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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보물을찾아라 인디아나존스들 ( 11회~14회)Ⅰ [한국 고고학 70년 발굴 현장 회고]
11. 광주 신창동 유적 발굴한 조현종 前 광주박물관장
‘자연의 타임캡슐’ 저습지… 수천년전 유기물까지 원형 그대로
27일 조현종 전 국립광주박물관장이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 출토된 목제 괭이자루를 살펴보고 있다. 이곳에서는 기원전 1세기 원삼국시대 유물 2000여 점이 무더기로 출토됐다. 광주=박영철 기자
《 고고학자들에게 저습지(低濕地) 유적은 ‘대박’으로 통한다. 마치 타임캡슐처럼 저습지에서는 수천 년 전 유물이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심지어 썩기 쉬운 나무나 풀, 씨앗 등 온갖 유기물도 그대로 남아 있다. 이런 보존은 유물이 포함된 연못이나 우물과 같은 습지 위에 흙이 뒤덮여 외부 공기를 완벽하게 차단해주기 때문에 가능하다. 27일 조현종 전 국립광주박물관장(60)과 둘러본 광주 신창동 유적은 한국 저습지 발굴을 태동시킨 역사적인 장소다.
1992년부터 20년 넘게 발굴이 이어지고 있는 이 유적에서는 기원전 1세기 원삼국시대 유물이 총 2000여 점이나 출토됐다. 당시 사람들이 먹고 버린 벼 껍질부터 현악기, 베틀, 문짝, 칠기(漆器), 목제 농기구, 비단 조각, 심지어 그들이 배설한 기생충 알까지 나왔다. 이쯤 되면 미시생활사 복원의 ‘종합선물세트’와 다름없다. 조 전 관장은 고속도로와 국도 1호선 사이의 발굴 현장에서 “고고학자로서 운이 참 좋았다”며 오래전 기억을 더듬었다. 》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 1997년 출토된 수레바퀴 유물들(위 사진). 바퀴축과 바퀴살, 가로걸이대가 보인다. 아래 사진은 베틀 유물로, 방추차와 바디 등 부속품들이 한꺼번에 출토됐다. 국립광주박물관 제공
1992년 5월 광주 신창동 국도 1호선 직선화 공사 현장. 도로 포장을 위한 건설 중장비로 부산한 현장에 조현종(당시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사)이 황급히 흙을 퍼 담았다. 그는 연구실에 돌아오자마자 서둘러 흙을 채질한 뒤 물을 부었다. 물에 뜨거나 가라앉은 물질을 확인하다 점토대토기(粘土帶土器) 조각과 볍씨들이 눈에 확 들어왔다.
점토대토기는 초기철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 양식. 오랫동안 품어온 의문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오래전부터 농경 유적을 찾고 싶었습니다. 그때까지 출토된 건 고작 불에 탄 쌀 몇 알이 전부였거든요. 영산강 유역 어딘가에 농경 유적이 있으리라는 짐작이 현실로 들어맞은 겁니다.”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 출토된 현악기 등 각종 농경의례 유물들.
그해 6월 공사는 전면 중단됐다. 국도 1호선은 유적을 피해 우회도로가 만들어졌다. 공사 중 발견된 유적으로 인해 국도 방향이 바뀐 것은 처음이었다. 당시 문화재위원이던 김원룡 서울대 교수와 한병삼 국립중앙박물관장, 김기웅 경희대 교수가 진가를 알아보고 당국에 유적 보호를 강력히 요청한 결과였다.
김원룡은 한발 더 나아갔다. 당시 지건길 국립광주박물관장에게 “발굴을 즉각 중단하고 먼저 저습지 발굴기술부터 배워 오라”고 했다. 그때 한국 고고학계는 저습지 발굴 경험이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조현종의 회고.
괭이, 따비 등 나무로 만든 각종 농사 도구들.
“발굴 중이던 유적을 중간에 덮는 건 처음이었습니다. 하지만 흠 없이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곧 수긍했습니다. 유적을 위해서도 저 개인을 위해서도 훌륭한 판단이었죠.” 조현종은 그해 12월 일본 나라문화재연구소로 떠나 저습지 발굴을 배운 뒤 1995년 5월 신창동 유적 발굴을 재개했다.
