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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오해를 또 하실까봐, 부연설명을 좀 드려야 되겠다.
우리가 기공을 하게되면 부정할 수 없는 강렬한 기의 체험을 하게 된다. 그때의 기분은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때는 황홀한 올가즘에 가까운 엑스터시를 맛보게 되기도 한다. 이건 안해본 사람은 모른다.
얼라들이 엄마 아빠의 기쁨을 모르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런 쾌감에 빠져서 지나치게 감각적 기공을 탐닉하는 사람도 많다.
이 기공의 감각도 잘못하면 중독이 되고 습관성이 된다. 섹스나 자위행위도 습관성이 될 수 있고 심하면 중독에 빠
지기도 한다. 섹스나 마약처럼 기공도 습관성 내지 중독될 위험성이 있다.
기감에 몰두해서 무아지경에 빠져있을 때 뇌에서 분비되는 화학물질들의 변화를 보면 히로뽕 맞은 것과 유사한 면
이 있다.
이런 강렬한 감각을 체험하게 되면 이런 감각이 건강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나아가서는 병을 고칠 수 있는 효과도
있지 않겠나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기감이 아무리 강렬하고 황홀하다 해서 그것이 병을 고친다는 근거는 못 된다. 통쾌하게 웃으면 건강에 좋
지만 하루종일 웃기만 하면 암이 나을 것인가는 다른 문제이다.
기가 하나의 감각이라면 이것도 분명히 건강과 관련이 있고 연동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시각은 감각이지만 시각 자체가 육체적 기능에 큰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녹색은 오행상 목기에 해당하는 색이라서 목기의 장기인 눈의 기능을 강화한다.
잠수함 내의 모니터가 녹색인 이유는 눈의 피로도를 낮추기 위함이다. 산에서 푸른 녹색의 숲을 자주 보면 시력에
좋은 것도 같은 이유다.
아픈 부위를 손으로 쓸어주면 손의 촉감이 통증을 완하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효과를 내는 것도 이와 같다.
감각은 건강과 육체의 기능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기라는 감각도 분명히 건강과 질병에 작용한다.
그러나 녹색을 칠해놓은 방 안에 하루종일 근시환자를 놓아둔다 해서 근시가 완치되지는 않음을 알아야 한다.
녹색은 눈의 기능을 좋게하는 하나의 요인일 뿐 눈의 치료수단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기치료라는 것은 감각을 치료에 활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부수적이고 보완적인 것에 만족해야 한다.
오감에 의한 사물의 인식은 전부 허상입니다
00님이 다섯 번 중에 세 번만 맞춰도 학회에 보고할 가치가 있다 하시는데 구름은 열 번이면 열 번 다 맞춥니다.
눈으로 보고 사물을 가리는 거나 기로 감지해서 가리는 거나 다를 바가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의 오감이란 기를 각 특성별로 나누어서 인식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기라는 통합된 정보 중에 빛정보(색과 형상)를 따로 떼서 보는 것이 눈이고, 냄새정보를 따로 떼서 감지하는
것이 코에요. 이 다섯 가지 감각기관이 따로 따로 분리해서 인식하는 정보들이 하나로 모인 것이 기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기로써 사물을 인식하는 것은 가장 정확하고 빠른 인식의 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감에 의한 사물의 인식은 전부 허상입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처럼 생겨먹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 눈이 그렇게 생겨먹은 것처럼 보여줄 뿐입니다.
세상의 소리가 우리 귀에 들리는 것과 같은 소리가 아닙니다. 다만 우리 귀가 소리를 그렇게 전해줄 뿐입니다.
00님이 구름을 볼 때는 구름처럼 보이겠지만 벌이나 나비가 구름을 볼 때는 홍야님이 보시는 구름과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우리가 꽃을 볼 때 색색가지로 형형하게 피어있는 아름다운 광경이지만 벌이나 나비의 눈에는 저 꽃들이
우리하고 아주 다른 모습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보는 세계와 벌이 보는 세계 중에 어느 것이 세계의 참 모습이겠습니까?
박쥐의 귀에 들리는 세상의 소리는 우리가 듣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우리 귀에는 들리지도 않는 소리들을 박쥐는 늘 듣고 있습니다. 개는 시각보다는 후각에 더 의존하는 동물입니다.
코가 먼저고 귀가 그 다음이고, 눈은 그 다음입니다.
개는 우리가 맡지 못하는 온갖 냄새를 하루종일 맡고 삽니다. 개에게 세상이란 그런 냄새들로 가득 찬 곳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생명체는 자기의 감각기관이 만들어내는 저마다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의 모습은 결코 한가지가 아닙니다.
생명체의 감각기관의 종류와 특성, 구조에 관계없이 생명의 종류에 관계없이 물질과 생명을 막론하고 똑같은 세계
를 보는 유일한 방법은 기로써 감지하는 세계뿐입니다.
기로써 인식하는 세계는 인간에게나 개에게나 벌에게나 달에게나 지구에게나 똑같습니다.
저마다의 고유한 감각기관을 가진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을 때도 우주가 존재한다 말할 수 잇는 것은 기로써 온 우주
가 서로 교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기라는 정보의 교류가 없다면 생명체가 없는 우주는 곧 존재하지 않는 우주입니다.
서로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구에 생명이 없어도, 온 우주에 살아있는 것이 하나도 없어도 지구와 달과 태양계와 북두칠성과 은하수의
모든 존재들은 서로를 인식합니다.
기의 존재 때문에 모든 존재는 살아있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기란 의식 이전의 의식입니다.
만물의 자기 정보이고, 자기의 정보를 외부에 전하고 상대의 정보를 감지하여 반응합니다.
그래서 생명체의 개입이 없어도 우주는 생성되고 소멸되고 합니다. 기라는 정보의 교류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주는 살아있습니다. 지구도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살아있습니다.
감각은 생명체가 기를 좀더 분화하여 인식하는 부분들입니다. 그래서 받아들이는 주체마다 다 다릅니다.
그것 때문에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감각이 만들어낸 세계를 진짜 세계라고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세계는 아주 쉽게 파괴됩니다. 사고나 병으로 두 눈을 잃는 순간 자신에게 세계는 암흑입니다.
두 귀를 잃는 순간 세계는 적막입니다.
감각의 세계는 아주 쉽게 다른 것으로 바뀝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세계가 있습니다.
바로 기로서 인식하는 세계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나의 감각이 만들어 낸 세계로부터 진실된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기로서 세계를 인식하는 순간 감각이 만든 허구의 세계는 사라지게 됩니다.
그것은 원초적인 감각입니다. 우주 본래의 느낌이고 본질적인 정보의 교환입니다.
물리학은 기의 저 밑바닥에서 노는 세계입니다. 결국 감각적 세계의 탐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는 00님이 하루라도 빨리 콩이 든 컵을 백번 찍어서 백번 다 맞출 수 있게 된 다음에 학회에 보고하시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제가 보기에 홍야님은 삼개월이면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또 하나의 눈
1회용 커피컵을 이용한 기감 개발 훈련도 처음에는 예감에서 시작한다.
여러 개의 컵에 손바닥을 대어봐도 처음에는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 없다.
