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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9일 활빈교회 일일부흥사경회
예수님을 따르는 법과 그 결과
(요한복음 12:23~34)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27.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29.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천둥이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31.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33.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34.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본문에는 예수님을 따르기가 예수님 믿기와 예수님 섬기기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은 지가 얼마나 되었는데 이제 와서 예수님 따르는 법을 들어야 할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따르기는 그렇게 쉽게 생각할 문제는 아닙니다.
제가 영락교회에 있을 때 읽은 한경직 목사님의 에피소드가 떠오릅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90세가 넘으셔서 몸이 불편하여 병원에 계실 때입니다. 교계의 증경총회장님들이 병문안을 오셨다 가실 때가 되자 제일 원로 목사님께서 ‘목사님, 저희 가는 길에 좋은 말씀을 해주시죠.’라고 부탁드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 목사님께서는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라고 이야기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그 에피소드를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평생을 교계를 위해 헌신하다가 총회장까지 하신 분들이 병문안을 오셨는데 그분들에게 목사님께서 유언처럼 남기신 말이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라니 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90세가 넘으신 한 목사님께서 생애 마지막으로 가지셨던 관심이란 ‘내가 예수를 잘 믿었는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개신교를 대표하신 목사님께서 예수를 잘못 믿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일까요? 온전한 믿음이 100점이라면 스스로 60점이나 70점이 된다고 이제야 깨닫고서 그것이 가장 큰 관심거리가 되셨기에 마지막 유언처럼 증경총회장님들에게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라는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닐까요? 이러한 말씀은 한편으로는 위안이 됩니다. 저는 장로교 통합측에서 유아세례를 받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칠십 평생을 살고 나중에 돌이켜봤을 때 행여나 예수님을 잘못 믿었다고 생각이 든다면 한 목사님의 에피소드를 떠올리며 나도 돌이킬 수 있겠구나 하는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합니다. 도대체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이기에 한경직 목사님까지도 생애 마지막에 예수를 제대로 믿었는가에 대해 관심하셨을까요? 그 관심이 얼마나 크셨기에 증경총회장님들이 찾아오신 자리에서 그것을 유언처럼 남기셨을까요? 교계를 대표하며 모든 교인들의 모범이 된 삶을 사셨던 목사님이 무엇을 계기로 ‘혹시 내가 예수를 잘못 믿었던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셨을까요? 예수 믿는 것의 어떤 요소가 우리로 하여금 돌아보게 만드는 것일까요? 이것은 사뭇 무서운 문제입니다.
본문 2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이 가까워진 때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새삼스레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하셨던 것일까요? 이미 제자들은 3년이나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점을 염두에 둔다면 ‘너희가 3년 동안 나를 따르느라 고생이 많았다. 이제 내가 종착역에 다다랐으니 너희가 상상도 하지 못할 은혜와 구원의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집을 버리고 가족도 버리고 3년이나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에게 새삼스럽게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3년 동안 제자들이 한 번도 예수님을 따라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점이 설령 80년을 예수를 믿었더라도 잘못 믿은 채로 끝날 수 있는 요소입니다. 잘못 믿었는데 잘못인지도 모른 채 끝날 수 있습니다. 세계에 기독교 인구는 천주교까지 합쳐서 20억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는 20억 명의 사람들 중에서 정말로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백 명 중 한 명이나 될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목사나 장로 혹은 권사나 집사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과 예수님을 앞세우는 것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목자가 앞에서 가면 양 떼는 따라옵니다. 그런데 어떤 양이 ‘어이 목자! 거기서는 오른쪽이 아니고 왼쪽으로 가야지!’라고 말한다면 어떨까요? 그렇게 하는 양이 있다면 목자 뒤에 오고 있을지라도 목자를 따르는 것이 아니고 목자를 앞세우는 것입니다. 양은 목자가 자기들을 어디로 끌고 가는지 모릅니다. 양들은 오직 목자의 뒷모습만을 바라볼 뿐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우리의 믿음에 적용해 보면 예수님을 앞세운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업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일주일 안에 1억을 해결 못하면 부도가 날 판입니다. 이제 사장님의 마음은 부도라는 현실에 사로잡힙니다. 어디서라도 1억이 생기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억을 원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기도합니다. 사업이 일차적으로 마음을 사로잡았고, 사업의 문제로 인해 예수님을 앞세우게 된 것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봅니다. 건강에 문제가 생기자 마음에 건강의 회복을 바라는 소원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 소원이 일차적으로 마음에 달라붙은 상태에서 예수님을 부릅니다. 소원이 해결되는 목표를 위해 예수님을 앞세우게 된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답시고 예수님을 앞세우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자녀 문제가 생기면 해결되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깁니다. 장로교 통합측은 다른 교단처럼 삶의 소원을 드러내어 강렬하게 간구하지는 않습니다. 쉽게 말해 점잖케 굽니다. 