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대구밀알감리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밀알방 류창원권사
본 회퍼
그리스도의 ‘참된 제가’가 된다는 것을 실제 삶을 통해 보여주었으며, ‘독일의 양심’으로 불리는 천재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2.4~1945.4.9)는 1906년 독일 브레슬라우의 명망 있는 집안의 8남매 가운데 여섯째로 태어나 많은 형제자매들과 함께 자랐다. 그는 이란성 쌍둥이였고, 쌍둥이는 여동생이었다. 그의 부친 칼 본회퍼는 베를린 대학의 정신병리학 교수였고, 그의 모친 파울라는 예나대학의 교회사 교수였다.
할아버지 프리드리히는 튀빙겐의 고등법원장 및 궁정목사로 사역했지만, 본회퍼의 아버지는 신앙에 무관심했다. 하지만 본회퍼는 어려서부터 다른 사람들의 감정과 필요를 살피도록 교육 받았으며, 각 개인의 개성과 소질을 인정해주는 자유로운 분위기 가운데 자랐다. 그의 가정은 오랜 기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교회에 충실한 가정은 아니었다. 그나마 종교심이 강했던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성경 이야기를 읽어주었지만, 아버지는 과학적 불가지론자였으며 현실주의자였다.
이런 가운데 본회퍼는 10대에 목사와 신학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17살에 튀빙겐대학에 입학했고, 1924년에는 베를린 대학으로 학교를 옮겼다. 이 두 대학은 당시 독일의 사상계를 이끌고 있던 최고의 명문이었다. 본회퍼는 이미 이곳에서 출중한 학문적 재능을 보였고, 교회역사학자인 하르낙이나 신학자 칼 바르트의 주목을 받았다.
자유주의 신학자 하르낙은, 젊은 신학도 본회퍼에게 애정 어린 보살핌을 주었다. 본회퍼 역시 하르낙으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본회퍼가 하르낙의 신학적 노선을 추종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나중에 베를린대학 교수 취임 강연에서 하르낙의 이론을 반박했다.
본회퍼는 칼 바르트에게서 직접 배운 적은 없다. 하지만 그와의 교제를 통해 신학적 영향을 받게 되었다. 신학의 구조와 골격, 방법론에서 본회퍼의 신학은 항상 바르트의 신학이었다. 그러나 본회퍼의 진정한 정신적 지주는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였다. 그는 루터교 정통주의를 따르지는 않았지만, 루터교의 신학 전통 위에서 가르침과 강조점들을 그의 시대에 맞게 해석하려고 했다.
하여튼 이같은 위대한 스승들의 기대에 부응하듯 1927년 21살의 나이에 그는 ‘성도의 교제’라는 졸업논문으로 베를린 대학에서 우등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28년 2월부터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독일인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목회 훈련을 받았고,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와 교수자격 논문인 ‘행동과 존재’를 제출하여, 베를린 대학 신학부의 교수가 되었다.
목사안수를 받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라, 1930년 24살이었던 본회퍼는 진보신학의 명문으로 불리는 미국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 초청으로 미국에서 1년간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는데, 이 때 라인홀드 니버와 교제하면서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동시에 평화주의자인 프랑스 출신 장 라세르를 만나, 평화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과 성경적 교훈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또한 그는 백인들에게 인종차별을 받는 흑인들의 삶 속에서 민중들과 어울린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된다. 본회퍼는 그곳에서 신학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받았지만, 히틀러 정권의 등장과 더불어 곤경에 처한 독일교회를 기억하며 귀국을 결심한다.
1931년 미국 생활을 마치고 다시 베를린 대학으로 돌아온 본회퍼는 목사안수를 받고, 가을학기부터 베를린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하지만 강의를 오래 지속하지 못하고, 1933년 여름에 끝을 맺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섬기던 교회와 베를린 대학이 히틀러의 불법을 인정 내지 침묵했기 때문이다. 본회퍼의 나치즘과 히틀러에 대한 구체적인 항쟁은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시작되었다.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총통이 되면서 교회는 심각한 탄압에 직면하게 되었다. 정권을 장악한 히틀러는 자신의 명령을 따르는 어용 목사들을 동원하여 독일 복음교회를 새로 조직하면서, 독인 민족인 아리안 인종 외에 다른 인종의 목사 안수를 금지하는, 소위 ‘아리안 규칙’을 발표하였다. 이 법에 따르면 유대인의 피를 받은 사람이나 유대인과 결혼한 사람은 일체 국가의 공직을 가질 수 없었으며, 심지어 유대인 혈통을 가진 사람은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없었고 기독교 개종도 불가능했으며 예배에 참석조차 금지하는, 철저한 반유대적인 정책을 기본 골자로 하는 법이었다. 그런데 나치의 이 같은 만행에 대해 당시 독일교회는 저항은커녕, 오히려 히틀러를 구세주로 숭배하고 있었다.
