미래의 소망이 없으면 현재가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스가랴서 9:9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습니다.
스가랴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마틴 루터는 스가랴서 9:9의 내용을 골자로 마태복음 21장을 본문으로 “왕이 오신다”라는 설교를 했습니다. 성탄절은 왕이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루터는 설교에서 진정한 왕이신 예수님이 오실 때, 우리가 섬기고 있던 가짜 왕들을 버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의와, 구원과 생명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루터는 탑상체험에 대한 경험을 말하면서 자신이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기 전까지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루터는 로마서 1:17절을 읽다가 하나님께서 심판의 주가 아니라 사랑의 주님으로 오심을 깨닫게 됩니다. 로마서 1:17절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의”란 심판이 아니라 사랑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시며, 우리를 삶의 곤경으로부터 구원해주기 위해서 오십니다. 따라서 강림절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반드시 우리 삶에 찾아오실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예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등불에 기름을 가득 채우고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와 같이 우리의 마음을 희망과 소망으로 가득채우고 예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크리스마스라는 말의 뜻은 “그리스도와의 만남”입니다. 따라서 성탄절은 예수님과 만나는 날입니다. 만약 우리의 삶에 고난과 역경이 닥쳐왔다면, 우울과 어둠이 우리를 감싸고 있다면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침잠하는 대신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비추시는 빛 가운데로 나아와야 합니다. 성탄절을 맞아 왕으로, 메시아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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