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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5
성령의 법
로마서 8:1~11 (성령론6)
I. 죄책감은 우리를 아프게 한다
<하지 못하고 남겨둔 일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 마거릿 싱스터 오늘 하루 무슨 일을 했습니까?
미처 하지 못하고 남겨 둔 일은 무엇입니까?
해가 서산에 질 때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건 남겨둔 일입니다.
⦁잊어버린 부드러운 말 ⦁쓰지 않은 편지
⦁보내지 않은 꽃 밤이 깊어지는 시간, 내 가슴에 남는 잔영들입니다.
⦁형제들 앞을 가로막고 선 그 돌들, 내가 치워줄 수 있었는데
⦁힘 북돋아 주는 말, 바쁘다는 핑계로 남겨두었습니다.
⦁내 문제 안고 있느라, 우는 친구 안아주지 못했습니다.
⦁우는 가슴 어루만지는, 사랑의 말을 놓쳤습니다.
하루 해는 짧고, 슬픔은 크기만 합니다.
해가 서산에 질 때까지, 남겨진 일이 마음을 아프게합니다.
⦁오늘 하루, 내가 잘한 일이 아니라 ⦁미처 하지 못하고 남겨둔 일들이, 세상을 아프게 합니다.
⦁깊은 밤, 내 마음 한 구석 아프게 남아 있는 잔영이, 나를 슬프게 합니다.
작은 일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하루 해를 마칠 때에 때로는 찜찜하다는 말을 아십니까?
죄는 인생의 해질 무렵 우리를 참 아프게 합니다.
죄는 늘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죄는 우리를 위축시킵니다.
모든 사람이 안고 살아 가는 죄의식은 좋은 것일까요? 아니면 나쁜 것일까요?
죄책감은 참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우리를 위축시킵니다. 부끄럽게 만듭니다.
죄책감이나 정죄 의식은 우리의 기쁨과 내적 평화를 빼앗아갑니다.
우리는 분명 예수 믿고 영생을 얻었는데 아직도 우리 안에는 육의 갈등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선한 지킬박사도 살아있고 나쁜 하이드도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선하고 바르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한편에서는 하이드의 나쁜 마음이 도사려 있습니다.
내 진실 뒤에는 가식이 나를 비웃고 있습니다.
내 자비 뒤에는 교만이 나를 노려보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었으면 이런 하이드의 마음쯤은 사라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죄의 유혹은 사라지고 갈등은 없고 탐욕도 죽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웬일입니까?
내 안에는 항상 지킬박사와 하이드가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 좋은 사람도 그 믿음이 흔들립니다.
성령을 체험한 사람도 낙심합니다.
치유의 은사로 죽을 병에서 살아난 사람도 별로 달라진게 없어 보일 때가 있습니다.
능력의 선지자 엘리야도 이세벨이란 여자 한 사람이 두려워
로뎀나무 아래 누워서 죽여달라 하나님 앞에 넋두리를 합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도 절망과 낙심에 쓰러져 있을 때가 있었습니다.
아내가 상복을 입고 통곡을 합니다.
아니 여보 누가 죽었어? 하나님이 돌아가셨어요.
무슨 불경한 말씀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당신이 그렇게 쉽게 절망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이 죽지 않고서 어떻게 그렇게 허무하게 쓰러질 수 있단 말입니까?
영적거인 사도 바울도 오늘 본문 바로 앞장 로마서 7장에서 내적 갈등을 토로합니다.
“내 속에는 두 개의 내가 매일같이 싸우고 있다.
하나는 죄를 지으려는 육의 생각이요 다른 하나는 선을 행하려는 성령의 생각이다.”
오늘 본문 로마서 8장에서는 죄를 지으려는 이 마음을 “육신”이란 말로 표현합니다
로마서 8장 1절~11절 열한 절 안에 “육신”이란 말이 10번 이상 등장합니다.
선을 행하려는 마음 “영”이라고 하는 말도 10번쯤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는 “죄와 사망의 법”이란 말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란 말이 날카롭게 대조되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크리스천의 위대한 승리의 비결 “성령의 법”입니다.
II. 예수 안에서 이미 죽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안에는 이런 갈등이 없습니까?
여러분 안에는 영적인 투쟁이 없습니까?
우리는 구원받았지만 내 안에 영적 싸움과 갈등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오히려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경학자들은 오히려 이런 연약함, 갈등을 인간다움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았지만 육의 몸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병들 수 있습니다.
