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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6-52 소경 바디매오를 가르침
마20:29-34, 눅18:35-43 비교하라.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거지 바디메오가 소리쳤다. 그는 예수가 지나간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예수께서 정확히 어느 지점쯤 계셨는지 몰랐을 것이다. 그러기에 큰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는 하찮은 거지에 불과했으며 거치적거리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번 크게 외쳤다. 보통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마1:24)라고 불렀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곳에서 사신 연고로 육체적으로만 예수를 이해하여 부른 것이다.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것은 메시야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시17:2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어린 아이들이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쳤다(마21:15-16). 바디메오가 정확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부른 것인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지만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것은 그 나름대로 메시야(구원자)를 찾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는 불쌍히 여기소서 ejlevhsovn(엘레에-손)라고 호소했다. 이 호소는 시편에서 고통 받는 자가 하나님을 부르는 소리이다(시4:1, 시6:2, 시41:4, 시51:1, 시109:26, 시123:3). 예수께서는 다시 이 길을 지나가신 일이 없었으므로 이 소경에게는 유일한 기회였다. (이와 같은 부름이 마태복음 15:22에 "여자 하나가 딸이 귀신들렸나이다"한 기사에서 나온다. 마태복음은 마태복음 9:27절에 바디메오가 예수를 이렇게 부른 것을 이 여인도 따라한 것이 아닌가 싶다.) 51절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다. 예수께서 그가 무엇을 요구할지를 몰라서 물으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고 고백하고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셨다.
11:1-10 예루살렘 입성
마21:1-11, 눅19:28-40, 요12:1 비교하라. 예수께서는 자신의 때가 임박해 오고 있음을 알고 계셨다. 그리고 그 준비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기로 스스로 결정하신 것이다. 서기관과 대제사장들이 고발하고, 가룟유다가 팔고, 빌라도가 제판을 하는 수순을 밟기는 했지만 엄밀히 말해서 예수께서는 스스로 그의 목숨을 내어주신 것이다. 이 거룩한 죽음 준비의 일환으로 두 제자에게 2절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고 심부름을 시키신다. 예수께서는 신적 능력으로 그것을 보고 계셨고 제자에게 명하셨다(마17:27, 요1:48). 이 사건은 구약성경의 스가랴 9:9(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과 창세기 49:11(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에 나타난 예언을 이루시기 위함이었다. 예수의 말씀대로 나귀는 메어 있었고 주인도 예수가 이른 대로(주가 쓰시겠다)라고 말하여 허락하였다. 8절에서 보여준 이들의 행동은 왕에 대한 영접이었다(왕하9:13). 나무 가지 stibavda"(스티바다스)는 "나뭇잎"인데 요한복음 12:13에는 "종려나무가지"로 기록되어 있다. 종려나무 가지는 요한계시록 7:9(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에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존경과 환영을 표시하는 것이다. 호산나 마태복음을 보라. 당시의 종교적 감탄사로 "아멘", "할렐루야"도 동일한 단어이다.
11:12-14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저주
마21:18-19 비교하라. 이 비유는 이스라엘에 관한 실물 비유로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 가지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13절에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는 무화과가 나오지 않는 철이었다는 것을 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 a[ra(아라)시나 하여 무화과나무로 다가가셨다. 무화과는 없었고 14절의 명령을 나무에게 내리신다. 예수의 신적 능력이 갖가지 병자와 바다를 잔잔케 하신 것처럼 나무에게도 말씀으로 명령을 내리시고 그대로 된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무화과나무를 표본으로 새삼스럽게 능력을 보여주실 필요는 없었다. 이스라엘의 상징은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였다. 이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예수님의 입장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셨다. 이제 그가 다른 일을 하실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자신을 죽이는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무화과나무를 통해서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A.D. 70년에 있었던 실제적인 심판은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누가복음 19:41-44은 예루살렘 멸망을 예언했고, 마태복음 11:15-19에서는 무화과나무 비유와 연결되어서 성전을 청결케하는 비유가 나온다. 성전에서도 이 열매는 없었기 때문에 마가복음13:1-2의 예언은 불가피한 것이 되었다.
11:15-19 성전을 청결케 하심
마21:12-17, 눅19:45-48, 요2:13-17 비교하라. 이 사건은 네 복음서 기자가 모두 다루고 있는데 요한복음의 경우 초기 공생애의 부분에 삽입해 넣었다. 공관복음서 중에는 누가가 제일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마태와 마가는 나름대로 충실히 적고 있다. 그러나 마가의 것은 베드로의 증언이 곁들여 있어 이 부분에 관한 제일 충실한 기록을 남겼다고 볼 수 있다. 서로 다른 시기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보고 기자들이 임의로 적절한 곳에 삽입해 넣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본서의 순서를 따르는 것이 옳다고 본다. 15절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바리새인들은 성전안에서 어린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찬송하는 것을(마21:15) 가증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상인들과 환전상들의 고함 소리로 성전이 아수라장이 된 것에는 아무 느낌이 없었다. 매매하는 자들은 생계를 이어가기 위한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라 안나스와 대제사장들의 가족에게 고용되었거나 결탁된 사람들이다. 그렇지 않고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거나 주위에서 장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성전은 주전 19년에 헤롯 대왕에 의해 건축되기 시작하였고, 그가 죽은 후에 계속해서 작업이 이루어져 A.D. 64년에 완공되었지만 A.D. 70년에 로마군대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성전의 넓이는 121,410㎡이며, 길이가 333m * 433m 나 되는 큰 성벽으로 둘러싸였다.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 20세 이상의 유대인 남자들이 바치게 되는 반 세겔의 성전세(출30:13-16, 마17:24-27)를 히브리나 두로의 돈으로만 받았는데 순례자들은 헬라, 애굽, 로마 등의 나라에서 통용하는 돈을 가지고 있었기에 환전하지 아니하면 성전 세를 낼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이곳 사정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얼마든지 바가지를 씌울 수 있었다. 이들의 모습 속에 비친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의 성전이라기 보다는 대제사장들과 특정 층의 돈벌이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이러한 모습에 대해서 17절 가르쳐 ejdivdasken(에디다스켄)는 동사 "가르쳤다"는 우연히 대화 중에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몰락해 가는 모습을 보고 가르치는 것이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셨다. 마가만이 만민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마가 자신이 이방인들을 위해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유대인만을 위해서 필요한 성전이 아니라는 것을 꼬집고 있다. 예수님의 성전에 대한 생각은 "가르치는 곳"(눅2:46), "내 아버지의 집"(눅2:49), 그리고 "기도하는 집"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성전에서 이렇게 가르치시는 것을 대 제사장들은 물론 허락하지 아니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주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바른 진리를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막고 나설 사람은 없었다. 18절 기이히 ejxeplhvsseto(엑세플레세토)는 "깜짝 놀라다, 매우 놀라다, 경악하다, 무서워하다" 뜻의 동사로 볼 때, 그들에게는 두려운 말씀이었다. 이와 같이 강력한 말씀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19절 매양 저물매(Kai; o{tan) "그 날의 늦은" [황혼이 질 때]를 가리킨다.
11:20-25 믿음의 힘에 대한 말씀
아침에 성전에 올 때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았다. 뿌리로부터는 완전히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질문을 "무화과나무가 왜 죽었는지?"에 대해서 21절 베드로같이 나서기 좋아하는 제자도 더 이상 묻지 않고 죽은 사실만을 예수께 고했다. 이것은 제자들도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적인 예수님의 행동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제 관심의 초점은 무화과나무의 죽은 것으로 인해 그 이유가 아니라 그대로 된 것에 대한 관심이다. 현장의 경험들을 바탕으로 믿음을 가질 것을 권면 하신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22-25절에 나타난다. 23절 의심치 diakriqh'/(디아크리데)는 "분리하다"의 뜻으로 믿음과 반대되는 말. 25절의 말씀은 언 듯 이 사건과 교훈에 연결되지 않는 것 같이 보인다. 하지만 25절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는 무화과나무의 저주를 본 제자들이 혹시 잘못 이해하여 개개인의 잘못의 용서를 하는데 오해할 소지가 있어 덧붙인 말씀으로 보인다. 우리의 저주는 가볍고 개인적인 흥분으로 형제를 미워하는 감정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약3:10).
