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7년 소현세자의 혼례식이 있었다.
인조와 인렬왕후는 처음에 남인 윤의립의 딸을 마음에 두었다. 하지만 인조반정 이후 왕비는 집권세력인 서인출신으로 간택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강석기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한다...235쪽
세자빈이 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원래 세자빈으로 간택된 여인은 윤의립의 딸이었다. 그러나 윤의립의 서족 조카 윤인발이 1624년 이괄의 난에 가담하여 처형당한 것을 이유로 김자점등 대신이 강하게 반대하면서 간택은 없던 일이 되었다. 결국 세자빈을 재간택하게 되었고 9월29일 서인 강석기의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
<공사견문록>에는 인조가 세자빈을 간택할 때 마음에 둔 권씨처가 있었는데, 그녀는 음식을 주면 모두 손으로 집어먹어, 풍병이 있는가 의심하여 세자빈으로 간택을 하지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세자빈에서 탈락한 후 다른 곳에 시집을 간 후에는 부덕으로 칭송받아 인조가 그 꾀에 속았음을 탄식했다고 한다.
세자빈이 영예가 보장되는 자리가 아님을 보여주는 일화다...254 - 255쪽
강빈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으니 신원을 해야한다는 점은 효종때에 이르러 정국의 이슈로 떠올랐다. 효종 즉위부터 강빈에 대한 신원문제와 강빈 옥사의 의혹이 제기되었다.
효종은 강빈의 옥사를 재론하는 자는 역률로 다스리겠다는 특별 하교까지 내렸다.
이런 상황에서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젖힌 인물은 김홍욱이었다. 1654년 황해도 관찰사로 있던 김홍욱은 강빈의 신원과 소현세자 세째 아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직언을 하여 조정에 파문을 일으켰다. 격분한 효종은 곤장을 때려 그를 죽게했고 사건 자체는 일단락되었다.
김홍욱은 추사 김정희의 7대조로 조선후기 경주김씨 가문이 절의의 집안으로 자리를 잡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강빈옥사를 둘러싼 여러의혹이 제기되었고, 1718년(숙종44) 강빈은 마침내 신원되기에 이르렀다...
소현세자빈 강씨의 시호를 '민회'라고 정하였는데, 이는 백성들로 하여금 그녀가 지위를 잃고 죽은 것을 슬퍼하고, 가슴아파하게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에서 취한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같은 해 윤 8월에 숙종은 민회빈 강씨의 총명함과 덕을 칭송하며 제문을 지어 원혼을 위로하였다.
또한 민회빈 강씨의 아버지 강석기의 관작도 복위되었으며, 그녀의 형제들도 함께 신원되었다.
강빈의 묘소는 현재 광명시에 소재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민회빈 묘로 불렀으나, 1903년(고종40) 추승된후 '영회원'으로 그 명칭이 변경되었다..263 - 264쪽
왕비로 산다는 것, 신병주, 2020년, (주)매경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