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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374
4월23일 [부활 제2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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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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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A4jOCVpXb5k&list=PLpB9z9SOeZQfGRsNAtfExml1MP8zwjc0C&index=2&t=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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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 프로젝트를 요약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공식이자 신조(信條)가 있습니다. 언젠가 나이 들어 머릿속이 흐려지고 기억력이 감퇴하더라도, 이 공식만은 잊어버리지 않도록 달달 외워둬야겠습니다.
그 공식의 저자는 요한 복음사가인데, 정말이지 군더더기 하나도 없이 깔끔하게 정리하였습니다. 아무런 부연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간단합니다.
① 하느님은 세상과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십니다.
② 그 극진한 사랑의 표시로 당신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③ 예수님이 이 땅에 파견되어 오신 이유는 세상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④ 이 세상 그 누구든, 그 어떤 대역 죄인이든 상관없이 아버지께서 보내신 외아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은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심판받고 멸망할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너무 쉬워서 어려운 것 같습니다.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표현에 제 마음이 한참 머물렀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럽고 은혜로운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밥먹듯이 죄를 짓고, 동일한 잘못을 평생토록 반복하는 우리 죄인들에게 얼마나 감사한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종말에 펼쳐질 무시무시한 광경이 자주 등장합니다. 읽을 때마다 끔찍한 생각과 함께 밀물처럼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지난 삶을 돌아보면서, ‘큰 일이네 이거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안절부절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예수님 말씀을 묵상하며 너무 걱정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며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사실 종말에 펼쳐질 무시무시한 광경들에 대한 성경 저자들의 표현은 유다교 묵시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산책하다가 길잃고 헤매는 어린 강아지 한 마리를 발견했다고 칩시다. 이제 겨우 눈을 뜬 한달된 강아지입니다. 낑낑대며 어미를 찾아 사방을 헤매다닙니다. 그냥 두고 갈 사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백방으로 노력할 것입니다.
사악한 우리 인간도 이런데 하물며 하느님은 어떻겠습니까? 연민과 측은지심의 하느님, 사랑과 자비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연약한 죄인인 우리 인간, 방황하고 헤매는 우리 인간들을 절대로 모질게 몰아부치지 않으실 것입니다.
요한 복음 사가의 표현에 따르면 심판은 하느님께서 하시기 보다 우리 인간 각자가 자초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우리 인간 각자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 혹은 불신의 결과로 구원 또는 멸망을 자초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 각자의 자유 의지를 존중해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해 신앙이냐? 불신이냐?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예수님의 요청에 우리가 어떻게 응답하는가 여부에 따라 심판과 구원, 단죄와 영원한 생명이 결정될 것입니다.
어떻게서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그 간단한 공식, 신앙의 신조(信條)를 굳게 믿어야겠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메시아 하느님으로 굳게 믿고 고백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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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HFcbFFXxTpU
<내가 편한 곳이 내가 살 곳이다>
1979년 미국 오하이오주, 지역 일관지에 뜻밖의 광고가 실립니다. 노인들에게 7일간의 무료 여행을 보내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행에는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뉴햄프셔주의 오래된 수도원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규칙을 듣게 됐습니다. 먼저 청소나 빨래 설거지 같은 집안일은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이고, 1979년이 아닌 20년 전인 1959년처럼 지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수도원의 모든 환경은 1959년처럼 꾸며져 있었습니다.
노인들은 마치 자신들이 20년 전에 살았던 것처럼 보고 말하고 행동하였습니다. 이후 일주일간의 체험이 끝나자 노인들은 마치 다른 사람처럼 훨씬 젊어져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보호자의 도움 없이는 혼자 일어나지도 못하던 노인들이 혼자 옷을 입고, 계단을 내려오는 등 건강해진 모습을 보였습니다. 또한, 실험 이후 그들은 시간을 거슬러 젊어진 것처럼 신체적 나이 역시 50세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하버드대학교 엘렌 랭어 교수가 계획한 ‘시계 거꾸로 돌리기’라는 실험이었습니다.
환경의 변화가 어떻게 몸의 변화를 끌어낸 것일까요? 환경의 변화가 먼저 믿음의 변화를 끌어낸 것입니다. 70대 노인들이 나이를 잊고 50대라는 착각에서 오는 믿음을 갖게 만든 것입니다. 믿음은 정체성을 변화시키고 믿는 대로 자신을 변화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자신이 사는 환경과 떼려야 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생긴 정체성이 곧 자신이 사는 세상과 직결됩니다. 정체성과 맞는 세상에 살아야 마음이 편합니다.
2003년 미국 유타주 블루 존 캐니언으로 가벼운 하이킹 등반을 떠났던 자신만만한 청년 애론 랄스턴은 그만 호박돌을 잘못 짚었다가 돌과 함께 떨어져 절벽 사이에 손이 끼이게 됩니다. 그는 음식과 물 없이 5일을 버팁니다. 가진 칼로 자신 팔을 짓누르고 있는 돌을 긁어보지만, 칼만 무뎌질 뿐 손은 빠지지 않습니다.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돌아가야만 하지만 남은 방법은 자신의 손을 그 뭉툭하게 된 작은 칼로 잘라내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뼈 때문에 팔목이 잘리지 않을 것이기에 먼저 자신의 팔꿈치를 거꾸로 꺾어서 부러뜨려야 합니다. 그것이 아니면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작업을 하다가 중도에 포기하거나 기절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할까요? 아니면 거기서 멈추어야 할까요? 그는 먼저 팔을 부러뜨립니다. 칼로 살과 힘줄을 자릅니다. 그리고 이렇게 소리칩니다.