다만 '이 컵일 것 같다'는 예감이 드는 정도다. 그리고 그 예감도 처음에는 안 맞는다. 그런데 되풀이 하다 보면 그
예감이 점차로 어떤 감각으로 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예감이 머리 속에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손바닥을 통해서 머리로 올라온다는 것이다.
그 때의 느낌은 참으로 묘하다. 어떤 기운인 것 같기도 하고 자기 기분이 그래서 느끼는 것 같기도 하고 긴가민가
싶으다. 그런데 그런 느낌이 하여간에 오는 컵을 들었을 때 그 속에 알맹이가 있게 되면 그때의 그 기분을 기억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에도 그런 비슷한 기분(아주 희미하고 애매한 것이지만)이 드는 컵을 열었을 때 알맹이가 있는
확률이 점차 높아지면서 그 기분이 하나의 감각으로 기억이 된다.
우리가 육감이라 말하는 예감이 발달해 가는 것이다.
처음에는 콩을 넣고 해본다고 치면 자연히 콩의 기운이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있다. 그 다음에는 집에 있는 콩을 한
그릇 담아놓고 그 그릇에 손을 가까이 대고 무엇인가 느껴보면 콩이 든 컵을 찾을 때 느꼈던 것과 똑같은 기분이
손바닥에서 살아난다. 그게 콩의 기운이다.
다음에는 마늘을 넣고 해보면 이번에는 아주 쉽게 비슷한 기운을 느끼게 되는데 기감이 발달함에 따라 콩과 마늘
의 그것이 약간 느낌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 쯤에는 방법을 바꾸어 본다. 두 개의 컵 중에 하나에는 콩을 넣고, 다른 하나에는 마늘을 넣고 엎어서 섞은 후에
어느 쪽이 콩이고 어느 쪽이 마늘인지를 알아 맞추어 보는 것이다.
그것이 되면 콩과 마늘의 기운을 구별해서 감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것의 구별은 눈으로 콩과 마늘을 보고 구분하는 것과 똑같이 능숙하게 할 수 있다.
즉 사물을 구분하는 또 하나의 눈을 갖게 되는 것이다.
숙달이 되면 열 개의 컵에 각기 다른 식물들을 넣어놓고 그 전부를 알아맞힐 수 있게 된다.
물론 이때의 그 열 가지 식물은 사전에 각각의 기운을 미리 알고 있는 것이어야 한다.
한번도 기운을 재어보지 못한 식물들을 넣어놓고 알아 맞혀 보라 하는 것은 생전 처음 보는 동물이나 곤충의 이름을
맞추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정도로 기감이 개발되고 나면 세상의 모든 사물의 기운은 다섯 가지로 대분할 수가 있음을 알게 된다. 즉 이 세상
에 존재하는 색깔은 수십만 가지 색상이지만 크게는 오원색 중 하나에 속하는 색으로 나눌 수 있는 것처럼 미세하게
차이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어떤 계통의 기운에 포함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 다섯 가지 기본적 기운의 차이가 바로 오행의 기운이다. 이것을 우리는 목기, 화기, 토기, 금기, 수기라고 부른다.
이것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는 기가 실재한다는 이야기이고 음양오행은 부정할 수 없는 과학적 사실이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것은 누차 말했다시피 아주 특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보통의 아무라도 가능한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인 우리 집 둘째도 하는 일이다.
동양의 명의는 청진기나 체온계, 컴퓨터 단층 촬영기가 없어도 환자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았다.
진맥을 해보고 병을 알면 하의, 환자를 척 보기만 하고 병을 알면 중의, 환자를 보기도 전에 병을 알아야 상의로 대접
했다. 이게 있을 수 없는 미신이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동양의 명의들은 환자의 기광(氣光)으로 모든 것을 보았다. 결코 초능력이나 미신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왕초보 기훈련
기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면 속는 셈치고 미친 짓을 한번 해보기 바란다.
종이컵 다섯개와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물을 하나 준비한다. 콩이라도 좋고 쌀알이라도 좋고, 마늘 한쪽이라도
좋고, 포도 한 알이라도 좋다.
다섯 개의 컵을 엎은 뒤에 그 중의 하나에 준비한 것을 넣는다. 그리고 눈을 감고 다섯개 컵을 마구 돌려 섞는다.
넣은 물건이 아주 작은 것이면 섞을 때 감각으로 알기 어렵다.
그래놓고 컵 하나씩 손바닥을 갖다대고 특별한 어떤 예감이나 뭔가 조금 다르다싶은 미세한 뭔가가 느껴지는 컵을
열어보는 것이다. 하지만 처음에는 번번이 빈 컵을 열게 될 것이다.
다섯개의 컵에서 어떤 하나가 특별히 다른 감이 오는 것이 없을 것이다. 즉 차이를 못 느낀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을 계속 반복하다 보면 점점 맞추는 확률이 높아져 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아주 미세하지만 콩이나 마늘이 들어있는 컵에 손을 갖다댈 때 약간의 야릇한 느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첨에는 전혀 못 느끼지만 계속 실험을 해보면 차츰 차츰 마늘이나 콩의 기운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느낌이 왔을 때 컵을 열어보면 그 속에는 틀림없이 들어있다.
처음부터 다섯 개로 하지말고 두 개나 세 개로 시작하면 더 쉽다. 어차피 두개일 때는 확률이 50프로다.
그러나 이 확률이 70, 80프로로 올라가게 된다. 나중에는 10개 20개의 컵 중에서도 무엇인가가 들어있는 컵을 정확하
게 가려낼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바로 콩이나 마늘이 '나 여기 있어요!'하고 자기의 정보를 기로서 발산하고 있기
때문이고, 인간에게는 그것을 감지할 수 있는 감각능력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집의 두 딸애가 이것을 터득해서 학교에서 초능력자 대접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여러 개의 도시락 뚜껑이나 불투명한 필통들 중의 하나에 무엇을 넣고 들어있는 것을 알아맞추는데 백발백중이거든.
다른 애들이 보기에 초능력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이런 생명체(식물)가 아닌 도형이나 숫자의 기운은 워낙 미약해서 기감각을 아주 발달시키지 않으면 알아채기가 쉽
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기감의 예민함의 문제지 기운 자체는 모든 사물이나 심지어 도형과 같은 모양에도 고유한 기운이
있다.
자연 속에는 남근석이라 해서 남자의 거시기하고 비슷하게 생긴 돌들이 있는데 그것에서는 양의 기운이 나온다.
남자의 거시기하고 모양이 비슷하게 생긴 물건은 전부 양기가 있다.
마찬가지로 여자의 음문과 닮은 형상에는 음기가 있다.
이게 바로 모양 자체가 고유한 기운을 만든다는 이야기다.
재밌어요? 재미 없으면 고만하고. 디제이 얘기도 할 게 억수로 많은디.
이론보다는 각자 체험해 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기는 백문이 불여일감이니까요.
'기'의 본질 자체에는 도덕성, 인격, 사회적 기능과 연계시킬 일은 없다고 봅니다.
저는 지금 기공에 대해서가 아니라 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기공이라 하면 인격적 도야나 영적인 완성과 같은 도덕적이고 추상적인 목표의 설정이 가능하리라고 보고 그럴 필
요도 있으리라고 보지만 '기'라는 것에 대한 증명이나 '기'의 본질 자체에는 도덕성, 인격, 사회적 기능과 연계시킬
일은 없다고 봅니다.