11:27-33 권세에 대해 설명하심
마21:23-27, 눅20:1-8 비교하라.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걸어다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이제 예수께서 행하시는 일을 그대로 볼 수 없었던 모양이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이 모두 나와서 예수께 질문하고 있다. 그들은 상당히 흥분된 상태에 있었고,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자신들) 마음대로 성전을 누비며 다니고 있는 예수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라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직접적인 답변을 하지 않으시고 다시 그들에게 30절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내게 대답하라고 다그쳤다. 누가복음 20:6에서는 "저희가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고 말함으로 군중들의 생각을 외면하기 어려웠다. 이 질문에 그들은 답변하지 못하고 예수도 그들에게 대답하지 않으셨다. 33절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는 [대답할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장로(Elder in the ot)
히브리어 ynEq]z(자켄) "턱, 턱수염"의 의미와 b`(셉), by`(십)의 "백발"의 뜻이 있다. 헬라어 presbutevrwn(프레스부테로스)로 각 성읍의 총회나 회의에 모였던 대표성격을 띤 어른들이었다. 이들은 턱수염과 백발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장로들은 히브리 민족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며 바로에게(창50:7), 미디안 족속과 모압족속에게(민22:7), 기브온족속(수9:11)에게도 있었다.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장로들은 유목민 때부터 존재했으며 애굽의 종살이 때도 있었다(출3:16, 출4:29). 모세는 제사드리는 일을 분담하기 위해 70인의 장로를 뽑았고 모세의 영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했다(민11:16-17). 장로들은 때때로 제사장과 함께 기록되었다(왕상8:3, 왕하19:2). 각 지파의 장로들의 구성(공의회)에 대해서는 특별히 알려진 것이 없다. 지파나 지역에 따라 결정되었던 것 같다. 숙곳에는 77인의 장로들이 있었다(삿8:14). 신약에서 장로들은 구약의 관계를 연장하여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나이많은 사람, 연장자의 의미이자 지도자의 의미 또한 가지고 있다. 초대교회에 있어서는 지방교회 감독자의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신약에서 장로직관 관련된 용어는 70회 이상 나타난다. 이중에 반정도가 유대교의 장로직에 대해서 언급한다(마15:2, 마26:47, 막8:31, 막14:43, 눅7:3, 눅22:52, 행4:5, 행25:15). 요한복음에서는 8:9의 변형의 표현을 빼면 한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이것은 아마 공관복음에서 장로들이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문제를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공관복음에서의 유대교의 장로들이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과 함께 예수께 대항하는 무리로 언급되었지만 이후의 장로에 대한 언급은 다시 좋은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딤전4:14)라고 말한다. 또한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딤전5:17) 디도서 1:5에는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으며, 베드로는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벧전5:5)고 말했다. 계시록에서는 "이십 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계4:4)고 표현함으로 예수께서 잡히실 때 공의회 회원의 일부 유대교 장로들에게 문제가 있었지만 이후 신약시대에도 여전히 장로제도는 운영되었고 존귀한 연장자이며 지도자로 역할을 감당했다.
포도원 농부 비유(마 21:33-46; 눅 20:9-19)
(막 12:1) 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막 12:2)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막 12:3) 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막 12:4)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막 12:5) 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 느9:26, 살전2:15
(막 12:6)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막 12:7) 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시2:2, 히1:2
(막 12:8)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
(막 12:9)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막 12:10) 너희가 성경에 ㄱ)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막 12:11)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막 12:12) 그들이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두고 가니라 마21:46, 요7:30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마 22:15-22; 눅 20:20-26)
(막 12:13)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막 12:14)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막 12:15)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1)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막 12:16)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막 12:17)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
부활 논쟁(마 22:23-33; 눅 20:27-40)
(막 12:18)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눅20:27
(막 12:19) 선생님이여 ㄴ)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신25:5
(막 12:20)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막 12:21)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막 12:22) 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막 12:23)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막 12:2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딤전1:7
(막 12:25)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막 12:26)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ㄷ)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마22:32, 눅20:38
(막 12:27)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마22:32, 눅20:38
가장 큰 계명(마 22:34-40; 눅 10:25-28)
(막 12: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막 12: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ㄹ)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신 6:4 이하
(막 12: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고전13:13
(막 12:31) 둘째는 이것이니 ㅁ)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레 19:18
(막 12:32) 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막12:29
(막 12: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막 12:34)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마22:46
그리스도와 다윗의 자손(마 22:41-46; 눅 20:41-44)
(막 12:35)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눅20:41, 삼하23:2
(막 12:36)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ㅂ)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시110:1
(막 12:37)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듣더라 롬1:3, 눅21:38
서기관들을 삼가라(마 23:1-36; 눅 20:45-47)
(막 12:38)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막 12:39)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약2:3
(막 12:40)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가난한 과부의 헌금(눅 21:1-4)
(막 12:41)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막 12: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막 12: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막 12:44)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12:1-12 포도원(악한) 농부 비유
마21:33-46, 눅20:9-19 비교하라
세 복음서에서 모두 말씀의 동기와 시작에 대에서, 비유의 동기는 의심할 여지없이 명백한 동기와 대상이 있었다. 앞장에서 연결된 것인데, 당시의 대제사장, 장로, 서기관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그 성전에서 예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는데 가만히 있지 않았다.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신학자료>
마태 = 대제사장, 백성, 장로
마가 =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
누가 =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
마태복음에는 서기관이 빠져있는 것은 그가 세리였기 때문에 같은 공직자인 서기관을 의도적으로 기록하지 않았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이 부분은 누가가 제일 확실하게 전해주고 있다.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 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눅20:1)왔다고 표현함으로 복음을 전했던 예수님께 그들은 와서 물었던 것이다.
본문의 시작과 같이 예수께서는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에게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함께 복음을 듣고 있었던 백성에게 가르치시고, 백성들은 이 비유 말씀은 그 자리에서 이해하였다. "사람들이 듣고 가로되 그렇게 되지 말아 지이다 하거늘"(눅20:16) 예수님의 비유를 조금 관심 있게 살펴보면 다른 비유들과 차이가 있는 것을 발견된다. 비유들은 들의 백합, 공중의 새들, 목자와 양 등을 소재로 한 자연의 평화와 질서를 말하는 비유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오늘 비유는 그 대상이 인간이다. 인간을 비유로 한 것은 불법과 죄에 관하여 다루고자 함이다. 오늘 이 비유말씀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부르짖는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① 하나님은 포도원의 주인이시다.
이 비유는 당시의 백성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포도나무로 상징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의 이스라엘을 믿는 사람으로 풀이한다면 우리에게도 관계 있는 말씀이 되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렘 2:21) 또한 에스겔은 "네 피의 어미는 물가에 심긴 포도나무 같아서 물이 많으므로 실과가 많고 가지가 무성하며"(겔 19:10)라고 말한다. 시편기자는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
주께서 그 앞서 준비하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편만 하며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우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시 80:8-10) 예수께서 포도원 이야기를 꺼내실 때 그 듣는 사람들은 아무 의심 없이 이스라엘을 향해서 하는 말씀인 것을 받아들였다.
② 욕심은 끝이 없었습니다.
많은 죄인들의 공통된 이야기가 처음에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다.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마21:33-34) 주인은 추수 때에 보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목적은 분명했다. 추수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화장실 갈 때 마음하고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고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마21:35) 주인 보낸 종들을 마구 때리고 죽였다. 이 종들은 이스라엘에 파송한 하나님의 선지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기서 멈추시지 않는다.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마21:36) 그들은 또 주인이 보낸 종들을 죽였다. 아주 그 모든 실과를 자신들이 다 먹으려고 작정했으며 종들은 우습게 알았다. 그래서 주인은 이제 마지막 카드를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마 21:37-38) 그 아들까지도 죽였다. 이 말씀을 마태, 마가, 누가는 예수님이 지상에서 마지막 주간에 사역하신 행적 가운데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의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여러 번 제자들에게 일러주었는데 오늘 말씀은 비유 가운데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③ 우리도 주인을 내어쫓지 않으십니까?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마 21:38-39) 그들은 왜 아들을 죽였는가? 상속자이시기 때문이다. 바로 그 상속을 자신들이 가지려는 것이다. 당시의 대제사장과 서기관, 장로들만 그런 것 아니다. 오늘 우리도 사실 주님의 것을 가로채고 있는지 모른다. 하나 님의 것을 내 것으로 알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영광을 받으려고 하는 것 모두 주인을 내어쫓는 것이다. 처음에는 종들만 죽였지만 마지막에는 주인의 아들까지 죽이는 자들과 같이 예수를 죽이는 사람들 모두 예수의 영광을 가로채는 사람들이다.