그런데 속마음에서 바라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문제 해결을 바랍니다. 갖고 싶은 것을 소원합니다. 이런 것들이 마음에 먼저 자리를 잡고 나면 예수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믿음이 아닙니다. 노골적으로 기도하든 은근히 기도하든 결국 마음속에서는 내가 원하는 목표를 향해 예수님을 앞세우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발견한 뒤에 따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면 나라의 독립을 얻고 장관 자리 하나는 차지할 수 있겠다.’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에는 세상에서 잘 나가고 출세하겠다는 바람이 먼저 자리 잡았습니다. 그 결과 자기들이 생각하는 목표를 향해 예수님을 앞세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아시고 새삼스레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3년 동안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예고하셨음에도 그 말씀이 믿어지지도 않았거니와 이 세상에서 소원을 이루고자 하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은 와닿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달리실 십자가는 세상 삶이 끝나는 자리입니다. 제자들의 생각에 예수님을 따르려면 어쨌든 세상 안에서 따라야 했습니다. 그렇기에 설령 예수님이 죽는다는 것을 알아들었다 하더라도 그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을 예고하시며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따라오라고 말씀하신 장소는 당연히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모든 사람을 부르고 계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서는 세상 바깥으로 나가셨습니다. 나사로는 죽었다가 다시 세상의 삶으로 돌아왔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 밖으로 나가신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 이하를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실 때 문을 열지 않고 벽을 통과하여 들어오신 사건이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으로 되돌아오신 것이었다면 그러한 일을 하실 수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람들 눈에 보였지만 세상 밖에 계셨습니다.
3년 동안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른 것도 아니고 믿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세상 안에서 소원을 갖고 예수님을 앞세우고 있었을 뿐입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을 앞세워서는 따를 수도 믿을 수도 없습니다. 세상의 끝인 십자가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출발점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며 고난의 삶을 사는 것을 십자가를 따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남편이 마음에 안 들지만 30년이고 40년이고 참고 사는 것이 십자가를 따르는 것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며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는지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름이란 지구 바깥으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26절에서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날마다 십자가를 출발점으로 삼아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까지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25절에서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생명으로 번역된 프시케(Ψυχή)로써 영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뜻을 염두에 두고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라는 말씀을 풀어보자면 ‘육체를 입고 세상에 살아있음을 좋아하는 자는 나를 따를 수 없다.’라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다양한 바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족이 형통했으면 좋겠고, 몸이 건강했으면 좋겠고, 사업이 잘됐으면 좋겠고, 나라가 평안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것에 대한 소원을 갖고 사는 것이 ‘육체를 입고 세상에 살아있음을 좋아함’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로는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육체를 입고 세상에 살아있음을 미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육체가 당장 죽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 마음이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을 싫어해야만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목사님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목사님이 목회가 잘됐으면 하는 소원을 갖는다면 육체를 입고 세상에 살아있음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이라도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감의 출발점은 십자가 죽음입니다.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까지 마음이 따라가야만 합니다. 마음으로 이 세상을 좋아해서 육체에 붙어있는 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2장에서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라고 했습니다. 할례로 어린아이의 포피를 잘라버리듯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 마음과 유착된 육체를 잘라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승천의 과정을 거쳐 하나님께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일어나야 하는 일이고, 날마다 일어나야 하는 일이며, 모든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야 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자면 마음이 대체 어떻게 하늘로 가라는 것이냐는 질문을 하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미국의 하버드 대학으로 아들을 유학 보낸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사업도 어렵고 몸도 아프고 좋은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던 중 유학 간 아들로부터 수석으로 졸업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러자 사업도 어렵고 몸도 