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쉐#정체성
나는 누구인가요? Who am I?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야 합니까?" 모쉐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나오게 할 수 있을까요?" (출 3:11)
표면적으로 그 의미는 분명합니다. 모쉐는 두 가지를 묻고 있습니다. 첫째, 나는 누구인가, 그토록 위대한 사명을 감당할 자격이 있는가? 두 번째는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두 번째 질문에 응답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성공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너에게 혼자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너에게 그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내가 너를 위해 할 것이다. 나는 네가 나의 대리인, 나의 대변인, 나의 사자, 나의 목소리가 되기를 원한다.
하나님은 첫 번째 질문에 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마도 모쉐는 자신의 방식으로 스스로 대답했을 것입니다. 타나크 전체에서 가장 적합한 것으로 판명된 사람들은 자신이 전혀 합당하지 않다고 부인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의 사명을 맡았을 때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다'(사 6:5)라고 말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나는 어린아이라 말할 수 없다'(렘 1:6)라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다윗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모쉐의 말을 되뇌었습니다(사무엘하 7:18).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요나는 도망치려 했습니다. 라쉬밤에 따르면 야곱은 밤에 씨름하던 사람(천사)에 의해 길이 막혀 도망치려던 중이었습니다(라쉬밤 창 32:23).
토라 속의 위대한 사람들은 그리스 신화나 다른 신화에 나오는 인물과는 다릅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명성을 얻기로 결심한 운명론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리스인들이 메갈로피키아라고 부르는 자신의 가치에 대한 적절한 감각, 즉 우아함과 우월감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튼이나 옥스퍼드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통치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대신 그들은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도덕적 삶의 영웅이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모쉐, 엘리야, 예레미야, 요나는 죽고 싶다는 기도를 할 정도로 절망에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이 있었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그 일을 해냈습니다. 마치 작아짐이 위대함의 표징인 것처럼.
그래서 하나님은 모쉐의 "왜 나입니까?"라는 질문에 답하지 않으셨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답이 드러났습니다.
질문 안에는 또 다른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단순히 가치에 관한 질문이 아닐 수 있습니다. 정체성에 관한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하라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산에 홀로 선 모쉐는 그 말을 할 때, 하나님에게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또한 자신에게 묻고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두 가지 가능한 답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모쉐는 이집트의 왕자였습니다. 그는 파라오의 딸에게 아기 때 입양되었습니다. 그는 왕궁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이집트인처럼 옷을 입고, 이집트인처럼 보이고, 이집트인처럼 말했습니다. 그가 거친 목동들로부터 이트로의 딸들을 구해 주었을 때, 딸들은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에게 "이집트 사람이 우리를 구해 주었다"라고 말했습니다(출 2:19). 모쉐라는 이름은 바로의 딸이 그에게 지어준 이름입니다(출 2:10). 아마도 이집트 이름이었을 것입니다(사실 '모쉐'는 '람세스'와 마찬가지로 고대 이집트어로 "아이"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토라에 나오는 모쉐 이름의 어원은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냈다"라는 뜻으로, 히브리어 사용자들은 이 단어가 어떤 의미였는지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첫 번째 답은 모쉐는 이집트의 왕자였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가 미디안인이라는 점입니다. 그는 이집트에서 자랐지만 어쩔 수 없이 떠나야만 했습니다. 그는 미디안에 집을 짓고 미디안 제사장의 딸인 찥포라라는 미디안 여인과 결혼하여 그곳에서 조용히 양치기로 "만족하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그가 그곳에서 얼마나 많은 세월을 보냈는지 잇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이집트를 떠났고, 사명을 시작했을 때 이미 80세의 나이로 파라오 앞에 처음 섰습니다(출 7:7).
그는 성인 생활의 압도적인 대부분을 미디안에서, 한편으로는 이스라엘 백성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집트인들과 멀리 떨어져서 보냈던 것입니다. 따라서 두 번째 답은 모쉐가 미디안 사람이란 것입니다.
