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은 그녀는 자기가 어렸을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녀는 그를 만날 때마다 그 이야기를 꺼내곤 한다.
얘기해 주세요. 그땐 어땠어요?
그녀는 스트레가(오렌지 맛을 곁들인 술 이름; 옮긴이)를 마시며
그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그렇게 말하곤 한다.
그녀는 시원시원하게 생긴 얼굴에 늘씬한 몸매를 가진
매력적인 아가씨다.
아주 오래전이지. 벌써 이십 년 전이구나. 그가 말한다.
그들은 카스키나 가든 근처의
비아 파브로니라는 곳의 아파트에 살았지.
당신은 다 기억하고 있을 것 아니에요.
어서 계속 얘기를 들려주세요. 그녀가 말한다.
무얼 듣고 싶은 게냐? 그가 묻는다.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까?
네가 갓난아기였을 때 일어난 일을 얘기해 줄까?
어차피 그 일은 너하고도 관계가 있는 이야기니까 말야.
얘기해 주세요.
하지만 잠깐만요, 먼저 마실 걸 좀더 준비해 두는 게 좋겠어요.
그래야 중간에 이야기가 끊어지지 않을 테니까요.
그는 부엌에서 술을 더 가지고 왔다.
이윽고 의자에 앉은 그가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 * *
그때는 그들도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았단다.
그러나 둘은 미친 듯이 사랑에 빠져 있었고,
결국 열여덟 살짜리 소년과
열일곱 살짜리 소녀가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딸아이를 낳았지.
아기는 십일월 하순에 태어났다.
혹독한 추위가 몰아닥쳤고,
마침 물새떼도 그 지역으로 몰려올 무렵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소년은 사냥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이제 남편과 아내, 아빠와 엄마가 된
소년과 소녀는 방 세개짜리 아파트에 살았는데,
바로 위층에는 치과 의사의 사무실이 있었지.
그들은 밤마다 위층의 사무실을 청소하는 것으로
집세와 가재 도구 사용료를 대신했다.
여름이면 잔디밭과 꽃밭을 돌보아야 했고,
겨울에는 인도에 쌓인 눈을 치우거나
도로에 제설용 염화칼슘을 뿌려야 했어.
그들 둘은 서로를 무척이나 사랑했다.
게다가 그들은 원대한 야심을 품고 있는 몽상가였지.
틈만 나면 하고 싶은 일들, 가고 싶은 곳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단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창 밖을 내다본다.
지붕마다 쌓인 눈이 늦은 오후의 햇살 속으로 흩날리고 있다.
얘기를 계속해 주세요. 소녀가 말한다.
소년과 소녀는 침실에서 잠을 잤고,
아기는 거실에 놓아 둔 요람에서 재웠지.
이 무렵 아기는 생후 삼주쯤 되었는데,
그제서야 간신히 밤에 잠을 자기 시작했단다.
어느 토요일 밤이었지.
위층에서 청소를 마친 소년은 치과 원장실로 들어가
책상 위에 발을 떡 올려놓고 칼 서덜랜드에게 전화를 걸었어.
칼은 소년의 아버지와 함께
사냥과 낚시를 즐기던 오랜 친구였었다.
소년은 상대방이 전화를 받자 이렇게 말했어.
칼 아저씨, 저 아빠가 됐습니다. 딸아이가 태어났어요.
정말 축하한다. 그래, 집사람은 어떠냐? 칼이 물었지.
좋아요. 아기도 건강하구요. 다들 아주 좋습니다.
소년이 대답했어.
잘됐구나. 그런 소식을 들으니 정말 반갑다.
집사람에게도 안부 전해 주렴.
혹시 사냥 때문에 전화한 거라면, 좋은 소식을 하나 알려주마.
요즘 거위가 엄청나게 몰려들고 있어.
나도 사냥은 꽤 오랫동안 했지만,
이렇게 많은 거위는 처음 볼 정도야.
오늘만 다섯 마리를 잡았지. 아침에 두 마리, 오후에 세 마리.
내일 아침에 또 나가볼 생각이다. 너도 생각 있으면 오려무나.
