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메를로-퐁티는 1961년 5월 3일에 사망했다.
유고 가운데에는 특히 한 책의 첫 부분인 육필 원고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가 타계하기 2년 전에 집필을 시작한 것이었다.
원고에는 《보이는 것고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이 책은 메롤로 퐁티의 유고집이다.
미확정원고와 메모를 클로드 르포르가 정리, 편집하여 1964년에 간행한 것이 이 책이다.
필자의 천박한 이해력과 알량한 깜냥으로 인해서 결국 이 책 자체의 소화를 다음 기회에 미룬다.
서동욱 교수와 황인술 교수의 지혜를 빌어서 아주 소심하게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현상학의 창시자 후설의 사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 꼽으라면 의식의 '지향성(Intentionalität)'이라는
개념이다.
종래에 의식은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것(res cogitans)'이라는 개념에서 보듯 일종의 고립된 사물처럼 다루어져
왔다(저 표현에서 res란 라틴어로 사물(thing)을 뜻한다).
그러나 의식은 고립되어 있지 않고 늘 무엇인가를 향하고 있다.
여러분도 한번 실험해 보라. 눈을 감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함으로써 여러분의 의식이 가 닿는
각종 대상, 상념, 수학적 개념, 물리학적 이론, 기억 등등으로부터 의식을 고립시키려고 해보라.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의식은 잠을 잠으로써 의식 없음(무의식)에 도달할 수는 있을지언정, 깨어있는 의식은 늘 무엇에 대한 의식,
무엇인가를 지향하고 있는 의식이지 그 자체만으로 모든 것과 무관하게는 존재할 수는 없다.
이것이 의식의 지향성이다.
퐁티는 데카르트 코기토의 반성을 통해 주체는 '~으로 향하고 있는' 지향성을 갖는 존재이며,
지향성 주체는 순수의식이 아닌 몸임을 주장하였다.
"살아 있는 주체에게 그 자신의 몸은 당연히 모든 외재적 대상들과 다르다"는 것이 퐁티의 생각이다.
퐁티는 몸과 정신은 분리될 수 없으며, 의식은 몸속에 들어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몸은 단순한 정신의 지시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정신활동 또한 몸속에 스며있으며 몸의 활동에 의해 드러난다.
이러한 몸에 대해 퐁티는 내 몸은 모든 다른 감각적 대상들에 '감각력을 지닌' 대상이라고 규정한다.
나의 몸은 다른 모든 대상들처럼 감각적 성질의 복합체일 뿐만 아니라, 색깔과 소리에 반응하는 감각 주체인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살'은 신체의 모양을 나타내지만 모든 존재자에게 모양을 부여하는 '존재의 원소'라고 말한다.
즉, '살'은 어떤 사물의 본체(本體)인 실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살은 존재의 원소'로 세계가 존재하고
있는 상황 그 자신이며, 지금 여기에 있는 신체의 감각능력이 존재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지각의 현상학에 나오는 구절을 보자. "우리는 결코 무(無) 속에 머물러 있지 않다.
우리는 항상 충만 속에, 존재 속에 있다.
마치 얼굴이 쉬고 있을 때나 심지어 사망해 있을 때도 늘 무엇인가를 표현하지 않을 수 없게끔 되어 있는 것
처럼." 사르트르에게 의식은 아무런 내용도 가지지 않는 텅 빈 '무'였다.
나의 자아나 신체를 비롯해 내용을 지니는 것들은 이 텅 빈 의식이 바라보는 외적 대상들일 뿐이었다.
메를로-퐁티는 반대로 생각한다. 우리는 결코 사르트르가 말하는, 아무런 내용으로도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텅 빈 의식 같은 데서 출발하지 않는다.
애초에 우리는 피할 수 없이 충만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의식이 빠져나간 죽은 얼굴조차 늘 충만한 내용(표정)을 지니지 않는가?
외부의 세계는 바로 프리즘으로 들어오는 빛이 굴절되어 들어오듯 이 충만한 내용과 뒤섞이며 우리 의식에게
주어진다.
외부 대상이 우리에게 의식되는데 불가결하게 개입하는 조건인 이 충만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몸'이다.
▣ 세잔의 생 빅투아르 산
현상학자 메를로 퐁티는 '생 빅투아르 산'의 모습을 변주해 여러 편을 화폭에 옮긴 세잔의 풍경화에서 예술의
본질을 포착하려 했다.
그는 세잔의 작품은 끊임없이 그 "심층부를 파면서, 사물들의 흥분되고 불가해한 발생"을 회복시키려 한다며,
폴 세잔은 예술이 사유에 이를 수 있는 '표현'이나 ' 언어'라는 사실을 꿰뚫고 있었던 작가로 평한다.