12:13-17 세금에 대해 교훈
마22:15-22, 눅20:20-26 비교하라. 예수의 권위에 대한 질문으로 실패하자 저희는(대제사장, 사기관, 바리새인) 책잡으려 ajgreuvswsin(아그류소시) "사냥을 하여 잡다, 덫을 놓아 잡다"의 ajgreuvw(아그류오)에서 파생한 단어이다. 이번에는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어 어떻게 하든 흠을 잡으려고 했던 것이다. 14절 이들은 사실 매우 비아냥거리는 듯 한 말로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라고 묻는다. 이들이 비아냥거리면서 말하기는 했지만, 예수님이 바르게 행하고 계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들이 던진 질문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라는 자신들이 생각하기에는 빠져나갈 수 없는 기막힌 질문이었다. 이 질문을 한 자들이 바로 해롯당과 바리새인이라는 것을 염두 해 두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긍정을 하든 부정을 하든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바치라고 하면 신학적인 문제와 함께 평민들에게 나쁜 평판을 주게될 것이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공격할 것이고, 바치지 말라고 하면 로마에 대한 반역죄로 몰려 헤롯당에게 당장 체포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들은 의기양양하여 15절 다시 재촉하여 묻는다.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예수께서는 이들의 이중성을 잘 알고 있었다. 16절 이 화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고 물으셨다. 당시의 사람들은 사실상 자의든 타의든 이미 세금을 내고 있었다. 또한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께서 구태여 직접 대답을 줄 필요가 없었다. 화상을 물은 것은 그들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문제를 확인시켜 준 것이다. 가이사 Kaivsari(카이사리)는 로마 황제의 칭호로 "황제 폐하"라는 말과 같다. 바치라 ajpovdote(아포도테)는 "돌려보내라"는 뜻으로 세상 것은 세상 사람에게 주고 그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려야한다는 의미가 있다. 데나리온 화폐에는 당시의 통치자 디베리우스(Tiberius:로마 제2대 황제로 14-37년 재위) 황제의 흉상이 있고, 뒷면에는 "최고의 제사장"이라는 글과 신들의 보좌에 앉은 황태후 "리비아"가 있었다.
12:18-27 부활에 대해 교훈
마22:23-33, 눅20:27-40 비교하라.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사두개인
사두개인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이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B.C. 134-104년에 재위하였던 요한 힐카누스의 때였다. 그리고 A. D.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멸된 후 역사에서 사라졌다. 이들은 유대인 사회에서 귀족 사회를 형성하였고 숫자적으로는 바리새인들보다는 적었지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명칭은 자신들이 사독의 옛 제사장 계보 출신이라는 주장을 나타낸다(왕상1:26). 이들은 성문화된 성서만을 받아들였으며 율법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구전 해석들을 반대하였다. 비록 그들 자신들도 율법에 대한 사적인 해석들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들은 제사장들만이 가지는 특권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에 대해서도 분개하였다. 사두개인들은 종교적 문제들에 대한 관심이 일반적으로 부족하였다. 그들은 인간을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로 보았고 하나님의 섭리의 개념을 부인하고 내세에 있어서의 보상 또는 처벌, 천사들, 영혼들, 몸의 부활에 대한 어떠한 신앙도 부정하였다. 이러한 이들의 주장은 사도행전23:8에 기록되어있다. 이들은 앞서 질문한 바리새인과 헤롯당의 현실적인 세금문제의 질문과 다르게 성경을 들고 나왔다. 19절 이들은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상투적으로 쓰였던지 아니면, 이런 생각은 이들이 갑자기 들고 나온 질문이라기보다는 이들 속에 깊이 자리잡고있는 생각을 예수께 같은 질문을 하고있는 것이다. 신명기 25:5-10에 나온 모세의 수혼법(嫂婚法)을 들고 나왔다. "남편이 죽게될 경우 가장 가까운 형제로부터 친척까지(룻4:1-8) 미망인과 결혼해야하고, 이렇게 하여 낳은 첫 아들은 고인의 아들로 인정하여 이스라엘 가문에서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제도를 말한다." 20-23절까지 질문은 이어진다. 질문의 요지는 23절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을 당하여 저희가 살아날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이다. 24절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했다고 지적하신다. "성경"은 앞의 부분을 말한 것이다. 한마디로 제대로 정확히 아는 것이 없고 오해만(잘못해석) 하였다는 것이다. 25절에서 부활 때의 일들을 언급하신다. 한마디로 이 세상의 문제가 천국에서 연속되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서는 이 땅과 전혀 다른 곳이라는 것이다. 26절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관해서는 출애굽기 3:1부터의 글과 출애굽기3:6을 인용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요지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죽었지만 족장들이 모세 시대에도 여전히 살아있음을 말한다. 그들은 세상 적인 관점에서는 죽은 자들이나 하나님 입장에서는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옮겨진 자들인 것이다(눅16:19-31, 빌1:21-23)." 그러므로 27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고 하신 것이다. 롬8:38-39 참고하라.
12:28-34 모든 계명을 중 가장 큰 계명
마22:34-40, 눅10:25-28 비교하라. "서기관"(마2:6 주석)을 보라. 이곳의 서기관이 바리새인, 사두개인 중의 한사람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이 질문의 동기에 대해 마태(마22:35)와 누가(눅10:25)는 예수를 시험하려고 한 것이라고 하나 마가는 진실 된 질문을 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 전 부분이 계속해서 나쁜 의도의 질문이었는지라 마태와 누가는 같은 시각에서 본 것이고 마가는 이 사람의 질문의 의도를 별도로 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질문의 의도와 관계없이 질문의 참 뜻과 예수께서 하신 대답을 구해야 할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서 필자가 마태복음에서 주석 한 부분은 마태복음의 입장을 그대로 따르고 있을 뿐이지 이곳과 상반되게 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랍비들은 613가지의 계명 중에서 늘 으뜸이 되는 계명을 찾고, 토론했던 문제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이 서기관은 율법 중에서 으뜸가는 계명을 묻지 않고 모든 계명들 가운데 으뜸가는 계명을 묻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지식과 당시의 율법 중에서 계명의 제일을 찾으려 시도했던 사람들과는 대조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가는 이 사람이 예수를 시험하려고 묻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질문에 29절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고 선언하신다. 이 말은 여기 질문한 서기관에게만이 아니요 전 이스라엘 백성(영적으로는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말씀하신 것이다. 30절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이 부분은 신명기 6:4-5를 인용하신 것이다. 마음 kardiva"(카르디아스)는 마음 중심에서 나오는 생각으로 생명의 중심(잠4:23)이며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감찰하신다(롬8:27, 삼상16:7, 살전2:4).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셨다(갈4:6).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강하게 하신다(살전3:13). 목숨 kardiva"(프쉬케스) "영, 호흡, 미혼, 생명, 마음"으로 원어의 같은 단어가 목숨(마2:20, 마10:39, 마16:26, 마20:28, 마22:37, 막8:37, 막10:45, 눅9:24, 눅10:27, 요10:11, 요15:13, 롬16:4 등)으로, 생명(행27:22), 혼(살전5:23, 히4:12), 마음(마22:37, 눅3:35, 눅10:27, 눅24:45, 요10:24, 요12:40, 행14:2, 행15:24, 행21:13, 롬11:34, 고전2:16, 고후4:13, 엡6:22, 빌2:2, 골4:8, 살후2:17 등)으로 나온다. 뜻 dianoiva"(디아노이아스)는 "깊은 사고, 작용, 사상, 목적, 지성"을 의미한다. 원어의 같은 단어가 뜻(마12:7, 마22:37, 눅7:30, 눅10:27, 요4:34, 요7:17, 행13:22, 36, 행20:27, 행22:14, 롬9:19, 롬15:32, 고전4:5, 고후8:5, 엡1:11, 골1:4, 딤후2:26, 히2:4, 히10:10, 계17:13, 17 등)으로 마음(막3:5, 눅1:51, 눅6:45, 롬1:24, 롬7:23, 고전4:5, 고전14:25, 엡1:11, 엡2:3, 엡4:17, 히4:12, 벧전1:13)으로 나타난다. 힘 ijscuvo"(이스퀴오스) "강력함, 능력, 본질적인 힘"을 의미하며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막14:8), "화해하기를 힘쓰라"(눅12:58), "증거 하나니 힘대로 할 뿐 아니라"(고후8:3),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벧전4:11),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벧후1:5) 이라고 나온다. 다하고 o{lh"(홀레스)는 "전체의, 모든, 완전한, 모두, 함께, 전부, 온전히"의 뜻으로 전심으로를 말한다. 사랑하라 ajgaphvsei"(아가페-세이스)는 인간에서 나오는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을 말한다(마19:19, 마22:37, 마22:39, 막12:30, 요13:34). 31절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는 레위기 19:18을 인용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그들이 알고 있는 율법과는 전혀 새로운 것임과 동시에 또 그들이 알고 있는 성경을 인용함으로서 32절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고 고백을 이끌어 내셨다. 이로 보건대 이 사건에 대해서는 마태와 누가의 생각보다는 마가가 더 바로 본 것으로 생각된다.
