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영호 전 영국주재 북한공사는 지난 5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가장 두려워하는 종교는 기독교라고 말 한 바 있다.
"김일성이 기독교 집안 출신이라 기독교 속성을 너무 잘 안다. 기독교를 그대로 두면 권력 세습을 이어갈 수 없다는 걸 알았던 것이다"고 그는 말했다.
북한 당국은 북한에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하지만, 탈북자들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종교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면 가혹한 형벌을 받는다고 한다.
지난 2월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스포츠, 문화,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남북 간 교류의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스포츠 분야에서는 단일팀이 만들어지고 농구 등에서 친선경기가 있었고, 한국 공연이 북한에서 열리고 북한 공연도 한국에서 열렸다.
또 개성 만월대 유적 발굴에 합의했으며, 개성의 남북연락사무소도 지난 14일 개소했다. 하지만 종교는 제외됐다.
기독교인이 세운 정권이 어쩌다 기독교를 억압하게 됐나?
인연의 시작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 평양 교외 농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형직은 초등학교 교사로 선교 활동을 했다. 어머니 강반석도 신자였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따라 북만주 길림성으로 건너갔는데, 여기서 그는 정동제일교회 제6대 목사를 지냈던 손정도 목사를 만났다.
손정도 목사의 자녀들은 김일성과 형제처럼 지냈다. 이 시기 김일성에 대해 묻고자 손정도 목사의 장손자인 손명원 씨를 만났다.
그는 BBC 코리아에 "김일성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버지의 학교선배였던 할아버지께 찾아왔다고 들었다"며 "가족같이 지내면서 (김일성이) 교회도 열심히 나왔다"고 회상했다.
특히 손 목사의 둘째 아들 손원태와 김일성은 전쟁놀이를 하며 친하게 지냈다. 이 둘은 김일성이 죽기 3년여 전 평양에서 만났다. 당시 김일성은 손정도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손명원 씨는 "당시 평양은 기독교의 원산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선교사들이 많이 와서 선교를 했다"며 "세례를 받은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 평양에서부터 김일성의 가족은 기독교와 깊은 연관이 있었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추후 "손정도 목사님은 비록 사상은 달랐지만, 참으로 민족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더 이상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 것이다. 정확히 어느 시점에 그가 신앙을 버렸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김일성이 손정도 목사 기념사업회를 하라고 명했다고 손명원 씨는 말했다. 2003년 손정도목사 남북학술토론회가 북한에서 열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산주의의 종교관에 따르면 '종교는 아편'이라고 규정한다. '북한이 목사를 기념한다는 것이 이상하다'라는 질문에 손명원 씨는 "사회주의지만 결국은 인간이기 때문이지 않을까"라고 답했다.
북한의 '목사'
태영호 공사에 따르면 북한은 전쟁 후 예배당을 대대적으로 부수며 기독교를 탄압했다. 이유는 김일성을 신격화하기 위해서였다. 2000년 6월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북한교회재건위원회가 파악한 북한의 무너진 교회 수는 3천여개다.
하지만 김일성 일가와 기독교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김일성의 친척(외삼종조부)인 강량욱 목사가 조선그리스도교연맹(조그련)을 창립했고 3대가 수장직을 맡아 현재는 손자인 강명철 목사가 위원장이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에서는 조그련을 기독교로 보지 않는다.
갈렙선교회 김성은 목사는 BBC 코리아에 "(한국 기독교에서는) 목사는 규정에 의해 목회에 안수가 돼야 하는데 조그련 소속 목사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외부에 종교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선전하려고 교회도 세우고 예배와 찬양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진짜 신도가 생기기도 했다고 태영호 공사는 밝혔다.
태 공사는 "1980년을 고비로 평양에는 봉수교회와 장충성당을 건설했다. 봉수교회나 장충성당 근처에 거주하는 '빨갱이 여성들'을 뽑았다"며 "시늉만 하던 이들이 믿음이 생기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예배 시간 전부터 교회나 성당에 나오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썼다.