원자력이 인류에게 도움이 되던 전쟁 무기로 쓰이던 그것은 원자력 자체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E=MC제곱이 맞는 공식이냐를 따지는 단계에서는 도덕성은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유리겔라의 초능력 시범에 쓰이는 자연법칙이 도박사에게는 쓰이지 말라는 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기'는 자연의 법칙이어서 도덕성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도둑의 시력이 경찰관보다 더 좋을 수 있고 오히려 더 좋아야 도둑질을 하겠지요.
시력은 경찰이냐, 도둑이냐하고 별 상관이 없습니다.
기감도 그 자체로는 그런 가치개념과는 관련이 없는 육체적 능력 중의 하나입니다.
오히려 검객이나 무술인들에게 더 발달해 있는 능력입니다. 인간보다 짐승들이 더 예민한 능력입니다.
다만 현대인들이 기공을 인격적 수련과 도적적 수행의 한가지로 보기 때문에 기공 능력과 그런 정신적 가치의 균형
을 요구한다는 접입니다.
그러나 저는 기능력을 축구선수나, 야구선수의 운동능력과 같이 봅니다. 기능력과 정신적, 도덕적, 인격적 수준과는
연관성이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반드시 고귀한 품성과 맑은 영혼의 소유자라야 기능력이 뛰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두 가지가 비례하는 것도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유리겔라나 카퍼필드나 기타 테레비의 '놀라운 세상' 같은 프로에 자주 나오는 초능력자들이 뭐 별시리 인격적 도야
가 된 사람들이겠습니까?
우리가 동양적 수행 속에 기공을 포함시키다 보니 그런 요구와 기대심리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저는 그 점에 대해
좀 시니컬합니다.
마음공부와 기공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설법하실 때 기에 대한 얘기는 안 하셨는지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오히려 기라는 것이 신비체험이나 영적현상 내지는 무지몽매한 소수 사람들의 미신같은 것으로 치부되어 온 이유
중의 하나가 기능력과 인격적 수준을 같이 보려고 하는 경향도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기는 그런 것과는 별 무관한 자연현상이고 만물의 본질이라고 저는 봅니다.
도덕적 잣대로서 잴 게 아니라 과학적 잣대로서 재야 할 대상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기와 음양오행은 물질과 생명의 양쪽에 적용되는 법칙이고, 육신과 영혼에 함께 작용하는
기제입니다. 그래서 영적 수련에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나중에 별도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기공과 자세
보통 명상이나 기공이나 참선을 할 때 결가부좌에 허리를 세우고 눈을 감는 자세가 표준인 것 같습니다.
절에서의 참선도 처음 화두를 정해서 참선을 시작할 때는 저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움직이거나 다른 일을 하게 되면 자연히 정신이 그 쪽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철 스님 말대로(요새 중앙일보 연재 때메 많이 써 먹는데요) 주야일여, 오매불망의 경지가 되면 하루의
일상 전부가 화두를 든 수행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화두를 의식으로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화두가 나한테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얘기죠.
기공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나중에는 부엌에서 밥할 때나 빨래를 할 때나 친구들하고 수다를 떨 때도 기공은
계속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잠잘 때에도.
우리가 자세를 바로 하고 눈을 감는 것은 우선 눈에 무엇이 보이면 의식이 그것을 쫓아가기 때문이고, 귀에 소리가
들리면 정신이 산만해지기 때문입니다.
몸을 움직이고 있으면 몸의 조절에 의식이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에 몸을 고정시켜 놓는 것이 도움이 되겠지요.
그러나 기공은 의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어서 조금 숙달되면 특정 자세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처음에는 기감을 느껴보려면 온 신경을 손과 머리에 집중해서 어떤 감각이 오나 안 오나, 긴가 민가, 마치 망보는 도
둑처럼 긴장해서 의식을 집중하게 되는데요, 나중에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게 돼요.
눈에 잔뜩 힘을 줘야 잘 보이는 것은 아니자나요. 그냥 보면 되지요.
기도 마찬가지로 그냥 느끼면 돼요. 자세 바로하고 폼 잡을 필요는 없다는 거지요.
흔히 테레비에서 기공사들이 기 치료를 하는 광경을 보면 두 눈을 질끈 감고 두 팔을 내밀고 마치 변비환자 뒤보듯이
온갖 용을 쓰는 장면을 봅니다.
그런데 기라는것은 그렇게 눈감고 용쓰는 거 하고는 별로 상관이 없어요. 손을 내밀던 안 내밀던 기의 전달에는 차이
가 없습니다.
눈을 감고 안 감는 것과도 무관합니다.
물론 처음부터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처음에는 사과의 기가 어떤 것인가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눈을 감고
집중을 해서 느껴보고는 했었지요. 그리고 손위나 눈앞에 사과라는 실물이 있어야 감각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과가 있건 없건 관계없어요. '사과'하면 벌써 손에 사과 기운이 착 올라옵니다.
눈감을 필요도 없고 포즈도 필요 없지요.
기감을 실제로 훈련해서 열어 가는 과정이나 방법은 차근차근 설명을 해드릴 텐데요. 질문을 하셨기로 우선 답변을
드려 봅니다.
올바른 수련의 중요성
사람은 밥만 먹고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도 없다.
사람은 음식으로 영양을 섭취하고 호흡으로 산소를 얻어야 살 수 있다.
이 두가지가 균형있게 몸에 들어오지 않으면 인체는 문제가 생긴다.
태민님의 섭생은 주로 전자에 치중하는 것이고 단전 호흡은 후자에만 매달려 있는 것이다.
'노자를 웃긴 남자'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살아있는 사람이란 정기신(精氣神)의 결합체이다.
정은 육신의 생명력이다. 우리가 음식을 통해서 공급하는 영양이 없으면 정은 유지되지 못한다.
생식을 통한 섭생이란 이 정을 잘 가꾸고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반면에 신(神)은 호흡을 통한 대기의 기운이 없으면 활력을 잃게 된다.
그래서 사람은 밥을 오래 굶으면 정이 메말라 죽게 되고 숨을 오래 못 쉬면 신이 떠나버려 죽게 된다.
숨을 쉰다는 것은 협의로 말하면 몸 속에 산소를 공급하는 것이다.
산소란 불을 타게 만드는 촉매이다. 산소가 없으면 불이 탈 수가 없다.
때문에 신(神)이란 산소를 촉매로 해서 불타오르는 기운이다.
이것을 우리가 신기(神氣)라 하는데 오행의 기운으로 보면 화기(火氣)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신기가 발달한 사람은 주로 성직자나 무당이 되기 쉽고 이상하게 변질되면 미친 사람이 된다.
성직자 집안에 정신병자가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몸의 화기는 물리적인 개념의 불과 마찬가지로 산소의 공급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호흡법으로 수련할 때 가장 활발해 지는 기운이 화기가 되고 이 화기가 너무 강해지면 신기가 발동한다.
신기가 발동해서 주체를 못하면 사람이 돌아버린다. 이게 주화입마다.
