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7월4일자 ‘염화실 탐방’대담 : 향봉스님(편집국장)
팔만장경이 禪이요
삼처전심이 교학
불국선원 개원은
흰종이에 먹칠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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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수행자의 길을 걸으며 정화불사와 종단발전을 위해 노력한 월산스님. |
이번 염화실(拈花室) 탐방은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오현, 정휴 두 분 스님이 대구에서 불국사까지 동행해 주었다. 파안대소(破顔大笑)를 인색치 않게 나눌 수 있는 글 쓰는 도반 스님들이고 보니 월산(月山) 조실(祖室) 스님이 계신 불국선원(佛國禪院)의 염화실엔 씨줄 날줄로 엮어가는 진한 생명의 타는 불꽃이 해바라기처럼 피어올라 더욱 좋았다.
“처처(處處)가 안락국(安樂國)이지. 마음이 고요하면 삼계가 다 고요하고 한생각이 일어나면 수미산 바람소리가 요란하지…”
속리산 법주사 계실 때와 토함산 불국사 계실 때와 생활의 변화를 묻는 정휴스님의 질문에 스님께서 답하신 말씀이다.
월산스님께서 10여년 전 법주사 주지 스님으로 계실 때 정휴(正休)스님이 전문강원(專門講院)의 강사(講師)를 맡아 스님을 모시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정휴스님의 또 다른 질문이 <벽암록(碧岩錄)>의 <운문끽구자(雲門喫拘子)>로 옮겨간다.
-벽암록에 보면 부처님께서 천상천하(天上天下)에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고 말씀하신데 대해 운문스님께서는 ‘만일 내가 그때 부처님 곁에서 그 말을 들었더라면 한 방망이로 부처를 당장 죽이어 주린 개에게 던져 주어 세상을 진정 태평케 하리’라는 기록이 있는데요. 스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격외(格外)도리의 함정에 운문(雲門)마저 빠진 꼴이야.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얘기야. 그때 내가 있었다면 운문스님께 한마디 해 줄걸 그랬어…. 하하하”
큰스님의 웃음이 온 방안을 날아다니며 기자의 땀 지린 속옷고름까지 가볍게 흔들어주는 통쾌하고 시원스러운 대소(大笑)이다.
“그런데 요즘 선(禪)을 수구(修究)한 적도 하지도 않은 자들이 그럴듯하게 오도송(悟道頌)을 지어 맞추고 입으로는 선(禪)의 경지(境地)에 금세 도달한 듯한 언어를 부끄럼 없이 쓰고 있으니 탈이야.”
삼처전심(三處傳心)을 운운(云云)하면서 정휴스님이 부처가 되지 않았나 착각할 정도로 선법문(禪法問) 흉내에 접어들자 스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옆에 있던 오현스님이 한 마디 않을 수 없던 모양이다.
-정휴가 그 좋은 예의 표본실의 청개구리지요? 스님께서 방금하신 말씀은 향봉이나 저에게는 해당이 없는 정휴 혼자서 감내(堪耐)해야 할 말씀이지요?
그리하여 방안은 또한 파안대소(破顔大笑)의 꽃무지개가 번갯불처럼 번뜩인다. 용광로처럼 불꽃 충만한 큰스님의 법음(法音)은 선교일여(禪敎一如)로 옮기어가고….
“착별지(着別地)와 무착별지(無着別地)라는 말이 있지. 둘 인걸로 생각지만 덩이는 하나야. 꽃이 피고 잎이 되는걸 보고 둘로 착각할는지 모르나 꽃과 잎을 이룬 근본 요소는 하나거든.
교(敎)와 선(禪)을 양분하여 둘로 보나 팔만대장경이 곧 선(禪)이요 삼처전심이 학(學)임을 알아야합니다. 지풍광(地風光)의 심외별전(心外別傳)이 따로 어려운데 있는 게 아니고 평상심(平常心)이 이 바른 도(道)요 번뇌(煩惱)가 곧 이 보리(菩提:지혜)듯이 선(禪)을 불심(佛心)으로 교(敎)를 불언(佛言)으로 율(律)을 불행(佛行)으로 귀결처(歸決處)의 일치를 찾을 수 있는 게야.”
스님의 말씀이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지극히 깊은 웅덩이의 생명수를 우리의 목마름에 부어주시는 것인 줄 알면서도 기자는 조심스레 대화의 또 다른 문을 열어 보았다.
-해인사 방장이신 성철스님을 뵙게 되면 항시 3000배를 말씀하십니다. 스님께서는 3000배를 한 뒤에야 화두(話頭)를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어떤 글 쓰는 분은 성철스님의 3000배를 ‘굴신운동(屈身運動)’으로 가볍게 받아들였으나 저의 생각은 또 다릅니다. 3000배는 성철 큰스님께서 화두(話頭) 이전에 주신 화두임이 분명하며 3000배 그 자체가 그대로 해인사 방장 스님 특유의 창안(創案)하신 살아있는 화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통도사 극락암 조실 스님이신 경봉 노스님의 미소(微笑) 그 자체가 노스님께서 계신 삼소굴(三笑窟)과 합일되어 크나큰 화두로 저희에게 다가서듯이 성철스님의 3000배는 그런 의미에서 굴신운동 (屈身運動)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화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선(禪)의 미학(美學)과 화두(話頭)의 정의(定義)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요?