12:35-37 다윗의 자손 문제
마22:41-46, 눅20:41-44 비교하라. 예수께서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뇨하는 문제를 제기하시었다.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는 것은 당시의 일반적으로 예수를 부르는 방법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름대로 예수를 존경하여 부르는 방법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마1:1)이라고 책의 서두를 열고 있고, 족보의 여러 사람 중에서 유독 아브라함과 다윗만을 대표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경우는 마1:20, 마9:27, 마12:23, 마15:22, 마20:30, 31, 마21:9, 15, 마22:42, 막10:47, 48, 막11:10, 눅1:27, 눅2:11에서 나타난다. 이런 부름에 대해서는 그동안 언급이 없던 예수님이 지적하고 계신 것이다. 다른 사람이 말할 때는 가만히 계셨다는 것은 그대로 인정하셨다는 뜻이다. 그런데 서기관들이 이렇게 부를 때는 인정하지 않으신 것이다. 그것은 문맥상으로만 보면 다른 곳에서는 구원의 주를 찾아 부르고 찬양하고 있는 뜻으로 불렀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형식적으로 부르고 있는 것에 대한 지적이다. 그리스도(메시야를 헬라어로 말한 것으로 두 단어에는 차이가 없다.)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뇨는 예수님의 반문을 다시 번역하면 [어찌하여 메시야를 다윗의 자손이라고만 하는가?]이다. 예수님은 이어서 36절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시편 11:1의 말씀을 인용하셨다. 다윗이 말하기는 했으나 그 말을 한 것은 성령을 통해서 한 것이었다(왕23:2, 행1:16, 벧후1:21). 이 부분을 예수께서는 메시야의 의미로 해석하셨다(행2:34, 35, 고전15:25, 히1:13). 37절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다윗의 이렇게 주를 불렀는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지적하셨다. 인간적인 혈통으로만 보면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러도 되지만 그를 하나님의 아들(主)로 인정한다면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없음을 말씀하신다.
12:38-44 서기관의 경계와 가난한 과부의 헌금
마23:1-36, 눅20:45-47, 눅21:1-4 비교하라. 38절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qelovntwn ejn stolai'" peripatei')을 다시 번역하면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 은 여러 사람들이 오고가는 곳에서 공개적으로 인사 받는 것을 말한다. 39절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역시 공개적인 장소에서 대접받고 높은 자리를 좋아하는 명예욕과 허영심에 가득한 것을 지적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으면 상좌에 앉지 말고 말석에 앉으라고 권하셨다(눅14:8-9, 참고, 막10:35-45, 요5:44, 약2:2-4). 40절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유대교에서는 과부와 고아는 법률적으로 보호를 받는다. 출애굽기 22:22-23의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지라"를 보아 알 수 있다. 당시의 서기관들은 가르침에 대한 보수를 받는 것은 금지되어 있어서 기본적으로 가난하게 살았다. 여기서 예수님은 이들이 어떤 방법으로 과부의 가산을 삼키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제자들까지도 이해할 수 있는 부도덕한 일들이 행해지고 있음을 말한다.
42절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렙돈은 히브리 동화, 고드란트는 로마 동화인데 마가가 로마인들을 위해 번역해 넣은 것 같다. 44절 예수님의 이 헌금에 대한 설명은 이 여인의 두 렙돈은 생활비 전부를 넣은 것이라고 보셨다.
막13:1-8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 예언하심
마태복음 24장, 누가복음 21장 비교하라. 마가복음 13장은 작은 계시록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비록 내용은 작지만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직접 하신 것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요한 계시록에서 확대 설명된 핵심이 본 장에 있다(살전4:13-17 참고). 본 장의 목적은 단순히 앞날에 대한 호기심에서 다루어진 것이 아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이스라엘에게 당부와 경고의 말씀이 포함되어 있다. 제자 중 하나가 정확히 누구인지 모르지만, 마태는 "제자들", 누가는 "어떤 사람들" 이라고 기록함으로 어떤 제자가 물었겠지만 다른 제자들뿐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들까지도 동의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말했다. 상당히 애국적인 관점에서 긍지가 있는 소리로 들려진다. 헤롯에 의해 지어진 것이지만 제3성전은 로마 세계의 건축물 중의 하나였다. 이 건물은 예루살렘 멸망 때까지도 완성을 보지 못했다. 상당히 좋은 돌들로 장엄하게 지어진 건축물임에 틀림이 없다. 이 건축물을 보고 유대인이면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건물이었다. 그런데 주님은 예루살렘을 보고 우셨다(눅9:41). 여기서도 주님의 대답은 저주의 뜻으로 말씀하신 것은 아니었다. 다만 당신께 보이는 사실을 서글픈 마음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2절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이 예언은 유대인들이 로마에 대항하였을 때, 베스파시안 황제(Vespasian A.D. 69-79년)의 아들 디도(Titus)에 의해서 A.D. 70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 이 때 로마 군인들 사이에 돌과 돌 사이에 보물이 숨겨있다는 소문이 있어 성전을 헐어내면서 돌들 하나하나를 70여 차례에 걸쳐 철저하게 파괴하였다. 또한 이 때 이 도시에 살고있는 대부분의 유대인들 약 100만 정도의 사람이 학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도망간 사람들이 돌아와 이 장소를 찾지 못하도록 이 성전을 비롯해 전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였다. 3절 종용히 묻자오되(kat! ijdivan)는 "사적으로, 개인적으로"의 뜻이다. 4절 어느 때에 이런 일 tau'ta(타위타) "언제, 얼마나, 어느 때에"의 뜻으로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이 모든 일이 pavnta tau'ta(판타 타위타) pavnta는 "모든(골1:4, 살전2:15, 계16:3), 만물(고전15:27, 엡1:22, 빌3:21, 히1:3, 계4:11, 계21:5, 계22:21)"의 뜻으로 세상의 종말로 보는 견해와 하나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평행구절인 마태복음 24:3에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아오리이까"라고 말함으로 좀 더 분명히 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후자의 견해가 옳은 것이다. 5, 6절 "미혹 자들이 나타난다", 7, 8(앞 부분)절 "대적과 전쟁이 일어난다", 8(뒤 부분) "재난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막13:9-13 제자들이 받을 시련에 대해 말씀하심
10절 만국에 전파되어야(pavnta ta; e[qnh) pavnta(모든) e[qnh(민족, 이방인)의 뜻으로 다시 번역하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야] 또는 [모든 이방인에게 전파되어야]인데 후자의 것이 더 나은 것으로 본다. 이방인 선교 사상은 구약성경(사42:6, 사49:6, 사52:10, 사60:6, 시96편) 에서도 나타난다. 13절 나중까지(eij" tevlo")는 "마지막까지, 종말까지"를 말하며 견디는 uJpomeivna"(훼포메이나스)는 "확고부동하다, 흔들리지 않는다, 인내하다, 버티다, 남겨지다"의 뜻으로 여러 신학자들은 단순히 참고 기다리는 것뿐만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제자 됨, 여러 일에 위대한 것으로 영광스럽게 재림하는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한 새롭게 변화시키는 능력(고후2:14)이라고 하였다. 성경은 끝까지 참고 견디도록 당부하신다. 끝까지 견디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허사이며 구원도 없는 것이다(마24:13, 눅9:62, 행13:43, 고전15:58, 고전16:13, 골1:23, 살후3:13, 딤전6:14, 히3:6-14, 벧후3:17, 계2:10).