기수련하다가 돌은 놈들이 바로 이런 케이스다. 호구지책에는 관심이 없고 주야장천 기나 수련, 명상 같은 귀신
씨나락 까묵는 소리만 하며 사는 놈들을 나는 통신에서도 여럿 봤다.
벌써 신기가 올라서 현실에는 관심이 없고 마음이 구름 위로 떠다니는 거다.
단전 호흡을 해서 몸의 진기를 단전에 모은답시고 눈을 질끔 감고 지랄염병을 떨다 보면 배꼽 밑이 뜨끈뜨끈해질
수가 있다. 그러면 '와 이게 바로 경지구나'하고 좋아서 펄쩍 뛴다.
그러나 호흡으로 강화시키는 기운은 주로 화기다. 계속하다가는 무당 되분다.
그리고 그렇게 모은 기운을 온 몸에 돌린답시고 대갈빡으로 밀어올리면 어떻게 되겠나? 화기가 머리로 올라가면
사람은 미치게 된다. '화가 뻗친다', '화가 난다, '화가 치민다', '미치겠다'하는 표현들은 모두 몸의 화기가 머리로
올라가는 느낌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동의학에서는 건강의 기본적인 조건으로 수승화강(水昇火降)을 든다.
수기는 위로 올려보내야 하고 화기는 아래로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화기가 아래로 내려가야 몸의 말단부인 손과 발의 끝까지 피가 돌고 기운이 공급되어 건강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머리는 인체에서 가장 많은 산소를 소비하는 곳이다. 쉽게 말하면 에너지가 소모되어 언제나 열이
나는 곳이 머리다.
이 머리를 물을 올려보내 식혀주지 않으면 나중에는 증기압을 못 이겨 뚜껑이 열리게 된다.
뚜껑이 열리면? 발작을 하겠지. 화가 나서 펄펄 뛰는 것이 바로 머리 뚜껑이 열렸을 때다.
수승화강은 건강의 기초다. 몸에 화기를 공급하는 화덕이 심장이고 물탱크가 바로 방광(신장)이다.
심장이란 화덕에 바람을 불어넣는 풀무가 바로 허파이다. 심장과 허파의 오행상 관계는 다음에 설명을 하기로 하자.
아뭏든 심장에서 만들어져 내려오는 불과 신장에 저장되었다가 위로 올라가는 물이 만나면 어떻게 되겠어?
물과 불이 만나면 수증기가 생긴다.
이 수증기가 온몸에 퍼지고 돌아야 되는 거다. 그런데 증기 상태가 아닌 불과 물이 그대로 몸에 공급되면 열증과 냉
증이 생기게 된다.
불이 닿은 곳에는 과열이 되어 기능이 떨어지고 찬 물이 고인 곳은 냉증이 되고 암이 된다.
물이 바싹 마른데다가 불길만 딥따리 센 사람의 전형적인 모델이 바로 도올이다.
그래서 도올의 기운을 보면 무당끼가 있는 것이댜. 신끼가 아주 발달한 사람이어서 학자가 아니라 성직자가 되었으
면 더욱 좋았을 사람이다.
사람은 육체적인 건강뿐만 아니라 정신의 건강도 이 수승화강에 달려 있다.
그런데 화기를 잔뜩 뱃속에 모아서 이것을 정수리 꼭대기로 밀어올려서 백회가 뻥 터지도록 지랄삥을 치면 어찌
되겠냐? 돌아분다고.
그래서 단전 호흡을 할 때는 극히 조심해야 돼. 자기 몸에 모인 기운이 어떤 기운인지는 알고 돌려야 한다는 얘기야.
몸의 진기만을 모아서 제대로 통기, 환기를 시키는 것은 무척 좋은 건강법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단전호흡 도장에를 가면 이런 건 가르쳐 주지도 않아. 배꼽 밑이 뜨끈뜨끈해지면 한소식 들은 것
으로 친다고. 자랑하고 축하해 주기 바쁜 것이야.
올바른 수련은 정과 신을 건강하게 하고 기운이 구석구석 잘 돌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이 것은 호흡만으로도 안 되고 섭생만으로도 한계가 있다.
올바른 섭생과 올바른 호흡의 두 가지가 병행되어야 하는 거다.
호흡에만 매달려 몸을 망가뜨리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는 것은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
만유오행
제가 <기의 여행>에서 현대 물리학이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중력자"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이 있습니다.
중력 때문에 모든 물질이 서로 끌어당기고 있는데 두 물 질 사이의 공간에서 두 물질을 서로 당겨주고 있는 고무줄
같은 것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 물리학자들을 괴롭혀 왔지요,
입자들 사이의 결합을 유지해주는 힘은 광자 같은 고무줄이 발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중력을 매개하는 중력자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물질과 물질 사이의 텅빈 공간에는 서로를 연결해주는 어떤 끈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만물은 서로를 잡아 당기고 있습니다. 어떤 입자 가속기 속에서도 중력자는 검색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력자는 물질세계의 일부분이 아닐 것이라는 추측을 낳았습니다.
저는 물리학자는 아니지만 음양오행학자로서 한 가지 가설을 갖고 있습니다.
중력은 물질도 아니고 에너지도 아닌 순수정보로서 이 우주뿐만이 아니라 ‘모든 우주’를 꽉 채우고 있는 다섯 가지
형태의 끈들(오행)의 상생과 상극이 만들어내는 질서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끈이 무량수 뭉쳐져서 물질로 변한 것이며, 때문에 모든 존재는 그 본질이 오행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서로간의 상호관계에 의해서 음과 양이라는 상대성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타존재와 음양오행의 상호작용으로 대면하게 됩니다.
내가 있고 남이 있다면 둘 사이에는 음양오행이 작용합니다. 만유인력이 아니라 만유오행입니다.
이와 같이 음양오행이 만드는 조화와 질서가 모든 존재가 각자의 위치에 각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오행이 가장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형태가 원입니다. 때문에 오행의 질서장은 원을 만들어 냅니다.
입자 속에서 전자가 원을 그리며 회전하는 것도 입자 내의 질서가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달이 지구 둘레를 도는 것도 달과 지구 사이에 오행의 질서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원운동이 나타난 것입니다.
모든 천체의 원운동이 오행의 질서가 완성되어 나온 것입니다.
이 질서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불규칙한 직선 운동들이 보입니다.
우리가 중력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천체의 회전과 원운동들은 중력이 아니라 오행이 질서를 만든 것이라고 나는
봅니다.
그래서 중력자가 발견되지 않는 것입니다. 만물들 사이의 공간에는 중력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행의 끈들이 있습
니다. 서로 간의 거리는 질서의 산물입니다. 질서가 무너지면 원이 무너지고 직선운동이 나타나서 두 존재는 가까
워져서 충돌하거나 멀어져서 비산하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됩니다.
멀어지지도 않고 가까워지지도 않으면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힘은 바로 오행의 질서입니다.
그 힘은 우리 자신과 이 세상 모든 것과의 사이에 서로 작용하는데 이것을 우리는 지금까지 중력이라고 말해왔을
뿐입니다. 나와 달 사이에는 중력이 아니라 오행이 작용합니다.
