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시작과 끝이 4성제라는 주장을 이제는 종종 듣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4성제 대한 법문이나 설명은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불교의 시작과 끝이 4성제인가요?.
4성제가 불교의 시작이요 끝이라면..
4성제만 공부하고 실천하면 불교는 완성된다고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말하는 불교의 시작은 여기서부터 해야 할 것 같습니다.()^^.
4성제 내용인 고.집.멸.도는 불교의 시작이요 끝이므로..
석가세존께서 유일하게 성스러운 진리[聖諦]라고 이름한 유일한 것이라고 합니다.
4제인 고,집과 멸,도는..
세상은 고(苦).. 괴로움이다. 그 괴로움은 어떻게 생긴 것인가?..
그 원인은 댐에 물이 모여 고여 있듯.. 괴로움이 모여 있기[집, 集] 때문이다.
이렇듯 괴로운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목표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모든 괴로움은 멸할 수 있다.. 그것을 열반이라고 한다.
열반에 이르는 길이 있는가?. 그렇다. 8정도와 같은 수행을 하면 멸할 수 있다.
이렇게 4성제는 내가 처한 상황과 내가 갈 길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는 겁니다.
즉 세상은 고해다라는 것은 세계관이요, 8정도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은 인생관이 됩니다.
그런데 세상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뉴스를 보더라도 타이틀만 볼 뿐 그 내용은 자세히 보지 않아요. 관심이 있는 게 아니면..
세상은 불교를 말할 때.. 불교는 세상을 고해라고 하더라.. 고만 알 뿐!입니다.
고해를 벗어난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는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부처님처럼 고해에서 벗어난 삶이 되자는 것이지.. 괴로움 속에 헐떡이며 살자는 종교가 아니잖아요.^^
그러나 불교를 시샘하는 자들과 이웃 종교는..
불교의 열반은 말하지 않으면서.. 불교는 세상을 고해라고 가르치기에 세상을 떠나라고[출가]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아요.
그리고 바쁘게 사는 일반인들은 불교는 세상을 비관으로 보는 출가주의라는 인식을 하고..
그와 같은 인식은 지금도 별로 바뀌지 않고 있지요.
이와 같은 개인적인 출가주의 불교를 반성하면서 극복하려고 나온 불교가 무엇일까요?.
바로 대승불교입니다.()^^.
대승불교가 바라본 지점은 자신의 고통이란 현실의 고와 불자의 목표인 멸보다 그 과정에 있는 사회입니다.().
대승불교는 가세 가세 모여서가세.. 아제 아제 바라승아제.. 하듯 개인이 아닌 우리를 강조합니다.
대승불교에 등장하는 모델은 누구입니까?.
제일 먼저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님이 떠 오릅니다.^^().
아미타불의 48서원 첫번째는 "내 불국토에는 지옥 아귀 축생 등 삼악도의 불행이 없을 것" 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바로 지옥이요, 아귀 세상이요, 축생들이 설치는 새상 아닙니까?.
관세음보살님은 이 세상을 변화시켜 아미타 세상인 극락으로 만들겠다며 지금도 실천하고 계신 분입니다.().
두 번째는 "중생이 아프니 내가 아픕니다" 라고 하신 분이시고..
세 번째는 "아미타불만 염불하면 극락간다"고 하신 우리 선배이신 원효스님이십니다.()^^.
이렇게 가르치고 실천하는 게 대승불교입니다.
그렇다면 대승불교에서는 4성제를 어떻게 보는 게 됩니까?.
고제 : 세상은 온통 괴로움에 빠져있다.
집제 : 그 이유는 탐욕이 주인이 되어 서로를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멸제 : 그런 사회는 극락으로 바꿀 수 있다.
도제 : 보시, 지계, 인욕, 정진 등 여섯 보살행을 통해
대승불교에서는 개인 자신이 아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무대로 삼고 있는 겁니다.
우리 불교는 15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대승불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말한 대승불교 모습[보살행]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곧 말과 실천이 다른 불교였다는 겁니다.
왜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