“만세! 내 팔을 잘랐다. 이젠 살았어!”
실화를 다룬 영화 ‘127시간’의 내용입니다. 애론은 블루 존 캐니언의 협곡에 있었지만 실제로 그곳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어머니와 친구들 곁에 있었습니다. 그는 5일 내내 자신이 속해있던 세상을 상상하며 그 자리가 자신이 있을 자리가 아님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속해있게 만드는 팔을 잘라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피로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할 인간이 아님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하늘에 있어야 한다고 알려주십니다. 이것을 믿으면 자신이 속한 세상이 바뀝니다. 돈이나 명예, 쾌락이 있던 이런 세상에 머무르는 것이 고통으로만 여겨집니다. 그러면 자아라는 팔을 자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새로 태어나는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계속 ‘새로 남’에 관한 말씀입니다. 새로 태어남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믿음으로 성취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그리스도의 피로, 즉 물과 성령으로 생깁니다. 그러면 자신이 속해야 하는 세상이 바뀌고 이를 위해 자신의 팔을 자르는 노력이 시작됩니다.
이제 미사가 재개되려고 합니다. 우리는 미사가 그동안 얼마나 그리웠습니까? ‘왕이 된 남자’란 영화에서 왕과 똑 닮은 거지가 왕노릇을 하게 됩니다. 처음엔 어색해서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자신도 왕일 수 있다는 생각이 일자 오히려 그 자리에 편안함을 느끼고 진짜 왕처럼 행동합니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믿음이 바뀌면 그 정체성이 합당한 공간에 머무는 것이 편한 법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믿음으로 하느님 백성이 됩니다. 내가 편한 곳은 세상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이 계신 하늘입니까? 집입니까, 성당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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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3,31-38 : 아버지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셨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서 모든 것 위에 계시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위에서 온 뿌리에서 나셨고, 당신 안에 본성적으로 아버지의 선하심을 가지고 계시다. 그러기에 모든 것 위에 계신 분이시다. 아드님은 아버지와 같은 본성을 지니셨으며 아버지의 광채요 모습이기 때문에 탁월한 분이시다. 그래서 모든 이가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드님을 공경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요한 5,23) 그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32절) 그분은 보고 들어서 아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본성적으로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그분 안에 모든 것이 있었고, 모든 것이 아버지의 품에서 완전한 상태로 나왔기 때문에 당신 안에 이미 가지고 계신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 참되고 거짓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따르려 하지 않는다.
신앙인으로서 말씀을 따른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증언하는 것이다.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인간은 참된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그분을 닮아가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위에서 오신 분의 말씀을 따른다면, 그는 진리가 하느님께 가깝고 소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셨다. 말씀을 따름으로써 그분이 참되심을 고백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34절) 아드님이 아버지의 말씀이시다. 우리도 말을 하려고 할 때에, 말하려는 개념이 이미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의 말이 되어 표현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도 말씀을 품으셨고, 아드님을 낳으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낳으셨으며 아드님을 통하여 시간을 창조하셨다. 아드님은 아버지의 말씀이시며, 아버지의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의 말씀을 성령 안에서 하신다. 이 아드님은 성령을 온전히 지니고 계시며, 친히 성령을 부어주시고 우리는 그분께 성령을 주십사고 청한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35절)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외아들로서 사랑하신다. 그래서 “그분 손에 모든 것을 내주셨다.” 여기서 ‘모든 것’이란 아들이 아버지와 똑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은 당신과 같은 존재이시므로 또 다른 당신을 보내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유일한 말씀이시자 지혜이신 그분은 본질적으로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을 영원으로부터 가지고 계시다. 단지 그것은 아버지께로부터 받으셨다는 것이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36절) 그러나 아드님을 믿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과 관련하여 모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마태 7,21)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 대한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우리의 믿음은 착한 생활과 행동이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36절) 그 사람 위에 머무른다는 것은 치유 받지 못하고 버림을 받는다는 것이다.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그분을 믿고 따른다면 하느님의 분노가 떠나고 생명이 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생명을 얻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요한 3,18)고 하신 것이다. 이제 예수님을 더 잘 알고, 더 잘 따라 그분을 닮을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용기와 지혜를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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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성서못자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사도들이 성령 강림 후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 것은, 마치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활동을 전하는 신문 보도 또는 지울 수 없는 드라마 속 명장면과 같습니다. 최고 의회의 수장 대사제의 질문에 베드로와 사도들은 매우 담대하게 답합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루카는 베드로 외에 다른 사도들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한 사도의 개념과 범위를 짐작해 보면, 분명 예수님 생전에 줄곧 함께하였던 이들로서 그분께서 세례를 받으시던 때부터 사도들을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함께한 이들 가운데, 특히 앞서 성전에서 베드로의 첫 기적과 솔로몬 주랑과 최고 의회의 증언 때 침묵 속에 지켜보았던 요한 사도가 함께 있었음은 매우 확실해 보입니다.
대사제 앞의 베드로와 달리 요한 사도는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시는데,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하는 것이다.