문득문득 절망하고 좌절할 수 있습니다.
내적 갈등과 영적 투쟁에서 실패하고 죄의식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그 갈등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불신자는 기도하지 않아도 갈등이 없습니다.
선을 행하지 않아도 고민이 없습니다.
죄지은 것을 자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합니다.
죄와 사망의 법이 그들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넘어질 때마다 거룩한 아픔이 있습니다.
영적인 진통이 있더란 말입니다.
이 영적 투쟁과 갈등에서 우리가 깨끗이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또 다른 원리가 있습니 다.
이 싸움과 갈등은 내 힘으로, 내 노력으로, 내 의지로, 승리할 수 있는 싸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나요, 내 문제인데 내가 뭔가 해볼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연구해 서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닙니다.
힘써서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래전 어떤 목사님이 난산의 고통을 겪고 있는 산모를 심방 갔습니다.
아이고 사람 살려 사람 살려~ 큰 소리로 우니까 예배가 안되고 찬송이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얼른 544장 울어도 못하네. 아기가 나오려니까 힘을 쓰는 거예 요.
2절 힘써도 못하네~ 그래도 안 나오니까 예배 끝날때까지는 참아봐야지 입 술을 깨물더래요.
참아도 못하네~ 4절을 부르는데 쑤욱 나오더래요. 믿으면 되겠네. 교회 안에 꽤 선하고 품성이 착해 보이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영적투쟁에서 승리하며 사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목사보다 더 선해 보입니다.
전도사님, 권사님들보다 기도를 많이 합니다.
장로님보다 훨씬 더 열심히 충성합니다.
그런데 율법주의가 또아리 틀고 앉아 만사에 비판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습니다.
자기 의만 남아 있습니다.
자기에게나 적용해야 하는 율법으로 다른 사람을 비난합니다.
그 얼굴에 행복이 없습니다. 교회가 다 썩었다고 떠들고 다닙니다.
그 누구도 용서함이 없습니다. 언제 나 비난의 칼을 들고 있습니다.
문득문득 비판의 말이 터져나오는 걸 똑똑해서 그런 말이 생각났다고 착각합니다.
목사도,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그들 앞엔 비판의 대상일 뿐입니다.
현대판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위선자일뿐입니다.
그들의 가슴엔 따뜻함이 없습니다. 은혜가 없습니다. 푸근함이 없습니다.
차라리 죄인들은 자기 가슴이나 치며 나는 죄인입니다.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살아가시는 동안에 예수님께서 사용하실 수 없는 날카로운 말로 비판할 때가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율법주의자들입니다.
독사 새끼, 지옥의 자식들, 하루살 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자들,
껍데기는 변화된 것 같은데 본질 죄가 우글거리는 자식 들이라고 책망했습니다.
그렇다고 복음적인 사람은 마음대로 죄짓고 살아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었을 때 내 안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나는 예수와 함께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내 모든 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되었 습니다. 예수께서 용서하신 죄를 누가 정죄하리요?
본질적인 저주의 죄에서 나는 이미 죽었 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내 죄도 매달렸습니다.
그분이 못 박힐 때 내 자아가 못 박혔습니 다.
십자가 위에서 그분이 죽으실 때 나는 이미 죽었습니다.
그분이 부활하심으로 나 또한 다시 살아났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을 때 그분의 풍성한 삶, 영생이 나의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양으로 하여금 풍성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지난 여름, 얼마나 더웠습니까?
공동묘지에서 누워있던 시체가 그러더랍니다.
“아이, 더워 죽겠네.” 옆에 있던 선배 시체가 말합니다.
“야, 임마. 너 벌써 죽었어.”
사랑하는 여러분, 자꾸 넘어지고 죄짓는 나에게 집중하지 말라는 겁니다.
내 안에 일어나는 욕망과 탐욕을 묵상하지 말라는 겁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얼마나 엄청난 존재가 되었는지, 내 신분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거기에 집중하라는 거예요.
내가 죄를 짓고 절망하고 낙심하고 나는 안 돼!
좌절 할 때에 거기 있는 그 모습은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의 자리가 아니에요. 당신의 것이 아니에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예수 안으로 오라는 겁니다.
내 신분에 집중하라는 거예요. 연약함 에 매몰되어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탄을 향하여, 나 자신을 향하여, 세상을 향하여 담대히 선언하는 겁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다.