신창동 유적에서 발견된 나무로 만든 문짝. 고상가옥에 쓰인 것으로 보인다.
"남한에서 가장 오래된 수레바퀴였군요!”
1990년대 당시 신창동 발굴 현장. 부식되기 쉬운 목기와 칠기 등이 다수 출토됐다.
2000년 말 구라쿠 요시유키(工樂善通) 사야마이케(狹山池) 박물관장을 만난 조현종은 그가 그린 스케치 한 장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해 중국 쓰촨(四川) 성에서 출토된 수레바퀴 유물을 묘사한 그림은 3년 전 신창동에서 나온 목기(木器) 형태와 흡사했다. 발굴팀은 해당 유물에 대한 정밀조사에 들어갔다.
당초 의례용 기물로 알았던 유물은 바퀴살과 바퀴축, 고삐를 고정하는 가로걸이대(車衡·거형)로 각각 밝혀졌다. 앞서 평양 낙랑고분에서 기원전 2세기의 수레 유물이 발견됐을 뿐, 삼한지역에서 최초로 출토된 기원전 1세기 수레 유물이었다. 학계는 흥분했다.
1990년대 당시 신창동 발굴 현장. 부식되기 쉬운 목기와 칠기 등이 다수 출토됐다
‘마한 사람들은 소나 말을 탈 줄 모른다(不知乘牛馬)’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기록을 토대로 당시 첨단의 수레 제조기술을 익힌 고조선 유이민(流離民) 집단이 삼한으로 이주한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다. 한반도 고대사 해석의 큰 흐름을 바꿀 수 있는 대발견이었다.
1990년대 당시 신창동 발굴 현장. 부식되기 쉬운 목기와 칠기 등이 다수 출토됐다.
1990년대 당시 신창동 발굴 현장. 부식되기 쉬운 목기와 칠기 등이 다수 출토됐다.
최근 국립광주박물관장에서 정년퇴직한 그에게 남은 과제를 물었다. “신창동에서 야자수 열매를 꼭 닮은 나무 그릇이 나왔습니다. 나는 이게 삼한이 멀리 동남아시아와 교류한 흔적이라고 믿어요. 동북아시아에만 국한하지 않고 시야를 넓혀서 연구해 보고 싶습니다.” [광주=김상운 기자 ]
[출처] : 김상운 동아일보기자 외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 동아일보
12. 여주 흔암리 유적 발굴한 임효재 서울대 명예교수
“일본보다 600년 앞선 탄화미 발견… 내 인생 최고의 유물”
임효재 서울대 명예교수가 7일 경기 여주시 흔암리 유적 근처에 재현된 움집 앞에서 탄화미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여주=홍진환 기자
“허 참, 임 선생이 미국서 ‘요상’한 걸 배워왔네.”
1975년 11월 경기 여주시 흔암리 발굴 현장. 이곳을 찾은 선배 교수들이 임효재 당시 서울대 고고학과 전임강사(75·서울대 명예교수)를 미덥지 않은 눈으로 바라봤다. 땅을 파기도 빠듯한 시간에 임효재가 이끄는 발굴팀은 화덕 자리(爐址·노지)의 흙을 여섯 포대나 퍼 담아 연구실에서 온종일 분석에 매달렸다. 교수들은 궁금했다.
“도대체 뭘 찾아내려는 건가?” “불에 탄 쌀(탄화미·炭化米)을 찾고 있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낱알도 찾기 어려운데 땅속에서 그 미세한 걸? 음 알겠네….”
임효재는 1968년 스튜어트 스트루에버 미국 노스웨스턴대 교수가 창안한 부유법(water flotation technique)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흔암리 발굴 현장에 적용했다. 부유법은 탄화곡물이 있을 가능성이 높은 화덕 주변의 흙을 물에 붓고 위에 뜬 물질을 채로 걸러내 돋보기나 현미경으로 조사하는 방식이다. 탄화곡물은 불에 탄 상태라 미생물에 의해 부식되지 않고 오랫동안 땅속에 보존돼 있다.