이를 본 본회퍼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을 히틀러 우상화로 몰아가고 있다고 경고하는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었고, 결국 방송은 중단 당하고 말았다. 본회퍼는 이어 ‘위기에 처한 목사들을 위한 모임’ 설립에 참여하고, 반기독교적인 독일 교단과 히틀러의 만행을 규탄하기 위해 ‘교회와 유대인 문제’라는 연구 논문을 발표하는 등 히틀러의 만행에 정면으로 대항하기 시작했다.
그는 진정한 교회의 사명은, 정치적 불의에 대한 문제 제기와 이 불의한 체제에 의해 희생된 피해자들을 돌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기독교적인 불의한 체제에 대해서는 생명을 걸고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만약 어떤 미친 사람이 많은 승객을 태운 버스를 운전하고 있다면, 교회의 사명은 그 미친 운전사가 사고를 낸 후에 다치거나 죽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버스에 올라타서 미친 운전사의 운전대를 빼앗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미친 운전사로 표현된 사람이 히틀러를 암시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었다.
히틀러의 ‘복음교회’에 대항하여 독일의 ‘고백교회’ 운동이 바르멘에서 시작된 것도 이즈음이다. 당시 독일교회에서는 본회퍼처럼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나치에 반대하는 신학자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고백교회를 결성하여 그들의 양심을 실천했다. 독일 고백교회 운동은 히틀러의 통제를 받는 어용교회의 반기독교적인 신학을 비판하면서 진정한 교회의 사명을 회복하고자 했던 독일 기독교인들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이런 가운데 1933년, 27살의 본회퍼는 히틀러의 박해를 피해 독일을 떠나 영국 런던에 있는 독일회중교회 목사로 부임하여 약 1년 반 동안 목회했다. 그런 가운데 1934년 독일 고백교회 총회는 총통에 오른 히틀러를 반대하는 긴급조치를 선언하지만, 히틀러 정권은 당시 최고의 석학이요 독일 교회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칼 바르트를 본 대학에서 해임하는 등 강경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본회퍼는 이 같은 험악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935년에 다시 독일 고백교회의 부름을 받고 귀국하여, 반히틀러 운동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영국에서 돌아온 본회퍼는 핑켄발트 신학교에서 목회자 후보생들을 가르쳤는데, 이 신학교에서 강의한 내용은 훗날 유명한 저서 ‘나를 따르라’와 ‘성도의 공동생활’로 출간되어 후대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에게 많은 신학적 영감을 제공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형제의 집’이라는 공동체를 만들어 생활했으나, 이 신학교와 ‘형제의 집’은 2년 뒤 히틀러 정권에 의해 폐쇄되었다.
1936년, 30살이 되었을 때, 독일 당국은 본회퍼의 대학교수 자격을 박탈하고, 이듬해에는 모든 고백교회 소속 신학교의 폐쇄를 결정한다. 본회퍼가 강단을 지키고 있던 핑켄발트 신학교도 게슈타포에 의해 폐쇄되었고, 이 교육기관의 원장이었던 한스 이반트는 체포되어 수용소로 이감된다.
이후 본회퍼는 주로 시골 지역의 독일 고백교회를 찾아다니며 자신의 제자들과 후배들의 목회를 격려하고, 스위스 제네바를 중심으로 하는 해외 저항세력들과 연계한 국제 활동에 깊숙이 관여하게 된다.
1938년 독일군의 오스트리아 침공과 더불어 히틀러와 독일교회의 야합은 계속되었다. 히틀러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독일 목사들은 그에게 충성 맹세를 바치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극단적인 독일 민족주의에 열광하던 일단의 청년들이 유대인들에 대한 공개적인 테러를 자행하기 시작했다. 본회퍼는 고백교회 교육 책임자들이 모인 베를린 집회에 참석했다가 게슈타포에 의해 베를린 체류 금지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1939년 본회퍼는 혼란스러운 독일을 떠나 미국 뉴욕에서 잠시 머물게 된다. 그러나 그해 9월,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하고 영국에 대한 전쟁 선포를 함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화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반 히틀러운동의 선봉에 서 있던 본회퍼의 안전을 염려하던 서방세계에서는 본회퍼의 귀국을 극구 말렸다.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본회퍼를 유니온 신학교 교수로 초빙하였고, 일부에서는 미국으로의 망명을 권하기도 했다. 그러나 본회퍼는 히틀러 치하에서 고통 받고 있는 독일 고백교회의 일원으로서, 반 히틀러운동에 참가하기 위해 귀국하기로 결정한다. 상아탑의 신학이 아니라 현장의 신학을 추구하던 본회퍼에게는 당연한 결정이었다.
