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1>
ㅡ 사물(四物)놀이(金德洙 傳)ㅡ
(우리가 우리 것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댓글주시면 교정하겠습니다.
일시/ 2020.5.28(목)-31(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M시어터
극본/ 이동연. 연출/ 박근영
출연/ 김덕수 사물놀이단
주최/ 세종문화회관. 현대차 정몽구재단
주관/ 한국예술종합학교 산학협력단
이번 사물놀이 공연을 보려고 했다.
첫공연을 마치고 정부지침에 따라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후속조치로 행사자제! 방역조치인 공공시설 운영중단으로 <김덕수傳>은 취소 되었지만, 오늘 29(금). 19:30 네이버 TV를 통해 온라인 공연을 생중계 한다고 합니다.
아울러 필자가 작성한 <컬럼>을 참고해 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ㅡ 이 작품을 음악극으로 극본을 쓴 이ㄷ연교수의 초청으로 모처럼 20여년 동안을 필자는 뮤지컬 기획담당(실장)으로 근무했던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관극(觀劇)하려고 했었는데~ 기록으로 글이라도 남기려고 한다.
사물(四物)하면 2쇠(쇠.징)와 2가죽(장고.북)의 만남이다. 원래는 법고(法鼓), 운판(雲板), 목어(木魚), 범종(梵鐘)를 4개의 불교용어를 말할 수 있으나 무대공연으로 78년도 발표 공연을 함으로서 사물놀이가 정착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필자가 77년도 미국 30개 주립대학을 순회하고, 78년 CIOFF에서 초청받아 유럽을 순회하고 있을 때~
돈화문 옆 "공간사랑" 에서 사물놀이(김ㄷ수, 김ㅇ배, 이ㅈ대ㆍ이ㄱ수), 최태ㅌ현(최ㅈ실), 가나다순), 무대공연으로 민속학자 심우성(沈雨晟)씨가 탄생시킨 글씨(四物놀이)를 무대장치로 세워놓고 발표공연을 했다.
이후 사물놀이는 풍물(農樂)에서의 삼도(경기, 영남, 호남/신라. 백제.
고려?) 타악가락으로서 다스림->오채질굿->우질- 좌질-> 풍류-> 굿거리-> 덩더궁-> 별달거리-> 자진가락-> 짝쇠-> 휘모리 등 보편적으로 20분 내외로 구성되어 끝맺음 하게 된다.
그러나 이번 공연은 음악극으로 준비했다고 했다.
사물놀이는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아 타악으로서 자리매김을 하였다.
1982년 미국 달라스에서 열린 강ㅁ석이 함께한 세계타악인대회(PASIC) 금탑수상한 계기로 그 이름을 전세계적으로 알려졌다.
뉴욕타임스은 "세계를 뒤흔든 혼의 소리" 라 했고 뉴욕필의 모리슨은 "내가 진짜 위대한 음악을 오늘 봤다."
그후 두 분은 국악원? 정년을 마치고
김ㄷ수는 한예종(한울림예술단장), 이ㄱ수는 원광대(민족음악원장), 최ㅈ실은 중앙대(중앙타악단장)에서 교수로 활약하여 정년을 했다. 그러나 김ㅇ배는 국악원에서 근무하다가 안타깝게도 故人이 되었다.
풍물(農樂)은 야외공연으로 처음 시작은 문굿(비나리)으로서 고사소리 덕담, 축원 등, 시작 前에 진행되었고 판굿으로 끝을 맺게 된다. 판굿은 마당에서 꾼들이 사방으로 움직이는데 선반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략적으로 상모는 채상모와 부포상모를 말할 수 있는데 전립(戰笠: 벙거지, 벙테기)이라고 하여 전쟁 중에 무관(武官)의 전복(戰服)에 착용했던 것을 쓰고 사용한 것을 인용한 것으로 자반뒤집기와 12발로 끝맺음을 하게 된다. 정규군이 부족할 때 농민들이 함께 전쟁에 참여했다는 설도 있는데 기본적으로 天地人의 三才의 전문 유랑예인집단(男寺堂)에 의해 전수해 오게 되었다.
요즘에 와서 타악전공자들에게 크게 영향을 주었고 현대에 와서 사물을 활성화, 대중화 시키는 계기가 되어,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다양한 장르와 결합하는 공연도 시도했던,
서태지와 아이들, 국악관현악과 신모듬, Jazz그룹과 Rock구룹과 만남!으로 대중화를 이루고 있고 세계화 되어 있다.
이번 공연을 준비한 김ㄷ수 명인과 출연자와 스태프에게 수고의 박수를 보냅니다. 최창주 <평론가. 남예종 석좌교수>
참고자료 (남지은 기자 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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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김덕수일까? “5살때부터 지난 63년, 신명나게 살았잖아” 다음은 남지은기자 인터뷰 내용이다.