유구에서 토기와 같은 인공(人工)의 유물을 찾아내는 게 발굴의 전부였던 당시 국내 고고학계에서 자연 유물을 찾는 것은 시도된 적이 없었다. 40여 년 만에 흔암리 유적을 다시 찾은 임효재는 “모두들 반신반의했지만 한반도 최고(最古)의 탄화미를 결국 찾아냈다”며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과도 맞바꿀 수 없는 내 인생 최고(最高)의 유물”이라고 회고했다.
○ 일본 학계의 ‘한반도 전파설’을 깨뜨리다
1976년 4월 발견된 탄화미. 연대 측정 결과 기원전10세기 것으로 추정됐다
“선생님, 아무래도 뭔가 나온 것 같습니다.”
1976년 4월 여주 흔암리 현장 연구실. 핀셋으로 부유물을 하나씩 헤집으며 한참 돋보기를 들여다보던 서울대 학부생 이남규(현 한국고고학회장·한신대 교수)가 임효재를 급하게 불렀다. 전형적인 타원형의 탄화미였다.
꼬박 6개월 동안 충혈된 눈으로 작업한 끝에 나온 값진 성과였다. 앞서 임효재는 1972∼1975년 미국 텍사스주립대 유학 시절 부유법을 배웠다. 임효재는 “1970년대 초반까지 우리 학계는 농경유적에서조차 곡물을 찾아내지 못할 정도로 ‘눈 뜬 장님’과 같은 처지였다”고 말했다.
발굴팀은 연대 측정을 위해 탄화미와 함께 출토된 목탄(木炭)을 한국원자력연구소와 일본 이화학연구소에 동시에 보냈다. 객관성을 높이기 위해 양국 연구소에서 교차검증을 실시한 것이다.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 결과는 놀라웠다.
두 연구소 모두 기원전 10세기로 나왔는데, 이에 따르면 흔암리 탄화미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것인 동시에 일본보다 600년 이상 앞선다. 흔암리 발굴 이전 최고(最古) 탄화미는 김해 패총에서 발견된 것으로 연대는 기원후 1세기였다.
학계는 흥분했다. 벼농사 기원에 대한 일본 학자들의 한반도 전파설이 깨졌기 때문이다. 1970년대까지 일본 학계는 후쿠오카(福岡) 현 이타즈케(板付) 유적에서 발견된 탄화미의 연대(기원전 3~4세기)가 김해 패총보다 빠르다는 이유로 벼농사가 중국 남부에서 일본 열도를 거쳐 한반도로 전파됐다는 주장을 펴고 있었다.
그러나 흔암리 탄화미 발견을 계기로 상황이 역전된 것이다. 이로써 세계 고고학 교과서의 내용도 바뀌었다. 임효재는 벼농사의 황해 횡단설을 제기했다. “중국 양쯔(揚子) 강에서 황해를 건너 한반도 중부지방으로 벼농사가 들어왔다고 봅니다. 이후 한강을 따라 퍼지면서 일본 열도까지 전해진 것이지요.”