대사제는 예수님의 증언을 바탕으로 하느님을 받아들이며 전하는 사도들의 말에 크게 충격받습니다. 이제껏 자신을 포함한 최고 의회의 모든 사제가 하느님을 위해서 증언하였을 때 그 자부심이 대단히 커서, 자신들보다 더 크고 높은 권위와 힘은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명령하였는데, 사도들은 사람이 아닌 하느님께 순종하겠다고 하여, 쉽사리 그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대사제 앞에서 사도들은 예수님께 들었던 증언을 통하여 하느님에 대하여 확신합니다. 우리도 사도들처럼 진정으로 예수님의 이 증언을 믿고 기도하며 실천한다면 하느님을 굳건하게 증언할 수 있습니다. 일상의 삶에서 믿음에 따른 행동에 의문을 가지게 하는 사회 제도나 결정에 맞서 우리는 얼마나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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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요한 3,31)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요한 3,36)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라는 말에서 바오로 사도가 아테네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때의 일이 연상됩니다.
“그는 회당에서 유다인들과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과 토론하고, 또 날마다 광장에 나가 그곳에 모인 사람들과 토론하였다.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의 몇몇 철학자도 바오로와 대담을 나누었는데, 어떤 이들은 ‘저 떠버리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바오로가 예수님과 부활에 관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고 ‘이방 신들을 선전하는 사람인 것 같군.’ 하고 말하였다."(사도 17,17-18)
“사실 아테네인들과 그곳에 머무르는 외국인들은 모두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이야기하고 듣는 일로만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이었다."(사도 17,21)
바오로 사도는 구원과 생명에 관한 ‘기쁜 소식’(복음)을 아테네 사람들에게 전해 주었지만, 그들은 바오로 사도를 시끄럽게 떠들기만 하는 ‘떠버리’ 취급을 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에게 ‘복음’은 ‘기쁜 소식’이 아니라 무의미한 ‘소음’이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저자는 아테네 사람들이 무엇인가 새로운 이론을 듣는 것을 좋아했다고 말하는데, ‘복음’을 그저 신기하고 낯선, 새로운 이론으로만 생각한 사람들은 ‘호기심으로’ 한 번 들어보려고 했습니다.(사도 17,19-20) 그러나 그런 호기심조차 느끼지 않은 사람들은 ‘복음’을 ‘쓸데없는 소리’로만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땅에서 난 사람들’이고, ‘땅에 속한 사람들’이고, ‘땅에 속한 것만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쓸데없는(헛된)’ 이론에 빠져서 인생을 낭비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라는 말은, “예수님은 모든 것을 지배하시는 분이고, 그래서 인간에게 궁극적인 구원을 주시는 분이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지배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의 허무’를 극복하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믿는 사람은 새로운 생명, 참 생명,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갑니다. 그러나 안 믿는 사람은 허무하게 사라질 육신의 생명에만 집착하면서, 그리고 쓸데없는 일로 시간을 낭비하면서, 하루살이처럼 살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요한 3,32)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요한 3,34-35)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은 곧 하느님의 말씀과 가르침이고,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곧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요한 5,19; 7,16-17) 그래서 예수님을 안 믿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하느님을 안 믿고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 것처럼 사도들도 자기들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증언했습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사도 3,15) 그러나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사도들이 직접 보고 들었다는 증언 자체를 안 믿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믿으려는 노력’에서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믿음이 생기거나 믿음을 갖게 되는 일은 없습니다. (사실상 ‘믿음’은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요한 3,33)
이 말의 뜻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산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구원’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한다.”입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말은 무조건 믿으라고 윽박지르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그들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라고 따질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았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일은, 누군가가 저쪽 세상에 가서 확인한 다음에 전해 주는 일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았는지 여부는 그 사람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이쪽 세상에서 충분히 드러납니다. (우리 교회가 어떤 분을 성인으로 선포하는 것은, 저쪽 세상에 가서 확인한 다음에 하는 일이 아니라, 그분의 이쪽 세상에서의 ‘삶과 죽음’을 보고 판단함으로써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사도들의 증언을 믿는 것도 사도들이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라는 말은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마태 11,19)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뜻이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 생활이 바뀌고, 가치관이 바뀌고, 인생 전체가 변화된 사람들이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을(요한 14,6) 증명하는 증거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믿고 있는 ‘내가’(우리가) 곧 증거이고, 증인입니다. 물론 ‘믿는 사람답게’ 잘 살고 있을 때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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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경규봉 가브리엘 신부님]
<사람에게 복종하기보다 하느님께 복종하는 사도들>
대사제는 사도들이 의회의 결정에 불복종하고 않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하는 점에 대하여 추궁한다. 그 자신도 불의하게 예수님을 사형하였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선포됨으로써 자신들이 당할지도 모르는 불이익에 대한 염려와 걱정을 가지고 사도들을 심문한다.