아픈데 마음이 기쁩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있는 아들에게 가 있기 때문에 그곳에서 발생한 기쁨을 그대로 흡수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몸은 한국에 있어도 마음은 얼마든지 아들이 있는 곳에 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육체가 있는 곳에 마음이 항상 같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너희 육체로부터 마음을 잘라내라는 의미에서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할 때 마음에서 육체를 잘라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육체에 붙은 상태에서는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마음이 육체로 만날 수 있는 대상으로부터 기쁨과 만족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동안에는 십자가에서 지구 바깥으로 나 있는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까지 길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제자들은 3년이나 예수님과 동고동락했지만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 채 앞세웠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다른 교단처럼 노골적으로 세상일을 간구하거나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은연중에라도 세상을 향한 소원을 갖고 있다면 하나님을 앞세우게 됩니다. 골로새서의 말씀처럼 마음에서 육체를 잘라내는 할례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사람을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십자가에서 함께 같이 죽는 것입니다. 마음이 육체에 붙은 삶을 끝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육체와 분리되었다면 우리의 마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로마서 13장 14절을 보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라고 했고, 갈라디아서 3장 27절에서도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음이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우리처럼 몸 하나를 입고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이르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이유는 예수님의 하나의 몸을 모든 사람의 마음이 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은 다른 사람에게 내어줄 수도 없으며 다른 사람의 마음이 나의 몸을 입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의 몸을 입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이유입니다.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셨지만 십자가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해서 부활의 과정, 승천의 과정을 통하여 보좌 우편에 이르셨습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에 대해 죽은 자입니다.’라는 고백을 생활 속에서 해나가는 모든 사람의 마음은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따름이기에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나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에 대해 죽은 자입니다.’라고 고백할 때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입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내 마음이 들어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표현을 굉장히 많이 사용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을 막연하게 예배당에 출석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은 육의 몸을 벗어야 합니다. 할례 하듯이 마음으로부터 육의 몸을 잘라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입고 예수님과 같이 승천하고 같이 보좌 우편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개별적으로 나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독생자이신 예수님 안에 들어있는 나를 보십니다. 나를 독생자처럼 여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아들로 삼으신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어서 내 마음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따라 올라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보좌 우편에 계실 때 예수님의 몸 안에 내 마음이 들어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모습을 보시고 독생자처럼 소중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는 말씀에 담긴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몸은 하나지만 그리스도이심으로 지구상의 80억 인구가 각자 입을 수 있는 몸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는 자들은 마음이 육체를 입고 세상 안에 살아있음을 미워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이 계신 곳까지 끝까지 따라가려고 마음먹는다면 예수님의 몸은 여러분 각자가 마음으로 입을 수 있는 자가용 몸입니다. 예수님의 몸을 자가용으로 입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까지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24절을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한 사람이 희생하면 여러 사람이 득을 본다는 식으로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이 육체를 입은 것은 우리와 똑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으로 이 땅에 사시는 동안에도 마음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가 계셨습니다. 반면 우리의 마음은 육체에 붙어서 이 땅에서 뒹굽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뱀은 땅을 기어다닙니다. 이로부터 예수님이 왜 바리새인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부르셨는지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마음에서 갖는 소원은 전부 땅에 있는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마음에서 가지고 싶고, 이루고 싶고, 소원하는 것이 전부 땅에 있다면, 마음이 육체를 입고 세상에 살아있음을 좋아하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마음의 배를 붙이고 땅의 것만 좋아서 먹고 싶어 하기에 독사의 새끼들이라 부르셨던 것입니다.