막13:14-22 마지막 때의 재난과 대처방법
14절 멸망의 ejrhmwvsew"(에레-모-세오-스) "약탈, 황폐시킴"을 뜻하며 원어는 (마24:15, 막13:14, 요17:12, 빌1:28, 살후1:9, 벧후2:19, 벧후3:7)에 나온다. 가증한 것 bdevlugma(브델루그마)은 "혐오스러운 것, 몹시 미운 것"으로 우상숭배를 말한다(단9:27, 단11:31, 단12:11). 어떤 신학자는 A.D. 70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을 때 성전을 헐고 유대인을 멸망시킨 로마인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읽는 자 oJ ajnaginwvskwn(호 아나기노-스콘-)는 가르치기 위해서 큰 소리로 읽는 것을 말한다(마24:15, 행8:32, 계1:3).
막13:23-27 주의 재림에 대한 예언
이 부분은 구약의 여러 구절들에 흩어져 있는 내용을 묶어서 하나로 말씀하고 계신다. 23절의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는 이러한 사실은 말하신 것이다. 전 세계적이며 천문학적으로 표현된 종말의 현상은 구약(사 13:10, 24:23, 34:4, 겔32:7-8, 욜2:10, 욜3:15, 암8:9), 신약(행2:20, 벧후3:10, 계6:13-14, 계8:12) 등에서 나타난다. 26절 인자가 심판하기 위해서 오시는 모습은 다니엘 7:13절에 나온다.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것은 다니엘의 예언과 일치한다(다니엘 7장 참고). 23절 삼가라 blevpete(블레페데)는 "깨닫다, 주의하다"로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사도들, 그리고 이적과 기사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이다(마7:15, 마10:17, 막12:38, 눅20:46, 빌3:2, 벧후3:17 참고).
막13:28-37 무화과 나무의 비유
앞 부분의 내용이 종말에 대한 예언이기 때문에 제자들은 혼란스러워 질 수 있었다. 그러한 종말이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본 비유로 교육하고 계신 것이다. 포도나무와 무화가 나무는 이스라엘을 대표할만한 나무이다. 하지만 종말이 이스라엘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본 비유는 이스라엘에게만 내려진 비유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비유인 것이다. 그래서 누가는 무화과 나무에 다가 "모든 나무들"을 첨가했다(눅21:29). 이 비유는 선한 농부의 비유와 같은 종류로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는 말씀 중에서 천기를 예리하게 분별하는 것과 이 비유를 비교하라(마16:2-3). 이 말씀은 두 가지 관점에서 선명하게 제시되어있다. 첫째, 종말의 정확한 날짜에 대해서는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그 날을 정확히 알 수 없으므로 늘 깨어 있으라는 것이다. 누가 마지막날을 계산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만도 예수의 말씀을 부정하는 것이요 무시하는 처사가 된다. 33절 주의하여 blevpete(블레페데) "조심하여"로 한글성경에서는 주의하라(마6:1, 마16:6, 11, 막8:15, 눅12:1, 눅21:8, 롬14:13, 골2:8, 딤후4:15), 조심하라(막13:9, 고전8:9, 고전10:12, 갈5:15), 삼가라(마7:15, 마10:17, 막12:38, 눅20:46, 빌3:2, 벧후3:17)로 나온다. 34절 문지기 그리스도 자신이 문이 된다(요10:7). 처녀들이 주님에게 문을 열어 달라고 간청한 적이 있다(마25:11). 바울서신에도 이런 은유가 들어있다(고전16:9, 골4:3). 36절 홀연히 와서 ejxaivfnh"(엑사이후네스) "갑자기"와서의 뜻으로 성의 수문장들은 늘 깨어 근무하는데 주인이 갑자기 순시하여, 만일 졸고있거나 잠을 자면 채찍으로 맞거나 혹은 그의 옷을 불에 태우거나 했다. 이 단어는 마17:5, 눅2:13, 행2:2, 행9:3, 행10:30, 행12:7, 행16:26, 행22:6, 살전5:3에 나타난다. 37절 깨어 있으라 grhgorei'te(그레고레이테)는 "방심하지 말라"(be wakeful)이다. 이 단어에서 "그레고리"(Gregory)라는 로마 교황의 이름이 나왔다. 이 단어는 마24:42, 마25:13, 막13:33, 34, 35, 37, 골4:2에 나타난다.
14:1-2 종교지도자들의 음모
마 26:1-5, 눅22:1-2, 요11:45-53 비교하라. 마가복음 자체의 속도가 빠르지만, 예수님의 수난과 관련된 막14, 15장도 마찬가지이다. 마태와 누가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의 마지막을 담고 있는 이 부분의 앞뒤에 여러 교훈과 비유들을 많이 담고 있는 반면 마가는 바로 사건이 전개되어간다. 이런 점에서 마가의 기록은 속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정확한 날짜에 대해서는 여러 신학들간에 의견이 다양했지만 결론을 맺지는 못하고 있다. 다만 유월절 기간 동안에, 유월절 양이 죽임을 당하는 그 순간에 아니면 좀 더 걸린 것인지는 우리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1, 2절의 말씀으로 추정할 수 있다. 1절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마가, 누가복음에는 "유월절과 무교절"이 같이 나오는데 마태복음에는 유월절만 나온다. 이 두 절기는 연속되기 때문에 이렇게 기록된 것이다.
유월절 to; pavsca(토 파스카)
니산월(4월) 14일 오전에는 집 안에서 누룩을 찾아 없애고 오후에는 양을 잡는다. 그리고 이날 저녁부터 15일 이른 아침까지 한밤중 사이 유월절기로 지낸다(출12:6-20, 출48, 민9:2-14, 신16:1 참고). 이 명절은 15일부터 21일까지 지속되어 무교절 ta; a[zuma(타 아주마)로 이어졌다(출12:15-20, 출23:15, 출34:18, 신16:1-8). 이 두 명절은 민간의 관습으로는 같은 명절로 취급되어 유월절로 합해져서 지내졌다(눅22:1). 유월절은 예루살렘에서 24km 이내에 있는 유대인 성인남자는 의무적으로 예루살렘에 참가해야 하는 오순절, 초막절과 함께 제일 중요한 절기로 지내는 삼대절기이다. 이틀이 지나면은 유월절 이틀 전에 니산월(4월) 13일(수요일)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유월절의 축제기간동안에 예수를 죽인다는 것은 상당히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사건들을 보면 상당히 빠르게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14:3-9 마리아가 예수께 향유를 부음
마26:6-13, 요12:1-8, 눅7:36-50 비교하라. 3절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아마도 예수님의 능력으로 지금인지 전에 인지는 모르나, 고침을 받은 한 문둥병자의 집에서 그가 감사함으로 식사에 초대했을 가능성이 짖다. 한 여자가 요한복음의 기자는 이 여자가 마르다와 나사로의 동기간인 마리아라고 밝힌다(요12:3). 당시의 관습으로 보아 여자가 남자들의 식사에 들어오는 것은 맞지 않지만(슈바이쳐) 그러나 시골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그다지 엄격하게 분리되지는 않았다(로마이어).고 한다. 나드 navrdou는 히말리야의 "보탄"과 "네팔의 산중" 그리고 인도에서 나는 감송향의 뿌리에서 짜서 나오는 향유이다. 이스라엘에서 쉽게 구하기 어려운 이 향유는 어머니에게서 딸에게로 물려져 가보처럼 취급되어 보통 귀인들이나, 값이 비싸 부자 중에 일부만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레인). 옥합 ajlavbastron(알라바스트론)에는 많은 량의 나드 향유가 담겨있었으며(요12:3) 옥합은 석고로 된 매우 귀품 있는 흰색 단지였다.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옥합은 오래 동안 보관되었기 때문에 그 입구가 막혀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옥합은 향유가 사용될 때를 위해서 있었기 때문에 깨뜨린 것이다. 또한 예수께 일부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아낌없이 전부 사용하기 위해서 깨뜨린 것이다. 유대에서는 잔칫집에서 귀한 손님에게 기름을 부어 주거나(시23:5, 시141:5, 눅7:46) 제사장이나 왕의 취임식 때도 기름을 부었다(삼상10:1, 왕하9:6). 일반적으로 이 비싼 옥합을 깨뜨리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 이유를 자세히, 여인이나 예수께 묻지도 않고 성급하게 자신들의 마음대로 해석하고 분을 낸 제자들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마태복음 26:8에서는 제자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아마도 마태는 제자들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데 동의한 것으로 보고, 마가는 특정한 제자만, 가롯유다가 더 화를 많이(요12:4) 내면서 그 가치를 금방 계산해 내었다. 그 가치는 삼백 데나리온이었다. 당시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으므로 오늘날(2002년) 약5만원으로 계산하면 1,500만원이 된다. 5절 책망하는지라 ejnebrimw'nto(에네브리몬토)는 어근단어 ejmbrimavomai(엠브리마오마이) "씩씩거리다"에서 유래했다. 감정이 섞인 말로 호통을 치면서 꾸짖듯이 말한 것이다. 이 여인은 최선을 다했지만 제자들의 이런 꾸지람에 상당히 당황했을 것이다. 예수께서 6절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7절 가난한 자들은 이 땅에 언제든지 있다(신15:11). 그러므로 도울 마음만 있으면 언제든지 도울 수 있지만 십자가를 지셔야 할 예수께는 그 시간이 촉박해 오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만 있을 뿐이다. 8절 힘을(e[scen) "축적된, 준비된 힘"을 말한다. 다하여(ejpoivhsen:)는 "완수하다, 이루다"의 뜻이다.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는 [내 몸에 향유를 발라 내 매장을 준비하였느니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이런 연유로 예수께서는 이 여인을 9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였다.
