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기적
하늘이 돈짝만 한 산골에서 어리광으로 자란 13살 막내가 하루아침에 서울로 올라온 것도 지금 생각해 보면 기적이었다.
중. 고등학교 6년 중 다니다 말다 야간으로 겨우 3년간 학교에 나간 후 육사에 간 것도 기적이다.
영예의 졸업장을 거머쥐고 소위로 임관하여 부대에 배치된 지 몇 개월 만에 부하들을 못살게 구는 선임 대위를 패주고 무사한 게 기적이었다.
월남전에 가서 갓 중위가 되어 한국군 위에 군림하려 한 미군 소령의 발밑에 대고 M-16 소총을 연발로 발사한 후 무사한 것도 기적이다.
22개월간의 월남전 전투 생활로 몸무게 47kg이었던 내가 정일권의 애첩 정인숙의 남동생을 쥐어패서 정일권 국무총리가 김계원 참모총장에게 “지만원 중위를 처벌하고 결과 보고 할 것”이라는 전통을 보낸 데 대해 정복을 입고 국무총리실로 찾아가 담판을 내고, 정인숙의 집으로 찾아가 정인숙과 담판을 하여 없던 일로 했던 사실도 기적이었다.
사관학교 졸업 후 야전과 전쟁터와 고급사령부에 근무하면서 책을 놓은지 9년 만에 스파르타식 교육으로 유명한 미해군대학원 경영학 석사과정에 가게 된 것도 기적이다.
문과 석사에서 응용수학 박사과정으로 점프하여 학위를 받은 것도 기적이었다.
이것은 비단 나만의 기적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미 해군대학원 전체의 기적이었다. 더구나 박사 논문에서 수학분야의 최고급 과정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수학공식 두 개와 정리 6개, 알고리즘 1개를 창조한 것은 나도 놀랄 기적이었다.
중령시절 국방연구원에 근무하면서 전군에 5년동안 예산개혁을 주도했던 것도 기적이다. 2억 5천만 달러 짜리의 공군의 방공자동화 사업을 단돈 25달러 가치도 없다 하여 군을 떠들썩하게 한 죄(?)로 몇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대령 예편을 하자마자 미 국방성의 초청으로 미국에 가고, 그곳에서 바로 모교인 미해군대학원에서 교수를 한 것도 기적이었다.
1991년 처녀작인 “70만 경영체 한국군 어디로 가야 하나”라는 책을 써서 소설을 제치고 베스트셀러 1위를 7주간 연속한 것도 기적이다.
전국구 국회의원 자리, 장관 자리, 국영기업체 자리, 제안을 모두 뿌리친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이 정체를 모르던 시절, 김대중, 임동원 등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을 향해 “너는 빨갱이”하고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은 사실들도 기적이었다.
18만 쪽에 달한다는 "역사 바로 세우기" 재판 수사자료 및 재판자료를 5년 동안이나 집요하게 분석하여 12.12와 5.18의 진실을 밝히고, 북한 자료들을 입수하여 5.18광주에 북한 특수군이 왔다는 것을 증명해 낸 것도 기적이었다.
세계적인 영상분석 능력을 보유한 영상분석 팀장 ‘노숙자 담요’를 만나 477명의 광수를 찾아낸 것도 기적, 이후의 팀워크 체제를 갖추게 된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과거를 살 때에는 어렵고 고통스러웠지만 지나고 나면 넓고 아름답다고... 하지만 내가 살았던 인생길은 뒤돌아 볼 때 더욱 아슬아슬한 벼랑길이었다. 마츠시타 고노스케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자기 일에 몰두하는 모습’이라 했다.
내가 수많은 벼랑길을 걸으면서 추락하지 않은 것은 언제나 정의와 의협심에 나를 내던지는 모습을 아름답게 지켜보는 우군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령 때 전라도 육사출신 10년 선배 대령을 만나 고과 점수 최하위를 받았지만, 진급심사에 참여했던 여러 대령들이 나를 중령으로 특진시켜 주었다.
나는 늘 정도를 걸으면서 불의에 도전했다고 장담한다. 아무런 배경도 없는 내가 소위 때 대위를 두들겨 패버렸고, 중위 때 정일권 애첩의 동생을 패버리면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이때마다 주위에는 항상 나를 돕는 고마운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쓴 보고서로 인해 김인기 공군참모총장과 이기백 국방장관이 전두환 대통령에 불려가 혼쭐이 났으니 이들이 어찌 일개 육군대령을 가만 둘 수 있겠는가? 내가 생각해 봐도 나는 겁 없는 인간처럼 살았다.
