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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후서 3장
1. 주는 미쁘사(1-5)
예수님이 오시면 사람들이 마음껏 놀던 세상은 사라지고, 새로운 참된 세상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때가 되면 세상은 무엇이 허상이고, 무엇이 실상이었는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곧 눈에 보인 것이 전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다른 세계가 감추어져 있었고, 그것을 보지 못했던 것이, 자신들의 무지였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말은, 지금의 세상은 도무지 알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믿음이 아니고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재림을 믿는 사람입니다. 재림을 믿는다면, 세상 또한 사라질 것을 믿는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성도는 세상에서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아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세상을 심판하실 때, 내 것만 달랑 남겨 놓으시고, 심판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애당초 내 것이라고 우길만한 것은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내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세상에 내 것을 남겨 놓기 위해 살아갑니다. 이것이 재림과 상관없이 산다는 증거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재림을 믿는다는 말은 하되, 재림을 전혀 믿지 않는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준비하신 세계보다는, 육신이 몸담고 있는 세상에, 자기 세계를 구축하는 일에 열중한 채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우리의 속성을 깨뜨리시고, 그 속에 천국 백성의 속성을 집어넣으시기 위해 일하십니다. 이것이 주의 미쁘심입니다.
3절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미쁘시다는 것은 진실과 신실을 의미합니다. 진실하시고 신실하신 주께서, 우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면서, 우리가 천국 백성의 속성이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신다는 것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이, 주가 굳건하게 하시고 지켜주지 않으면 안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주가 나서서, 굳건하게 해주시고 지켜주셔야만 하는 위험한 곳입니다. 우리를 대적하는 악한 세력이, 강하게 역사하고 있는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을 나를 위한 곳으로 보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일이 나를 중심으로, 나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깨어질 곳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도 세상에서 큰 소리 칠 수 있는 것을 달라고만 합니다.
세상은 돈 가지고 노는 곳입니다. 자연히 돈이 많은 사람이, 큰소리칠 수밖에 없습니다. 돈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나라에서도, 큰소리치게 하는 힘이 되는 것인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치 본향에는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고, 작심한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이것이 세상에 취해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심각성을 전혀 느끼지를 못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실상을 아는 사도는 다릅니다. 1-2절을 보면 사도는 데살로니가교회에게 이렇게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1-2절 “끝으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고, 또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사도는 무엇 때문에 기도를 부탁하는 것일까요? 사도보다는 데살로니가교회의 기도가 더 힘이 있어서일까요? 아니면 흔히 말하는 것처럼, 사도 개인의 기도보다는, 교회가 함께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이 더 힘이 있어서일까요?
하지만 그것은 사람이 힘을 모으면, 하나님의 응답도 받아낼 수 있다는, 사고방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한 사람보다는 열 사람의 기도가 더 세고, 열 사람보다는 백 사람의 기도가 더 세다는, 세상의 힘의 논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사도가 기도를 부탁하는 것은, 사도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교회에 알게 함으로써, 사도가 원하는 것을 함께 원하고, 사도와 같은 마음으로 주를 바라보자는 취지에 따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는 말을 이어서 하는 것입니다. 사도와 같은 마음이 아니고서는, 우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로부터 지키시는 것이, 주의 미쁘심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의 미쁘심은 육신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지 않습니다. 주의 미쁘심이 육신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면, 데살로니가교회에 계속된 박해와 환난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주의 일이 됩니다. 다만 주께 죄를 범한 징벌의 차원으로 밖에 볼 수 없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도 더 극심해진 박해와 환난에서 주의 사랑, 은혜를 이해하기 힘들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기도를 부탁하는 말을 하면서, 미쁘신 주의 일이 우리를 굳건하게 하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는 것임을 주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의 기도에서 우리는, 사도가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 염두를 두어야 합니다. 