○ 아시아 문화교류사 열쇠를 찾아
1975년 탄화미를 얻기 위해 흙을 물에 넣은 뒤 체질을 하고 있다. 서울대 박물관 제공
학계는 벼농사의 기원이 고대 아시아의 정치, 사회, 문화를 결정한 핵심 요인이었다는 점에서 흔암리 발굴의 의미를 높게 평가한다. 벼농사가 아시아 대륙을 횡단해 전파됐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문화교류사 연구에서도 중요하다. 1978년 흔암리 발굴보고서는 “흔암리 탄화미는 기원전 7∼13세기 전후 한반도 문화에 영향을 미친 중국 룽산(龍山) 문화의 파급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흔암리 유적은 자연유물이 고고학 연구의 중요한 연구 분야로 떠오르는 계기가 됐다. 실제로 임효재의 제자인 이경아(미 오리건대 교수) 안승모(원광대 교수) 김민구(전남대 교수) 등이 식물고고학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노교수에게 흔암리 유적의 남은 학술적 과제를 물어봤다. “흔암리 유적에 담긴 당시 사회구조가 아직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습니다. 주거지별로 흙을 채취하면 곡물의 양이나 종류가 각기 다릅니다. 이들 사이에 사회계급이나 기능의 차이가 있었다는 얘기죠. 후학들의 추가 연구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여주=김상운 기자]
[출처] : 김상운 동아일보기자 외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 동아일보
13. 여수 적량동 고인돌 발굴 이영문 목포대 교수
비파형동검 발굴의 달인… 국내 40점중 18점을 그의 손으로
이영문 목포대 교수가 7월 20일 전남 여수시 GS칼텍스 정유공장 내에 보존된 고인돌 2기 앞에서 발굴 당시를 설명하고 있다. 고인돌 무게는 각각 90t에 이른다. 여수=김경제 기자
지난달 20일 전남 여수시 적량동 GS칼텍스 정유공장. 저유탱크들 사이로 나란히 선 거대한 돌덩이 두 개가 멀리서도 눈에 보였다. 덮개돌 무게만 90t에 이르는 고인돌 2개. 하나는 고임돌 4개가 육중한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바둑판식, 다른 것은 덮개돌만 있는 개석식(蓋石式) 고인돌이다. 현대문명을 상징하는 화석연료 공장 내부에 있는 거석(巨石)은 선사시대로 시간을 되돌리는 타임머신처럼 느껴졌다.
이들을 직접 발굴한 이영문 목포대 교수(63)는 오랜만에 만난 자식을 대하듯 고인돌 곳곳을 살피고 어루만졌다. 그는 “반경 500m 안에서 고인돌이 300기나 나왔는데 이 2기는 다른 것들보다 5∼10배나 컸다”며 “너무 거대해서 다른 고인돌처럼 외부로 옮기지 못하고 결국 공장 안에 남겼다”고 말했다. 그는 고인돌을 바라보며 27년 전 기억을 하나씩 되살렸다.
○ 온전한 형태의 비파형동검 첫 출토
2009년 전남 여수시 월내동 고인돌 유적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들. 동북아지석묘연구소 제공
“선생님, 파괴된 석실에서 동검 조각 같은 게 여럿 나왔습니다.”
“동검? 자네 잘못 본 거 아닌가?”
“3년 전 주암댐에서 나온 것처럼 홈이 파여 있습니다.”
“뭐라고? 당장 그리로 가겠네.”
1989년 1월 18일 여수 적량동 호남정유(현 GS칼텍스) 공사 현장. 사업부지 확장 공사 과정에서 발견된 고인돌 25기를 조사하던 도중 이영문은 제자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대어가 걸린 느낌에 그는 서둘러 현장으로 달려갔다.
붓과 꽃삽을 잡고 조심스레 유물을 노출시키자 비파형동검(銅劍)과 비파형동모(銅모·청동투겁창) 조각들이 보였다. 발굴에 들어간 지 사흘 만에 여수반도에서 동검과 동모가 처음 출토된 순간이었다.
그해 3월 5일까지 발굴이 진행된 이 유적에서는 비파형동검 7점과 비파형동모 1점, 관옥 5점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비파형동검이 이처럼 많이 나온 건 전례가 없었다. 더구나 고인돌에서 쪼개지지 않고 완전한 형태의 비파형동검이 나온 것도 처음이었다.
청동기시대 고인돌에는 주술적 의미를 담아 동검을 2, 3조각으로 쪼개서 매장하는 게 보통이다. 동경(銅鏡)을 깨뜨려 무덤에 부장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완형의 동검이 나온 고인돌(7호)은 보존 상태도 좋았다. 당시 덮개돌과 고임돌 6개가 온전히 남아 있었다. 덮개돌을 걷어내자 작은 돌들로 채워진 지하석실이 있었고, 돌무지 아래서 동검이 나왔다. 다음은 이영문의 회고.
“경험상 석실 깊은 데에서 나오는 동검은 오히려 보존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7호 고인돌 동검은 불과 지표로부터 20cm 아래에서 출토됐는데 상태가 훌륭했습니다. 지금도 제가 발굴한 것 중 최고로 치는 유물이죠.”