그러나 사도들은 이미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했고, 성령을 받았으며,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한 사람들이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자신들을 감옥에서 풀려나게 하심으로써 주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계심을 굳게 믿는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적대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충실하게 전파할 수 있었다. 설사 죽음을 당할지라도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적대자들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와 힘이 충만하였다. 그들은 적대자들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었고, 자신들이 받는 모욕과 박해까지도 오히려 기쁨으로 생각하였다.(사도 5,41)
이제 그들은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죽더라도 주님을 위해서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자신의 삶 전체를 온전히 주님께 바칠 수 있는 깊은 신앙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인간적인 것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주님께만 관심을 두게 된 것이다. 그들은 용기백배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전하는 복음 선포가 곧 하느님께 복종하는 것임을 증언하며, 적대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하고, 자신들과 자신들이 받은 성령이 곧 그 증인임을 전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권위가 손상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지도자에게 권한을 주신다. 지도자는 하느님의 권위가 침해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지도해야 한다.
사람은 하느님의 도구일 따름이다. 만일 지도자가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을 거스르거나 적대하도록 한다면 이는 하느님과 충돌하는 것이므로 그들의 지도력과 권위는 상실되고, 그들의 영향력은 사라져 버리고 만다.
대사제와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처형함으로써 이미 하느님을 거역했을 뿐만 아니라 회개하지 않고 그리스도와 그 사도들을 박해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권위를 상실했다. 그들에게는 최소한의 권위조차 남아있지 않다.
주님의 부활과, 주님의 이름으로 행한 기적이 이를 증명한다. 때문에 사도들은 비록 그들이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결코 그들에게 복종할 수 없었다. 비록 그들이 자신들을 죽이려고까지 하였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잡혀서 박해를 당하고 회당에 끌려 가 마침내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며 나 때문에 임금들과 총독들 앞에 서게 될 것이다.”(루카 21,12) 하고 예언하셨다.
주님의 말씀대로 사도들은 박해를 당하고 감옥에 갇혔다. 참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박해 받으셨듯이 박해를 받는다.(요한 15,20) 그러나 결국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신다.(요한 16,33)
주님께서는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마태 5,11-12) 하고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상을 이미 약속하셨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박해 가운데에서도 하느님 나라의 상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삶을 산다.
사도들은 사람을 두려워하기보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사람에게 복종하기보다 하느님께 복종하고, 사람들을 바라보기보다 하느님을 바라보며 살아간 분들이다.
우리도 사도들을 본받아 하느님께 복종하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하느님을 바라는 신앙인이 되자. 사도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셨던 성령께서 우리에게도 힘과 용기를 주시기를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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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김훈일 세례자요한 신부님]
<신앙의 보증>
1997년 경제적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국가가 빚을 갚을 능력이 되지 않아서 국제통화기금에 돈을 빌리고 강제적으로 경제개혁을 해야만 했습니다.
많은 기업들이 도산했고 여러 은행들이 문을 닫았습니다. 이 와중에 사업을 한 것도 아니고 빚을 진 것도 아닌데 모든 재산을 잃어버린 이들이 있었습니다. 보증을 서 주었다가 함께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것입니다. 그 중에는 가족 간에 친지간에 빚보증으로 더 큰 상처를 가진 사람들도 보게 됩니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맡기거나 보증을 서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뢰는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그 사람을 상대하면서 얻은 여러 가치들을 종합할 때 생깁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보증을 서게 되면 낭패를 당하기 십상입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믿음도 이와 같은 방식을 거치게 마련입니다. 신앙과 믿음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생겨납니다. 그러니 신앙은 하느님의 부르심과 인간의 응답이라는 절묘한 조화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부르실 때 대자연과 우리 이웃들을 증인으로 쓰십니다. 때로는 우리 자신을 당신의 증인으로 쓰시기도 합니다. 그럴 때 사용하시는 방법이 시련과 고통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응답할 때입니다. 이미 하느님은 당신의 것을 다 내놓았고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는 응답할 우리의 자세만이 남았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니 우리의 믿음으로 보증을 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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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정민수 헨리코 신부님]
<사제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가끔 신부님들께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사제 직무 가운데 강론과 고해성사만 없으면 사제생활도 할 만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 중에서 고해성사는 그저 듣기만 하면 되지만 강론은 하느님 말씀을 묵상하고 신자들이 믿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나름대로 많은 준비가 필요합니다.
한 주일에 한 번쯤이라면 열심히 준비해 강론하겠지만 매일매일 묵상하고 강론을 준비해 강론대에 서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도 몇 년쯤 하다 보면 똑같은 복음 말씀을 가지고 강론을 해야 하는데 밑천 다 떨어지고 나면 할말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가끔은 강론을 준비하지 못하고 강론대에 설 때가 있습니다. 그러고는 성령께 기도합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강론 준비 못했습니다. 성령을 보내시어 저의 입에 하느님의 말씀을 담아주십시오.’
그러고 나서 강론을 하면 신기하게도 강론을 준비하고 했을 때보다도 훨씬 깊이있는 강론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늘 준비 없이 성령께만 의지할 수 없는 노릇이라 정신차리고 시간을 내어 준비합니다.
사제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알리는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는 부차적인 일에 매달려 본업인 예언 직무를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됩니다. 준비 없이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을 누가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이겠습니까?