이에 당국은 '진짜 신도'를 체포했고 더 이상 교회나 성당을 세우지 않기로 했다. 한국 기독교에서도 북한에는 기독교 신자가 많지 않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북한인권정보센터 부설 북한인권기록보존소의 '2015 북한종교자유 백서'에 따르면 1997년 이후 탈북자부터 2015년 탈북한 응답자 1만183명 중 1만146명(99.6%)이 북한에서는 종교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없다고 응답했다.
20여 년째 '탈북 선교'를 하는 김성은 목사 역시 북한 내 기독교 신자는 "정말 소수의 인원이다"라고 말했다. "죽음을 각오하고 신앙을 지키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덧붙였다.
북한에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기독교 목사나 신자는 소수라 할지라도 성경을 접한 이들은 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인권기록보존소에 따르면 2000년 이전 탈북자 중 성경을 본 경험이 있는 이들은 9명에 불과했지만, 이 후 탈북한 이들 가운데는 424명이 성경책을 접했다고 답했다.
하지만 김정은 위원장이 집권 후 '기독교를 접촉한 주민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해 중국에서도 탈북 기독교인을 체포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고 한다.
'탈북 사역'
탈북자들의 대다수는 기독교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북한을 탈출한다. 일각에서는 탈북자의 90%가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한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도 교회의 도움을 받는 경우가 많다.
한국 내 탈북자 모임이 있는 대형교회가 20여 곳이 있으며, 탈북자를 중심으로 모인 교회도 10여 곳이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딜레마도 있다고 '북한 사역'을 하는 한국 목사들은 지적한다.
탈북자 중 일부는 한국에서 신학교를 다니며 북한 주민 혹은 탈북자를 대상으로 선교 사역을 할 것을 다짐한다. 하지만 선교 사역이 고되고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하는 것은 간과하고 뛰어드는 경우도 있고 결국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김성은 목사는 일부 탈북자들은 "탈북 과정에서 선교사로부터 물질적 도움을 받기 때문에 '선교사는 돈이 많고 주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며 이로 인해 탈북자가 선교 사역을 하려 할 때 만류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저희가 데려온 사람이 저희를 제일 미워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그는 말한다.
'교류 있을 것이다'
반면, 북한이 반긴 목사도 있다. 바로 미국의 빌리 그레이엄 목사다.
1992년 서양 목사로는 최초로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그레이엄 목사의 아내인 루스 그레이엄이 평양 외국인학교에 다닌 인연으로 북한이 먼저 그레이엄 목사 부부를 초청한 것이다.
당시 그레이엄 목사는 성경책과 자신의 저서를 김 주석에게 선물했으며, 2년 후 다시 평양을 찾았다.
인연은 인도적 지원으로 이어졌다.
그레이엄 목사의 아들인 프랭클린 그레이엄 목사는 '사마리아인의 지갑'이라는 대북지원 민간단체를 만들었고, 방북 당시 그레이엄 목사의 통역을 맡았던 드와이트 린튼 목사의 집안 역시 대북지원단체를 설립해 인도적 도움을 주고 있다.
종교적 교류가 지원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일각에서는 남북 간 종교 교류도 조만간 활발히 이뤄질 것으로 본다.
북한이 헌법에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한 것은 국제적 관계를 염두에 둔 것도 있지만 종교 교류를 원천적으로 차단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다는 의견도 있다.
아울러 일부 목사를 탄압하는 것은 입국한 허가 조건과 다른 활동을 해서 탄압한다는 점에서 중국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고 이우영 북한대학원대학교는 밝혔다.
북한과 중국은 '종교 비자'를 발급하지 않고 있는데 '사업 비자'와 같은 비자를 받고 탈북을 돕고 탈북자들에게 선교를 하는 것은 북한과 중국의 입장에서는 불법적 행동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BBC 코리아에 "북한도 실리를 중시한다"며 "옛날에는 기독교를 '반미'와 연결지어 (탄압을) 강조했지만, 종교적 교류는 지원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고 현실적 필요에 의해서 교류를 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