목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마음에서 진심으로 가졌으면 좋겠고,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소원이 땅에 있는 것이라면 목사도 독사의 새끼가 됩니다. 마음의 배를 땅에 붙이고 땅에 있는 것만 원하고, 마음이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가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몸을 입고 겉으로 보기에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사셨지만 마음은 항상 하늘에 가 계셨습니다. 마음이 육체와 붙어있지 않고 칼로 자르듯이 찢어져서 마음은 하늘 아버지께 가 계셨고 육체는 땅에 계셨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라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한 알의 밀처럼 떨어져 죽으심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세상 밖으로 나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가서 독생자의 자리에 있게 됩니다. 예수님처럼 마음은 하늘에 머물고, 몸은 땅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한 알의 밀이 비유하는 것은 예수님과 똑같은 형태의 수많은 사람이 생겨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밀알이 떨어지고 자라서 결실하면 똑같은 밀알이 수없이 달립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적용해서 나를 희생해서 남에게 득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밀알의 비유는 예수님 한 분께만 적용될 수 있는 비유인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어서 사람들을 부를 것이다. 내가 달린 십자가로 와서 나와 연합하는 모든 사람은 나의 부활과 승천에도 함께 할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 살 때 아버지께만 마음을 두었던 것과 똑같이 그들도 마음을 아버지께만 두게 될 것이다. 이로써 나와 똑같은 자들이 수없이 많이 생기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서 정말로 예수님처럼 육체를 입고 세상 안에 살아있음을 싫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십자가로 마음에서 육체를 잘라버리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 앞에 내 마음이 머물러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왜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마음이 육체를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야만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2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광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영광이라는 말을 참 많이 합니다. 그러나 그 영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막연하게 느껴질 뿐입니다. 영광(榮光)이란 말 그대로 영화로운 광채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심은 사람의 의식이라는 무대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의 의식에서는 하나님께 조명이 비치지 않습니다. 설령 하나님의 이름은 알더라도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간다는 것은 우리 의식에서 하나님이 일등으로 조명을 받으시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에게 모든 관심과 조명이 집중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세상 바깥으로 나가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이는 곧 우리 마음의 의식이라는 무대에서 하나님이 1등을 하셔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사업이 위태로우면 마음은 사업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때 마음에서 1등으로 보이는 대상은 사업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2등으로 밀려나셨습니다. 그러던 중 미국으로 유학 간 아들에 대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때 마음에서 1등은 자녀입니다. 이제 사업은 2등으로 밀리고, 하나님은 3등으로 밀려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머니가 치매에 걸렸음을 알게 됐습니다. 이제 어머니의 치매가 마음에서 1등을 차지하고 다른 문제들이 2등, 3등으로 밀리고 하나님은 4등이 되어버리셨습니다.
이처럼 살다 보면 시시각각으로 의식에서 영광을 받는 문제들이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은 몇 등이실까요? 마음에서 자녀가 먼저 보일 때 하나님은 자녀에게 밀리셨습니다. 건강이 먼저 보일 때 하나님은 건강에 밀리셨습니다. 사업이 먼저 보일 때 하나님은 사업에 밀리셨습니다. 돈 문제, 인간관계, 심지어 예배당 행사에도 하나님은 밀리십니다. 우리의 생활 현장에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기는커녕 2등 3등에도 오르지 못하고 계실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이 올림픽 경기에서 꼴등을 한 선수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삶의 현장을 살다 보면 내 마음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삶의 현장 언제 어디서든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연합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육체를 벗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몸을 입고, 부활과 승천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보좌 우편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는 아무도 끼어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에서 하나님이 항상 1등이듯이, 내 마음이 예수님 안에 있다면 나에게서도 하나님은 항상 1등이 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구원의 사건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며 ‘이제부터 나를 따르라’라고 십자가로 부르십니다. ‘너희 마음이 나의 몸을 입고 따라오면 나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있을 것이다. 그럴 때 몸이 어디에 있든, 누구를 만나든, 어떤 문제를 마주하든 의식이라는 무대에서는 항상 하나님이 1등을 하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이 땅에 머물러 있으면 의식이라는 무대에서 하나님은 절대 1등을 하실 수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등수는 밀려날 것이고, 있지도 않은 존재인 것처럼 여기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에서는 하나님은 저 멀리 밀어내고 교리로만 개념으로만 단어로만 생각으로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지금 저와 마주 보고 있듯이 실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마주하지 못한 채 하나님을 개념으로만 단어로만 교리로만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땅에 머물러 있는 한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땅에서 기적들을 행하셨을 때, 제자들은 그 기적을 바라보며 미래를 꿈꾸느라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에서 하나님은 몇 등인지도 모르게 밀려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취급당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다 풍랑을 만났습니다. 