따라서 모쉐가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 것은 단순히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느끼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느낍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유대인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민족의 운명을 겪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대인으로 성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을 유대인으로 인정할지조차 의심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그들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더 깊이 들어가면, 그는 왜 그들의 지도자가 되려고 생각했을까요?
이집트에서 노예로 지내는 이스라엘의 운명은 그의 운명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운명의 일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것에 대한 책임이 없었습니다. 그는 그것으로 고통받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는 이스라엘 노예를 괴롭힌 이집트인을 죽이고, 다음 날에는 이스라엘인 두 명이 서로 싸우는 것을 막으려는 등 실제로 그들의 일에 개입하려 한 적도 있었지만, 그의 개입은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누가 당신을 우리를 다스리고 심판하게 했습니까?" 그들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이 모쉐에게 한 최초의 기록된 말입니다. 모쉐는 아직 지도자가 되겠다는 꿈을 꾸지 않았는데, 이미 그의 리더십은 도전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제 모쉐가 인생에서 직면했던 선택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한편으로 그는 이집트의 왕자로서 호화롭고 편안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의 고난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그의 운명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쩔 수 없이 도망쳐 나온 후에도 그는 결혼한 미디안 가족과 평화롭게 목자로서 조용히 여생을 보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자유로 인도하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그가 거부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받아들였을까요? 하나님은 그가 그 일에 적합한 사람인 것을 어떻게 아셨을까요? 첫 아들의 이름에 한 가지 힌트가 담겨 있습니다. 그는 "나는 이방 땅의 나그네"라고 말하며 그의 아들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불렀습니다(출 2:22). 그는 미디안에서 집처럼 편안함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곳은 그가 있는 곳이었지만, 그는 그곳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짜 단서는 첫 번째 개입의 전주곡인 앞 구절에 담겨 있습니다. "모쉐가 장성하여 자기 백성에게 나가서 그들의 고된 노동을 보았더니" (출 2:11).
이 사람들은 그의 동족이었습니다. 겉모습은 이집트인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궁극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모압인 룻이 이스라엘인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당신의 백성은 나의 백성이 되고 당신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리라"(룻 1:16)라고 말했던 것과 다르지 않은 전환의 순간이었습니다. 룻은 태어날 때부터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모쉐는 자랄 때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고통을 보고 고통받는 사람과 동일시하면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랍비 요셉 솔로비칙은 이를 운명의 언약, 브릿 고랄(brit goral)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오늘날까지 유대인 정체성의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믿는 유대인과 믿지 않는 유대인이 있습니다. 실천하는 유대인과 그렇지 않은 유대인이 있습니다. 하지만 동족이 고통을 당할 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외면할 수 있는 유대인은 거의 없습니다.
마이모니데스는 이를 "공동체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는 것"(poresh mi-darchai ha-tsibbur, 힐콧 테슈바(Hilchot Teshuva) 3:11)이라고 정의하며, 이는 다가올 세상에서 몫을 받지 못하는 죄 중 하나라고 말합니다. 하가다(Haggadah)가 악한 아들에 대해 "집단에서 자신을 배제함으로써 신앙의 근본 원칙을 부정한다"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유대 신앙의 기본 원칙이란 무엇인가요? 유대 민족의 집단적 운명과 그 운명에 대한 믿음입니다.
나는 누구인가요?
모쉐는 물었지만, 마음속으로 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집트인 모쉐도 아니고, 미디안인 모쉐도 아닙니다. 내 백성이 고통받는 것을 볼 때 나는 유대인 모쉐일 뿐이며,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책임을 부과한다면, 그 책임을 짊어져야 합니다.
내가 나다울 수 있는 것은 내 백성들이 그들이기 때문입니다. (For I am who I am because my people are who they are.) 이것이 예나 지금이나 유대인의 정체성입니다.
이상은 Rabbi Lord Jonathan Sacks의 ”Future Tense and The Great Partnership.“에서 발췌하여 게재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누구입니까?“
글: <월간샤밧> 편집장
※ <월간샤밧> 블로그 자료실이 업데이트 되였습니다. 많은 이용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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