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과 지혜
희랍말 '필로소피아'는 '필로스'와 '소피아'가 결합되어 이루어진 말이다. 소피아는 지혜를, 그리고 필로스는 사랑을 뜻한다. 그러나까 '필로소피아'는 지혜에 대한 사랑이다.
고대 동.서양의 학문에 대한 태도는 서로 엇비슷하긴 해도 고대 희랍에서 특히 보다 엄밀한 학문적 태도가 미리 성립하였다고 볼 수 있다. 고대 희랍의 식인들은 사물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가 무엇인지, 그리고 사물들이 어떻게 해서 생기는지 또한 세계의 구성은 어떻게 되었는지 등에 대해서 예리한 통찰력을 가지고 깊이 탐구하였다.
특히 플라톤 같은 철학자는 편견(그릇된 지식)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참다운 지식이 무엇인지 구분하려고 하였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변화하는 대상은 어떤 것으로서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불변하는 참다운 것은 무엇인지에 관해서 탐구하였다.
지식이란 우리의 아는 능력(인식능력)과 대상이 만나서 우리 안에 생기는 앎이다. 우리는 새로운 대상과 환경에 접하고 적응하면서 지식이 쌓이는 것을 경함한다. 지식이 무엇이고 어떻게 지식이 성립하느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입장이 있으나 철학의 역사에서 두드러진 입장들은 경험론과 합리론의 두 이론이다. 경험론은 17세기 영국에서 발전하였으며 이 입장을 대변하는 철학자들은 베이컨, 로크, 흄 등이다. 이에 비하여 합리론은 마찬가지로 17세기 영국에서 발전하였으며 이 입장을 대변하는 철학자들은 베이컨, 로크, 흄 등이다. 이에 비하여 합리론은 마찬가지로 17세기에 주로 대륙(독일, 불란서, 네덜란드)에서 발전하였고, 그 대변자는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이다.
경험론과 합리론이 취하는 지식의 이론을 우리는 인식론이라고 부른다. 이들 두 경향은 주로 "인간은 어떤 능력에 의해서 대상을 아는 것인지, 그러한 앎(지식)은 변하는 지식인지"의 문제에 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경험론에서는 우리가 오직 감각경험에 의해서 대상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흄 같은 철학자는 지각에 의해서 지식이 설립한다고 말한다. 지각은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 우선 감각에 의해서 우리는 대상에 대한 생생한 인상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인상이 차차 희미해지면 소위 관념이 된다.
장미꽃의 예를 들어보자. 내가 눈으로 장미꽃을 보는 순간 나에게 직접 생기는 것은 장미꽃이라는 관념이 아니라 장미꽃의 모습이다. 제일 먼저 나에게 남는 것은 가시 달린 초록빛 줄기와 잎, 그리고 검붉은 꽃잎들이다. 이 모습이 점차 사라지고 내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나에게 남는 것은 '장미꽃'이라는 관념이다.
좀더 간단히 말하면 1.나는 어떤 대상을 감각으로 대하여 그 대상에 대한 생생한 인상(모습)을 얻게 되고 2.생생한 인상이 희미해지면 그 대상에 대한 관념을 가지게 되며 관념은 바로 대상에 관한 나의 지식으로 성립한다. 흄에 의하면 우리들의 복잡한 지식도 모두 인상 및 관념의 획득과 마찬가지로 성립하며, 가장 복잡하고 추상적인 지식은 기껏해야 관념들의 연합 또는 우리들의 습관에 의해서 얻어진다고 한다.
이러한 흄의 입장은 학문적으로 귀납범을 근거로 삼는다.
귀납법이란 오늘날 자연과학에서 사용되는 대표적인 방법이다. 예컨대 수소원자 두 개와 산소원자 한 개가 화학적으로 합치면 물이 된다. 이 실험을 계속해서 결국 H2O라는 식을 얻게 된다. 또는 개별적인 관찰에 의해서 일반적인 원리에 도달할 때 다음과 같은 예를 들 수 있다.
"김씨가 죽었다. 이씨도 죽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결국 죽는다."