본회퍼 신학의 가장 큰 특징은 고난을 함께 나누는 삶의 실천이다. 본회퍼에 대한 나치의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그는 미국으로 망명할 수도 있었다. 미국 유니온 신학교에서 신학교수 자리를 마련한 뒤, 초대장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본회퍼는 독일 국민들과 고난을 함께 하지 않는다면, 전쟁이 끝났을 때 독일교회를 재건하는 일에 동참할 수 없다면서, 이를 거부했다. 본회퍼는 히틀러에 끌려 다니며 야합하고 있던 독일교회에 대해서 ‘값싼 은총’을 나누고 있다고 비평했는데, 그가 말하는 값싼 은총이란 ‘죄에 대한 고백이 없이 참예하는 성찬예식, 죄에 대한 진정한 회개 없이 쉽게 용서를 선포하는 설교, 교회 전통의 엄격한 절차를 무시한 세례의식, 회개가 없는 속죄의 확인’ 등이다.
독일교회가 진정한 회개 없이, 진정한 삶의 변화 없이, 시대에 대한 반성 없이, 교회의 거룩한 예식을 통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을 너무 값싸게 만들고 있다고 비판한 것이다.
본회퍼의 이 같은 외침은, 오늘 가장 예리하게 우리 한국교회를 향하고 있음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어쩌면 한국교회의 오늘의 위기는, 본회퍼와 같은 개혁자들의 뜨거운 외침에 귀 기울이지 않고, 교회가 세상과 적당히 타협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짧은 미국생활을 마치고 독일로 돌아온 그는, 히틀러 정권에 대한 저항 운동에 남은 힘을 쏟아 부었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히틀러의 정책에 반기를 들고 있던 몇몇 장성들, 지휘관, 귀족들과 함께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하게 된다. 본회퍼는 1940년 정보국 민간요원으로 위촉받아 적극적인 군대 항쟁 속으로 뛰어들게 되는데, 1941년에는 정보국이 주도한 유대인 구출계획에 가담하여 많은 유대인들을 탈출시켰으며, 또 영국 정부의 지원을 받기 위해 스웨덴 스톡홀름으로 잠입하여 자신의 스승이자 반 히틀러 운동에 관여하고 있던 칼 바르트와 세계교회협의회의 지도자와 면담하는 가운데, 독일 내에서의 반 히틀러 쿠데타 가능성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정치적 행보에 대해, 본회퍼에 대한 비밀경찰 게슈타포의 압박은 더욱 커져서 그의 모든 서신은 검열을 받아야만 했다.
이런 저항운동 속에서도, 1943년 37세 때, 본회퍼는 마리아 폰 베데마이어와 약혼을 했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하는데, 곧바로 본회퍼가 비밀경찰에 의해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두 차례 히틀러 암살을 모의하였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본회퍼는 동지들과 함께 히틀러 암살음모 사건의 용의자로 비밀경찰에 체포되었다.
본회퍼는 테겔(Tegel)교도소에서 1944년 10월까지 약 18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하는데, 그곳에서 그는 구약 연구에 집중하면서 부지런히 성경을 통독하였고, 여러 경로를 통해 신학, 철학, 음악, 문학 및 역사 분야 등의 많은 서적들을 확보하여 섭렵했다. 또한 부모, 동료, 약혼녀 등과의 서신 연락을 통해 감옥의 일상생활과 그 속에서의 기독교적 묵상의 글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리고 함께 수감된 동료들에게 위로의 설교를 전하기도 하였다.
그 후 본회퍼는 부헨발트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다가. 마침내 1945년 4월 9일, 안타깝게도 미군이 진격해오기 바로 직전 프로센부르크 강제수용소에서, 히틀러 암살 계획의 배후 조종 혐의로 붙잡혔던 여러 동지들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때 그의 나이 불과 38세였다. 히틀러는 그로부터 20일 후, 베를린 지하 참호에서 에바 브라운이라는 여성과 결혼식을 올리고 그 다음날 베를린이 함락되기 직전 자살하고 말았다.
역사는 히틀러를 홀로코스트의 주범이자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쟁 범죄자로 단죄하였지만, 히틀러에 의해 죽임을 당한 본회퍼는 기독교의 살아있는 양심의 상징으로 오늘날까지 기억되고 있다.
그가 얼마나 신실한 신앙인이었는지는 그가 옥중에서 남긴 한 편의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시의 제목은 ‘나는 누구인가’이다.
대구밀알감리교회♡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