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노와 갈릴레이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는 약 1500년 동안 서양의 우주관은 그리스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이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당연히 천동설은 불변의 진리요 신의 성전처럼 유럽 사상계에 군림하고 있었다. 그의 우주체계는 완벽한 지구 중심의 우주 구조론이었고, 기독교 교리의 하나로 숭상받았다.
그러나 1530년 코페르니쿠스가 주창한 지동설을 확립시킨 이가 바로 갈릴레이다. 1609년 갈릴레이는 당시 망원경을 개량한 천체망원경으로 인류 최초로 천체를 관측하였다. 그는 목성에 있는 위성 4개를 발견했는가 하면, 지구도 화성이나 목성과 같이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이론을 수용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확립하기 위해 '천문대화'를 집필하였다. 1632년의 일이다. 이 책은 당시까지 보편적 진리로 믿어 왔던 지구 중심의 우주 구조론을 반박하고 코페르니쿠스가 구상한 태양 중심의 지동설을 변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은 로마 교황의 분노를 샀고 교황청에 의해 곧바로 금서(禁書) 조처가 내려졌다. 갈릴레이는 종교재판에 회부 돼 처형 위기에 처했다. 그는 결국 자기주장을 철회하고 "앞으로 절대로 이단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 후 귀가할 수 있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이후 그는 오랜 세월 이단자 취급을 받아 왔다. 그러다 최근에야 비로소 교황청에 의해 완전히 복권되었다.
갈릴레이와 같은 시기의 이탈리아 철학자 지오르다노 브루노는 세계의 무한성과 지동설을 결합하여 무한 우주 속에 무한히 많은 태양계가 있다는 우주관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그의 주장 역시 기독교의 교리와 상충되었다. 결국, 그는 감옥에 갇혔다가 화형에 처해졌다. 이처럼 중세 과학 암흑기에는 성서에 따른 지구중심설이 보편적인 진리였고, 그 외 어떠한 우주관도 인정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