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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세~1세까지의 기간이다. 이 나이 때 아이는 엄마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다. 아기는 본인이 원하는 것을 일관되게 얻고자 하며 무엇보다 자신의 안전이 보장되어야만 안심할 수 있다. 즉 이 시기에 부모가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주어야 향후 어른이 되었을 때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감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엄마조차 믿지 못했던 이들이 다른 누구를 믿을 수 있겠는가.
만약 이 시기에 엄마가 너무 바쁘거나 병으로 인해 곁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을 경우, 혹은 이혼이나 부부간의 갈등으로 엄마의 부재를 경험한다면 그 사람은 원초적인 생존에 있어 항상 무의식적 불안에 시달리는 어른이 될 수 있다.
만1~2세에 해당되는 이 시기는 막 걷기 시작하며 세상을 돌아다니고 경험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이전과는 달리 본인의 두 팔과 다리로 해보고 싶은 것이 너무 많은데, 어떤 부모는 과도한 걱정과 불안으로 지나친 통제를 하려고 한다. 아이가 멀리 나가려 하거나 새로운 물건을 만지는 것, 움직이는 것 등을 너무 과하게 혼내거나 겁을 주면 아이의 마음엔 수치심과 의심의 싹이 자란다.
실제로 한국의 많은 엄마들이 이런 실수를 한다. 자신의 아이가 너무나도 소중하기에 온실 속에 가둬놓고 키우는 것이다. 우리 아이가 티끌만큼도 다치지 않게, 소중히 키우려는 노력이 오히려 아이의 성숙을 방해하는 모순이다. 아이는 본인의 자율성이 과도하게 침해 받으면 이렇게 생각하게 되어버린다.
엄마가 나를 믿지 못하는구나.
나는 부족하구나, 뭔가 문제가 있어.
즉, 본인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만 3~5세경, 우리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간다. 인간이 처음으로 부모의 품을 벗어나 가족이 아닌 사람들과 만나고 소통하는 시기다. 이때 우리의 세계가 확장된다. 처음으로 사회화를 경험하게 되는데 인정과 공감을 얻을 수도 있지만 타인과의 관계에서 두려움과 불안을 겪을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시기에 부모의 역할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슬프지만 현시대를 사는 우리나라 엄마들은 이 시기에 아이들을 영어유치원에 보내고 선행학습에 투자한다. 이 시기는 외국어보다는 한국어 발달에 집중해야 한다. 다른 아이보다 똑똑하게 키우겠다는 욕심에 아이에게 첫걸음부터 과도한 부담을 짊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초등학교 시절이 이 단계에 해당된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타인과의 경쟁이 시작된다. 잘하는 아이는 상을 타고 1등을 하고 선생님과 부모의 칭찬을 받겠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는 혼나고 열등감을 느끼게 된다. 노력한 만큼 좋은 결과가 나와 성취감을 느끼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되는 경우 남들과 비교당하고, 자신의 능력과 가능성을 믿지 못하게 된다.
이때 부모의 역할은 공부하라고 다그치거나 학원을 여러 개 보내는 것이 아니다. 아이가 잘못된 열등감을 가지지 않도록 용기를 줘야 한다. 단순히 외우고 맞추는 게 아닌 다른 분야에 재능이 있는지 함께 고민해주고, 아이가 자신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도록 반복적으로 응원해줘야 한다.
초등학생은 부모의 한 마디에 천당과 지옥을 오간다, 용기를 주는 한 마디, 자식에 대한 부모의 긍정적이고 너그러운 태도에 엄청난 용기와 열정을 갖고 변할 수 있는 유연함을 갖춘 시기라는 것을 잊지 말자.
바로 이 단계가 청소년기, 흔히들 말하는 질풍노도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소속감과 탐색이다. 소속감이란 어느 집단에 속하여 인정을 받고, 연대감을 형성하고, 탐색이란 새로운 세계와 가능성을 찾아서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려고 하는 시도다.