그러지요.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전화 드린 겁니다.
소년이 말했어.
그럼 다섯시 삼십분 정각까지 우리 집으로 오너라. 칼이 말했다.
탄약은 든든히 준비하라구. 틀림없이 많이 잡을 수 있을게다.
그럼 내일 아침에 보자꾸나.
소년은 칼 서덜랜드를 무척 좋아했어.
아까도 말했지만, 그 때는 돌아가시고 안 계신
자기 아버지의 친구였으니까.
소년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나자,
두 사람 모두 친구와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함께 사냥을 다니기 시작했지.
서덜랜드는 아주 덩치가 크고 머리가 벗겨진 남자였다.
가족도 없이 혼자 살고 있었고,
좀처럼 필요없는 말은 하지 않는 과묵한 성격이었어.
소년은 이따금 그와 함께 있을 때면 자기가
혹시 말이나 행동을 잘못한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을 느끼곤 했다.
주변에 그렇게 오랫동안
입을 열지 않는 사람은 좀처럼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번 입을 열었다 하면
웬만해선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는 완고한 일면이 있었고,
소년은 그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칼 서덜랜드에게서 풍기는
강인하고 현실적인 분위기를 무척 좋아했다.
통화를 마친 소년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아내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그녀는 짐을 챙기는 소년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사냥용 외투와 탄약 주머니, 장화, 양말,
사냥 모자, 긴내의, 엽총 등이 소년의 준비물이었다.
몇 시쯤 돌아올 거야? 소녀가 물었다.
열두 시쯤이면 올 거야. 소년이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늦어도 다섯시나 여섯시를 넘기진 않을 거야.
그 정도면 너무 늦나?
아니, 괜찮아. 소녀가 말했다.
우리 걱정하지 말고 재미있게 사냥이나 즐겨.
지금까지 너도 고생 많이 했으니까.
내일 저녁에는 캐서린에게 예쁜 옷을 입혀서
샐리한테 놀러가는 게 어때?
좋지. 좋은 생각이야. 소년이 말했다. 계획을 짜보자구.
샐리는 그녀보다 열 살이 많은 언니였다.
소년은 그 언니를 조금 좋아했다.
물론 그는 또 다른 언니 베시도 좋아했지만 말이다.
그는 소녀에게,
만약 너하고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샐리에게 장가갔을 거야,
하고 말한 적이 있었다.
베시 언니는 어때? 그때 소녀는 그렇게 물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무리 봐도 얼굴은
우리 셋 중에서 베시 언니가 제일 나은 것 같아. 어떻게 생각해?
베시도 좋아. 소년은 그렇게 말하며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내가 샐리한테 장가가고 싶다고 하는 것과는
약간 차원이 틀려.
샐리에게는 사람을 사로잡는 묘한 매력이 있거든.
그래, 만약 둘 가운데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면,
난 샐리를 선택할 거야.
하지만 네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야? 소녀가 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냐구? 네 아내는 누구지?
그야 너지. 소년이 말했다.
우린 언제까지나 서로를 사랑할까?
소녀는 그런 대화가 무척이나 즐겁다는 듯 또다시 캐물었다.
그럼, 언제까지나. 소년이 대답했다.
우린 언제나 함께 있을거야. 우린 마치 캐나다 거위같아.
그것은 그의 머리 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비유일 뿐이었다.
왜냐하면 그 무렵 그는 캐나다 거위 생각을
자주 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 놈들은 일생에 단 한 번 결혼을 한다.
일찌감치 짝을 골라서는, 평생을 함께 지내는 것이다.
설령 둘 가운데 한 마리가 먼저 죽거나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나머지 한 마리는 절대로 재혼을 하지 않는다.
어딘가 아무도 없는 곳으로 떠나가 혼자 살아가기도 하고,
혹은 다른 무리와 함께 살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거위들 틈에 섞여 있다 해도
반드시 독신을 유지하며 혼자 생활한다.
슬픈 이야기야. 소녀가 말했다.
그냥 멀리 떠나서 혼자 살아가는 것보다,
다른 동료들 틈에 섞여서 혼자 살아가는 게 더 슬픈 것 같아.
