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하우스 1-4화. 너무나 글로벌한 동네, 이태원을 접수하다.
영어 강사 파티 때 만난 강사들과는 학원에서 만나면 친구처럼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주고받았다. 하루는 잘생긴 영국인 강사 아더를 만났다. 아더는 역삼 YBM에서 내 레벨 테스트를 했던 선생님이기도 했다.
“Hi, 아더!”
“새봄, 내 생일파티가 있는데 오후 6시까지 학원 앞으로 와요.”
헉! 잘생긴 영국인 영어 강사가 내게 생일파티 초대를 하다니.
나는 들뜬 마음에 당연히 가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심사숙고 끝에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는 그를 위해 한국어 교본과 조그만 화분을 선물로 샀다. 설레는 마음을 감추며 학원 앞으로 갔더니 웬걸, 아더의 학생들 대여섯 명이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내심 나에게 사심이 있나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흑흑.
어쨌든 우리는 근처의 와인 삼겹살집으로 향했다. 처음에 모인 사람들은 열 명 정도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인원이 불었다. 아더의 각국 출신의 친구들과 수업이 끝난 후 온 다른 영어 강사들로 인해 스무 명도 넘는 인원이 삼겹살에 상추쌈을 싸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외국인 수가 많아지니까 아더의 학생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레벨 3씩이나 되는 학생들이었음에도 모여드는 외국인들에게 겁을 먹었는지 밥을 먹자마자 부랴부랴 나가기 바빴다. 집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던 나는 한국의 삼겹살집에 이렇게 많은 외국인들이 모여 밥을 먹고 있는 현실이 신기해 짧은 영어로 계속 대화를 주고받으며 상황에 충실하기 바빴다. 모델처럼 멋진 아더의 독일인 친구를 감탄의 눈초리로 쳐다보면서 말이다.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내가 ‘우물 안 개구리’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나보다 한참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몇 개국의 언어를 구사하는데 나는 그동안 뭘 하며 살았던 말인가. 그들 속에 있으니 지구 위의 수많은 나라 중에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만 일평생을 살아온 내가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졌다.
‘아아, 이래서 영어를 배워야 하는구나.’ 나는 상추쌈을 입에 넣으며 생각했다. 더욱 영어를 파고들겠다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식후 우리는 근처의 어느 바(bar)로 자리를 옮겼다. 바에는 이미 아더의 또 다른 친구들이 한 무리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이 자주 쓰는 ‘more people more fun’처럼 친구의 친구, 그 친구의 친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사람들 속에서 과연 몇 명이나 아더를 알고 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모두들 간단히 자기소개를 한 뒤 맥주를 마시고 떠들었는데 그룹 속에 끼어 있는 사람 중(한국인도 몇 있었다) 유일하게 나만 영어를 못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나는 내 옆에 앉아 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온, 사람 좋아 보이는 은행원들과 주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의 영어도 내 영어만큼이나 참으로 이상했다. 서로 각국의 억양이 섞인 영어로도 웃고 재미있게 대화를 나눴다는 것이 오히려 더 희한했다.
그날 마지막 행선지는 이태원의 클럽으로 정해졌다. ‘춤도 못 추는데…, 밤도 늦었는데…, 영어도 힘들고…, 이쯤에서 그냥 집에 갈까?’라며 잠시 갈등을 했다. 그러나 결국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클럽에 대한 호기심에 못 이겨 순순히 그 대열에 합류했다.
이태원에 발을 내딛는 그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서울의 여느 거리와 전혀 다른 낯선 분위기, 영어 간판들. 길거리에는 흑인과 백인들. 아랍계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식당 안에는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들이 음식을 먹고 있었다.
나는 너무 놀라 스콧 할아버지에게 소리쳤다.
“맙소사! 스콧, I can’t believe we’re in Korea!”
10년 넘게 서울에 살면서 이런 곳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나는 외국에 온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사방을 둘러보며 일행을 따라 걸었다.
클럽에 도착해서 보니, 클럽 안은 더욱 굉장했다. 세상에나 여기가 정말 한국인지 미국인지. 마치 순간 이동을 해서 미국에 온 것 같았다. 지저분한 클럽에다 지저분한 화장실은 요즘 보기 드문 남녀 공용이었고, 춤추는 사람들 모습 또한 가관이었다. 더티 댄싱인지 살사 춤인지 에로틱한 포즈로 춤을 추고 있는 남녀가 홀에서 흐느적거렸고, 머리를 삐삐처럼 양 갈래로 묶은 젊은 백인 여자가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고 있었다.