주님, 오늘 제 강론을 통하여 저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시며 듣는 모든 이들이 주님의 말씀으로 알아듣게 하시어 부활의 신비를 더욱 깊이 깨닫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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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인터넷 공간에서 기사와 글을 읽을 때가 있습니다. 글의 내용을 보지만 글을 읽은 사람의 ‘댓글’도 볼 때가 있습니다. 칭찬과 격려의 댓글이 있습니다. 응원과 희망의 댓글이 있습니다. 코로나19에 대한 한국의 방역과 정책에 대한 외국의 기사를 보았습니다. 한국의 방역과 정책이 코로나19의 확산을 방지하는데 효과적이라는 기사입니다. 한국의 정책은 ‘투명성, 개방성, 자발성’이라고 합니다. 무엇보다 깨어있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중요했다고 합니다. 극심한 사재기도 없었고, 마스크를 착용하였고, 사회적인 거리두기를 실천하였습니다. 미국에서 살고 있기에 이런 기사를 읽으면 한국인으로서 자부심도 느끼고, 기분이 좋습니다.
부족한 저의 글에도 댓글을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감사할 일입니다. 원로사목자께서 저의 글에 댓글을 주셨습니다. 저는 신부님의 영성과 열정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따뜻한 사목으로 신자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셨습니다. 본당 사목을 하실 때면 언제나 ‘사랑의 나눔’을 실천하셨습니다. 신자들에게 사랑의 실천을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였고, 신자들도 기쁜 마음으로 신부님의 나눔에 함께 하였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신학생 양성과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거금을 기부하셨습니다. 원로사목자로 사목 일선에 있지는 않지만 지금도 매년 한센 인을 위해서, 요셉의원을 위해서 기부를 하신다고 합니다. 신부님의 격려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신앙은 ‘이어달리기’와 같습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교회는 사람에게 순종하기보다는 하느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오늘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사도였고, 그분들이 순교자였고, 그분들이 성인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신앙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보지 못합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은 하느님을 믿고 알아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인생을 아름답게 살다가 하느님께로 간 박경리 데레사 선생님의 마지막 작품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옛날의 그 집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쑥새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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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봄 나무>
요한 3,31-36 (하늘에서 오시는 분)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봄 나무>
꼭대기 아득 높은 곳에
하늘을 향해 움트는
연녹색 여린 이파리
하나하나 곱게 틔우려
굵은 뿌리에서 자아낸
실오라기 하나둘
땅속 깊이 내린다지
봄 나무야 너는
하늘을 향하니
하늘에 속한 거니
땅속 깊이 뿌리내리니
땅에 속한 거니
난 말이야
맨 아래 갓난 실뿌리부터
맨 위 갓난 이파리까지
끊김 없이 이어졌으니
가를 수 없는 하늘과 땅
모두에 속한단다
하늘을 땅으로 내리시고
땅을 하늘로 올리시려
위에서 오신 분을 밀쳐내고
하늘을 가리고 땅만을 탐내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봄 나무는 답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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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드디어 오늘부터 정부의 방역지침 준수 사항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사를 하기 위해 마스크를 쓰고, 체온도 측정해야 하고, 연락처도 적어야 하는 등 많은 불편함이 있지만 그래도 미사 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오늘 하루에 대해 커다란 기대를 하게 됩니다. 아무튼, 하루빨리 코로나-19 사태가 빨리 끝나기를 기도하면서 새벽 묵상 글 시작합니다.
지금과 다른 삶을 살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의 희망일 것입니다. 저 역시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싶습니다. 이를 위해 인터넷으로 강좌 하나를 신청했습니다. 예전부터 관심이 있었던 그래픽 강좌입니다. 사진을 보정 하거나 원하는 이미지를 만드는 데 사용하던 프로그램인데 그 동안 바쁘다는 이유로 손을 놨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억나는 것이 없어서 강좌를 새롭게 신청했습니다. 문제는 강좌를 봐도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거의 10년 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프로그램이기에 새 버전의 프로그램은 화면 구성도 많이 바뀌었고 또 복잡해서 익히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루 이틀 강좌에 빠지면서 전과 똑같아졌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말했습니다. “어제와 똑같이 살면서 다른 미래를 기대하는 것은 정신병 초기 증세이다.” 지금과 다르게 살겠다면 어제와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저절로 다른 삶이 되기를 원할 때가 많습니다.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정신병 초기 증세에 들어선 것입니다.
어제와 다른 무엇인가를 해야지만, 지금과 다른 삶이 펼쳐질 수 있습니다. 이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도 어제와 똑같이 한다면, 어제와 같은 신앙인으로 살게 됩니다. 더 나은 신앙인이 되겠다면, 어제와는 다른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하늘로부터 오신 분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하시는 분이며,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믿는 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경고의 말씀을 하십니다.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어떤 순간에서도 굳은 믿음이 필요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믿음은 단순히 “믿습니다.”라는 말 한마디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믿음에는 여기에 믿는 대상의 말과 행동을 그대로 따르는 실천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어떤 아이 두 명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서로가 자기 아빠가 이렇게 말했다면서 서로 자기가 맞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 아빠가 그랬어.”라면서 자기 말이 맞다고 주장합니다.
아빠가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 자기 말이 맞는 이유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빠에 대한 굳은 믿음이 있기 때문이지요. 이런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어제와 다른 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원한 생명의 길에 더욱더 가까이 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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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함>
성소국장과 신학교에서 오랫동안 강의를 했었기 때문에 후배 신부들을 많이 알고 있으며, 또 개인적으로도 아주 친합니다.
그런데 한 젊은 신부로부터 어떤 신부님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같은 지구라서 함께 하는 자리가 종종 있는데 이 신부님이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후배 신부를 무시하는 것 같고, 가끔 기를 죽이는 말씀도 너무 많이 하신다고 하더군요. 사실 힘들게 한다는 신부님은 제게도 선배 신부님이 되십니다.