그런데 미국 국방성에서 단 한차례 세미나를 가졌던 사람들 중, 나를 향해 “당신 같은 사람을 한국이 안 쓰면 미국이 쓰겠다”며 충분한 과제비를 주어 미국방성과 미해군대학원에 근무하게 해 준 고위관리를 만난 것도 믿기 어려운 기적이었다.
- 5.18 의 진실 -
저와 제 친구들은 15년에 걸쳐 피와 눈물로 5.18의 진실을 밝혀냈습니다. 1980년 5월 18일부터 "10일 동안" 북한 특수군 600명과 또 다른 전문 공작단 600여 명이 선전포고 없이 침략했던 사실을 대한민국과 국제사회에 보고하기 위해 밝혀낸 진실입니다.
우리는 가장 먼저 1980년 광주에서 촬영된 사진들을 발굴해 냈습니다. 이 사진들 자체가 대한민국 사회에는 일대 충격이었습니다.
사진 속 얼굴들을 영상분석 특수 프로그램과 영상분석에 숙달된 눈매들로 분석했습니다. 최근 인테넷에 얼굴을 남긴 유명한 인물들 중 과연 누가 이들 광주의 주역들과 닮았는지를 그야말로 숙달된 전문가들이 찾아내는 작업을 한 것입니다. 그 결과 1980년 광주현장 사진 인물들 중, 무려 478명이 북한의 얼굴들이라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북한에서 출세한 장군들과 내각책임자들을 포함해 북한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대거 포함돼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이는 제가 생각해도 기적입니다.
이와 더불어 저는 1997년 한국 법원이 5.18광주 폭동역사를 민주화역사로 탈바꿈시켰던 판결내용이 6개의 중요한 사실에 대해 사실 오인이라는 결정적인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도 증명했습니다. 한국사회의 무시할 수 없는 일각에서 이 역시 기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5.18 역사를 민주화역사인 것으로 성역화해온 광주시장을 포함한 5.18 유공자 단체들이 2015년 10월부터 6개월 동안 제 참모들이 발견한 이 사진들을 광주의 번화한 장소들에 전시하고 사진 속 주역들을 애타게 찾았지만 사실상 지금까지 나타난 인물이 없습니다. 광주에는 폭동을 주도한 인물이 없다는 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북한이 1980년 5월 1,200명 이상을 광주로 침투시켜 대한민국을 전복시키려 했던 이 사실은 반드시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나서서 응징해야만 하는 세기적인 침략사건입니다.
대한민국은 1945년 8월 15일 미국이 흘린 피의 덕분으로 해방이 되었지만, 불행하게도 남북으로 분단되었습니다. 그 후의 한국 역사는 북한의 끝없는 군사적 도발 및 정치공작과 그에 대한 남한의 반작용으로 점철되었습니다.
북한의 도발은 비단 핵무기와 유도탄을 비롯한 군사적 측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안에 북한을 추종하는 세력을 길러 그들로 하여금 대한민국의 안보와 발전을 사사건건 방해하게 만들고, 파괴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공작적 측면도 그만큼 강합니다.
미군이 보유한 ‘사드’를 한국 땅에 배치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자위를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국민이라면 모두가 쌍수로 환영하고 그 자산을 운영하는 미국에 대해 머리 숙이어 고마움을 표시해야 마땅한 일입니다.
하지만 매우 기이하게도 이 땅에는 사드 배치를 결사적으로 방해하는 정치인들과 국민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세력 단위로 들고 일어나 국론을 분열시키는 실로 볼썽사나운 모습들을 연일 보이고 있습니다. 이 모든 세력의 중심에는 북한의 공작이 있고, 북한의 공작을 수행하는 북한 추종세력이 있습니다.
고 이승만 대통령, 고 박정희 대통령, 전두환 전 대통령이 집권했을 당시에는 정부가 이런 내부의 적을 물리치는 일을 최우선 과제로 수행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부터는 이 내부의 적이 거의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지상에서 떳떳하게 세력을 키워왔습니다.
그 세력이 오늘날 사회의 주요 인프라를 장악했고, 정치권과 사법부를 장악했고, 심지어는 청와대에 까지 대거 침투해 있다는 것이 대한민국을 지극히 사랑하는 애국진영 국민들의 공통된 생각입니다.
대한민국에 북한 추종세력이 기하급수적으로 확산된 것은 공산주의자인 김대중 및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재직하면서 부터 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뿌리는 1980년 5월 18일부터 10일 동안 광주에서 발생한 무장폭동을, 역사의식이 없는 정치꾼들이 정치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