사도가 만약 우리와 같은 시각으로 세상을 봤다면, 본문과 같은 기도를 부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의 기도는 세상에서 자기 것으로, 자신을 굳건히 세우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우물 밖의 세상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상상할 수도 없고, 우물 밖에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조차도 모릅니다. 우물 밖의 세상을 알려면, 우물 밖의 세상을 경험한 다른 개구리가 들어와서, 얘기를 해주는 길 밖에 없습니다. 사도가 지금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우리가 보지 못한, 다른 세계를 본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세계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를 통해서, 다른 세계에 대한 눈을 뜰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우물 안의 세계만 전부로 여기는 개구리가, 우물 밖의 세계에 대한 얘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처럼, 사도가 전하는 얘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세상이 세상의 실체도, 전부도 아닙니다. 우리 눈에는 세상이 돈만 있으면, 재미있게 살 수 있는 곳으로 보이지만, 사도에게 세상은 악한 자가 역사하는 곳이었습니다. 성도를 미혹하고, 복음을 방해하는, 사탄의 활동이 극심한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상이기에 주가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건져주지 않으면 안되는 곳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이러한 주의 역사가 없으면, 안되는 세상을 성도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성도의 승리는, 주의 인도하심에 달렸습니다. 그리고 성도의 승리는, 미혹과 박해와 환난이 계속되는 세상에서, 끝까지 주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주가 함께 하시고 인도하심으로 가능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5절에서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가를 깨닫고, 박해와 환난에서도, 천국을 소망하는 자로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인내에 참여하는 것이 됩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현실에 속지 않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자신을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이것이 인내입니다.
보이는 세상만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사도의 기도는 실감 있는 생생한 기도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실감있는 생생한 기도라면, 사업이 잘되고, 좋은 대학, 좋은 직장 갈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일 것입니다. 그것이 생생한 현실의 문제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현실은 예수님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세상은 완전히 깨어집니다. 세상에서 즐기고 기뻐하고 자랑하던 모든 것들은, 여름 햇살에 눈 녹듯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일어날 참된 현실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이러한 참된 현실에 맞추어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이라는 약속의 말씀 아래서, 주의 미쁘심을 생각한다면, 미쁘신 주께서 우리에게 왜 함께 하셔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성도는 주어진 환경과 상관없이 주를 바라보며, 주의 도우심과 붙드심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2. 떠나라(6-18)
인간관계에는 만남과 떠남이 반복됩니다. 좋아서 만나기도 하고, 싫어서 떠나기도 합니다. 때로는 싫지만, 어찌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만나는 것도 있고, 좋아하지만 할 수 없이, 떠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에게도 떠나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가 본문에서 언급합니다.
6절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사도는 이같은 내용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로서는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아주 강력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백성이 왕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것처럼, 교회가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주의 뜻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형제에게서 떠나라고 할 정도면, 교회에 해를 끼치는, 아주 악한 존재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잘못된 재림론을 가지고, 성도를 미혹했던 시한부 종말론자들이나, 현대 교회가 경계하고 있는, 신천지와 같은 이단을,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바울이 경계하면서 떠나라고 하는 그 대상은, 사도의 말대로 하면, 게으르게 행하고, 사도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않은, 모든 형제들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사도가 말한 이들이, 진심으로 성도가 함께 하지 말고 떠나야 할, 악한 자라는 느낌으로 다가옵니까?
사실 우리에게는 사도가 말한 이들이, 떠나야 할 악한 자라는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게으르고, 전통대로 행하지 않는다는, 사도의 말에 담겨 있는 심각성을 깨닫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현대 교회를 보면, 십자가의 복음을 훼손하고 무너뜨리는, 비 복음적이고 비 성경적인 말들로 가득한데도, 그 말의 심각성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것입니다.