하지만 후배 신부가 말하는 것처럼 못된 신부가 아닌 정말로 열심히 사는 멋진 신부입니다. 신학생 때부터 친한 관계를 유지하며 만났으니, 30년 넘게 알고 지낸 사이입니다.
따라서 이런 말을 들을 분이 아니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친구란 그냥 아는 사람과 다릅니다. 나만 알고 있는 어떤 특별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친구입니다. 저는 그 신부님의 특별함을 알고 있기에 좋아하는 것이고, 후배 신부는 그 특별함을 보지 못하기에 어렵게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특별함을 보지 못하니 부정적인 마음이 생기면서 멀리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 특별함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도 그렇습니다. 주님의 특별함을 찾아야 굳게 믿을 수가 있고 주님의 뜻을 따를 수가 있습니다. 사람에게서 특별함을 찾지 못하면, 주님에게서 어떻게 그 특별함을 찾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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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파스카 예수님과 ‘우정友情의 여정’>
-주님을 증언하는 삶-
오늘 새벽 프란치스코 교종의 강론 서두 말씀이 새롭게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분은 우리를 ‘미치도록(madly) 사랑하신다. 어느 성인은 말하곤 했다. 하느님의 사랑은 ‘미친 듯(like madness)' 보인다. 십자가는 이런 사랑의 최고의 표현이요, 모든 크리스천의 지혜를 함축한다. 십자가를 관상하는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계시된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미치도록(madly)’, 정말 대단히 사랑하십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표현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파스카의 예수님과의 평생 우정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정말 미치도록 하느님을, 예수님을, 모두를 사랑했으면 좋겠습니다. 열렬한 사랑이야말로 성덕의 잣대입니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못하면 미치지 못한다’, ‘미쳐야 미친다’ 라는 말도, 또 ‘제대로 미치면 성인聖人이지만 잘못 미치면 폐인廢人이 된다’라는 말도 생각납니다. 하느님을, 예수님을 닮아 사랑에 제대로 미친 참 아름답고 매력적인 분들이 바로 사도행전의 사도들이요 교회의 성인들이요 우리 주변의 무수한 익명의 성인들입니다.
어제 아침 산책중 목격한 열심한 자매도 생각납니다. 미사는 참석 못하는 대신 멀리서 아침 일찍 운전하여 수도원에 와서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요셉상 앞의 봉헌초 상자 안과 밖을 한참토록 말끔히 청소하였습니다. 미치도록 주님을 사랑하는 모습이 참 아름다워 물끄러미 바라보다 사진도 찍어 드렸고 강복도 드렸습니다. 이런 분들이 진정 미치도록 사랑스런 익명의 성녀聖女입니다. 이런 익명의 성녀聖女같은 무수한 자매들이 모여 세계 영적 일류의 국가를, 국력을 이룸을 깨닫습니다. 전송한 사진에 대한 답신입니다.
“신부님, 오늘 너무 너무 기쁘고 축복 받은 날이예요. 행복하게 하루를 시작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 조심하시고 평안하게 지내시길 기도드립니다. 다시 생각해도 너무나 반갑고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하느님을 닮아 예수님은 당신 사도들은 물론 우리들을 미친 듯이 사랑하십니다. 항구하고 간절히 사랑하십니다. 사도들은 성령이 충만하여 이런 미친듯한 사랑으로 담대히 부활하신 주님을 증언합니다.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는 베드로가 사도들을 대표하여 담대히 주님을 증언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는 참으로 유익한 가르침이기에 그대로 전문을 인용합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영도자와 구원자로 삼아 당신의 오른편에 들어 올리시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일의 증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시는 성령도 증인이십니다.”
얼마나 담대하며 확신에 넘치는 증언인지요! 참으로 미치도록 사랑하셨던 주님께 대한 증언이요, 사도들 역시 미치도록 하느님을, 예수님을 사랑하셨음을 봅니다. 이런 파스카의 예수님이 우리를 부단히 회개하여 죄를 용서 받게 함으로 당신과의 우정을 깊이하십니다. 사도들만 증인이 아니라 하느님께 순종하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성령도 증인이요, 이 성령의 은총으로 우리 또한 증인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이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베드로의 증언이라면 오늘 복음은 요한의 예수님께 대한 증언입니다. 베드로의 증언과 요한의 증언을 통해 더욱 분명히 드러나는 파스카 예수님의 신원입니다. 요한의 증언 역시 그대로 오늘의 우리에게는 좋은 가르침이 됩니다. 그 일부를 인용합니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바로 요한 사도의 파스카의 예수님께 대한 체험적 고백입니다. 참으로 파스카 예수님의 미친듯한 사랑을 체험했기에 요한 사도의 이런 체험적 사랑의 고백입니다.
바로 우리의 평생 여정의 영원한 도반이신 파스카의 예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우리의 영도자이시자 구원자이신 이런 예수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게 해주시는 결정적 역할을 하는 분이 바로 성령입니다. 참으로 성령의 은총으로 파스카의 예수님과 우정이 깊어질수록 땅에 속한 우리들은 점차 하늘에서 오신, 모든 것 위에 계신 예수님과 하나됨으로 저절로 초연한 이탈의 사랑, 자아초월의 사랑이, 삶이 실현됩니다.