63년간 지치지 않고 예인의 길을 걷게 한 힘은 물을 필요가 없었다. 첫 느낌처럼 “하루하루가 신명 났기 때문”이다. “63년 전 일이지만 어제처럼 생생해요. 1957년 추석 다음날이었어. 아버지가 어디론가 데려갔어. 큰 가마솥, 장국밥, 환호하던 사람들…. 장터의 생동감 넘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해.” 도착한 첫날 그는 어른 세명 위에 올라타 ‘무동’이 됐다. 5살(우리 나이 6살) 어린아이가 낯선 장소에서 무섭지 않았을까. “너무 좋았어요. 어른 세명 위까지 올라갔어. 내가 4층 꼭대기에서 밑을 다 내려다보는 거야. 무동이 최고 인기였던 시절이지요. 한 시간 이상 했어요. 새미놀이라고 하는데, 내가 새미야. 신명 났지.”
첫 기억의 좋은 느낌은 63년 동안 바뀌지 않았다. “아버지가 원한 분신으로 살았다”지만, 아쉬움이 생길 틈 없이 예인으로서의 인생은 특별했기 때문이다. 그는 7살 때인 1959년 빼어난 장구 실력을 뽐내며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았고, 중·고교 때는 한국민속가무예술단과 리틀엔젤스예술단원에 뽑혀 전세계를 누볐다. “국민(초등)학교 6년 전체 출석 일수가 300일도 안 돼. 학교에 너무 안 가니 3학년 때인가 어느 날 퇴학을 당했어. 근데 그즈음 대통령배 대회에서 1등을 했거든. 별 두개 장군이 불러 어느 학교 다니냐고 묻길래 잘렸다고 했더니 바로 복학시키더라고. 하하하.” 옛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들려주는 표정이 개구진 아이와 같다.
타고난 끼에 기대어 영광에 취했다면, ‘김. 덕. 수’ 이름 석 자는 사라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호의호식하는 대신 사라져가는 전통을 지키는 데 재능을 쏟았다. 1978년 사물(꽹과리·징·장구·북)놀이를 만든 것도 풍물이 저물던 때에 그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서였다. 전통은 고루하다는 편견이 생길까 봐 시대 흐름에 맞춰 줄곧 변화를 꾀했다. 1983년 서울시향과 최초의 사물놀이 협주곡을 연주했고, 2010년엔 디지털과의 접목도 시도했다. “전통을 발전시키는 게 내 숙명이라고 생각해요. 사물놀이를 전세계에 전파하겠다는 것도 삶의 목표였죠.” 1982년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열린 ‘세계타악인대회’에 참가해 사물놀이를 세계에 처음 선보였고, 2017년 일본에서 남북 국적 예인을 아울러 만든 ‘하나로 사물놀이단’은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
무엇보다 김덕수의 역사는 우리 근현대사를 관통한다. 지난 60여년간 시대의 울분 속에 늘 그가 있었다. “정치적 이념은 없다”지만 “풍물은 기본적으로 민초의 풀뿌리 문화이기에 시대를 대변하고 저항의 의미를 담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 소리가 가장 힘차게 울려 퍼진 건 1987년이었다. 이한열 열사의 추모 굿을 겸한 공연 <바람맞이>에서 춤꾼 이애주는 소복을 입고 사물놀이에 맞춰 물고문과 불고문을 표현했다. “잡혀갈 각오를 하고 공연했어요. 양심에 의한 거였지. 이거는 해야 한다.” 지금은 그의 상징이 된 수염도 그때부터 기른 저항의 표시였다.
하지만 사물놀이 인기도 예전 같지 않다. 2017년 9월1일 그가 설립한 사물놀이 전용 극장 인사이트홀은 문을 닫았다. 김덕수의 후예가 곳곳에서 활동하지만, 그를 뛰어넘을 만한 차세대 스타는 없다. 그는 “난장 문화를 재생산하고 재창조할 수 있는 전용공간이 없는 것은 아쉽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복 받은 삶”이라고 했다. 이날 들려준 ‘김덕수의 63년’은 오는 28~31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상연하는 음악극 <김덕수전>에 오롯이 담긴다. 이동연 한예종 전통예술원 교수가 그의 삶을 극본으로 썼고, 박근형 연출이 극으로 빚었다. 세종문화회관이 명인의 가치를 조명하기 위해 기획한 시리즈로, 지난해 명창 안숙선에 이은 두 번째다. 그는 “<김덕수전>을 제안받고서야 세월이 참 많이 흘렀다는 걸 실감했다”고 한다. “5살 이후 난 늘 같은 곳에서 신명 나게 놀고 있었으니까 시간이 흐르는지도 몰랐어요. 한순간인 것 같아.” 그는 이번 작품을 준비하며 “처음으로 인생에 중압감이 생기더라”면서도 “지난 인생을 돌아보게 된 게 가장 큰 성과”라고 했다. 어떤 생각을 했느냐고 물으니 눈망울이 잠시 그윽해진다. “참 부끄럽다는 생각. 많은 인연이 있었는데, 그들의 사정에 좀 더 귀 기울였으면 어땠을까….” 그 사연도 극에 담긴다. 그가 다시 웃음을 찾으며 말했다. “앞으로도 계속 신명 나게 살 겁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기자님의 승인 없이 글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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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한국예술종합학교 연희학과에서
명인과 함께한 세월이 보람스럽고 든든히고 감사했습니다. 2020.5.29.
최창주 前 한예종교수 연희학과장.
現 남예종 석좌교수,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