나와 북두칠성 사이에는 중력이 아니라 오행의 상생상극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물리학은 오행을 발견하기 전에는 중력자를 찾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벽운공을 통해 생전에 밝히고 싶은 것이
바로 만물 사이에 존재하는 힘입니다. 물리학자들이 그냥 겐또로 중력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만유간의 상호작용, 만유오행을 밝히고 그 법칙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제가 못하고 죽으면 우리 구름타운의 아들과 딸들이 밝혀내고 말 것이라고 저는 확신하고 믿습니다.
중력과 기감
저는 명상 중에 여러 가지 의문들에 대해 답을 얻으려고 해 봅니다.
그래서 엉뚱한 상상이나 공상도 명상에 끼여들곤 합니다.
제가 자주 해보는 생각 중에는, 만약에 무중력 상태에서 벽운공을 하면 어떻게 될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주 공간에서 비행하고 있는 우주선을 타고 있는 우주인이 벽운공을 하면 지구상에서 할 때와 어떤 차이가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인데요. 아마도 언젠가는 벽운공을 수련한 사람이 우주선을 타고 외계로 나갈 날이 있으리라고
생각되지만 아마도 요원한 훗날의 일이겠지요.
만약 우주 공간의 무중력상태에서 벽운공을 했을 때 지상에서와 별 차이가 없다면 중력과 오행은 상관이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는데, 만약 커다란 차이가 있다면 중력과 오행은 상당한 연관이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제가 만약 생전에 우주선을 타고 나갈 수만 있다면 단박 확인이 될 것이지만 구르미가 200살을 산다 해도 그런 날이
올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느끼기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을 듯 합니다.
무중력 상태에서는 기감이 대단히 약해지리라는 것이 제 추측입니다.
이 추측이 체험으로 확인되는 날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무중력 상태란 오행의 상호작용이 서로 상쇄된 것이기 때문에 기감이 대단히 약하게 변할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완전 무중력상태라는 것은 실현불가능하기 때문에 완전한 무오행상태도 역시 불가능합니다.
어떤 무중력상태를 실현하더라도 미약한 오행의 작용은 남아 있을 것입니다.
수련의 정도에 따라서는 이런 약한 오행의 기감도 감지할 수 있겠지만 현저하게 기감이 둔해질 것입니다.
반대로 중력이 점점 강해지는 가속도 상태에서 벽운공을 한다면 기감은 더욱 예민해지고 오행의 작용은 더욱 강할
것입니다. 비행기를 몰 때 급회전이나 급상승, 급하강을 하면 중력이 세져서 최신의 제트전투기라면 지상 중력의
아홉 배, 즉 9G까지도 가속도가 붙습니다.
조종사가 기절하는 경우도 흔히 발생합니다. 이런 가속도의 위력은 엄청난 것입니다.
이 힘은 오행의 질서가 깨지려고 할 때 질서를 유지하려는 힘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만약 가속도(질서를 깨려는 힘)가 한계치를 초과하면 질서는 파괴됩니다. 전투기는 공중에서 산산조각이 날 것이고,
조종사의 혈관은 전부 터져 버릴 것입니다. 이런 질서의 파괴력에 대항하여 질서를 유지하려는 힘이 없다면 가속도
의 발생은 재앙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행의 질서는 유지되려고 하는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한계치까지의 가속도에는 견디게 되는 것입니다.
즉 가속도가 붙는 상태에서는 오행의 상호작용(질서 유지력)이 비례하여 커지고 무중력 상태가 되면 오행의 상호
작용(질서 유지력)이 약화될 것이라는 말이죠.
당연히 기감은 전자의 경우가 더 강해질 것이 틀림없습니다.
지상에서는 쉽게 느낄 수 있던 북두칠성의 기운은 우주 공간에서는 북두칠성과 더 가까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약하게 느껴지거나 전혀 안 느껴질 것입니다.
무중력 상태가 계속되면 우리 몸의 질서가 깨져서 새로운 질서가 자리잡을 것입니다.
만약 1G의 중력에서 살다가 2G의 세상에서 살게되면 역시 우리 인체의 질서는 새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과연 중력이 오행과 연관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무중력 상태와 가속도 상태에서 벽운공을 해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틀림없이 큰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Re..고인의 영가가 화장한 유골에서도 계신지요?
백상님 반갑습니다. 지난 일요일에 본원에 다녀가셨다고 고윤님께 전해들었습니다.
질문하신 내용에 대해서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이 질문에 대답을 하려면 ‘영가’라는 것
에 대한 정의가 먼저 필요합니다.
주로 절에서 천도재를 지낼 때 영가라는 말을 잘 씁니다. ‘영가를 천도한다’는 식으로 말을 하지요.
영가는 한자로 靈駕라고 쓰는데 駕라는 글자는 수레와 같은 탈것을 말합니다.
원래는 천자의 시신을 운반하는 영구차를 뜻하는 글자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망자의 영혼이 담긴 그릇이라는
뜻으로 씁니다.
불교에서 영혼이나 혼백, 혼령과 같은 말이 있는데도 왜 영가라는 말을 쓰느냐 하면 흩어진 영혼을 하나의 그릇 또
는 하나의 차(수레)에 주워 담는다는 의미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망자의 정신적인 기운은 사후에 여기저기에 흩어져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어느 것은 보내고 어느 것은
남겨놓고 하면 안 되니까 그것들을 전부 모아서 하나의 수레에 태워서 보낸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정리해서 말하면 ‘영가’는 여러 군데에 존재하는 망자의 영적인 기운들을 하나의 그릇에 모아서 담아놓은 것입니다.
그것을 좋은 곳으로 보내는 의식이 천도재입니다.
불교에서 왜 혼령이나 혼백, 귀신 등의 말 대신에 영가라는 용어를 쓰는지는 이해하셨지요?
사람이 죽고 나면 그 사람의 의식은 기운으로서 여러 군데에 남아있게 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망자의 시신입니다.
그리고 망자가 입었던 옷이나 아끼던 물건, 늘 몸 가까이 지니고 있던 사물들, 그리고 살았던 집이나 땅, 그리고 자손
의 육신과 정신입니다. 망자가 생전에 애착을 가졌던 정도에 따라 망자의 기운이 고착되는 강도가 비례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생전에 애착을 가지고 집착한 물건일수록 사후에 기운이 떠나지 않고 머무른다는 것입니다.
교통사고를 당해 죽은 사람의 기운은 사고현장에 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망자의 의식이 그 자리에 있어야
가족들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그 자리로 자기를 찾아 올 것이라는)는 원념이 사고현장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은 사고가 난 곳에서 가족들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물론 망자의 의식은 가족들이 찾아와도 모릅니다. 볼 수 없으니까요? 보지도 못하면서 마냥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
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10년, 20년 세월이 흐르면 점차 희미해져서 언젠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날이 오지만 가
족에 대한 집착이 슬픈 귀신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통사고가 난 현장에서 망자의 시신은 옮겨져서 병원으로 갔다가 다시 무덤으로 옮겨지거나 화장이 되겠
지요. 그렇게 되면 무덤 속에 누운 시신에도 망자의 기운이 있고, 사고가 난 현장에도 망자의 기운이 있습니다.
사고가 난 후에 폐차장에 옮겨진 망자의 차에도 망자의 기운이 있습니다.