풍랑이 압도적이어서 어부로서 잔뼈가 굵었던 제자들조차 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저는 이 사건이야말로 성경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적이 아닐까 합니다. 죽겠다고 아우성치던 제자들과 깊은 잠을 주무신 예수님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공통점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자기들의 하나님으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이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음 상태에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28절의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의 마음은 아버지를 직면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의식 속에서는 하나님이 1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지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어떤 풍랑이 일어도 풍랑은 하나님보다 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의식 속에서 1등을 하고 계신 하나님의 크기에 비하면 풍랑은 너무나 사소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풍랑은 예수님의 마음에 걸림이 될 수 없었기에 주무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상황은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마음이 육체와 붙어있었습니다. 풍랑이 일자 마음의 의식이라는 무대에서 풍랑이 1등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풍랑이 영광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의식에서 1등으로 상대하는 풍랑이 자기들을 죽일 것 같이 몰아치니 두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돈 문제, 자녀 문제, 건강 문제가 풍랑처럼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위안이 되는 소리를 듣고자 하는데 정작 목사님은 돈 벌 수 있다, 자녀가 형통할 수 있다, 건강할 수 있다는 설교를 안 합니다. 그러자 새벽 기도라도 나와서 하나님께 문제의 해결을 바라며 기도합니다. 그러는 동안 의식이라는 무대에서 1등을 하는 대상은 돈 문제입니다. 마음에서 돈 문제가 영광을 받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그것은 아무 소용 없는 짓입니다. 그렇게 부르는 하나님의 이름은 개념이고 단어이고 교리일 뿐입니다. 실제 하나님은 세상 만물을 지으신 우주보다 더 큰 분이십니다. 하나님에 비하면 세상에서 내가 만나는 돈 문제라는 풍랑은 너무나 작습니다. 내 마음에서 하나님이 1등을 하셔서 하나님의 본래 크기의 극히 일부라도 느낄 수 있다면 삶에서 느끼는 돈 문제는 더 이상 문제로 여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풍랑 만난 배에서 제자들은 살기 위해 아우성치다 예수님을 깨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꾸짖으셨습니다. 이러한 사건과 연관하여 우리는 겨자씨의 비유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7장 20절에서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겨자씨만 한 믿음이란 단순히 작은 믿음이 아닙니다. 우주 만물보다 더 크신 하나님에게서 겨자씨만큼의 부분이라도 내 마음에서 1등의 조명을 받으실 수 있다면, 설령 산같이 큰 문제가 생길지라도 내 마음에서 문제로 여겨지지 않으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잘못 믿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는 중에 마음에서는 문제가 영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기 중에 극히 일부라도 내 마음에서 1등으로 느낄 수 있기를 바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육체로 당하는 문제들은 더는 문제가 아니게 됩니다. ‘하나님! 내가 느끼는 하나님 크기에 비하면 이 문제는 티끌처럼 작은 것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금 느끼는 돈 문제가 티끌처럼 느껴지도록 하나님을 크게 느끼게 해주시옵소서. 하나님을 많이 느끼게 해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실감하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산처럼 큰 문제조차 더는 문제로 느껴지지 않는다면 이 산을 들어 저리로 옮기는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문제를 마음속에 붙잡고 하루고 일주일이고 일 년이고 해결을 바라며 기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일년내내 그 문제가 마음에서 1등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대체 몇 등에 계시는지 알 수 없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풍랑 만난 배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1등으로 의식하심을 통해 주무셨던 것과 같습니다. 우리 몸에 어떤 문제가 있더라도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가서 하나님을 직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교리로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을 실감하면서 하나님의 크기를 점점 더 크게 느끼게 되면 이 세상의 문제는 더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가 다가왔을 때 마음에서 문제를 영광 받게 해서는 안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롯의 아내는 두고 온 것들을 돌아보다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세상 문제에서 완전히 눈을 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서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마음이 이 세상을 떠나야 하고 그 방법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마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입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을 직면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직면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실감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마주한 문제가 문제가 아니게 될 정도로 하나님을 크게 느끼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내 의식에서 1등이 되셔야 할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그러한 의식을 세상의 문제에 빼앗긴다는 것은 감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을 1등으로 의식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드러난 사건이 베드로가 산헤드린 공회에 섰을 때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산헤드린 공회에 잡히셨을 때 너무나 무서워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했습니다. 그랬던 베드로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과 승천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경험은 베드로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 충격으로 세상을 빠져나왔고, 부활의 충격으로 세상 바깥에서 하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승천의 충격으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게 되었고 예수님 안에서 실제 하나님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십자가 사건과 부활과 승천의 충격을 통해 이전과는 다른 사람처럼 되어버리고 맙니다.