○ 팠다 하면 비파형동검 우수수…국내서 가장 많이 발굴
고고학계에서 이영문은 비파형동검 발굴의 1인자로 통한다. 그의 손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만 지금까지 총 18점에 이른다. 전국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40여 점)의 절반에 육박하는 숫자다. 내로라하는 고고학자들이 여수반도 고인돌에서 동검을 찾아 헤맸지만 오직 그만이 이런 성과를 거두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고인돌의 메카’ 전남 화순군이 그의 고향인 것도 마치 고인돌 고고학자의 운명을 예고한 것처럼 보인다.
“고향인 화순 벽송리 마을에 고인돌들이 있어요. 어릴 때 선산을 오가면서 친척들이 ‘이게 뭔데 여기 있느냐’며 궁금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는 그게 고인돌인 줄도 몰랐죠. 나중에 대학에서 수업을 듣고서야 고인돌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이후 그의 인생은 확 바뀌었다. 전남대 사범대를 졸업하고 1979년 해남 북평종합고 교사로 발령받았지만, 한 달 만에 사직서를 내고 전남대 박물관에 들어갔다. 고인돌 발굴에 본격적으로 매달리기 위해 안정적인 교직까지 버린 것이다.
고고학계는 그가 발굴한 비파형동검이 중국 랴오둥(遼東) 지방에서 북한을 거쳐 남해안 일대까지 이어지는 동북아 문명교류의 양상을 보여주는 핵심 자료라고 평가한다. 특히 고인돌에서는 세형동검만 출토되는 것으로 알려진 기존 학설을 깰 수 있었다.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를 묻자 그는 “청동기시대 당시 여수 일대에서 고인돌을 쌓은 집단들의 생활유적을 찾는 것”이라고 답했다. “다양한 비파형동검들이 모두 외부에서 전래됐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이것들을 여수에서 직접 제작했던 장소가 분명 어딘가 있을 겁니다.” [여수=김상운 기자 ]
[출처] : 김상운 동아일보기자 외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 동아일보
14. 공주 정지산 유적 발굴한 이한상 대전대 교수
‘백제 정지산 유적 〓 빈전’ 무령왕릉 지석으로 풀었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가 11일 충남 공주시 정지산 백제 유적을 다시 찾았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정지산 유적 내 중심 건물인 기와건물터로, 통나무 기둥들은 재현품이다. 이곳에 무령왕비의 시신이 2년 3개월 동안 안치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공주=박영철 기자
“초석(礎石·주춧돌)도 없는 건물에 연꽃무늬 기와라니….”
1996년 8월 충남 공주시 정지산 유적 발굴 현장. 그해 발굴에 착수한 지 6개월 만에 연꽃무늬 수막새를 발견한 이한상 국립공주박물관 학예연구사(49·현 대전대 교수)는 ‘대박’ 예감과 함께 깊은 고민에 빠졌다. 연꽃무늬 기와가 출토되는 삼국시대 건물터는 십중팔구 궁궐 혹은 격이 높은 사찰. 당시 무거운 기와를 버티려면 기둥 아래 초석이나 적심(積心·기둥을 올리기 위해 밑바닥에 까는 돌)을 놓는 게 상식이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초석이나 적심이 전혀 나오지 않는 대신 바깥부터 안쪽까지 기둥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기둥이 너무 많아 사람이 거주하기 불편할 정도였다. 궁금증은 갈수록 커졌다. ‘도대체 이 건물의 기능은 무엇인가….’
미스터리를 풀 열쇠는 인근 무령왕릉 안에 있었다. 20년 만에 정지산에 오른 그는 “발굴 한 해 전 무령왕릉 내부를 실측한 경험이 중요한 힌트가 됐다”고 회고했다.
○ 무령왕릉 지석에 담긴 실마리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무령왕릉 지석(가운데 사진)의 내용대로 공산성을 꼭짓점으로 삼고 서쪽으로 선을 그어 정지산 유적이 백제시대 빈전임을 알아냈다(위). 이곳에서는 궁궐이나 거대 사찰에서 주로 발견되는 연화무늬 수막새 (아래)가 나왔다. 이한상 교수·국립공주박물관 제공
‘병오년(서기 526년) 12월 백제국 왕태비(무령왕비)께서 천명대로 살다 돌아가셨다. 서쪽 땅에서 장례를 치르고 기유년(529년) 2월 12일 다시 대묘로 옮겨 장사를 지내며 기록한다(丙午年十二月 百濟國王太妃壽終 居喪在酉地 己酉年二月癸未朔十二日甲午 改葬還大墓 立志如左).’