14:10-16 가롯유다의 배반
마26:14-16, 눅22:3-6 비교하라. 가롯유다의 배반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분명한 사실 한가지는 11절 저들이 돈을 줄 약속을 한 것으로 보아 탐욕에 의해 예수님을 판 것은 틀림이 없다. 마태복음 26:15에 이 돈의 액수가 "은 삼십"으로 스가랴 11:12의 성취로 보았다. 출애굽기 21:32에는 "은 삼십 세겔"은 종이 죽임을 당했을 때 치러야 하는 액수였다. 그분은 왕이셨지만 우리의 종 됨을 대신해서 그 몸값을 치르신 것이다. 유월절을 예비한 이 집은 정확히 누구의 집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예수께서 미리 준비하신 예약된 집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14절 선생님의 말씀이 didavskalo"(디다스칼로스) "선생(랍비)"로 볼 때 잘 아는 사이였거나 제자들도 함께 잘 아는 사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제자들 중 하나의 집이라는 주장은 맞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렇게 복잡한 설명이 구태여 필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14:17-21 유다의 배신을 경고하심
마26:20-25, 눅22:14-16, 요13:21-30 비교하라. 예수께서는 12제자 중에 하나가 배반할 것을 미리 아셨다. 사복음서가 모두 이점에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구약의 시편41:9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를 인용하시면서 18절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라고 하셨다. 그리고 요한이 좀더 자세히 유다가 어떻게 예수께 지적을 받았는지 상세히 전한다. 이것은 요한이 예수께 제일 가까운 곳에 앉아서 그의 말씀을 충분히 들었기 때문이다(요13:26).
14:22-26 최후의 성만찬
마26:26-30, 눅22:15-20, 고전11:23-25 비교하라. 예수께 십자가의 죽음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는 이 시점에서 번거로운 이러한 만찬이 왜 필요했을까? 그것은 유월절 예식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임이 분명하다. 이 때가 정확히 유월절인지 그에 따라 준비한 상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유월절이던가, 아니면 유월절 바로 전후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은 유월절의 의미를 충분히 알고 있었고, 때문에 16절에서 별다른 이유 없이 유월절을 예비한 것으로 보인다. 예수는 어린양이었고 그의 몸과 피를 먹어야 하는 절기이기 때문이다. 로마의 군병들이 예수의 다리를 본의 아니게 부러뜨리지 않은 것을 해석할 때 이점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요19:36, 출12:46).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는 것에 대해서 예수께서 말씀하셨다(요6:48 이하). 당시에 이 말씀은 너무 이해되지 않는 어려운 말씀이어서 거침돌이 되었다(요6:60, 61, 66). 24절 많은 사람을 위하여는 이사야 53:12에 있는 메시야의 사역과 직책을 말한다. 흘리는바 ejkcunnovmenon(에크쿤노메논) [지금 막 흘리려 하고있는]이라고 번역해도 된다.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시내산에서 행했던 것처럼(출24:8)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을 맺는 것을 말한다. 언약 diaqhvkh"(디아테케스)은 "계약, 약속, 증거, 유언"을 뜻한다. 사도행전 3:25에서 언약의 자손이라고 했다. 히브리서 에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아브라함)에 새운 언약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적고 있다(히7:22, 히8:6, 히8:8, 히9:4, 히9:15, 히9:20, 히10:29, 히12:24, 히13:20 참고). 24절에 원어에는 새로운(kainh'")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 다시 번역하면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새로운 언약의 피니라]고 해야 한다. 많은 신학자들은 이곳에서는 이미 그 단어가 있든지 없든지 관계없이 예수께서는 신학적인 의미에서 유월절과는 다른 새로운 개념을 열고있다고 본다. 예수께서만 하실 수 있는 독창적인 것을 부고 계신 것이다. 이제 유월절의 어린양은 상징적이 되었을 뿐이고 예수께서는 실체가 되신 것이기 때문이다. 25절 새것으로 kaino;n(카이논)는 질적인 새것을 의미하는 것이며(벧후3:13, 요19:41, 엡2:15, 엡4:24, 계2:17, 계3:12, 계21:1) 시간적인 새것을 의미하는 nevo"(네오스)와 다르다(마9:17, 막2:22, 눅5:37, 고전5:7, 골3:10). 26절 찬미하고 유월절 식사에서 마지막(네 번째) 잔을 든 후에 부르는 할렐시의 후반부(시115-118편)를 부른 것을 말한다.
14:27-31 베드로의 부인을 예언
마26:31-35, 눅22:31-34, 요13:36-38 비교하라. 30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는 마가복음에서만 유일하게 나타난다. 이로 보아 마가는 베드로에게 직접 이 이야기를 전해들었을 것이다.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실수로 한번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부인하는 것을 말한다. 베드로는 얼마 있지 않아 있을 일에 대해서 장담하고 나섰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에 까지도 예언하고 계셨다. 31절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베드로의 공언은 항상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장담하며 말하고 있다. 베드로의 기록에서도 이러한 발언은 감추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마태(마26:35)와 마가는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고 추가하였다. 베드로가 한 말에 모든 제자들이 동의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14:32-42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심
마26:36-46, 눅22:39-46 비교하라. 34절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이 말씀은 시편 42:5, 11을 인용하신 것이다. 이곳에 사용된 동사 깨어 있으라 grhgorei'te(그레고레이테)는 조금 전에 있었던(막13:37) 문지기의 비유를 보라. 35절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당시의 보통 기도하는 자세는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벌리고 기도하는 자세였다(눅18:11, 딤전2:8). 땅에 엎드리는 자세는 영적인 고통을 시사하고 있다(민16:22). 그리고 예수께서는 "할 수 있으면" 또는 "될 수 있는 데로" dunatovn(두나톤)이라는 말을 35, 36절에서 반복해서 사용하셨다. 예수께서는 이 잔을 마시지 않고는 그리스도가 될 수 없었다. "할 수 있거든"이라는 말은 예수의 고뇌를 그렇게 표현한 방법이지 실제로 그렇게 해 달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에 대한 확대해석은 의미가 없다. 바로 이어지는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에서 더욱 예수님의 진정한 뜻은 잔을 마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 잔을 마실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예수께서는 몇 번을 정확하게 이 고난이 있을 것인가를 예언하시고 이미 충분히 알고 계셨고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37절 시몬아 자느냐 자고있는 제자들에게 무거운 예수님의 책망이 이어졌다. 특히 조금 전까지 주님의 마시는 잔을 자신도 함께 마시겠다고 큰소리친 베드로에게 떨어졌다. 예수께서는 그의 이름을 "베드로(반석)"(마3:16)이라고 부르지 아니하시고 원래 이름인 "시몬"이라고 부른다. 그가 아직 "베드로"라고 불려질만한 자격이 없음을 의미하며 아직도 세상 속의 사람 "시몬"이라고 부르신 것이다. 있을 수 없더냐 oujk i[scusa"(우크 이스퀴사스)는 "할 수 없느냐?"이다. 이 말씀은 변화산상 아래서 무능한 제자들이 병든 소년을 고치지 못하고 쩔쩔맬 때 사용하신 말씀과 같은 것이다(막9:18). 41절 세 번째 오사는 예수께서 시험을 세 번 받으신 것처럼(마4:1-11) 종결을 의미하신다. 그래서 주님은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고 하셨다. 이 주님의 말씀 속에는 쓴맛은 없으나 비애가 흐르고 있다.