그래, 슬픈 일이지. 소년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게 자연의 섭리인걸.
너도 그런 거위를 죽여 본 적이 있어?
소녀가 물었다.
무슨 말인지 알지?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어 번 쏘아 맞힌 적이 있어.
그러고 나서 한 일, 이 분쯤 지나면,
다른 놈 한 마리가 다가와서 빙글빙글 맴돌며
애처롭게 울어대곤 하지.
그럼 넌 그 거위도 총으로 쏴?
소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쏠 수 있으면 쏘지. 소년이 대답했다. 가끔은 놓치기도 하지만.
그러면서도 마음이 아무렇지 않아? 소녀가 물었다.
아니. 실제로 사냥을 하고 있을 때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어.
너도 알잖아, 난 거위에 대한 모든 걸 사랑해.
난 사냥을 하지 않을 때조차 그냥 거위들을
바라보고 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구.
하지만 인생은 모든 종류의 모순을 내포하고 있지.
그런 모순에 대해 일일이 생각하고 있을 수는 없는 거야.
저녁을 먹고 나서 소년은 아궁이에 불을 땐 다음
아내가 아기 목욕시키는 것을 거들어 주었다.
눈과 입은 아빠를, 턱과 코는 엄마를 각각 빼다박은 듯이
닮은 아기의 생김새가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그는 그 조그만 몸뚱이,
그리고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에도 파우더를 발라 주었다.
그리고는 소녀가 기저귀를 채우고 옷을 입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목욕물을 내다 버리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바깥은 무척 춥고 찌푸린 날씨였다.
숨을 쉴 때마다 하얗게 입김이 피어 올랐다.
한때 푸르렀던 풀밭이 지금은 가로등 불빛을 받아
뻣뻣한 캔버스처럼 회색으로 보였다.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곳 말고는 아직도 하얀 눈이 쌓여 있었다.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갔다.
그는 타이어 밑으로 모래 밟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조용히 내일 일어날 일들을 상상해 보았다.
머리 위의 창공으로 거위가 날아가고,
그의 어깨에 걸린 엽총이
짜릿한 반발감과 함께 불을 토해 낼 것이었다.
잠시 후 그는 문을 잠그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두 사람은 나란히 침대에 누워 책을 읽으며 잠을 청했다.
소녀가 먼저 들고 있던 잡지를 이불 위로 스르르 떨어뜨리며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도 눈꺼풀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지만,
억지로 몸을 일으켜 알람 시계를 점검하고 불을 껐다.
얼마나 잤을까, 아기가 우는 소리에 그는 잠을 깼다.
거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소녀가 요람 옆에 서서 아기를 품에 안고 얼르는 것이 보였다.
잠시 후,
그녀는 아기를 도로 내려놓고 불을 끈 다음 침대로 돌아왔다.
그때가 새벽 두시, 소년은 이내 다시금 잠들어 버렸다.
아기 울음소리가 또다시 잠든 그를 깨웠다.
이번에는 소녀가 그냥 자고 있었다.
아기는 한동안 발작적으로 울어대더니, 이윽고 조용해졌다.
소년은 잠시 귀를 기울이다가 까무룩 졸기 시작했다.
잠시 후 소년은 다시 눈을 떴다. 거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그는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아 램프를 켰다.
왜 이러나 몰라. 소녀가 아기를 안고
거실을 서성거리며 중얼거렸다.
기저귀도 갈아 주었고, 우유도 먹었는데.
그래도 자꾸 울어대니 어떡하지? 도저히 그칠 생각을 안 해.
피곤해 죽겠어. 이러다가 아기를 떨어뜨리면 어떡하지?
내가 잠시 안아줄 테니 넌 그냥 자. 소년이 말했다.
그는 일어나서 아기를 받아 안았고,
소녀는 도로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그냥 몇 번 흔들어 주기만 하면 금방 잠들 거야.
소녀가 침실에서 말했다.
소년은 아기를 안은 채 소파에 앉았다.
무릎에 올려놓고 천천히 흔들어 주었더니,
이윽고 아기가 눈을 감았다.