만약에 사고 당시에 망자가 흘린 피가 시트에 흘렀다면 무덤에 못지않은 기운이 차에 남아있게 됩니다.
망자가 살던 집에도 역시 망자의 기운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많은 곳에 흩어져서 존재하는 망자의 기운들은 망자가
생전에 가장 애착을 갖고 집착했던 순서대로 오래 갑니다. 죽기 전에 모든 욕심과 집착을 다 여의고 열반에 든 스님
이라면 운명하는 순간에 영적인 기운은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게 됩니다. 집착이 없으면 귀신이 남지 않습니다.
사람의 몸은 사람이 살아있을 때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한없이 집착했던 물건입니다.
그 어떤 보물보다 몸을 더 중하게 여기고 애착을 갖기 때문에 망자의 육신에는 가장 강한 집념이 엉겨있어서 떨어지
지 않습니다. 열반에 든 스님이나 부처는 설사 시신을 화장하지 않더라도 시신에는 다만 구성분의 물리적인 기운만
잇을 뿐, 집념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스님이나 부처의 시신은 그냥 물건일 뿐입니다. 욕심을 갖고 집착하던 생명
체의 시신이 아니라 그냥 단백질과 지방과 석회질로 구성된 물건만 남겨놓고 정신적인 기운은 깨끗하게 소멸되어
버립니다.
보통 사람의 시신에는 물질로서의 기운만이 아니라 생명체의 흔적이 강하게 남습니다.
원망과 집착과 한이 서려있습니다. 그것들도 다 일종의 기운입니다.
이런 기운이 살아있는 사람들의 기운과 작용하면 여러 가지 현상을 일으킵니다. 영가를 천도한다는 것은 망자가 남
긴 기운에서 집착을 가라앉히는 것입니다. 집착이 소멸하면 망자의 기운도 소멸됩니다. 집착이 풀어지고 나면 망자
의 시신에 남는 기운은 그저 물질로서의 기운일 따름입니다.
화장을 하게 되면 엄청난 열이 육신에 엉겨있던 망자의 기운을 육신과 분리시킵니다. 불은 화기여서 영적인 기운과
잘 반응합니다. 시신을 태우는 불의 열기가 하늘로 올라가 사방으로 흩어질 때 망자의 집착과 원한과 한도 불기운과
함께 흩어집니다. 그래서 화장을 하고나면 남은 유골에는 망자의 영적기운이 거의 사라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 유골을 잘게 부수어서 뿌리고 나면 망자의 원념도 대부분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망자의 원념이 비단 육신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장소에 있는 기운들은 화장한 시신과 상관없이
그대로 존재합니다. 만약에 화장한 유골을 가루를 내어 뿌리지 않고 땅에 묻거나 단지에 보관하게 되면 이 유골에
흩어져 있던 망자의 기운이 다시 모일 수도 있습니다. 땅 속 깊이 묻으면 땅의 지기인 음기를 받아 다시 기운이 강해
질 수도 있습니다. 매장한 시신의 경우 뼈 한 조각, 머리카락 한웅큼이라도 남아있는 한 망자의 기운은 존재합니다.
망자가 생전에 가장 집착했던 대상을 순서대로 나열해 보면 우선은 자기의 육신이 가장 소중했을 것이고, 그 다음이
즐겨먹던 음식과 술, 담배 같은 기호품들입니다. 제사를 지낼 때 음식과 술을 올리는 이유가 망자의 애착이 가장 강
한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음식과 술의 기운에 감응하게 함으로써 망자의 허기진 욕망을 달래주려는 것입니다.
그 다음이 사람에 따라 순서가 다르겠지만 집과 옷, 그리고 가족입니다. 그래서 아내나 남편, 자식들의 몸과 정신에
는 망자의 기운이 붙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귀신들린 상태로 살아갑니다. 자기 조상의 기운을 갖고 있습니
다. 보통은 기운의 작용이 그리 강하지 않기 때문에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사람의 유전자 자체가 조상의 기운입니다.
이와 같이 산재하는 망자의 영적인 기운들을 전부 모아서 그 기운들에서 집착과 원망과 한을 탈색시키는 작업이 천
도입니다. 그것은 지극히 자유로운 영혼만이 할 수 있습니다. 천도재를 해주는 스님자체가 탐욕과 집착에서 벗어나
지 못한 중생이라면 영가의 천도를 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합니다.
목탁 두드리고 염불한다고 영가의 천도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가를 천도하려면 갈애와 탐욕으로부터 자유
로워진 상태에서 얻을 수 있는 신성한 법력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집착을 다 끊어버린 평온한 기운이 영가의 기운
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스님이 우리나라에 몇 분이나 있을 지 의심스럽습니다.
우리 인생이 고해인 것은 죽은 다음에도 마찬가집니다. 망자의 영적인 기운들도 역시 무상한 대상에 고착되어 있는
이상 고인 것은 마찬가집니다. 산사람처럼 의식하지 못한다 해도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 기운은 존재 자체가 고입
니다. 그래서 빨리 소멸시키는 것이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산사람에게도 좋습니다.
망자가 세상에 남아있는 기운으로서 즐겁고 고통스러운 것과 생전에 지은 업의 과보로서 윤회하고 다시 태어나서
받는 복락과 괴로움은 다릅니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긴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일단 백상님의 질문에 이 정도 답변으로 갈음하려고 합니다.
중성미자가 빛보다 빠르다?
지금 중성미자의 속도가 광속보다 빠르게 나왔다고 세계 과학계가 크게 술렁이고 있는 것을 보면서 그냥 내 생각
하나를 올려봅니다.
빛이 파동이라고 할 때 빛이 전달되기 위해서는 매질이 필요하다고 과학자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빛이 통과하는 매질의 이름을 에테르라고 붙이고 에테르의 존재와 성질을 파악하려고 했었지요.
그런데 결국 에테르는 발견되지 않았고, “빛은 매질없이 전달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빛은 반사, 굴절, 산란을 합니다. 즉 모든 물질과 작용하고 간섭을 받고 진로를 차단당합니다. 물질이 내는 강한 중력
의 영향을 받으면 휘어지기도 합니다. 즉 빛은 다른 물질과 만나면 전진하지 못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기체 속에서도 반사하고 산란하는 것이 빛이어서 물과 같은 액체도 쉽게 통과하지 못하고 바위나 돌, 흙과 같은 고체
에는 부딪힌 그 자리에서 되돌아 나옵니다(반사).
빛은 투과력이 거의 없는 파동입니다. 지진 같은 것이 일어났을 때, 음파는 지구의 반대편까지 도달하지만 용암의
빛은 땅의 표면을 뚫고 올라오기 전에는 감지가 안 됩니다.
1초에 30만 km라는 빛의 속도는 진공이라고 말하는 공간 속을 빛이 달릴 때의 속도입니다.
즉 어떤 매질도 없는 상태에서의 속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빛이 매질 속을 나아갈 때는 속도가 변합니다.
물 속을 뚫고 나가는 빛의 속도는 진공에서보다 느려집니다. 매질이 되는 액체의 종류와 성분, 성질에 따라서 광속은
달라집니다. 대부분의 고체 표면에서 빛은 반사되어버리기 때문에 고체 속을 뚫고 나갈 때의 광속은 측정할 수가
없습니다. 유리는 고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유리는 액체입니다. 단단한 물인 셈이지요.