간단히 말해서 경험에 의해서 개별(특수) 사실들을 관찰, 실험하여 일반적인 결과 내지 원리를 추리할 때 그러한 방법을 귀납법이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합리론은 경험론과 정반대되는 입장을 취한다. 합리론의 아버지로 부리우는 데카르트 같은 철학자는, 인간에게는 대상을 참답게 알 수 있는 능력으로서 이성이 있다고 믿는다. 이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수학과 같이 불변하는 진리를 알 수 있다. 자연현상도 멋대로 변화하며 오직 감각대상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고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며 자연의 변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자연법칙 내지 자연의 원리가 있고 그것을 아는 것은 인간의 이성이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하여 이성적인 자아(나)가 가장 명료한 철학의 제1원리이고 이것으로부터 수학의 명제와 신의 존재가 불변하는 관념인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합리론자들이 보는 감각경험은 무엇인가? 합리론자들도 감각경험을 전혀 무의미한 것으로만 보지는 않는다.
감각경험은 단지 불확실한 지식을 전달해준다고 보는 것이 합리론자들의 견해이다. 따라서 합리론자들은 경험론자들과 달리 대상에 대한 절대적 지식, 곧 진리를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합리론자들의 지식이론은 소위 연역법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연역법은 일반적으로 수학이라든지 또는 신학이나 철학에서 흔히 사용되고 있는 학문의 방법론이다. 일반적인 원리나 법칠을 근거로 삼고 그것을 개별 상태에 적용하는 것이 연역법의 방법이다. 한두 가지 예를 들어보자. 신은 전지전능하여 만물을 창조하였다고 한다면 자연은 물론이고 인간 역시 신의 창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창안한 삼단논법에 의한 추리는 보텅 연역법에 의한 추리이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연역추리를 볼수 있다. : 모든 삼각형은 세 변과 세 각을 가진다. 이 도형은 삼각형이다. 그러므로 이 도형도 역시 세 변과 세 각을 가진다.
경험론의 지식이론과 합리론의 지식이론은 근세로부터 오늘까지 서로 대립되는 경향을 보여왔지만, 독일 철학자 칸트와 같은 사람은 경험론과 합리론을 종합하여 지식이론을 성립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런가 하면 쇼펜하우어나 베르그송같은 철학자들은 경험론과 합리론 모두를 거부하고 직관력에 의해서 직관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으며 그러한 지식만이 참답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우리들이 상식의 차원에서 보면 우리는 경험과 아울러 이성에 의해서 지식을 획득하며, 반성과 비판에 의해서 지식의 잘못을 수정하면서 지식을 증대시켜 나간다.
그렇다면 지식은 무엇이고 지혜는 무엇일까? 이들 두 가지는 어떤 점에서 같고 또 어떤 점에서 서로 차이나는 것일까?
학문은(철학도 마찬가지이지만) 1차적으로 지식을 목적으로 삼는다. 우리들이 수학을 배울 때 우선 목적으로 삼는 것은 수학적 지식이다. 그렇다면 지식이란 특정한 대상에 대한 앎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마찬가지로 생물학을 배울 때 우리가 목적으로 삼는 것으 생물세계에 관한 지식의 획득이다. 우리는 수학에 관한 지식이니 생물에 관한 지식이니 하는 말을 써도 그것들에 대하여 지혜라는 말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지식은 우선 부분적인 앎이다. 우리는 기술에 대한 지식, 정치에 대한 지식, 경제에 대한 지식 등의 말을 자주 쓴다. 다음으로 지식은 생활에 사용할 수 있는 앎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하여 특정한 앎을 가지는 것은 앎 그 자체로 만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앎을 실생활에 사용하려는 목적의식 때문이다. 따라서 지식은 대부분의 경우 유용성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은 때와 장소에 따라서 쉽사리 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깊은 사고와 오랜 역사를 통한 성찰에 의해서, 변하지 않고 보편성을 지닌 앎을 얻으려고 노력하여 왔다. 모든 학문들과 아울러 철학은 1차적으로 지식의 습득을 목적으로 삼았지만 근본적으로는 지혜의 획득을 목적으로 삼는다. 지식과 지혜를 딱 부러지게 한마디로 구분하기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 지식은 지혜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자에 나오는 백정의 예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장자에게 찾아와 도가 어떤 것인지 물었다. 장자는 그 사람에게 백정 이야기를 해주었다.
젊은 백정이 푸줏간에서 처음 일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매일 주인에게 꾸지람을 들으면서 비지땀을 흘렸다. 돼지나 소를 앞에 놓고 뼈에서부터 살을 발라내는데 수시로 칼이 무디어 졌고 벼에는 항상 살이 듬뿍 붙어 있었다. 젊은 백정은 그러기를 3년이나 하였다. 그러나 주인은 여전히 불만투성이었다.