이것은 마치 외국으로 출장 간 애인을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 몸은 한국 땅에 있지만 내 관심은 애인이 출장 간 외국에 가 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 또한 이러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 마음을 드리자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의 마음도 하늘로 올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후 베드로가 산헤드린 공회에 잡혀서 다시는 예수를 전하지 말라는 경고를 듣게 됩니다. 이때 베드로는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이 잡히셨을 때도 하나님은 똑같이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때 베드로의 마음에서는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 사건 이후로 베드로의 마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붙어서 하늘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베드로의 마음은 하나님을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마음이 땅에 있었기에 산헤드린 공회의 권세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에서 산헤드린 공회의 권세가 1등으로 영광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몇 등인지도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마음이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자 하나님을 직면하게 되었고 하나님이 1등으로 영광을 받으시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더 이상 산헤드린 공회의 권세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전하면 죽이겠다고 협박했지만 베드로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권세처럼 돈 문제는 권세를 갖고 우리의 마음에서 1등의 자리를 차지하려 합니다. ‘돈을 우습게 여기지 말아라! 돈 없으면 너는 망한다!’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직면한다면 더는 돈의 외침은 대단치 않습니다. 까마득하게 멀리 떨어진 소리처럼 들려오게 됩니다. 건강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몸 여기저기가 아픕니다. 건강의 외침이 너무나 크게 들렸기에 온갖 영양제를 찾아 먹으며 건강에 신경 쓰고자 했을 것입니다. ‘몸의 건강을 무시하지 마라! 장수가 최고다!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다!’라는 외침이 들립니다. 그러나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직면하자 건강의 외침이 더는 대단치 않습니다. 더는 건강이 내 마음에서 영광의 조명을 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따라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뵙자 의식에서 하나님이 찬란하게 조명을 받으십니다. 하나님 존재감이 분명하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지금 여러분께서는 설교하는 저의 존재를 분명히 느낄 수 있습니다. 실제로 눈으로 보고 있기에 존재를 느끼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존재감 또한 사실입니다.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하든 하나님의 존재감이 묵직하게 자리 잡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존재감이 자리 잡으면 몸으로 사는 삶에 무슨 일이 벌어져도 마음은 요동치지 않습니다. 내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서 하늘로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마음이 몸을 떠나 하늘로 올라간 건 좋지만 결국 삶에 돈 문제나 건강 문제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궁금증이 생길 수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내가 마음으로 하나님을 크게 느껴서 문제를 문제로 여기지 않게 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장 29절에서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고, 6장 8절에서는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장난으로 하신 말이나 그냥 하신 말이 아닙니다.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고 나면 더는 삶의 문제들이 영광 받는 것을 참을 수 없습니다. ‘감히 내 마음에서 하나님이 아닌 삶의 문제가 어떻게 1등을 할 수 있느냐!’라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싸움입니다. 생활 현장에서 돈 문제에 대해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하여 죽습니다. 그러면 마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입고 승천하여 보좌 우편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 세상 것을 좋아하는 나의 죄의 체질과 싸우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아버지! 내 마음이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게 해주시옵소서. 내 마음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서 돈 문제가 티끌처럼 느껴질 만큼 하나님을 크게 느끼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전까지는 하나님께서 손을 대고 싶으셔도 손대실 수가 없었지만 이제 비로소 하나님이 나의 문제에 손을 대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당하는 모든 문제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육체로 만나는 문제는 하나님이 다 계획하고 계시기에 기도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의 기도는 오직 예수님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이 내 마음에서 1등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크게 느끼는 것을 목적으로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럴 때 이 세상의 문제는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나가시게 됩니다. 우리가 이것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과 우리의 인식 차이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이 세상을 보고 계시는 문제를 느끼시는 크기는 우리와 다릅니다. 제가 캐나다에 있을 때 로키산맥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경험한 웅장함은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분은 로키산맥의 웅장함에 빠져 이민을 결정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비행기를 타고 로키산맥을 넘어갈 때 보면 웅장함은 온데간데없고 마치 성냥개비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로키산맥의 진정한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코앞에서 바라볼 때 느끼는 웅장함이 진실일까요? 비행기에서 바라볼 때 성냥개비처럼 느껴지는 모습이 진실일까요?