“선(禪)이란 모든 대의(大義)를 매조지하는 것이요, 화두란 의심처를 알아내는 하나의 열쇠야. 생명의 열쇠로도 볼 수 있지. 편집국장의 안목이 다르군 그래. 살불살조(殺佛殺祖)할 선사(禪師)아니면 말 못하겠군. 하하하.”
“공안(公案)이 똑같다면 하나로도 족할 텐데 전등염송엔 1700공안이 담겨 있음을 중요시해야합니다. 요즘 할(喝)이 너무 흔한데 <삼처전심(拈花示衆·多子塔前分半坐·廓示趺)>의 낙처(落處)를 모르고서는 몽둥이(棒)와 할(喝)이 죽은 것이며 삼처전심(三處傳心)의 귀결처(歸決處)가 따로 있음을 가릴 줄 알아야 합니다. <화엄경>의 종상(種相)과 별상(別相)이 합일(合一)되는 일절처(一切處)를 알아내는 것도 선(禪)일수 있는 것이지요. 빛의 광선(光線)이 수수 천 갈래로 보이나 근본요소는 하나뿐이니까. 마치 동그라미를 그려놓으면 처음과 끝이 없는 것처럼….”
-지난 달 불국선원(佛國禪院)의 개원은 어떤 의미에서는 한국불교 선종사(禪宗史)에 새로운 선을 그은 게 분명합니다. 재래식 한국선원의 장점과 중국 총림선원의 장점을 적절히 절충하여 선불도량(選佛道場)의 면모를 혁신 시킨 것으로 매우 의의가 깊고 크다고 하겠습니다. 스님께서 불국선원의 원장 스님으로서 한 말씀 해주시지요. 요즘의 심경(心境)도 곁들여주시고요.
“흰 종이에 먹물 칠한 게나 다를 바 없지. 지금 내 기분은 시방세계(十方世界)가 내 뱃속에 들어있는 느낌이지… 하하하.”
-스님의 배는 그럼 어느 세계에 있는 것인지요? 시인 오현스님의 재치와 위트 넘친 한마디에 방안이 또 한 번 환한 꽃 비늘로 충만하여 파안대소(破顔大笑)하는 가릉빈가의 날개깃이 화사롭게 너울댄다. 오가종풍(五家宗風)이 언젠가는 다시금 도래(到來)하여 선풍이 휘날릴 날이 있을 것을 스님께서는 힘주어 말씀하시며 조계종조도 언젠가는 뚜렷이 가려져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스님께서 직접 불국선원까지 안내해 주신다. 스님께 인사드리고 산문 밖으로 빠져나오는 우리 귓전에 또 하나의 스님의 말씀이 길을 밝힌다.
“시방세계일집안(十方世界一集眼)하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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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문 전신 대한불교 655호(1976년 7월4일자)1면 ‘염화실 탐방’에 실린 월산스님 인터뷰 기사. |
■ 월산스님은…
1913년 5월1일 함경남도 신흥군 원평면 원평마을에서 태어난 월산스님은 엄격한 가정교육과 서숙(書塾, 서당)을 거쳐 신학교에서 학문을 익혔다. 부친 별세 후 무상(無常)을 절감, 구도의 길에 올라 안변 석왕사와 치악산 상원사를 거쳐 도봉산 망월사에 이르러 1944년 춘성스님의 안내로 금오(金烏)스님을 친견한 후 출가 수행자의 길에 들어섰다.
해방을 전후해 덕숭산 만공(滿空)스님 회상에서 정진을 거듭하고 금봉(錦峰)ㆍ금오ㆍ전강(田崗)스님 등 당대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아 수선 안거한 후 가르침을 더욱 견고히 하기 위해 3년간 운수행각에 나섰다. 1948년 문경 봉암사에서 향곡 청담 성철 보문 자운스님등과 함께 결사 수행을 시작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은사 금오스님을 모시고 정화불사에 나서 팔공산 동화사, 속리산 법주사, 설악산 신흥사, 오대산 상원사, 태백산 각화사의 도량을 일신했다. 1968년 금오스님이 입적할 당시 “모든 일은 월산에게 부촉(咐囑)하노라”며 법을 전했다.
스님은 법주사 불국사 금산사 대승사 불영사 등 제방 선원의 조실로 추대되어 수좌들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했다. 1968년과 1978년 조계종 총무원장에 취임에 이어 1986년 원로회의 의장으로 불자들의 정신적 지주로 법등(法燈)을 밝혔다. 평생 수행자의 길을 걸으며 정화불사와 종단발전을 위해 노력한 월산스님은 1997년 9월6일 오후8시10분 경주 불국사 선원 염화실에서 임종게를 남기고 원적했다.
廻廻一生 일생을 돌고 돌았으나
未移一步 한 걸음도 옮긴 바 없나니
本來其位 본래 그 자리는
天地以前 하늘 땅 보다 먼저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