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해는 유난히 흉흉하고 소란하다. 칩거하는 일상의 연속이다. 다 떨쳐 버리고 조용한 곳에서 마음껏 자유로워지고 싶다. 한참 갈등 중에 쉽지 않은 용기를 내었다. 망설이던 두려움은 집을 나서는 순간 어느새 사라진다.
제주 도착 다음날이다. ‘박수기정’ 풍경이 펼쳐 내는 올레 9코스를 걷기로 일정을 잡았다. 주상절리가 발달한 대평포구 해안 절벽 길이다. 출발점에 서서 올려다본 박수기정은 수직으로 깎아지른 낭떠러지다. 병풍을 펼쳐 놓은 듯 신비한 풍경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마치 천상인듯 경이롭다.
용왕의 아들은 시끄러운 냇물 소리를 없애 달라는 스승의 부탁을 들었다. 그가 은혜를 보답하고자 설치했다는 방음벽이 바로 박수기정이란다. 제주도에서 길을 걷다 보면 사물과 그럴듯하게 닮은 형상들을 많이 보게 된다. 그것들은 얼추 비슷한 사실처럼 여겨지는 전설을 담고 있다. 애틋하고 구구절절한 바다 이야기들이 배경처럼 깔려있는 곳이 많다. 세월이 빚어놓은 현무암 형상들을 바라보면 성스럽기도 하고 장엄하다.
출발부터 경사가 심한 가파른 길을 오른다. 벼랑 아래에서 그림 같다고 느꼈던 풍경도 그 속을 걷기는 만만치 않다. 오솔길의 돌들로 걷기에는 위험하고 여간 힘들지 않다. 다행히 출발지점에서 올려다본 오금을 저리게 했던 아찔한 벼랑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절벽 위 좁은 숲길을 걷지만 서로 엉키고 어우러진 천년의 나무들이 울타리가 되어 공포심을 지워준다. 다만 저만치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출발점에서 올려다보았던 높이가 가늠될 뿐이다.
세상살이도 그렇다. 걷고 있는 벼랑길처럼 사방으로 무수한 위태로움 속에서 한 치 앞을 모르고 그저 살아낸다. 당장 내일을 모르면서 더 채우려 하고, 더 앞서려 한다. 나 역시 인간인지라 남들과 다르지 않았다. 열심히, 최선으로, 영원할 것처럼 억척을 떨었다. 얼마 전 한국의 대표 기업 회장도 허락된 백수를 다 채우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났다. 자신이 쌓아놓은 부와 명예도 그대로 남겨둔 채다. 세계 최고의 경영인이 되기까지 그의 욕망과 고뇌로 한순간도 편안하지는 않았으리라. 모든 것 다 이루어 낸 기업가들은 수명까지도 마음대로 살아낼 것 같다. 그러나 이루어 낸 부로 얼마간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성공한 기업인들의 수명이 그리 길지 않다는 신문을 읽은 적이 있다. 뉴스를 접할 때는 사람이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여 살아내는 세상살이가 참 허무하고 허탈하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이쯤에서 나도 좋은 곳을 찾아 멋진 풍경을 바라보며 살고 싶어진다. 그러나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사람의 삶이 아니던가.
다듬어지지 않은 급경사 길이 이어진다. 신이 무심하게 툭 던져놓은 것처럼 야성적이고 불친절한 길이다. 그래도 힘든 만큼 세월이 빚어놓은 수많은 비경을 아낌없이 보여주는 것이 올레길이다. 묵묵히 걷다 보면 분주했던 세상사 근심들이 어느새 사라지고 굳어 있던 마음도 녹아내린다. 많은 것들이 가벼워지고 지워지는 중에 도리어 선명해지는 나 자신이다.
어떤 손길이 더 물색을 그려낼 수 있을까. 단풍잎도 갖가지 고운 색으로 마지막 빛을 발하고 있다. 울창하게 우거져 있는 순수한 숲길에 들어서니 그저 평온하다. 자연은 이렇게 알 수 없는 시간 동안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예술작품을 곳곳에다 빚어놓았다. 이 빛깔과 향기와 바람까지 반겨주는 곳에 방문자가 되어 자연의 축복을 넘치게 받는다. 원초적인 길 위에서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누구도 눈치챌 수 없는 즐거움과 행복이 한가득 채워진다.
간혹 가까운 분들의 뭐 하러 제주도에 그렇게 자주 가느냐 말한다. 또는 제주도에 다녀온 걸로 그렇게 격하게 감동하느냐 할지도 모른다. 종종 가게 되는 제주도는 공항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고향 동네처럼 낯설지 않고 편안하다. 더욱이 올레길 걷기는 세상 어디를 다녀온 것보다 나에게만 특별하게 주어진 멋진 여행이라 여긴다. 그동안 우물 안 개구리처럼 먼 곳을, 떠나 보지 못한 탓도 있을 테고, 어린 시절 섬에서 자란 추억으로 무엇보다 제주도가 친근한 이유도 되겠다. 그러나 더 큰 이유로는 화산폭발로 만들어진 기이한 풍광들이 끝없이 가슴 설레게 유혹하며 끌어당긴다.
이제 와서 가슴 떨리게 하는 시절의 여행은 아니지만, 느지막이 올레길을 완주하는 뿌듯함이 마음을 벅차게 한다. 내 생에 이보다 더한 행운이라 여겨지는 일은 없지 싶다. 되돌아보면 인생을 쉽게 살아온 것은 아니다. 그러나 흐르는 세월에 주눅 들지 않고 거친 돌밭 길도 멋지게 걸어 내려와. 대자연의 넉넉한 기운을 옹골차게 채우며 길을 걷는다.
하루치를 꼬박 채우고서야 끝난 제주 올레 9코스다. 그리움이 몽땅 물든 박수기정 가을이 저물어 간다. 용기 내어 제주도에 오길 잘했다. 올레길 걷기를 잘했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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