구석에는 양복을 점잖게 차려입은 나이 지긋한 백인 남자가 혼자 팔을 흐느적거리며 브레이크 댄스를 추고 있었다. 70년대풍으로 잔뜩 멋을 부렸지만 전혀 효과적이지 않은 한국인 아줌마도 보였다. 그 아줌마는 묘한 분위기를 발산하며 요염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카우보이모자를 쓴 백인 할아버지는 춤을 추며 다가와 나에게 빨간 장미꽃 한 송이를 건네기도 했다. 더 이상한 건 춤도 추지 않으면서 춤추는 사람들 틀에 서서 맥주를 마셔가며 시끄러운 음악에 상관없이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었다. 텅 빈 테이블과 의자도 많은데 말이다.
클럽의 분위기도 이국적이고 이상했지만, 가장 희한한 것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게다가 춤추는 사람들 사이를 휘젓고 다니며 꽃 파는 아주머니까지. 아, 정말 알 수 없는 곳이었지만 어쨌든 구경하는 재미에 나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새벽까지 다소곳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새봄, 피곤해요?”
함께 간 일행이 나에게 피곤하냐고 물었다. 춤은 안 추고 계속 앉아 있기만 하는 내가 이상하게 보였나 보다. 하지만 나는 그 속에 들어가 춤추는 내 모습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그들 사이에 들어가 춤을 추기엔 나의 개성이 너무 약했다).
그날 받은 충격은 지금까지도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다. 그 뒤로 나는 몇 번 더 한국인 친구들과 이태원의 레스토랑, 커피숍에 가서 그곳의 이국적인 풍경을 구경하기는 했지만, 이태원은 정말 한국인 친구들과는 잘 가지 않는 곳이다. 친구들이 낯선 이태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글로벌 하우스 1-5화. 레벨은 여전히 9. 쪽팔려서 학원을 때려치우다.
드디어 영어학원에서 한 달을 보냈다. 하지만 내 영어 실력이 다 드러난 뒤여서 역삼 YBM 원어민 강사 반을 다시 신청하려고 하니 눈총이 따가워서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 나도 일말의 양심은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다시 강남 YBM에 레벨 테스트를 받으러 갔다. 이번에는 좀 나아지지 않았겠어?
그러나 이번에는 레벨 9도 안 된다는 진단이 떨어졌다. 세상에 나! 도대체 한 달 동안 그 많은 외국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쌓은 내 영어 실력은 다 어디 갔단 말인가.
질문을 이미 알고 있었고, 조금은 자연스럽고 유창하게 말할 수 있다고 내심 믿었는데 같은 결과가 주어지니 나는 충격을 받았다. 이번에는 내가 너무 횡설수설했나? 학원을 나오다가 길거리에서 우연히 스콧 할아버지를 만났다. 나는 잔뜩 울상을 지으면서 스콧에게 물었다.
“스콧, I don’t even deserve level 9.”
“무슨 소리, 그들이 새봄의 실력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거야. 새봄은 레벨 9는 충분히 되는 실력이야.”
하지만 위로해 주는 스콧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더욱 풀이 죽었다. 난 내심 레벨 3 정도는 되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이다. 역시, 외국인에게 말을 잘 거는 거랑 영어 실력은 상관이 없는 게 틀림없어. 단어, 문법, 어휘가 달리는데 수업 시간에 어떻게 따라갈까?
결국 나는 영어학원을 한 달 만에 그만두기로 했다. 한국인 선생님에게 영어를 배울 바에는 차라리 인터넷 영어교육 사이트에서 공부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영어교육 사이트를 찾아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우연히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학당 사이트를 알게 되었다. 그곳 게시판에는 한글을 배우고 싶어 하는 외국인들의 글이 많이 올라와 있었다.
내친김에 나는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이 접속하는 영어 사이트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에서 일하는 영어 강사들의 커뮤니티 사이트, 영자 신문의 게시판들, 외국인을 초청하는 한국의 홈스테이 사이트들, 게스트 하우스와 한국 정보 영문 사이트 등을 찾아냈다. 거기 올라온 글들이 영어책을 읽는 것보다 훨씬 더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내 직업이 홈페이지 관리하는 일이라 직업상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을 때가 많다. 나는 시간 날 때마다 이런 사이트에 접속해 게시판 글을 읽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우리나라에 사는 외국인들끼리 정보를 교환하거나 한국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올리기도 하고, 집을 구하는 글, 룸메이트를 구하는 글, 한국인 친구가 필요하다는 글들이 올라와 있었다. 내가 자주 들르는 곳 가운데 첫 번째가 코리아 헤럴드 사이트였다. 그 당시 내가 찾아낸 사이트 중 가장 활성화된 곳이었다. 그리고 조선일보 영자 신문,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 영어 강사들의 홈페이지 게시판(www.englishspectrum.com), 외국인 여행객을 위한 몇몇 한국 게스트 하우스 홈페이지 게시판을 자주 들락거렸다.
그들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절로 웃음이 날 때가 있었다.