안타깝게도 부모들은 청소년기 자녀들에게 소속감을 심어주는 데는 부던한 노력을 기울이지만 탐색능력을 길러주는 데는 소홀하다. 오히려 ‘너는 공부를 잘하니까 의사가 되어야 해, 변호사가 되어야 해’라는 식으로 자신의 기준에 맞춰 삶을 정하고 강요함으로써 아이의 탐색능력을 말살해버린다. 부모가 정한 프레임과 틀 안에 자녀를 가두고 정체성의 성장을 조기에 마감시켜버리는 것이다.
20~40세에 해당하는 초기 성인기에 우리는 이때 진로를 탐색하고 직업을 정하며 이성을 사귀고 결혼을 하거나 가정을 꾸리기도 한다. 비혼을 지향하는 경우, 다른 가까운 지인과의 연대감을 형성하는 시기다. 인생에서 가장 건설적이며 에너지 레벨이 높은 시기이기도 하다.
무수히 많은 사람을 만나 무수히 많은 관계를 형성하고, 그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겪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원하는 만큼의 연대감과 성취와 안정된 관계를 이루지 못할 경우, 사회적 고립감과 심각한 외로움, 우울감까지도 생길 수 있는 시기다.
이 시기에 방황하고 불안해하는 이들이 참으로 많다.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어른이’들이다.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 기대고 싶고 의지하고 싶은데, 이제는 내가 누군가를 책임져야 한단다. 사회구성원으로서 역할을 다하라고 한다. 지금의 내가 이 끝에 서 있다.
40~50대 후반까지의 시기가 여기에 해당된다. 중년기로 불리며 인생의 후반부를 향해 달려간다. 내가 무엇을 이뤘고 어떤 의미와 보람을 느꼈는지에 대해서 스스로 평가한다. 그게 만족스럽지 못했다면 좌절하고 침체에 빠지는 시기다.
30대까지는 원하는 것을 충분히 이루지 못했다고 해도 아직 젊으니 기회가 있기에 다시 도전한다. 성숙을 이루거나 안정되어 있지 않아도 벼랑 끝에 있지 않다. 하지만 중년은 다르다. 남들은 벌써 이만큼 이뤘는데, 부도 쌓고 자식들도 이만큼 키웠는데, 누구 아들은 외고를 가서 서울대에 붙었다는데, 그렇게 평가의 기준을 밖에 두고 비교해가며 초조해진다.
본인이 청소년 시절에 부모로부터 상처받았으면서도 그토록 미워했던 부모와 똑같이 행동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이 했던 실수를 자기 자식에게 대물림하는 것이다. 뻔히 아는 실수를 반복하는 이유는 집착과 불안 때문이다. 중년이 되면 가벼워져야 한다. 자식을 소유하려 들어선 안 되며 배우자, 일, 경제력, 성공에 대한 집착도 내려놓아야만 한다. 그래야 건강한 노년으로 넘어갈 수 있다.
마지막 노년기의 시기다. 인생을 돌아보면서 자아가 얼마나 성숙한 상태인지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놓인 모두가 깨달음과 지혜를 얻는 것은 아니다. 70~80대가 되어서도 여전히 미성숙한 이들이 많고 그들은 본인이 지나쳐온 이전 단계에 집착하고 미련을 가지며 거기에 머무른다.
어떤 사람은 여전히 본인이 청년기에 있다고 착각하며 해서는 안 될 말이나 행동을 하고, 심지어 아이처럼 유치하거나 이기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3.
프로이트의 이론에 따르자면 이미 내 미래는 행복한 것으로 결론이 났겠으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초기 아동기 시절의 나는, 중산층의 외동아들로 부족한 없는 관심과 지원 속에서 남 부러울 것 없이 자랐다.
그렇지만 초등학교 5학년 때, 불행하게도 어머니가 유방암에 걸린 후 나의 애착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입원, 재발, 항암치료를 거치며 어머니는 원래의 여유로움을 잃어버렸고 한쪽 가슴을 잃었다는 상실감, 여자로서의 삶이 끝나버릴지도 모르며 남편이 나를 예전처럼 사랑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으로 괴로워했다. 그렇게 깎여나간 자존감을 여자가 아닌 어머니로서의 만족감으로 보상받으려 했고 과도한 경쟁심과 열등감을 어린 아들에게 투사하기 시작했다.