그의 눈도 거의 감기기 직전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일어나서 아기를 요람에 눕혔다.
그때가 네시 십오분 전이었으니,
그는 아직 사십오분을 더 잘 수 있었다.
그는 얼른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
그러나 잠시 후 아기는 다시 울어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둘 다 벌떡 일어나 앉았다.
소년의 입에서 나지막이 욕설이 터져 나왔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지? 소녀가 말했다.
혹시 어디가 아픈 건 아닐까? 목욕을 괜히 시켰나 봐.
소년이 아기를 안아 올렸다.
아기는 잠시 발을 버둥거리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이것 봐. 소년이 말했다. 뭔가 잘못된 것은 아닌 것 같아.
그걸 어떻게 알아? 소녀가 물었다.
이리줘 봐, 내가 안아볼게.
뭔가 좀 주기는 줘야 할 것 같은데, 뭘 줘야 좋을지 모르겠어.
몇 분이 흘렀다. 그 동안에도 아기가 울지 않자,
소녀는 아기를 도로 요람에 눕혔다.
그들은 한동안 아기를 들여다보았다.
이내 아기가 갑자기 눈을 번쩍 뜨더니 다시
울어젖히기 시작하자,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소녀가 아기를 안았다.
아가, 우리 아가 착하지.
소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쩌면 배가 아픈 건지도 몰라. 소년이 말했다.
소녀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제 소년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아기만 꼭 끌어안고 흔들어 줄 뿐이었다.
소년은 잠시 옆에 서 있다가 부엌으로 들어가서 커피 물을 끓였다.
그리고는 양모 내의를 꺼내 입고 단추를 잠궜다.
이어서 겉옷을 입기 시작했다.
자기 지금 뭐하는 거야? 소녀가 물었다.
슬슬 출발하려고. 소년이 대답했다.
지금 꼭 가야 돼? 소녀가 말했다.
조금 더 기다려 보고 아기한테 별일이 없으면
천천히 가도 되잖아.
하지만 내 생각엔 아무래도 오늘 사냥은
포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이렇게 울어대는 아기를 데리고 나 혼자 어떻게 있으라구?
칼 아저씨는 내가 가는 걸로 생각하고 계획을 짜두었어.
소년이 말했다. 나도 같이 계획을 세웠다구.
난 자기랑 칼 아저씨가 무슨 계획을 세웠는지에 대해서는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어. 소녀가 말했다.
칼 아저씨도 마찬가지고. 난 그 아저씨를 알지도 못하잖아.
아무튼 난 자기가 안 갔으면 좋겠어.
어떻게 자기가 이런 상황에서 사냥을 가겠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는지 이해가 안 가.
너도 칼 아저씨를 전에 만난 적이 있잖아. 소년이 말했다.
그 아저씨를 모른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소녀가 말했다.
문제는, 내가 아픈 아기하고
단 둘이 남아 있고 싶지 않다는 거야.
잠깐만, 소년이 말했다. 넌 뭔가 오해를 하고 있어.
아니, 오해하는 건 바로 너야. 소녀가 말했다. 난 네 아내야.
얘는 자기 딸이고.
지금 자기 딸이 무슨 병에 걸린 건지도 모르는 상황이잖아.
아길 좀 봐. 왜 저렇게 울어대지?
어떻게 이런 우리를 두고 너 혼자 사냥을 간다는 거야?
괜히 흥분하지 마. 소년이 말했다.
넌 언제든지 마음만 내키면 사냥을 갈 수 있어.
소녀가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잖아.
아기한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우리를 내팽개치고 사냥이나 가겠다는 거야?
소녀는 눈물을 훌쩍이기 시작했다.
아기를 요람에 눕혔지만, 이내 아기는 다시 울어대기 시작했다.
소녀는 잠옷 소매로 얼른 눈물을 훔치고는 다시금 아기를 안았다.
소년은 천천히 장화끈을 묶은 다음,
셔츠와 스웨터를 걸치고 마지막으로 코트를 껴입었다.
부엌의 스토브에 올려놓은 주전자에서 물 끓는 소리가 났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 소녀가 말했다.