[ Mont Sainte-Victoire seen from Bellevue, 캔버스에 오일, 1885년경. <출처 : WikipediA> ]

[ Mont Sainte-Victoire, 종이에 watercolor, 1887년. <출처 : WikiART> ]

[ Mont Sainte-Victoire with Large Pine, 캔버스에 오일, 1887년경. <출처 : WikipediA> ]

[ Mont Sainte-Victoire, 캔버스에 오일, 1887년. <출처 : WikiART> ]

[ Mont Sainte-Victoire, 캔버스에 오일, 1890년경. <출처 : WikiART> ]

[ Mont Sainte-Victoire, 캔버스에 오일, 1897년. <출처 : WikiART> ]

[ Road near Mont Sainte-Victoire, 캔버스에 오일, 1902년. <출처 : WikiART> ]

[ Mont Sainte-Victoire, 종이에 watercolor, 1902년. <출처 : WikiART> ]

[ Bathers. Mont Sainte-Victoire in the Background, 종이에 watercolor, 1902년경. <출처 : WikiART> ]

[ Mont Sainte-Victoire, 종이에 watercolor, 1903년경. <출처 : WikiART> ]

[ Mont Sainte-Victoire, 캔버스에 오일, 1902년-1906년. <출처 : Wikimedia Commons> ]

[ Mont Sainte-Victoire and Chateau Noir, 캔버스에 오일, 1904년-1906년. <출처 : Wikimedia Commons> ]

[ La montagna Sainte-Victoire, 1905년. <출처 : WikipediA> ]

[ Mont Sainte-Victoire Seen from les Lauves, 캔버스에 오일, 1905년. <출처 : WikiART> ]

[ Mont Sainte-Victoire, 캔버스에 오일, 1906년경. <출처 : WikiART> ]

[ Mont Sainte-Victoire, 캔버스에 오일, 1906년경. <출처 : WikiART> ]

[ Mont Sainte-Victoire Seen from les Lauves, 캔버스에 오일, 1906년경. <출처 : WikiART> ]

[ 프랑스 남부지역 엑상프로방스 지역에 있는 생 빅투아르 산의 실제 모습. <출처 : Wikimedia Commons> ]
'의식'의 맹점
의식이 보지 못하는 것, 의식이 그것을 보지 못함은 원리적인 이유에서이다.
즉 의식이 그것을 보지 못함은 의식은 의식이기 때문이다.
의식이 보지 못하는 것, 그것은 의식 속에서 잔여(물)의 시각을 준비하고 있는 (그)것이다(망막 안에서 시각을
가능하게 할 섬유들이 주변으로 산포되는 그 출발점에서 망막은 맹목이듯이.) 의식이 보지 못하는 것, 그것은
곧 의식이 보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바로 그것이요, 그것은 의식의 조재에의 엮임이며, 의식의 신체성이고,
세계가 보이는 것이 되게 하는 실존 범주들이거니와, 또한 대상의 출생 장소인 살이다.
의식이 기만당하고, 전도되며, 간접적인 것을 불가피하다.
원리적으로 의식은 사물들을 다른 쪽 끄트머리에서 보며, 원리적으로 의식은 존재를 무시하고 존재보다도
대상을, 즉 의식이 연을 끊은 한 존재를, 그리고 의식이 그러한 부정을 부인하며 그러한 부정 저너머에 설정
하는 한 존재를 더욱 좋아한다 ㅡ 의식은 존재 안에서 존재의 비-은폐성을 알지 못한다.
즉 긍정적인 것에 속하지 않은, 저 먼 곳들의 존재로 있는, 매개되지 않은 현전을 알지 못한다. (p.3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