아들을 최고로 키웠다는 훈장에 집착한 어머니는 혹독한 교육을 강요했다. 덕분에 나는 과외와 학원을 세 군데씩 다녔고, 기를 쓰고 노력해 전교 10등을 해도 매번 혼났다. 이웃집에 언제나 전교 1등을 하던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넌 걔한테 맨날 지고서도 잠이 오니? 엄마는 동네 부끄러워서 다닐 수가 없어.
걔는 네 친구가 아니야, 라이벌이고 적이야, 반드시 이겨서 복수해야 해.
복수라니, 열네 살 중학생이 대체 누구에게 복수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인가. 그때 엄마가 했던 말은 과연 누구를 향한 것이였을까.
나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전교 1등 친구와 비교당했고, 엄마는 자신의 열등감과 우울감을 거칠게 토해냈다. 가장 친한 친구였던 그 친구는 어느새 나에게 가장 미운 존재가 되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나는 중학교 시절, 친구도 소속감도, 탐색능력도 모두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청소년기에 접어들어 부모와 큰 갈등을 겪은 나는 이 시기에 무수히 방황한다. 화해의 노력도 해보았고 부모를 이해하려고도 했으나 갈등은 더 악화되었고, 부끄럽지만 의절할 만큼 사이가 벌어졌다. 가족의 빈 자리를 채우려고 외로움 속에서 혼자가 아니고자 다른 것에 의존하고 집착하기 시작했다. 때로는 술이었고, 주식이나 쇼핑에 중독되었으며 어떨 땐 일에 중독되어 인정 욕구와 자존감을 보상받으려 했던 것이다.
우리의 삶은 변수와 갈등, 예상치 못한 실패로 가득하며 누구나 인생의 어느 단계에서는 좌절과 트라우마를 겪게 된다. 완벽한 인생을 사는 완벽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완전한 성숙이란 요원한 것일까.
4.
그렇지 않다. 에릭슨의 이론을 공부하고 활용하고 내 삶에 들여놓는 과정 속에서 내가 새로이 느낀 점은, 우리가 끝없이 상처받고 부모로부터 경험한 상처를 반복하고 되풀이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언제나 회복과 재생의 유연성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1단계 혹은 4단계의 어느 순간에 좌절하고 트라우마가 생겨 인생에 구멍이 뚫렸다 하더라도, 인생의 다른 순간에서 상처받은 자아를 회복할 성숙의 기회는 반드시 존재한다.
부모에게 받은 상처라고 해서 꼭 부모에게 직접 사과받을 필요는 없다. 배우자나 친구에게, 혹은 자신의 아들, 딸로부터 애착의 구멍을 메우게 하고 영혼의 구원을 받는 순간도 존재한다. 더 나아가 가장 좋은 것은 자기 자신의 손으로 그 구멍을 직접 메우는 경험이다.
당신의 상처는 영원하지 않다. 당신이 완벽하지 않듯 그 상처 또한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을 둘러싼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 그러니 자연스럽게도, 당신의 상처는 영원할 수 없다.
인생의 회전목마, 그 어딘가에서 당신의 트라우마는 반드시 회복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 꼭 아니더라도 회복될 것만은 분명하다.
☞ 출처: 교보문고
원문: 박종석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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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는 개인적으로 프로이드라는 인물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세상과 사람들의 모든 삶의 욕구와 본능을 성적인 것들로 대입하고 치환하여 설명하려 든 근본이 맘에 안들고 더욱이 우리나라 정서에는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와 국민성은 그런 단순한걸로 대입하기엔 너어무~ 복잡한 것들이 내밀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프로이드 자신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분석한 방식이라서 그렇겠지만요.
그러나 에릭슨이나 애들러와 같은 (프로이드보단 덜 알려졌지만 못지않게 중요한 지점을 집어낸) 심리학자들은 좋아합니다.
아마도 이들의 분석방식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더 잘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삶이 어쩌면 세상과 사람들 속에서 상처의 연속이고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살아가기 위해선 노력과 연습이 필요한데 적절한 글이라 생각하여 퍼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