나는 의인이다. 나는 성자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다. 선언하라는 거예요.
죄와 사망의 법을 벗어 집어던지라는 것입니다.
선언하고 살라는 거예요.
III. 적용되는 법이 다르다
오늘 본문 로마서 8장 1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신구약 성경 가운데 (제가 생각하기엔) 한 단어 안에 가장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단어가
오늘 본문에 시작하는 “그러므로”입니다.
로마서 1장부터 7장까지는 어마어마한 교리논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엄청난 신학이 소용돌이치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그러므로” 한 단어 안에 담아버린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죄인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았지만 죄에 대한 갈등이 있습니다.
이 문제는 내 노력이나 내 방법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정죄의식, 패배의식으로부터 어떻게 승리할 수 있을까요?
이 엄청난 내용이 “그러므로” 한 단어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입니다.
본문 8:1~11 열한 절 속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이 다섯 번씩 반복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길에서 넘어질 수 있습니다.
신앙인도 유혹을 만납니다.
그때마다 예수 안으로 오라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바다에 첨벙첨벙 뛰어들라는 겁니다.
그분 안에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마귀란 놈은 참 어이가 없는 놈입니다.
죄를 짓도록 우리를 달콤하게 유혹합니다.
죄를 짓기 전까지는 내 친구처럼 다가와 나에게 속삭입니다.
그러다가 막상 내가 죄를 짓고 나면 정죄합니다. 패배의식을 심습니다.
조롱합니다.
하나님은 너를 버렸어. 하나님은 너를 떠났어. 하나님은 너를 싫어해. 하나님이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두려움을 심습니다.
네가 똑같은 죄를 몇 번씩 짓고 네가 후회하는지 아니?
490번째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체면이 있거라! 마귀의 말입니다.
그때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묵상해야 됩니다.
나는 용서받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 앞으로 달려가면 용서하신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 않는다. 정죄하지 않는다.
우리를 지배하는 법은 결코 율법이 아닙니다. 사탄의 법이 아닙니다.
사망의 법이 아닙니다. 저주의 법이 아닙니다. 마귀의 법이 아닙니다. 생명의 법입니다. 살리는 법입니다.
성령의 법! 이것만이 우리한테 통합니다.
이제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적용되는 법이 달라졌습니다.
죄와 죽음의 법이 나를 다스리지 못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의 법, 용서의 법, 하나님 사랑의 법, 성령의 법만이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허물이 있어도 나를 버리지 않습니다. 마귀의 권세, 마귀의 조롱,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마귀가 결코 나를 가까이 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일제 식민지 법 안에서 살던 우리 민족이 해방을 받았습니다.
일본의 법이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마귀의 법, 사망의 법 안에서 살다가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왔습니다.
이사했습니다.
마귀의 법 사망의 법 아래 우리가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법만이 내게 통한다는 것입니다.
IV. 성령의 법
예수 그리스도 안에 정죄함이 없는 이유가 무엇이라고요?
적용되는 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나를 죄 없다고 선언했는데 누가 나를 정죄할 수가 있습니까?
너를 용서한다. 무죄 선언! 땅!땅!땅! 누가 정죄하리요.
해방이 선포되었습니다.
죄로부터 자유가 선언되었습니다.
지금까지는 몰랐으니까 웅크리고 앉아 있었지,
몰랐으니까 그게 내 모습인 줄 알았지, 몰랐 으니까 진흙탕에 빠져서 앉아 있었지,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이제는 진리를 알았으니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케 됨을 얻은 것입니다.
내 노력으로, 내 의지로, 몸부림을 해도 안 되던 것이 어떻게 그토록 쉽게 이루어질 수가 있었을까요?
3절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네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네 힘으로 안되던 그것이 하나님은 하시나니.
주일학교에 가서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사흘 만에 나왔다는 얘기 를 들은 아이가 집으로 달려와 아빠에게 물었습니다.
아빠는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믿어지세요? 아빠가 대답합니다.
아빠는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해도 믿을 수 있어! 왜?
하나님이 하신 일이거든!
예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근심합니다.
그러면 천국엔 누가 들어갈 수 있습니까?
천국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능히 하실 수가 있느니라.
그 능력을 성령의 능력이라고 하는데 로마서에 16장까지 성령이란 말이 34번 나옵니다.
그런 데 단 한장, 로마서 8장에 34번 가운데 21번 3분의 2가 나옵니다.