무령왕릉에서는 삼국시대 왕릉 중 유일하게 묻힌 사람의 이름과 사망일이 새겨진 지석(誌石)이 발견됐다. 여기서 나온 지석 2개 중 한 면에 무령왕비가 죽은 해와 빈전(殯殿·시신을 입관한 뒤 매장하기 전까지 안치하는 곳)의 위치, 남편 무령왕과 합장된 날짜가 기록돼 있다. 백제의 경우 왕이나 왕비가 죽으면 2년 3개월 동안 시신을 빈전에 모시고 상례를 치른 뒤 매장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한상은 이 중 ‘서쪽 땅에서 장례를 치렀다(居喪在酉地)’는 문장에 주목했다. 다른 지석에 방위표가 그려진 걸 감안할 때 이것은 빈전의 위치를 알려주는 결정적인 단서임에 틀림없었다. 기준점인 왕궁 위치는 지석 다른 면에 새겨진 매지권(買地券·죽은 사람이 땅 신으로부터 묻힐 땅을 사들인 증서) 문장을 통해 공산성(公山城)으로 추정했다.
이한상은 지도에 무령왕릉과 공산성(왕궁)을 직선으로 연결한 뒤 다시 공산성을 꼭짓점으로 지석이 가리키는 방향(서쪽)으로 직선을 그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정지산에 선이 닿았다. 정지산 유적이 백제 무령왕비의 빈전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이로써 초석이나 적심이 없는 연꽃무늬 기와 건물에 대한 의문도 풀렸다. 시신을 안치하는 장소이니만큼 사람이 거주하기 힘들 정도로 내부에 기둥이 빼곡해도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더불어 제기(祭器)로 주로 쓰이는 ‘장고형(長鼓形) 기대(器臺)’ 조각이 여럿 출토된 것도 빈전일 가능성을 높여줬다.
이한상은 이듬해 열린 전국역사학대회에 정지산 유적을 빈전으로 해석한 논문을 발표했다. 일부 회의론도 있었지만 학계 다수는 이를 지지했고, 정지산 유적은 2006년 국가사적으로 승격됐다. 특히 오다 후지오(小田富士雄) 후쿠오카(福岡)대 교수 등 일본 학계의 관심이 뜨거웠다.
정지산 유적에서 기와건물터와 함께 발굴된 대벽(大辟)건물터가 일본의 그것과 서로 닮았기 때문이다. 대벽건물터는 사각형으로 도랑을 판 뒤 그 위에 나무기둥을 촘촘히 박아 벽을 세운 것이다. 이한상은 “정지산 유적의 대벽건물터는 시신이 안치된 기와건물터와 품(品)자형 배치를 이루고 있어 다분히 기획성이 엿보인다”고 분석했다.
○ 학계 “백제 3년상 고고 자료로 실증”
고고학계는 정지산 유적이 삼국시대 빈전을 확인한 유일한 자료라는 점에서 높게 평가한다. 궁궐 안 빈전에서 5∼7일만 장례를 거행한 중국과 달리 3년상을 치른 고대 한반도의 장의 풍습을 고고 자료로 실증했다는 것이다. 3년상은 바다 건너 일본 열도에까지 전해졌다.
일본서기에는 일본 조메이(舒明) 천황이 죽은 뒤 ‘백제대빈(百濟大殯·백제의 3년상)’을 따랐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는 “백제와 일본 왕실이 상장의례를 공유한 것은 양국 문화의 깊은 연관성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라며 “정지산 유적 발굴은 대벽건물터가 일본으로 전파된 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단초가 됐다”고 설명했다 [공주=김상운 기자]
[출처] : 김상운 동아일보기자 외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 동아일보
무령왕릉 지석의 ‘사마왕’, 일본서기 기록과 완전 일치
[출처]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11회~ 20회)Ⅱ [한국 고고학 70년 발굴 현장 회고].|작성자 ohyh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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