우리의 인생은 막연하지 않습니다. 늘 말씀드리다시피 우리의 인생은 하느님을 향한 여정이요 평생 도반이신 파스카의 예수님과 ‘우정의 여정’, ‘예닮의 여정’입니다. 하여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는 살아갈수록 날로 파스카의 예수님과 깊어지는 우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예수님과 사랑과 신뢰의 우정이 깊어질수록 성령충만한, 영원한 생명의 삶이요 이런 삶자체가 파스카의 예수님께 대한 참 좋은 증언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의 평생 도반이신 당신과의 우정을 날로 깊이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게 해주십니다.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시편34,2와 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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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을 살다>
"인생은 정직과 거짓, 충직과 불충, 이기심과 이타심, 선과 악이라는 두 길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다르며 대치되는 논리로 이루어진 두 길 사이에서 오고갈 수는 없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
그야말로 양다리를 걸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복음의 결론은 명확합니다.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 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 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루카16,13)
집회서를 보면“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16-15-17)고 적혀 있습니다.
선택은 자유이지만 결과는 너무도 다르기에 신중한 처신이 요구됩니다. 죽음도, 생명도 지금 여기서 결정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 생명이 지금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실 미래의 생명은 지금 살고 있는 이 생명의 완성입니다.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오늘을 잘 살아야 합니다. 어떠한 상황과 처지에서도 예수님과 복음을 따를 수 있는 용기를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늘에서 오신 분이 모든 것 위에 있으면서 그분이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하느님의 진노가 그들 위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자업자득입니다. 목이 마른 사람에게 우물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어도 자기가 마시지 않으면 그림의 떡입니다. 깨우침을 주면 계산하지 말고 먼저 받아들여야 더 큰 것을 알게 되고 또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땅에서 난 사람은 위에서 오신 분, 아버지의 모든 것을 받고 오신 분,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하느님의 말씀과 권능으로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믿음 안에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읽고 성체를 모실 때마다 영생을 기뻐하고 또 그 기쁨을 전해야 합니다. 좋은 것을 혼자만 누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고,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을 모시는 영성체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활동하시도록 하면 할수록 나를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더 큰 영광을 받게 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저 훌륭한 위인들 중의 한 분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분의 말씀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 있어야 합니다.
이제 땅에서 난 사람은 하늘의 삶을 갈망하고,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 자신의 영혼 사정을 돌보지 않는다면 영원한 생명 보다는 멸망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선택은 자유지만 그에 따르는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으나 뽑히는 사람은 적다”(마태22,14)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에로 초대받았지만 아무나 구원을 받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고 완벽하고 좋은 일을 해 공로를 많이 쌓아야 구원받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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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삼위 하느님의 관계성이 잘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요한 3,34)
아버지에게서 파견되신 성자 예수님은 보내신 분의 뜻을 아시고 그분의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의 말로써 스스로의 영광을 들어높이시지 않으시고 오로지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아버지의 말씀을 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바로 아버지의 말씀이시지요.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요한 3,35)
그런 아드님을 하느님은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주십니다. "모든 것"에는 그야말로 다 들어 있습니다. 권한과 소유를 포함해 성령까지 주십니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드님 사이를 잇는 사랑이고, 사랑의 유대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드님에게 주실 가장 크고 중요한 존재는 바로 당신 자신이십니다. 사랑하는 존재 사이에서는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증여가 일어납니다. 하느님의 온전한 자기 증여가 아드님을 향해 일어납니다. 성부 하느님은 성자 예수님과 하나이시고 또 성령과 더불어 한 분이십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3,31)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당신들끼리의 완전한 사랑 안에 취해 계시지 않고 우리를 그 관계 안으로 초대하십니다. 하느님은 스스로의 충만함에 고립되어 계시지 않고 우리에게 당신을 열어젖히신 겁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음으로써 삼위 하느님의 관계 안에 참여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삼위 하느님과 누리는 지고의 행복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과의 관계에 참여하는 우리가 해야 할 실천적 몫이 구체적으로 밝혀집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사도 5,29)
감사하게도 사람을 통해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경우에는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없지 않지요. 오늘 독서 대목에서 이스라엘의 최고 의회 구성원들과 사도들이 맞닥뜨린 대립이 좋은 예가 될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누구의 뜻을 따라야 하는지 명백합니다. 비록 하느님께 순종함으로써 많은 것을, 생명까지 잃는다 해도 순종해야 할 분은 오직 하느님이십니다.
이처럼 성 삼위 하느님 안에 참여하는 우리의 믿음은 구체적인 선택과 결단을 요구합니다. 누구에게 순종하느냐에 따라 우리 존재와 방향성은 크게 달라지지요.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신 성령도 증인이십니다."(사도 5,32)
우리는 하느님께 순종함으로써 성령을 얻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에게 "한량없이 주신 성령을" 우리에게도 주십니다. 그 성령의 현존이야말로 우리가 하느님을 모신 그분의 사람임을 증언합니다. 성령께서 우리가 믿고 사랑하는 아드님의 증인이시고, 우리가 참여한 사랑의 관계의 증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삶은 우리에게 무수히 선택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누구를, 무엇을, 어떤 방식을, 언제, 어디를 선택할지 우리는 매순간 고민하고 움직이지요. 사람이 아닌 하느님께 순종하는 이는 자기 잇속이나 안위, 편리 등의 세속적 가치를 넘어서 거룩하고 공의로운 하느님의 뜻에 제 뜻을 합치는 사람입니다. 제게 해가 돌아올지라도 그렇습니다.
