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솜다리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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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여행자료 스크랩 두륜산 대흥사여행 2...원교, 추사, 정조대왕의 글씨빛나는 편액들.
이삭 추천 0 조회 103 12.01.18 21:5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두륜산 자락에 앉은 대흥사의 전각들에는 조선 후기

           서예의 양대 산맥이었던 원교 이광사와 추사 김정희가 쓴 편액과

           원교의 제자이며 호남의 명필이었던 창암 이삼만, 그리고

           정조대왕이 친필로 쓴 편액이 걸려있다.

           이처럼 명필을 감상하는 것도 대흥사여행의 또다른 즐거움이다.

           특히 조선후기 글씨의 쌍벽을 이루는 원교와 추사의 글씨를 한 곳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무척 귀한 경험이 될 수 있다.

 

           추사선생은 원교이광사의 글씨를 폄하하기도 했는데..일화를 소개하면.

           

           ---추사 나이 54세. 그는 기고만장한 삶을 살면서 당시 형조참판의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외교사절로 북경으로 떠나려 할 때 정변이 일어나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다행이 친한 벗인 영의정 조인영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고 제주도 귀양길에 오른다.

           전주와 남원을 거쳐 완도로 가던 길에 해남 대흥사에 들러 벗인 초의를 만난다.

           이 때 대흥사 현판에 걸려있던 원교의 대웅보전(大雄寶殿)글씨를 보고 초의선사에게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 놓은 것이 원교인데, 어떻게 그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버젓이

           걸어 놓을 수 있는가라며 호통을 쳐댄다. 

           추사의 극성에 못이긴 초의는 원교의 현판을 떼어내고 추사의 글씨를 달았다.

           

           63세의 노령에 해배된 추사는 한양에 가는 길에 다시 초의를 만나러 대흥사에 들렀고

           자신이 쓴 대웅전의 현판을 올려다 보게된다

           그리고 그 편액 속에 담긴 자신의 교만과 독선을 깨닫는다.  추사는 명필 이광사의 글씨를 못 알아보았으니

           이광사의 현판을 다시 걸고 자신이 쓴 편액을 내리라고 말한다.

           추사 김정희는 8년여 간의 힘든 유배 기간동안  깊은 자아성찰을 통해  겸손함과

           자신을 버릴 줄 아는 지혜를 깨달은 것이다.

 

 

대흥사 대웅전에 걸려있는 조선후기 서예가인 원교 이광사의 글씨.

그의 글씨는 추사에 비해 획이 마르고 기교가 있으며 화강암 골기(骨氣)가 느껴진다.

그는 추사의 그늘에 가려 잠시 잊혀지기도 했으나

 향토색짙은 동국진체를 완성한 그의 글씨는 당대 최고의 명필로 추앙받았다. 

 

 

대웅전 곁, 승방인 백설당에 걸려있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무량수각.

그의 글씨는 획이 기름지게 살지고 두툼하고 묵직한 예서체로 원교의 글씨와는 상반되는 미감을 보인다.

추사는 원교 이광사의 글씨체를 고전이며 촌스럽다고 혹평하기도 했다고 한다.

 

 

대웅전을 나와 천불전으로 향하다. 천불전으로 들어가는 문.

 

 

대흥사 천불전. 천불전의 현판도 원교 이광사의 글씨이다.

 

 

천불전의 꽃살문.

사방연속무늬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이 창살은

전북 부안의 내소사창살과 함께 손꼽히는 아름다운 꽃창살이다.

 

 

 

 

몇년전 내소사에 갔을 때 찍어놓은 꽃창살.

 

표충사앞에 초의대선사상이 있다.

조선후기 승려인 초의선사는 학문이 깊었고 그림과 서예에 능했으며

남종화의 대가인 소치 허련과 다산 정약용, 그리고 추사 김정희와 깊이 교류하였다.

   그는 두륜산 자락에 일지암을 짓고 동다송을 쓰는 등, 우리의 다도를 완성하여 다성(茶聖)이라 불리기도 한다

특히 차를 사이에 둔 추사와의 교분은 유명하다.

사정상 일지암까지 올라가보지 못한 것이 무척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기로 마음먹는다.

 

 

 

 

약하게 흩날리는 눈을 맞으며 표충사에 들어서니 왠지 숙연해지는 느낌이다.

걸어오며 사명대사의 일생을 떠올렸기 때문일까.

 

 

 

 

정조임금의 친필 현판.

힘있는 필체로 사명대사의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기리는 것같다.

 

 

정조임금의 친필 현판 옆에 어서각이라는 글이 보인다.

어서각이란 임금이 직접 쓴 글씨를 보관하는 장소라는 뜻으로 추담 장현경에게 하사한

영조의 친필을 보관하기 위해 정조가 세운 어서각이 전북 장수에도 있다.

 

 

표충사에 모셔져있는 사명대사의 영정.

 

 

눈을 맞고 앉아계신 초의선사와 사명대사의 유품을 보관전시하고 있는 성보박물관.

 

 

표충사앞에 있는 장군샘.

이 물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했으며 해마다 한번씩 호수의 흐름을 보였는데

절의 스님이 어느 날 자정무렵 물이 소용돌이 치며 지붕추녀 끝까지 솟구쳐 오를 때 이 물을 마시고

모든 질병을 고쳤다 한다. 고산 윤선도가 능히 장군을 낳을 샘이라하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 물을

길어다 먹은데서 장군샘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한다.

 

 

초의선사상 앞에 아주 멋들어진 소나무 한 그루가 눈을 맞으며 서 있다.

문득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시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준 문인화의 걸작, 세한도가 생각났다.

'추운 겨울이 와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고 쓴 발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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