애당초 예수를 따르는 이유가, 육신의 이익을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든 복음이 아니든 상관없이, 자신의 욕망에 부합되는 말이면, 환영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현실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세상이 안고 있는, 심각성을 보게 합니다.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떠나게 합니다. 곧 모세를 세워서 이루신, 출애굽을 말씀으로 다가오셔서, 우리에게 재현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분명 떠나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떠나야 할 그것이 무엇인가는, 사도의 말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7-8절을 보면, 사도는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면서, 스스로 수고하며 일하여 음식을 먹었다고 말합니다. 곧 먹을 것을 교회로부터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9절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사도가 그렇게 한 이유는, 사도로서의 권리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사도가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쳐도 되는, 권리로 보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사도가 본을 보인 것은, 스스로 수고하여 일하며, 복음을 전한 ‘자비량 선교’가 아니라, 사도라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쳐도 되는, 권리가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 목사가 목사라는 위치를, 교회로부터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당연히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 것으로 여긴다면, 사도의 본을 받지 않는 것이 됩니다. 교회가 목사에게 복음을 원한다면, 목사는 복음을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목사의 일입니다.
하지만 자기 육신을 위해, 복음을 감추고 가공하면서, 사람들의 귀에 즐거운 말을 하려고 한다면, 그것이 곧 교회에 폐를 끼치는 것이 되고, 그것은 게으름에 해당됩니다. 설사 교회가 복음을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성도의 생명의 문제를 생각한다면,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목사의 봉사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을 위해, 타인에게 폐를 끼쳐도 된다는, 사고방식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괴로움의 결과가 예상된다고 해도, 타인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이, 사도가 가르친 전통대로 행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복음의 정신이며,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셨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위해, 죽으시는 길을 가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은혜이고 사랑이며, 복음이 안고 있는 정신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안에서의 성도의 관계에는, 그 어떤 권리 주장도 없게 됩니다. 목사라는 권리, 장로라는 권리, 권사, 집사라는 권리 주장이 없게 됩니다. 오직 서로의 유익을 위해, 봉사하는 관계로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복음 안에서의 관계이기 때문에, 이런 관계에서 자기 편함이나 권리로 인해,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것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게으르고, 사도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않은, 모든 사람에게서 떠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떠나라는 것은 인간관계를 끊고, 아예 상종도 하지 말라는 의미라기보다는, 그 같은 사고방식으로 살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0절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이 말도 세상이 말하는, 노동과 그 대가의 관계에서 이해하기 보다는, 복음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노동에 대한 세상의 시각으로 본다면, 일하지 않은 사람은 먹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것이 노동의 원칙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노동의 원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을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처럼 인간에게는 편한 인생이 약속된 것이 아니라, 수고하여 먹고 살 수밖에 없는 인생이, 죄의 몫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예수를 믿으면 평안해진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평안의 인생을 사는 것은, 사람이 원하는 소망입니다. 수고하고 땀 흘리는 것보다는, 평안을 누리는 인생의 행복을 꿈꿉니다. 이것이 일하기 싫어하는 인간의 속성을 의미하는 것이고, 또한 이것은 인간이 죄 가운데 있는 존재임을 잊고 있는 것이 됩니다.
당시 데살로니가교회에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재림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가르치는 선생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재림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 수고하고 일하는 세상일을, 의미 없는 것으로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로 인해 앞서 말한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가 행해야 할, 의무가 무엇인가를 말합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현재에 충실하면서, 인간이 무엇으로 사는가를 증거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일하기 싫어하는 게으른 사고방식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이들은 사탄이 활동하는 세상에 대해서도 알지 못합니다. 오직 자기 한 몸 편히 사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상에 대한 안일한 생각으로, 자신의 편함만을 추구한다면, 그러한 사람과의 관계는 단절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안일을 추구하는 사고방식으로는, 생명의 세계를 맛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14-15절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
사도의 말대로 하면, 성도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듣기 좋은 아첨의 말이 아니라, 잘못된 것에 대해 권면을 하는 것입니다. 이 권면은 함께 진리의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랑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성도는 자신의 안일을 추구하고, 편함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수고하고 고생하는 것도, 복음 안에서는 마땅한 것이 됩니다. 이러한 성도는 예수님에게서 평강을 찾을 것이고, 예수님이 평강을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