14:43-52 체포당하심
마26:47-56, 눅22:47-53, 요18:2-11 비교하라.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예수께서 잡히실 때의 직접 검거에 나선 주동자들이 나타난다. 배신자 유다를 비롯해서 대제사장, 서기관들, 장로들이 보낸 무리들이다. 파송된 무리들은 잘 훈련된 예루살렘성전을 경비하는 종교경찰관들로 덩치가 큰 사람들로 이루어졌으며 이들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4절 가롯유다는 자연스럽게 예수께 입을 맞추고(선생님에게는 인사로 입을 맞춘다) 이미 계획하고 온대로 예수를 체포했다. 50절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저마다 두려움에 사방으로 흩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51절 한 청년이 neanivsko"(네아니스코스) "십대를 의미하는 청년"인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예루살렘에 사는 마가 요한이라고 말한다. 그의 아버지 집에서 만찬을 한 것으로 보고(막14:14), 후일에 성도들은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다(행12:12).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아마도 급한 대로 살짝 위장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예수를 따라가다 붙잡혔으나 도망갔다.
14:53-65 예루살렘 법정에서 심문 당하심
마26:57-68, 눅22:54, 55, 63-65, 요18:24 비교하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이더라 이들은 산헤드린 공회로 모이고 있는 것이며 이 공회는 종교적 또 정치적으로 최고의 법정이었으며 사형까지 의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는 로마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사형의 최고 선고는 로마 총독의 권한에 있었다. 54절 갑자기 이야기가 진행되는 중간에 베드로 이야기가 나온다. 처음에는 도망갔지만 아마도 예수님의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심의가 열리고 있는 대 제사장의 집안 뜰까지 들어와서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간에 55절-65절까지 그들의 심문이 계속되고 있다. 그들은 수많은 증거들을 들었다. 그러나 지금 찾는 증거는 사형에 해당하는 증거였다. 여러 증언들이 있지만 일치하지 않았다. 한 때는 58절 결정적인 증거를 찾은 것 같이 보였다. 그것은 예수께서 58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는 내용이었다. 그들의 성전을 파괴한다는 내용과 또 그것을 사흘에 짖겠다는 말은 이들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은 사형까지 해당할 수 있는 상당한 내용이었다. 59절 그러나 이것도 서로 의견일치가 되지 않아 죄목으로 삼을 수는 없었다. 이 내용에 대해서 60절 대제사장이 예수께 이 죄목이 합당하냐고 질문했다. 그에 대해 예수께서는 대답지 아니하셨다. 아마도 이 말에 대해서 더 이야기를 한들 그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쓸데없는 빌미만을 제공하기 때문에 말하지 않으신 것으로 보인다. 대제사장은 이어서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고 물으셨다. 6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대제사장은 옷을 찢고 더 이상의 증인을 요구하리요 하면 예수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시인했기 때문에 이것은 "신성 모독 죄"그것만으로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이라고 결정했다. 이들은 예수를 체포할 때 아무 죄목도 미리 결정하지 못하고 미리 예수를 체포하고 나중에 죄목을 억지로 찾은 것을 볼 수 있다. 한마디로 모든 절차가 불법이었다.
14:66-72 베드로의 부인
마26:69-75, 눅22:56-62, 요18:15-27 비교하라. 이러한(53-65절) 판결을 베드로는 다 보고 있었다. 결국 그는 여러 가지로 큰 소리를 쳤지만 예수님의 예언의 수순을 밟고 있었다. 69절 비자 paidivskh(파이디스케)는 "여자 노예, 종, 하녀"로 요한복음에는 문 지키는 여종(요18:17)이라고 밝히고 있다. 70절 부인하더라 hjrnei'to(에르네이트)는 문법적으로 미완료 시제로서 베드로의 지속적인 것임을 시사한다. 조금 후에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누가복음에는 "한 시쯤 있다가"(눅22:59)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 바로 이어서 라기 보다는 약간의 시간이 흘렀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가 순간적인 반복의 부인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시간을 가지고 부인하고 있음을 말한다. 72절 닭이 두 번 울어 새벽이 되었다는 신호가 들렸다. 이 때에 베드로는 기억되어 생각하고 ejpibalw;n(에피발론) "생각하기 시작하다" 울음을 터뜨렸다. 마가는 단순히 "울더라"로 기록했지만 마태와 누가는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하니라"고 했다. 이에 대해 대부분의 학자들은 철저한 회개라고 해석하고 있다.
15:1-15 빌라도에게 심문 당함
마27:1-2, 11-14, 눅23:1-5, 13-25, 요18:28-37 비교하라.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긴 것은 그들은 로마의 식민지이기 때문에(요18:31) 사형의 최종권한이 로마에게 위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죄목은 "신성 모독 죄"(마26:63-64)와 로마에 반란을 꾀했다(눅23:2)는 것이다. 2절 빌라도는 예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다. 이것은 이들이 고소한 "신성 모독 죄"의 결정적인 근거였기 때문에 빌라도는 예수께 확인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고 하셨다. 3절 대제사장들이 여러가지로 고소하는지라 그들은 벌 때처럼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이유(성전을 헐겠다고 한 것 등)를 달아 예수를 고소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아무 대답도 아니하셨고 빌라도는 5절 기이히 여기더라 qaumavzein(타위마제인) "경탄과 놀라움을 말한다." 예수께서는 그 많은 이유들에 대해서 묵비권을 행사하시고 계셨다. 그 죄를 인정하는 묵비권이 아니라 그들의 오해에 모두 대답가치를 느끼시지 않았던 것이다(요18:38, 눅23:4). 또한 예수님이 말씀하시지 않는 것은 곧 이사야 42:1, 53:7, 57:15, 스가랴 9:9의 예언을 성취시키는 일이었다.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주려고 한 말처럼 보이는 6절은 이러한 전례를 핑계삼아 이 골치 아픈 문제에서 손을 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빌라도는 9절 놓아주기를 원하느냐고 군중에게 제의한다. 항상 자신의 제판에 관한 문제를 군중에게 떠넘기고 있다. 총독으로서 사면 권을 행사하지 않고 책임을 회피한 것은 중요한 그의 잘못이다. 이 질문에 11절 대제사장들은 군중을 충동하였다. 12절 빌라도는 또 한번 군중에게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는 내가 어떻게 하랴고 묻는다. 실로 예수께 대한 조롱이었으며 또 한번 비열한 방법으로 자신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무책임하게 저들에게 넘겨준다. 13절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십자가형은 로마 시민권이 없는 중죄인이 받는 형이었다. 잔인하고 치욕적인 사형의 방법이다. 구약 성경의 예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이들은 알지 못했다(창3:15, 삼하7:12, 시72편, 시118:22, 23, 사7:14, 9:6, 11:1-10, 35:5-6, 42:1-4, 53장, 60:1-3, 렘23:6, 31:31-34, 미4:1-5, 5:2, 7:18-20, 학2:1-9, 슥3:8, 6:9-13, 9:9, 10, 13:1, 말3:1-4 등). 빌라도는 오히려 14절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고 말함으로 예수께서 무죄라는 것을 시인한 것이다. 그리고 누가에 의하면 세 번씩이나 말했다(눅23:22). 이것은 재차 저들에게 확인한 것이다. 마태는 여기서 "빌라도가 물에 손을 씻고 이 사람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증언한다(마27:24). 누가는 "저희 소리가 이긴지라"(눅23:23)고 했다. 그러나 결국은 15절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주니라 이로서 빌라도는 자신의 안전만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아들을 죄인들의 손에 맡기는 죄를 범하고 말았다.
15:16-20 로마 군병들에게 희롱 당함
마27:27-31, 요19:2-3 비교하라. 빌라도가 아주 엄격하게 자신의 문제를 군중에게만 돌렸다면 여기서 로마 군인들은 등장하지 않아도 된다. 로마 군인이 함께 조롱하고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 앞장섰다는 것은 빌라도의 권한을 넘겨준 것이다. 빌라도는 단순히 예수님을 군중에게만 넘겨준 것은 아니다. 자신의 권한을 엄청나게 남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결국 빌라도가 이 일에 주범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21절 어떤(tina:티나) 구레네 사람 시몬이 원어성경에는 "어떤"이 들어있다.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시골 구레네에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올라온 방문객이었을 것이다. 사도행전에 이 사람의 이름은 당시에 많이 사용한 "시몬"이라고 나온다(행15:14). 이 사람은 로마의 군인들에 의해서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로 향했다.