칼 아저씨하고 우리 둘 중에서 말야. 정말이야.
그게 무슨 뜻이지? 소년이 물었다.
말 그대로야. 소녀가 말했다.
만약 자기가 가족을 원한다면, 신중하게 선택을 하란 말야.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이윽고 소년은 사냥 도구들을 집어들고 위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먼저 자동차에 시동을 걸고,
다시 내려서 앞유리에 달라붙은 얼음을 긁어냈다.
밤 사이에 기온은 한층 더 떨어져 있었지만,
날씨는 너무나 청명해서 하늘에는 별이 총총히 떠 있었다.
별들은 그의 머리 위에서 밝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소년은 운전을 하면서 그 별들을 바라보았다.
문득 그 별까지 거리가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을 하자,
괜히 가슴이 찡해졌다.
칼 아저씨네 현관에는 불이 켜져 있었고,
그의 스테이션 왜건은 시동이 걸린 채 집 앞에 서 있었다.
소년이 모퉁이를 돌아 가까이 다가가자,
칼이 현관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소년은 마음을 정했다.
자네 차는 길거리에 세워 두게.
소년이 차에서 내려 걸어가자 칼이 말했다.
난 준비가 다 되었어. 들어가서 불만 끄고 나오면 된다구.
칼이 말했다. 미안해서 혼났네. 정말이야.
혹시 자네가 늦잠을 자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방금 자네 집에 전화를 걸어 보았지.
자네 아내가 받아서는 방금 떠났다고 하더군.
정말 미안해서 혼났어.
괜찮아요. 소년은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어떻게 설명을 해야 좋을지 잠시 망설였다.
그는 양쪽 다리에 번갈아 체중을 실으며 옷깃을 세운 채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서 있었다.
벌써 일어나 있었는 걸요.
우린 둘 다 조금 전부터 깨어 있었어요.
아무래도 아기한테 무슨 문제가 좀 있는 모양이에요.
잘은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자꾸만 깨어서는 계속 울어대는 거예요. 그래서 말인데,
사실은 지금은 사냥을 안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칼.
그런 일이 있으면 미리 전화를 하지 그랬어.
칼이 말했다. 그랬으면 되는 걸 가지고 말야.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일부러 여기까지 올 필요는 없었잖아.
이까짓 사냥쯤이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아닌가.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커피나 한 잔 하겠나?
그냥 돌아가 보는 게 낫겠어요. 소년이 대답했다.
그래, 그럼 다음에 같이 가자구.
칼은 그렇게 말하며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아무 말도 없이 현관 앞에 그냥 가만히 서 있었다.
자, 이제 얘기는 다 끝났지? 칼이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아침엔 사냥이
별로 신통치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더라구.
차리리 안 가는 게 더 잘된 일인지도 몰라.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칼. 소년이 말했다.
잘 가게. 칼이 말했다.
이봐, 누가 뭐라 해도 자네는 억세게 운이 좋은 친구야.
정말이라구.
소년은 다시 차에 올라 잠시 기다렸다.
칼이 집 안으로 들어가자, 이내 불이 모두 꺼졌다.
소년은 그제서야 기어를 넣고 모퉁이를 돌아 나왔다.
거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하지만 소녀는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었고,
아기도 그녀 옆에서 자고 있었다.
소년은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하면서
장화와 바지와 셔츠를 차례로 벗었다.
그리고는 양말과 내복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아침 신문을 뒤적였다.
이내 창밖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소녀와 아기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잠시 후 소년은 부엌으로 들어가 베이컨을 굽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녀가 가운 차림으로 침실에서 나오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끌어안았다.
이봐, 가운 자락이 불에 닿잖아. 소년이 말했다.
소녀는 소년에게 몸을 기대고 있었지만,
그 바람에 하마터면 가운이 타버릴 뻔했다.
아까는 미안했어. 소녀가 말했다.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왜 내가 그런 말을 했을까?
괜찮아. 소년이 말했다. 이봐, 베이컨 좀 마저 굽자.
정말로 그런 소리를 할 생각은 아니었어.
어떻게 그런 끔찍한 말을…….