그래서 유리를 통과할 때의 빛의 속도도 느려집니다.(오래된 사원의 스테인드그라스를 보면 흘러내린 것을 알 수 있
습니다)
반면에 음파는 단단한 고체를 통과할 때 더욱 속도가 빨라집니다. 매질이 단단할수록 음파는 더 쉽게 더 빠르게 더
멀리 전달됩니다.
빛과 중성미자의 속도를 비교하려면 같은 조건에서 측정해야 합니다. 광속은 매질이 아닌 공간에서의 속도인데,
이번에 측정한 중성미자의 속도는 지구의 내부를 관통하며 달린 속도입니다.
중성미자는 워낙 작고 전기적인 특성을 띠지 않기 때문에 어떤 물질과도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빛이 갖는 성질인 반사, 굴절, 산란이 없습니다. 다이아몬드도 중성미자가 볼 때는 진공이나 마찬가지고 무인지경
입니다. 다이아몬드를 구성하는 탄소의 원자핵과 전자 사이의 공간, 탄소 원자와 다른 탄소 원자 사이의 거리는 무
한대의 우주공간이나 마찬가집니다. 우리가 중성미자가 돼서 다이아몬드 내부에 들어왔다고 하면, 주변에 보이는
탄소의 원자핵과 전자들은 지구에서 보는 은하수처럼 멀게 보일 것입니다.
중성미자가 다른 입자하고 충돌할 확률은 지구에 거대한 혹성이 충돌할 확률과 비슷합니다.
수백 킬로미터의 지구 내부를 중성미자는 무인지경처럼 뚫고 지나갑니다. 중성미자의 돌진을 방해하거나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중성미자는 우주 공간을 달릴 때나 지구나 태양 같은 거대한 물질 속을
통과할 때나 조금도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아니, 달라질 것이 없다고 지금까지 과학자들은 생각하고 있는
거지요.
그러나 과연 달라질 것이 없는지는 아직 모른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빛이 물질 속을 투과할 때 속도가 느려지는 것처럼 중성미자가 물질 속을 통과할 때 음파처럼 속도가 더 빨라지는지
는 아직 검증되지 않았습니다.
초신성이 폭발할 때 만들어진 중성미자는 지구에 도달하는 시간이 광속과 똑같습니다.
초신성의 중성미자와 폭발의 섬광은 지구에 동시에 도착합니다. 이것은 관측 결과 확인된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때 중성미자는 물질 속을 통과한 것이 아니라 우주 공간속을 날아온 것입니다.
이번에 세른연구소에서 측정한 중성미자의 속도는 지구 속을 관통하여 달린 속도입니다.
측정의 조건이 다르다고 저는 봅니다.
빛은 중력이 강한 지점에서 더 빨라집니다. 빛이 빨라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느려지는 거지요. 블랙홀처럼 엄청난
중력을 만나면 시간은 정지합니다. 중성미자가 공간 속을 통과할 때보다 물질(지금의 경우에는 지구의 내부)이라는
매질 속을 통과할 때 물질의 중력이 중성미자를 더 빠르게 하지 않나 하는 것이 제 추측입니다.
중성미자가 빨라진 것이 아니라 중성미자의 시간이 늦게 흐른 거지요. 빛이 달릴 수 있는 물질 바깥의 시간이 1초 흘
렀을 때 지구라는 물질 속을 달린 중성미자에는 0.999999999999999999999초가 흘렀기 때문에 그만큼 빨리 반대편 검
출기에 나타난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천안함이 침몰했을 때 초병의 귀에 폭음이 들린 시간보다 지진파계측기에 음파가 먼저 도착한 것과 같습니다.
중성미자가 물질 속을 통과할 때 물질의 중력이 중성미자의 속도에 영향을 주는지 안 주는지 앞으로 물리학계가 검
증해야 할 과제라고 봅니다. 아니라면 중력 이외에 다른 요인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빛과 중성미자를 똑 같은 물질 속을 달리게 해보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겠지만 빛은 물질을 만나면 반사하기 때문
에 불가능한 실험입니다. 그러니까 같은 조건에서 빛과 중성미자의 속도를 비교 관측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같은 조건인 우주 공간 속에서의 속도는 양자가 같다는 것이 이미 증명되어 있습니다.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중성미자가 빛보다 빠르다는 결론은 내리기 어렵다고 봅니다. 이번의 실험과 계측에 실수나
오류가 없다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중성미자가 물질 속을 통과하는 속도는 빛보다 빠르다”가 되겠습니다.
달리 말하면 “중성미자가 물질 속을 통과할 때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가 되겠고요.
반면에 “빛이 물질 속을 통과할 때의 속도는 알 수 없다”입니다. 물질을 투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물리학자는 아니지만 겐또의 대가 아닙니까. 제 추론이 맞는지 안 맞는지 한번 두고 보시자고요.
시간 여행
말씀을 드린 김에 광속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드릴까 합니다. 그리고 광속보다 빨라지면 시간여행이 가능하다
는 이야기가 무슨 소린지 한번 쉽게 설명을 해볼까 합니다. 이 문제는 아무리 쉽게 설명을 한 책을 읽어도 이해가 잘
안되는 것이어서 제대로 설명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냥 심심풀이삼아 해보는 거니까 가볍게 들어주시기 바랍
니다.
광속에 관련된 모든 물리법칙은 한 가지 전제 위에서 성립됩니다. 그것은 관측자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관찰자
시점이 법칙의 근거가 된다는 점입니다.
광속 불변의 법칙이라는 것도 결국 관찰자에게 빛의 속도가 언제나 일정하게 보인다는 관측 결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관찰자가 어떤 방향으로, 어떤 속도로 움직이더라도 그에 관계없이 관찰자에게 보이는 빛의 속도는 언제나 같다는
것이 광속불변의 법칙입니다.
그런데 광속불변의 법칙은 다른 말로 하면 시간가변의 법칙이고 공간가변의 법칙입니다.
관찰자의 운동에 관계없이 광속이 일정하게 보이는 이유는 관찰자의 시간과 공간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빛이 1초에 달리는 거리가 30만 km가 아니라 빛이 30만 km를 달리는데 걸린 시간을 무조건 1초로 하는 것입니다.
그 시간이 아무리 빠르건 느리건 관계없이 무조건 빛이 30만 km를 달리면 1초가 지났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광속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불변일 수밖에 없지요.
빛의 속도가 일정한 대신에 시간이 빨라졌다가 느려졌다 하는 것이고 공간이 줄었다가 늘어났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속 불변의 법칙은 사실 말장난에 가깝습니다.
다만 관찰자에게는 어쨌거나 간에 광속은 불변으로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만약 내가 빛에 가까운 속도로 다른 빛과 나란히 달리고 있다면 그 빛은 아주 느리게 보여야 정상입니다.
그런데도 내 눈에 보이는 빛은 나로부터 매초 30만 km 멀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지금 나한테는 시간이 엄청나게 느리게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빛이 나한테서 30만 km 멀어지려면 다른 관찰자들
한테는 억겁의 시간 만큼 시간이 흘러야 됩니다. 그게 나한테는 1초가 흐른 것입니다.