그래서 성서신학자들은 신구약 성경 가운데 가장 빛나는 성경은 로마서다.
로마서 가운데 8장은 반지 가운데 반짝 빛나는 다이아몬드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8안에 이런 어마어마한 진리가 담겨 있더라 그런 얘기지요.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연약함 때문에 강력한 성령의 도움을 받습니다.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부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는 역설적인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법! 성령의 법! 이라고 할 때
여기 법이란 말을 다른 말로 바꿔보면 “통치,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법이란 성령이 통치하시니까,
의도 죄도 지옥도 천국도 모든 인생의 역사도 성령이 다스리시니까 성령은 능히 하시니라.
여기 법은 또 다른 “능력”이란 말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그것을 성령의 능히 하시나니,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이 모든 것이 가능하더 라는 말입니다.
또 다른 말로 “원리”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나를 지배하고 다스리던 이 마귀의 원리가 통하지 않는 겁니다.
죄의 원리가 통하지 않는 겁니다.
저주의 원리는 나로부터 완전히 떠나간 것입니다.
구원의 원리, 용서의 원리, 자유의 원리, 천국의 원리가 내 안에 있기 때문에...
생명의, 성령의 법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능히 하나님이 내 안에서 자유를 선포하고 진리를 알므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는 구속받은 정죄함이 없는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개그우먼 김혜선 씨는 남자보다도 강한 캐릭터로 인기를 모은 분입니다.
지금도 “골 때리는 그녀들” 축구 프로그램에서 FC 개벤져스 개그우먼팀을 강인 한 체력으로 이끄는 분입니다.
독일 유학을 떠나기 전에 사귀던 남친이 있었어 요.
만날 때마다 하는 말이 “넌 남자야, 너는 여자가 아니야”라는 비난의 말에 가슴 수술을 두 번이나 해 가며 여자가 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다 문득 어느 날 여자를 사랑하는 사람을 섹스 심볼로 이해하려는 남친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는 깨달음이 오는 겁니다.
속고 살았던 게 억울해서 독일 유학길에 오릅니다.
왜 유학 갑니까? 물었더니 죽기 위해 유학을 갑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거기서 지금의 남편 스테판 씨를 만납니다.
죽음의 자리가 생명의 자리로 바뀌어 지기 시작합니다.
수술한 가슴이 아프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수술한 가슴이 아프 다고 고백을 했더니 스테판이 하는 말이 참 재미있습니다.
“당신은 가슴이 크나 작으나, 있으나 없으나 당신 김혜선일 뿐이고 나의 소중한 사람 내 사랑입니다” 고백을 합니다.
용기를 얻고 독일 병원에서 가슴 보형물 제거 수술을 받습니다.
의식이 돌아와서 병실에 돌아왔더니 스테판이 천사같이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김혜선 씨를 반깁니다.
그리고 꼭 껴안아 주면서 말합니다.
“심장 뛰는 가슴이 가까워져서 좋다. 심장 뛰는 가슴이 가깝게 느껴져서 참 좋 다.”
그 품에 안겨서 대성통곡을 하지요.
자녀를 갖는 일을 두고 한국을 방문한 김혜선 씨의 시부모님들은 기자들의 질문 앞에 그렇게 말합니다.
“아이를 갖든 갖지 않든 사랑하는 내 자녀들이 선택할 일 입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지 우리는 그 선택을 존중할 것이고, 그들의 선택을 우 리는 사랑할 것이고 즐겨 함께 가족이 될 뿐입니다.”
자녀를 갖든 갖지 않든 그것은 소중한 그들의 결단입니다.
그들은 내 자녀들입니다.
심장 뛰는 가슴이 가깝게 느껴져서 참 좋다.
나는 그들의 결정을 사랑할 것입니다. 근사하지 않습니까?
복음 안에 이런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율법의 법칙과 성령의 법칙은 이렇게 다른 것입니다.
예수 안에는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과 이 진리를 알고 자유를 얻은 사람과는 하늘과 땅만큼이 나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가장 큰 은혜는 정죄받지 않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가장 큰 은혜는 범죄하고도 용서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은혜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죄와 사망의 법에 좌우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율법의 통치 아래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 생명의 성령의 원리, 생명의 성령의 능력, 생명의 성령의 다스림 안에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죄책감으로부터 당신은 자유를 얻었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능력만이 내 안에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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