내 잘못이지 뭐. 소년이 말했다. 캐서린은 어때?
지금은 좋아졌어. 아까는 왜 그랬는지 몰라.
자기가 나가고 나서 기저귀를 한 번 더 갈아 주었더니,
금방 좋아졌어. 그리고는 바로 잠이 들었거든.
아까는 왜 그렇게 울어댔을까? 자기, 너무 화내지 마.
소년은 웃음을 터뜨렸다.
뚱딴지 같은 소리, 나 화 안났어.
그나저나 이 프라이 팬을 어떻게 좀 해야 되겠는데?
자기는 가만히 앉아 있어, 내가 아침 준비할게.
이 베이컨하고 와플(우유, 밀가루, 계란 등을 반죽하여
구운 요리; 옮긴이)을 같이 먹으면 어떨까?
그거 좋지. 소년이 말했다. 배고파 죽겠어.
그녀는 프라이 팬에서 베이컨을 꺼내고 와플 반죽을 만들었다.
이제 완전히 긴장이 풀린 소년은 식탁에 앉아
그녀가 부엌 안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침실 문을 열어 두었다.
거실에서는 그들 둘 다 좋아하는 레코드가 돌아가고 있었다.
가능하면 쟤를 또 깨우지 않는 게 낫겠지? 소녀가 말했다.
그야 두말 하면 잔소리지.
소년은 그렇게 대답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베이컨과 계란 프라이,
그리고 와플이 담긴 접시를 소년 앞에 내려놓았다.
물론 자기 자리 앞에도 접시 하나가 놓여졌다.
준비 다 됐어.
소녀가 말했다.
맛있어 보이는데. 소년이 말했다.
그는 와플에 버터를 바르고 시럽을 끼얹었다.
하지만 와플을 자르다가,
그만 접시가 그의 무릎 위로 엎어지고 말았다.
이럴 수가…… 소년은 식탁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소녀는 그의 얼굴 표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지금 거울에 자기 표정을 한 번 비춰 봐.
소녀는 그렇게 말하며 계속 깔깔거렸다.
그는 내복 위에 쏟아진 시럽과,
온통 시럽에 범벅이 된 채 달라붙어 있는
와플, 베이컨, 계란을 내려다보았다. 그도 웃음을 터뜨렸다.
배고파 죽겠는데.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도 계속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그는 내복을 벗어서 욕실문으로 휙 집어던졌다.
그런 다음 그가 두 팔을 벌리자, 그녀가 그 품에 몸을 맡겼다.
이제 다시는 싸우지 말자. 소녀가 말했다.
싸우는 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일이야, 안 그래?
맞아. 소년이 대답했다.
두 번 다시 싸우지 말자. 소녀가 말했다.
그래, 싸우지 말자. 두 사람은 다정하게 입을 맞추었다.
* * *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잔을 다시 채운다.
자,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야.
별로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말야. 그가 말했다.
난 재미있었는 걸요. 그녀가 말했다.
정말 굉장히 재미있었어요. 그나저나 그 다음엔 어떻게 됐어요?
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잔을 들고 창가로 다가간다.
이제 바깥은 어두워졌고, 눈이 내리고 있다.
모든 건 변하기 마련이지. 그가 말한다.
어떻게 변하는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본인이 깨닫지 못하는 동안,
원하지 않는 동안에도 변화는 일어나기 마련이야.
그래요, 그건 사실이에요.
단지- 그러나 그녀는 말을 끝맺지 않는다.
그녀는 그쯤에서 대화를 끝내려는 듯하다.
유리창을 통해 손톱을 들여다보는
그녀의 모습이 그의 시야에 들어온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며,
시내 구경은 언제 시켜줄 거냐고 묻는다.
그가 말한다. 그럼 장화를 신고 나가 보자.
하지만 그는 그냥 창가에 서 있기만 한다.
그때 그렇게 함께 웃고 있던 시간이 떠오른다.
그들은 서로를 껴안은 채,
눈물이 나올 때까지 웃고 또 웃었다.
이 추위 속에 어디를 가려는 건지를 비롯한
다른 모든 생각들은 잠시 그 기억에 자리를 양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