“한국의 보통 사람을 만나고 싶은데 이렇게 어려울 줄 몰랐어요.”
이런 글에서부터 시작해서 한국어를 가르쳐줄 사람을 찾는 외국인의 글, 각종 정보를 교환하는 글, 매주 모여 인생 이야기를 하자는 무슨 클럽 사람들, 비흡연자의 깨끗한 룸메이트를 찾는 사람, 20년 전에 헤어진 어머니를 찾는 해외 입양아, 비행기에서 만났다 헤어졌는데 연락이 안 되는 친구를 찾는 사람, 한국의 역사를 공부하며 한·중·일을 구분하는 진지한 외국인까지. 물론 그 글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문장 구성도 익히게 되고, 정말 궁금한 내용은 단어도 찾아보게 되니 나날이 읽은 속도가 빨라졌다.
특히 가장 재밌었던 건 한일 월드컵 시즌, 한국에 있는 사람이라면 외국인이건 한국인이건 모두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 있을 때였다. 외국인 친구들과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거리 응원을 나갔던 것도 기억에 남는 일이었지만 게시판에 올라오는 글 때문에 흥분하고 싸운 기억도 잊을 수 없다. 이때만큼은 모두 자기 나라 편이었고, 심판의 편파 판정에 감정이 상한 외국인이 한국을 비난하는 글도 자주 올렸다. 나도 거기에 대응하는 댓글을 올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영문 홈페이지 게시판에 한국을 비방하는 외국인들과 싸웠다.
“한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쉬운 영어도 못 하는 무식한 놈이다.”
감정이 극도로 예민해진 외국인들이 월드컵과 전혀 상관없는 이런 글을 올리면 나도 분개해서 바로 글을 올렸다.
“무식한 것 바로 너희들이다. 세계에서 가장 쉬운 한글이라는 사실을 세계의 언어학자들이 다 인정했다. 세계에서 문맹률이 가장 낮은 나라도 한국이다.”
그러면 내 글을 읽은 외국인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공격성 짙은 글들을 무수히 올렸다. 나는 분노에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 밤새도록 맞받아쳐 줘야 했다. 그들이 몇 초도 안 걸려 금방 글을 올리면 영어 초짜인 나는 몇십 분을 끙끙거리며 간신히 몇 줄을 적어 올렸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각국의 국민성도 엿볼 수 있었고 나름대로 즐거운 경험이었던 것 같다.
글로벌 하우스 1~6화. 외국인 친구들과 채팅으로 수다를 떨어볼까?
어느 날, 친구가 ICQ(www,icq.com)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외국인과 채팅하는 걸 목격한 나는 그날로 동생을 졸라 내 컴퓨터에 ICQ를 설치했다. ICQ의 장점은 전 세계의 ICQ 사용자 검색 기능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라크를 검색하면 이라크에서 접속하고 있는 사람들을 확인할 수 있고, 그들의 나이나 사는 지역, 성별을 선택해 말을 걸 수 있다.
나는 지구본을 컴퓨터 옆에 놓고 흥미로운 나라들을 찾아서 접속자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가나를 검색하면 가나에서 ICQ에 접속해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있는지 알 수 있다. 접속해 있는 사람에게 “Hi”하고 메시지를 보내면 그중 한두 명은 “Hi, Who are you?”하고 되묻는다. 나는 한국인이라고 대답하고 가나라는 나라에 관심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반가워하며 이것저것 질문을 하고 우리는 어느새 친구가 되어 신나게 이야기한다.
영어 실력이 좀 달려도 걱정 없다. 야후나 네이버에 엄청나게 좋은 영어, 한영·영한 사전이 있으니까. 컴퓨터 왼쪽에는 사전을 띄우고 오른쪽에는 채팅 창을 띄워서 내가 원하는 단어를 검색해서 보내고, 상대방이 보낸 모르는 단어는 바로 해석하면서 이야기하면 된다. 문법이 틀려도 서로 단어로 이해한다. 그렇게 해석하고 천천히 대화해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은 없다.
실제로 나는 영어를 시작한 지 몇 달 만에 ICQ 채팅을 했는데 문법이 꽝이어도 밤새도록 깔깔거리며 이야기를 나눴다. 게다가 채팅하다 보면 기본 문장 정도는 간단히 익히게 되고, 실력이 엄청나게 늘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상대가 했던 표현을 내가 다른 사람에게 구사하면서 반복 연습을 하고, 밤새도록 채팅한 내용을 읽고 또 읽으면서 내용을 외우다시피 했다. 수많은 나라 사람과 채팅한 내용을 인쇄해서 지하철에서 읽으면서 혼자 킥킥댄 적도 많았다. 지구본을 옆에 두고 그들과 얘기하는 동안 007의 제임스 본드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지구는 그다지 넓지 않다.”
아, 얼마나 멋진 경험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