그러니 내 눈에는 여전히 빛의 속도가 1초에 30만 km를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날고
있는 나한테 영원처럼 긴 시간이 1초로 느껴질까요? 아니면 아주 길게 느껴질까요?
내가 만약 시간을 의식할 수 있다면 나한테는 일상적으로 느껴지는 1초가 흘렀다고 생각됩니다.
나의 의식도 그만큼 느리게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빛에 가까운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나는 엄청나게 폭이 줄어들어
서 내 몸의 두께는 0.111111111111111111111111111mm밖에 안됩니다.
그래서 30만km라는 거리가 아득하게 먼 거리가 되고 맙니다.
다른 관찰자들에게는 30만km지만 나한테는 우주의 끝과 끝 같은 거리가 됩니다. 그 먼 거리를 1초 만에 가야하니까
시간이 얼마나 늘어져야 되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내 몸의 모든 원자들의 진동도 다 느려지고 뇌파도 느려지고 생
리주기도 그만큼 느려집니다. 그래서 나는 시간이 느리게 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느끼지 못하지요.
평소에 느끼는 것과 다름없이 1초가 흘렀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지구상의 다른 사람들한테는 엄청나게 긴 시간이
흐르게 됩니다, 내가 브레이크를 잡아서 멈추어 서게 되면 그동안 나는 엄청난 거리를 달렸기 때문에 내 가족이나
친척들의 얼굴을 볼 수가 없겠지만 나는 불과 몇 초가 흘렀을 뿐인데 그들은 많이 늙었을 겁니다.
만약 내가 가족들이 보고 싶어서 다시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돌아가면 나한테는 처음 출발했다가 다시 돌아갈 때까
지 몇 초 밖에 안 걸렸는데 지구에서는 수십 년이 걸렸을 수도 있고, 내가 움직인 속도에 따라서는 몇 백 년이 흘렀
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광속에 가까운 로켓을 타고 지구를 떠난 것이 2011년 10월 1일 12시였는데 내가 5초 동안 갔다가 다시 5초 걸려
서 돌아왔다면-왕복에 10초-내가 다시 지구에 도착한 시간은 2011년 10월 1일 12시 10초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로켓에서 내려보면 내 가족들은 다 죽고 없고 날짜는 2099년 3월 5일 쯤 될지 모릅니다.
물론 이 도착하는 시간은 내가 광속에 얼마나 가까웠는가에 따라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단, 내가 광속보다
빠르지 않았다면 귀환 시간이 2011년 10월 1일 12시 이전일 수는 없습니다. 몇 시간이건 몇 백년이건 간에 그 시간
보다는 미래의 시간에 나는 돌아옵니다. 그렇다면 내가 광속보다 빠르게 여행을 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만약 내가 광속과 같은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면 다른 빛은 나한테 거의 정지한 상태로 보입니다.
상대 빛이 정지한 것이 아니라 시간이 멈춘 것입니다. 거리가 무한대로 확대된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상대 빛이 나한테서 30만km 멀어지려면 억겁의 시간이 흘러야 됩니다. 내가 빛의 속도와 완전히 같다면
영원의 시간이 흘러도 1초가 안 되는 것입니다. 아직 빛이 30만 km를 못 갔으니까. 그런데 내가 광속보다 더 빨라지
면 어떻게 될까요? 그때 내 눈에 빛의 속도가 어떻게 보일까요?
내가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져서 광속에 가까워질수록 시간은 느려지고 공간은 늘어납니다(상대적으로 나 자신은
축소되고 나의 질량은 무한대로 증가합니다). 이것은 나라는 관찰자한테만 해당되는 이야기고 지구상의 다른 사람
들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건입니다.
내가 움직이는 속도가 어떻게 변하던 여전히 빛은 나한테서 초당 30만 km를 움직이는 속도로 보입니다. 내가 점점
가속해서 광속에 도달하면 시간이 정지합니다. 상대 빛과 나의 상대거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둘 다 멈추어서게 됩니다. 시간이 흐르지 않기 때문에 상대 빛이 나로부터 30만km가 멀어지는데 걸리는 1초의 시간
은 바깥 세상의 영원이 됩니다. 시간이 정지한 것은 나라는 관찰자에게만 일어난 사건이며 바깥 세상은 전혀 상관
없이 시간이 흐르고 해는 뜨고 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더 가속을 해서 빛보다 더 빨라지면 어떻게 될까요? 광속보다 나의 속도가 더 빨라져도 상대
빛과 나 사이의 상대 속도는 여전히 초당 30만km입니다. 내 눈에 보이는 빛은 변함없이 1초에 30만km로 멀어지고
있습니다. 빛보다 빠른 나는 빛을 따라잡아서 추월하기 때문에 빛의 속도는 내가 빨라지는 만큼 느려져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내가 가속페달을 밟아서 빛을 따라잡으려고 해도 빛은 잡히지 않습니다.
빛은 여전히 같은 속도로 나한테서 멀어집니다. 내가 빛을 따라잡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광속은 나한테 변함없는 상대 속도로 관찰됩니다. 1초에 30만km!
내가 속도를 내면 낼수록 나는 과거로 돌아가서 상대 빛과의 속도를 언제나 똑같이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2011년 10월 1일 12시에 출발했는데 광속보다 빠른 속도로 5초 동안 갔다가 다시 5초 걸려서 되돌아왔다면
내가 도착했을 때 지구의 시간은 2011년 10월 1일 12 이전이 됩니다. 2001년 5월 15일일 수도 있고, 1899년 1월 10일
수도 있습니다. 광속보다 얼마나 빨랐느냐에 따라서 나는 어린애인 부모와 만날 수도 있고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중세의 지구에 내릴 수도 있습니다. 나는 출발했을 때보다 10초 이전의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10초 젊어진 내가 출발하기 전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간여행의 원리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광속보다 빠른 중성미자는 세른 연구소에서 출발한 시간보다 더 과거의 시간에 지구 반대편의 검출기
에 나타나야 된다는 소리가 됩니다. 그런데 현재 계측된 상황은 그렇지가 않고 출발한 시간보다는 미래의 시간에 나
타났는데 걸린 시간을 통과한 거리로 계산해보니 빛의 속도보다 빨랐더라는 것입니다.
이 중성미자는 빛보다 빨랐는데도 과거여행을 하지 않고 출발한 시간보다 미래의 시점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이야기
가 됩니다. 그래서 이 중성미자가 미스테리인 것이지요.
지금까지 절대진리의 하나로 인정된 광속불변의 법칙이 깨어진 것일까요? 광속보다 빠른 물체는 과거로 가게 되어
있는데 출발시점보다 미래에 나타났으면서도 속도는 빛보다 더 빠르다면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요?
현재 검출된 중성미자의 상세가 알려지지 않고 제가 가진 정보는 신문에 난 기사 정도이기 때문에 이 이상의 추론이
불가능한 것이 사실입니다. 좀 더 상세한 정보를 접하게 되면 다시 부연을 해드릴까 합니다.
어쨌던 저는 이런 이야기가 참 재미있습니다. 제가 죽기 전에 우주와 물질에 대한 궁극적인 답을 볼 수 있기를 소망
합니다. 제가 오래 살고 싶은 유일한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