"이 사람아, 칼이 그렇게 자주 무디어지고 살과 뼈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면서 자네가 어떻게 큰소리로 고기를 다룬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젊은이는 꾸중을 들으면서 그래도 열심히 일하였다. 그러기를 또 3년 이상 하였다. 이제 어느 정도는 고기 다루는데 자신감이 생겼다.
"주인님, 저도 이젠 이 정도면 고기를 제법 다루는 것 아닙니까?"
주인은 쳐다보지도 않고 콧방귀를 뀌었다.
"자네는 아직도 며칠에 한번씩은 칼을 가는 것을 내가 알고 있네. 아직 멀었어. 잔소리 말고 고기나 다루게."
젊은이는 낙담하지 않고 기운을 내어 다시 열심히 일하였다. 젊은이도 이제 나이를 먹어 어느덧 중년이 되었다. 그 사이에 주인은 세상을 떠나고 중년이 된 젊은 백정이 주인자리를 물려받게 되었고 새 주인은 조수로 한 청년을 고용하였다.
새 주인은 10년이상 고기를 다루어 왔고 이제는 자신이 고기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을 때가 많았다. 조수 청년이 고기 다루는 주인을 바라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주인님, 주인님은 뼈에서 살을 발라내는데 어쩌면 칼이 뼈에 부딪치는 소리가 전혀 나지 않습니까? 칼이 뼈와 살 사이를 교묘히 피해다니는 것 같습니다. 주인님은 고기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마치 칼을 가지고 춤추는 것 같습니다. 주인님이 고기를 다루면 칼이 무디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칼날이 더욱 예리해지고 번쩍이니 주인님이야말로 고기의 도를 다 깨친
분이십니다."
물론 젊은 백정이 처음 푸줏간에서 일할 때는 돼지나 소의 해부학적 구조나 칼을 다루는 방법 등에 대한 부분적인 지식을 충분히 배우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다. 이러한 지식이 쌓이고 거기에다 세월이 흐르고 젊은 백정의 인내와 노력이 가미되어 돼지나 소와 한몸이 되어 칼춤이 가능했다고 불 수 있고 젊은 백정의 이와 같은 경지는 기히 지혜의 경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지식과 지혜는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 그리고 지식은 부분적인 앎이며 생활에 유용한 앎이 지만 지혜는 그러한 차원을 넘어선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앞에서 우리는 '필로소피아'가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살펴보았다. 철학(필로소피아)의 1차적인 목적도 물론 지식의 습득이지만 근본적인 목적은 지혜의 획득이다. 그러므로 철학의 좁은 의미는 지식에 있고 넓은 의미는 지혜에 있다고 말하 수 있다.
우리는 자주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을 수 있다.
"사람은 올바른 인생관을 지니고 병확한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
이때 인생관이니 세계관이니 하는 말은 인생에 대한 지혜 그리고 세계에 대한 지혜를 뜻한다. 인생이니 세계니 하는 것은 전체를 말한다. 전체에 대한 앎이 바로 지혜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르게 말하자면, 지식을 갈고 닦으면 지혜가 된다고 말 할 수도 있다. 불교에서 "돈오점수"라는 말을 쓴다. 돈오란 문득 깨닫는다는 뜻이요, 점수란 말 그대로 점진적으로 또는 쉬지 않고 닦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거울을 한번 깨끗이 닦으면 그 거울이 언제나 깨끗하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사이에 거울을 얼룩지고 때와 먼지가 앉기 마련이다. 정성들여 쉬지 않고 닦아주어야만 거울은 깨끗함을 유지한다.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한 지식을 얻으면 그것은 쉽사리 잊혀진다. 그러나 성실하게 지식을 돌보고 그 지식을 키워나가다 보면 부분적인 지식은 어느덧 전체를 포함하고, 인생에 대하여 그리고 세계에 대하여 의미를 전달해주는 지혜로 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왜 지식을 추구하는가? 1차적으로는 무지를 극복하고 실생활에 사용하기 위해서 지식을 습득한다.
우리는 왜 지혜를 추구하는가? 인생과 세계에서 나의 위치를 확인하고 보다 명료하고 풍요로운 인생관과 세계관을 소유함으로써 인간다운 인간이 되기 위하여 지혜를 획득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