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김규식의 남북회담 제안과 북조선의 대응
북조선은 2월 8일 인민군 창건을 선포하고, 2월 10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초안’을 발표하는 등 남한의 단선에 대응하여 북조선의 독자적인 정부 수립 절차를 밟아 나갔다. 그런 가운데 2월 중순 새로운 변수가 발생했다. 2월 초순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에서 남북회담을 제안하고, 김구와 김규식 등 남한 민족주의자들이 이에 호응하게 되면서 북측으로서는 그냥 넘어갈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2월 16일 김구·김규식이 김일성·김두봉에게 남북요인회담을 제안하는 서신을 보냈고, 이에 북조선측은 면밀한 상황 검토에 들어갔다. 북조선 지도부는 김구와 김규식의 제안이 진정성이 있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었고, 북로당 대남연락부장 임해가 남한에 급파되어 홍명희와 김규식의 측근이었던 박건웅·권태양 등을 만났다. 이와 별도로 김일성의 직계라인인 성시백이 파견되어 김구의 비서였던 안우생 등을 만났다. 이런 과정을 통해 북조선측은 김구·김규식의 제안이 애국적 결단에서 나온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와 함께 2월 말에서 3월 초반 사이에 북조선 내에서 남한 우익에 대한 평가와 통일정부 수립에 대한 판단에 변화가 나타났다. 2월 24일 북조선민전 24차 중앙위원회는 한반도 문제 해결과 관련해 단선반대 투쟁과 함께 “외국군대가 철퇴한 다음에 인민회의의 전조선적 선거 실시”를 대안으로 제시하였는데, 총선거의 내용을 ‘인민회의의 전국적 실시’로 규정함으로써 북한에서 이미 자리를 잡고 있던 인민위원회 체제를 남한에 확대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 그런데 3월 9일 북조선민전 25차 중앙위원회에서 있은 김일성의 보고는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김일성은 남한 단선 반대와 외국군대 철수 후 총선 실시 주장을 되풀이 하면서도 ‘인민회의’가 아닌 ‘최고입법기관’의 전국적 실시를 주장하였다. 이는 북한에서 권력 형태를 두고 남한 우익과의 협상과정에서 논의할 수 있다는 여지를 보인 것을 의미했다.
3월 초까지도 북조선측은 김구를 이승만·김성수 등 단정 추진세력과 구분하지 않은 채, ‘미제국주의의 주구’ ‘민족반역자’ ‘반동분자’ ‘민족의 원수’ 등으로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의 3월 9일 보고 후 북조선에서 김구에 대한 평가가 바뀌었다. 3월 12일 북조선민전에서 발표한 ‘남조선 반동적 단독정부 선거 실시 및 유엔소총회 결정 반대에 대한 표어’에는 이승만·김성수 비판만 있을 뿐 김구에 대한 언급은 사라졌다. 이후 북한의 선전물에서는 남한 우익세력에 대한 무차별적인 비판을 자제하면서 단독선거와 유엔위원단 반대로 중심이 옮겨갔다. 북한은 김구·김규식의 남북협상 제안에 대해 공식적인 답변을 하지 않고 있었지만 3월 7〜9일 사이에 이들과의 제휴를 구체적으로 고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해 평양 을밀대 앞에 선 김구와 김규식
북조선측에서 김구·김규식 등 남한 민족주의자들과의 제휴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 것은 김구가 이승만과 결별하는 과정과 함께 이후의 김구 행적을 예의 주시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김구·김규식의 2월 16일 김일성·김두봉에 대한 서신과 함께 남북협상 제안을 받고 북조선측은 임해, 성시백 등을 남에 파견해 이들의 제안이 가진 진정성을 확인하였다. 이와 함께 3월 초 김구의 행적도 북측에는 긍정적이었다. 3월 1일 경교장에서 있은 3.1절 기념식에서 김구는 남한 단선 불참, 이승만과의 제휴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확고히 피력하였고, 3월 2일 김구는 김규식·홍명희와 회동, 남한 총선에 대한 행동통일을 모색하였다. 또한 김구는 3월 7일에는 이승만과 한민당을 중심으로 한 남한 극우진영이 유엔한국위원단과 협의하기 위해 구성한 민족대표단 참가를 거부하였다. 북조선은 김구·김규식·홍명희 등 남북협상을 요구하며 단선에 반대하는 남한 민족주의자들과 남한의 단선반대 동향을 파악하고, 과거의 반탁세력까지 포괄하는 남북정당·단체들의 연석회의 방침으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던 것이다.
북조선측이 내부적으로는 김구·김규식 등 우익민족주의 세력까지 포괄하는 정당·사회단체들의 회합을 확정했으면서도 공식적으로 남북연석회의를 제안하는 3월 25일까지는 공개적인 답변을 하지 않았는데 이는 남한의 선거 일정과 관련이 있었다. 미군정은 유엔임시조선위원단에서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가결하기 전인 3월 1일 남한 단선을 5월 9일(이날은 개기일식이 있을 예정이고 일요일이라는 이유로 나중에 5월 10일로 변경)에 실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의견이 갈려 격론을 벌였던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은 3월 12일에야 찬성4, 반대2, 기권2로 남한단선을 결정했다. 남한 단선이 확정되자 비로소 북조선은 정당·사회단체대표자 회의와 남북요인회담을 포괄하는 남북연석회의를 공식적으로 제안했다. 이것은 남북연석회의를 통해 남한 단선의 ‘반민족성’을 폭로함과 동시에 연석회의에 참석한 남한 대표들이 시간적인 제약 때문에 남한 단선에 참여할 수 없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요인은 북조선 내부 사정에 있었다. 남북연석회의 개최는 정부 수립 문제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었기 때문에 헌법초안을 채택할 인민회의 특별회의와 노동당 전당대회 일정과 연계해서 확정할 수밖에 없었다. 북로당 중앙상무위원회는 3월 15일에야 그동안 헌법초안 토의 등을 이유로 연기해왔던 2차 전당대회 날짜를 확정했다. 이날 헌법초안 승인을 위한 인민회의 특별회의를 4월 중으로 연기한다는 결정도 있었다. 또한 김구·김규식에 대한 답신도 3월 15일에 작성되었다. 김일성은 3월 12일 답신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김두봉에게 “국가적 사업은 일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 서두르는가?”라며 반문했는데, 충분한 준비가 끝난 뒤 남측 대표를 맞이함으로써 주도권을 쥐고 가기를 원했던 것이다. 북조선은 헌법초안에 대한 북로당 내부 논의가 완료된 시점에서 당 대회 일정을 확정하고 연석회의를 검토하였으며, 연석회의의 공개 제안은 북한의 헌법초안에 대한 대책과 남한 선거 일정을 고려해 정했던 것이다. 더욱이 북조선측이 헌법초안 논의를 위한 인민회의 특별회의 날짜를 명확히 확정하지 않고 4월 중에 개최한다고 한 것은 연석회의 상황에 따라 이 일정을 조정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3월 25일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북조선민전) 명의로 평양방송을 통해 「남조선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남조선 정당·사회단체에 고함」을 발표, 남북연석회의를 공식 제안하였다. 북조선민전은 이와 함께 “남조선 단독선거를 반대 투쟁하는 남북조선의 모든 민주주의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4월 14일 평양에서 개최할 것을 제안하는 서한을 남조선노동당, 한국독립당, 민주독립당 등 17개 주요 정당·사회단체 앞으로 각각 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