15:21-41 십자가에 못 박히심
마27:32-56, 눅23:26-49, 요19:17-30 비교하라. 십자가 처형을 받은 장소는 아직까지도 정확히 알려지지는 않았으며 학자들간의 의견이 분분하다. 성지순례 객들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었다가 부활한 골고다 언덕이 두 곳이라고 소개받는다. 한 곳은 전통적으로 인정된 장소이고, 다른 곳은 19세기 들어 새롭게 부각된 곳이다. 두 장소에 대한 학문적·종교적 논쟁은 매년 부활절이 되면 뜨거워지고 있다. 구교 쪽이 전자만 인정하는 반면, 개신교는 전자를 굳이 부정하진 않지만 후자 쪽을 상당히 인정하는 형편이다. 골고다(Golgoqa'n)에서 라틴어 Calvarium이 그리고 여기서 영어의 "Golgotha:갈보리"가 나왔다. 25절 때가 제 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박으니라 이 삼시가 정확하게 오늘날의 몇 시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3시(오전 9시)이며 33절 이 때부터 제 육시(정오)부터 제 구시(오후3시)까지, 6시간동안 계속되었다. 34절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Elwi elwi lamma' sabacqani) 이 부분은 다시 번역할 필요가 있다. Elwi(엘로이:Eloi)는 아람어로서 "나의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의 유래가 아니라 아람어의 형태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어의 엘리(eli)가 아니다. 이 소리를 듣고 35절 군중들 중에 "엘리야(!Hlivan)"를 부른다고 생각했다. 만일 여기서 "엘리"로 읽는다면 이 부분에 대해서 설명할 근거가 없다. 사박다니(sabacqani) 역시 "나를 버렸나이다"의 아람어이다. 우리는 이 구절을 대할 때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믿음으로 본다면) 예수그리스도의 절규로 그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를 먼저 생각나게 한다. 그는 속죄양으로서 우리의 죄를 지셨다(히9:28). 그는 저주를 받으셨다(갈3:13). 그는 우리를 위해 속죄 제물이 되셨다(고후5:21). 그러므로 이 고통은 그가 친히 우리를 위해 받으신 고난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보지 않는다면 그가 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을까?"에 골몰해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지 않아 진짜 버리신 것으로 부정하게 이른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할 찌라도 사실은 해석은 그대로 했지만 잘 못 받아들인 것이 된다. 아무리 그것이 예수님의 절규였다고 해도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는 사실이다. 이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 걸림이 되어 어떤 때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처럼 보였다. 굳이 필자가 이 부분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설명을 한다면, 다시 십자가를 지신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지금까지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문제가 대제사장들의 고소와 빌라도의 제판에서 군중에게 넘김과 로마 군인들의 십자가형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허락 하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일을 얼마든지 막으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다. 그러나 그분이 보내시고, 그 목적은 바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함이었다. 이 일은 하나님이 이루신 것인데, 바로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버리신 분은 하나님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원어의 아람어 형태인 "나를 버렸나이다"는 정확한 예수님의 말씀이다.
38절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는 마태복음 27:51 주석을 보라.
15:42-47 예수를 장사지냄
마27:57-61, 눅23:50-56, 요19:38-42 비교하라. 42절 이 날은 예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라고 기록하여 정확하게 이날이 금요일 유대인의 안식일 바로 전날 운명하신 것이 분명하다. 유대인의 안식일은 일몰에서부터 다음 일몰까지를 하루로 계산한다. 금요일에 해가 지면 안식일이 시작되는 것이다. 만일 시체가 금요일 일몰 후 까지 매달려 있다면 그것은 안식일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구약에서 유대인들은 밤중에라도 그 시체를 치웠다(신21:23). 물론 그런 풍습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우리는 43절에서 이미 숨을 거두신 예수님이지만 그 시체를 빌라도에게 당당히 요구하며(그의 모든 신분을 포기하며, 목숨을 건) 행동하는 정말 정의로운 사람을 만난다. 마가는 이 사람을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소개했다. 아직까지 십자가형의 모습이 생생히 남아있고 그 공포와 두려움은 누구에게든지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죽기로 결심하고 예수의 시체를 요구하는 이 사람은 아리마대 사람이요 공회원 이었다. 아마도 예수의 심문을 위해서 아리마대에서 소집되어 올라온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가 예수의 심문 때에도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아리마대는 예루살렘 서북 32km 지점 현재의 벨라(Shephelah) 지방 구릉지대에 있는 렌티스(Rentis)로 보고 있는데 그가 이미 예루살렘에 왔을 때는 모든 심문이 끝났었다고 볼 수 있다. 분명한 것은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소개한 것으로 보아 이미 믿음이 있었던 사람이다. 존귀한 eujschvmwn(유스케몬)은 "사려 깊고 경건하며, 근엄하고 존경받는 사람"을 말한다. 46절 아리마대 요셉은 그가 준비해둔 자신의 무덤에 예수의 시체를 안치한다(마27:60). 이것은 이사야 53:9의 "부자의 묘실"로서 예언이 성취되고 있는 것이다. 장래는 급하게 진행되었다. 돌을 livqon(리돈) 굴려 무덤을 닫았다. 자연석이 아니라 미리 맞추어둔 부자들의 묘에나 있는 굴러가게 만든 돌문이었다. 47절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 두 마리아는 예수의 십자가부터 지금까지 줄곧 지켜보았던 것 같다.
16:1-8 예수께서 부활하심
마28:1-8, 눅24:1-12, 요20:1-10 비교하라. 주일새벽 미명이었다(눅24:1). 길고 힘들었던 안식일이 끝나고 두 마리아는 예수의 시체에 향유을 넣기 위해 일찍 길을 떠났다. 그들의 마음은 무거웠을 것이며 착잡한 심정으로 땅을 쳐다보고 무덤입구까지 와서 무덤을 4절 눈을 들어 ajnablevyasai(아나불렢사사이) 본즉 qewrou'sin(데오루신) 놀라움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큰 돌이 무덤에서 굴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5절 두 마리아는 또 한번 더 놀랐다. 그것은 예수의 시체는 없고 천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천사는 분명한데 네 복음서들이 표현하는 방법에는 차이가 있다. 마태는 "그 형상이 번개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마28:3), 누가는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눅24:4), 요한은 "힌 옷 입은 두 천사가"(요20:12)라고 묘사한다. 이런 차이점은 초자연적인 부활에 대해 그들이 전해들은 대로 기록한 것이므로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이에 대해 이상근은 억지로 조화를 시킬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차이가 있는 것이 정상이기 때문이다."고 했다. 6절 살아나셨고 hjgevrqh(에게르테)는 "살리심을 받았다"는 뜻으로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말한다(행3:15, 행4:10, 롬4:24, 롬8:11, 고전6:14, 고전15:15, 고후4:14, 벧전1:21).
16:9-20 마가의 긴 맺음말
마28:9-20, 눅24:13-53 , 요20:11-23 비교하라. 마가의 긴 맺음말은 요한복음 20장에 있는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와, 누가복음 24장에 있는 엠마오로 가던 제자와, 마태복음 28장에 있는 지상명령을 함축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 부분은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 의심을 받고 있는 부분이다. 말씀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마가가 기록한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9절은 1절과 아무 연속성이 없다는 것이다. 마가는 다른 기자들과 달리 자신의 자료로만 기록해 나갔기 때문에 사건의 연속성이 긴박하면서도 연결이 잘 이루어져 있는데 유독 마지막의 이 부분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부분의 저자가 마가이든 아니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성경은 때로는 한 장을 혼자 다 기록한 것도 있지만 한 권을 여러 사람이 기록하거나 편집되어진 것도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우리에게 성경으로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부활 후 예수님의 출현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처음으로 보여졌다. 그녀는 누가복음 8:2에서 일곱 귀신에게 구원을 받은 여인이다. 이 여인은 낙담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했지만 믿지 못했다. 두 번째 실의와 좌절에 빠져 패잔병처럼 엠마오로 가는 제자에게 나타나셨다(눅24:13). 그리고 세 번째 열 한 제자에게 나타나셨다(눅24:25).
마가복음의 결론은
15절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전하라, 전파하라" khruvxate(케룩사테)는 선교에 대한 명령이다(마3:2, 마28:16-20, 눅24:46-48, 요20:21, 행1:8). 19절 하늘로 올리우사 부활 후 40일이 되어서(행1:3) 베다니 부근(눅24:50)의 감람산(행1:12)에서 승천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