이로부터 우리가 땅에서 크다고 느끼는 문제를 하나님이 하늘에서 바라보실 때 어떻게 느끼실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문제를 작은 문제라고 여기며 계획을 세우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그 문제를 너무나 크게 받아들입니다. 하나님께는 작은 문제로 여기시며 계획을 세우신 것들에 대해 우리는 너무나 큰 것으로 여기며 마음으로 붙잡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렇게 마음으로 문제를 붙잡고 있는 상태에서는 우리가 방해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해결하실 수가 없습니다.
돈 문제를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점점 크게 느껴집니다. 마치 아이맥스 영화관에서 곤충의 세계를 보는데 벌레 한 마리가 집채만 하게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벌레의 집게만 휘둘러도 사람 열 명은 끊어버릴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실제로는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벌레일 뿐입니다. 이 세상 문제가 이와 같습니다. 내가 마음으로 붙잡고 보면 볼 수록 세상 문제는 크게 느껴져서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위에서 보실 때 그 문제는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문제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에 맞는 계획을 다 세워놓으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문제를 크게 보며 스스로 대처하고 방법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해결을 간구하며 끌어안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보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비행기를 타듯이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땅에 있으면서 보고 또 봐도 문제는 크게 느껴질 뿐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이 조그마한 문제로 여기시며 해결을 다 계획해 놓으셨는데 아무것도 하실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한경직 목사님께서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라고 말하신 이유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말로 우리는 예수를 잘 믿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십자가 생활화를 외칩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내 마음이 이 땅에 머물며 의식에서 하나님 이외의 다른 대상이 1등이 되어서 조명을 받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돈 문제가 1등인 제 마음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제 마음은 주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까지 오르신 그 길을 따라서 같이 올라가기를 바랍니다. 지금 몸으로 만나는 이 문제가 티끌처럼 여겨질 수 있을 만큼 하나님을 크게 느끼게 해주시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제 마음은 세상에 먹혀버리고 맙니다. 세상이 큰 것으로 느껴지고 맙니다. 이러한 마음이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생활 현장에서 내 마음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져서 2등, 3등을 넘어 100등으로 밀려나시는 상황은 십자가로 끝내야 합니다. 하나님을 크게 바라보는 동안 이 세상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계획이 있습니다. 그 계획은 위에서 바라보실 때 맞추어진 계획입니다. 우리가 그 문제를 크게 보면 절대로 하나님이 계획을 수행하실 수 없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예언을 하나 하겠습니다. 삶은 열심히 살고 믿음을 대충한다면 죄와 저주에 찌든 삶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믿음을 철저하게 해야 합니다. 믿음이 여러분의 직업입니다. 예수님 십자가를 붙들고 사는 것이 은퇴 없는 평생 직업입니다. 믿음이 철저할 때 삶은 완전히 공짜가 됩니다. 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까지 거꾸로 살았습니다. 삶에는 철저하고 믿음은 대충했습니다. 예배당에 등록했고, 장로고 권사니까 이제 됐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한경직 목사님께서는 97세 때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짐이란 곧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심장 옆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꽂아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에서 하나님이 아닌 세상 것이 1등을 할 때마다 ‘주님! 나는 주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항상 십자가를 짊어지는 삶이고, 예수님의 죽음을 항상 짊어지는 삶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고백하는 자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아무쪼록 예수님을 따르는 이 길에 오류가 없기를 바랍니다. 몸은 각자의 처소에 있을지라도 마음은 전부 예수님 십자가에 와서 함께 머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야고보 장로님은 세상과 가까우면 하나님과 적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과 가까운 바람에 하나님도 잃고 세상도 잃어버렸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하나님을 영광의 자리에 모심에 실패가 없게 하시고, 세상일은 아버지의 계획이 철저히 방해받지 않고 다 이루어져서 공짜로 사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 마음과 뜻과 힘은 온전히 주님의 몸을 입고 하나님께만 다 쏟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