내 앞에 펼쳐진 기회들 안에서 숨겨진 하느님의 뜻을 찾아내어 선택하는 하루 되시길 축원합니다. 작고 소박해 보여도 그 안에 구원이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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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부활의 희망
그리스도님의 살과 피로 키워진 우리의 몸이 영원한 죽음을 당한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몸이 성체를 모셨기 때문에 더 이상 썩지 않고 부활의 희망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성 이레네오-
♣성체성사를 세워주신 것은 분명코 우리의 빛입니다. 죽음을 정복하고 부활하신 분이신 성체를 모시고 있는 몸이 영원한 죽음을 당한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성체를 모시고 산다는 것은 바오로 말씀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고 했기에 우리의 몸은 썩지 않고 부활의 희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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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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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는 자주 “무엇을 했느냐, 어떤 것을 했느냐?”, “잘 했느냐, 못 했느냐?” 하며, 따지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무엇을 갈망하고 어떤 열망을 품느냐?”, “무엇을 지향하느냐?”에 삶의 질이 달려 있습니다. 곧 돈에 열망을 품은 사람은 탐욕스러워 지고 돈의 노예가 될 것이고, 사랑하기를 열망한 사람은 사랑스런 사람이 되어 갈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면 생명이 충만해지고, 하느님을 열망하면 하느님이 되어 갈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3,36)
왜 그럴까? 왜 그분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그분의 신원과 그분의 사랑 때문입니다. 곧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졌다고 누구나 내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가진 것을 기꺼이 내어주시는 것은 바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신원을 “위에서 오시는 분”, “하늘에서 오신 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고 반복해서 증언합니다. 곧 아드님(예수님)은 위에서 오신, 보내진 사랑입니다.
여기서, ‘위’ 혹은 ‘하늘’이란 단순히 하늘과 땅, 위와 아래라는 상대적인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태어난 이’와 ‘오신 분’이라는 차이, 곧 본질적으로 다른 절대적인 차이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는 ‘태어난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태어난 이”가 아닌, 우리와는 전적으로 다른 “오신 분”, 곧 태어나지 않은 영원한 생명이신 분이십니다. 그것은,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분, 곧 우리를 넘어서 계시는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그분을 받아들이는 데는 이해를 넘어선 믿음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믿음”은 단지 자신을 열고 그분을 받아들이는 내면적인 응답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자신을 그분께 바치는 행위를 동반합니다. 곧 응답을 통하여 자신을 건네 드리는 실천적 행위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인 "CREDO"라는 단어 역시, 'CRO'라는 ‘가슴, 심장, 생명’이라는 말과 ‘DAER'라는 ’주다‘라는 말로 되어 있습니다. 곧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심장, 생명, 곧 자기 자신을 건너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그분과의 인격적인 결속을 의미합니다. 곧 실제로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삶’인 것이다. 그래서 믿는 이에게서는 이미 신적인 삶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곧 ‘오신 분’이 이미 ‘와 계신 분’이 됩니다. ‘이미’ 신적인 삶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믿는 이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곧 현재가 됩니다. 구원이 현재가 됩니다. 현세에서 이미 영원한 생명을 살고 하늘나라를 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해서 세상으로부터 도망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히려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야 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그러기에, 바오로 사도가 말한 대로, 우리는 땅에 발을 딛고 있지만 “하늘의 시민”(필리 3,20) 입니다. 땅에서 부활의 기쁨을 사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골로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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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요한 3,31)
주님!
항상 당신을 머리 위에 두고 살게 하소서.
당신 머리 위에 올라 당신을 조정하지 않게 하소서.
제 이성 위에 지혜로 계시고, 제 판단 위에 자비로 계시소서.
당신에 신비, 그 놀라움 우러러 주님이신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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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댓가>
"아드님을 통한 구원"
하느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아들을 보내시고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아비로서 자식에 대한 마음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데, 가장 귀한 아들을
우리를 살리는 댓가로 내놓으셨습니다.
새생명을 거져 얻은 우리,
어떻게 살다 갈 것인지
매일 죽음 묵상을 한다면
그리 속상하고 아둥바둥할 것도 없겠죠 .
'죽음을 기억하라' 이 말은
오늘 최선의 사랑을 하고
행복한 날에도 불행한 날에도
그날 감당할 댓가를 치르면 된다
몸으로 때우든, 시간으로 때우든ᆢ
"나는 오늘 어떤 댓가를 치를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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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3, 36)
아드님을 통해
우리의 삶은
믿음이 되고
영원한 생명이
됩니다.
아드님을 향한
믿음을
제외하고는
영원한 생명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보이지 않던
믿음을 당신
생명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살리시는
당신 생명으로
생명의 문을
활짝 여셨습니다.
숨길 수 없는
생명의
믿음입니다.
믿음의 첫 번째
자리는 언제나
순종입니다.
믿음은
순종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게합니다.
순종이 영원한
생명을 만듭니다.
순종의 힘을
말씀과 십자가로
뜨겁게
펼쳐나가는
생명의 오늘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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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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